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3. 1. 07:52

 2022년 3월 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 10,28-31)

 

 “Amen, I say to you,
there is no one who has given up house

or brothers or sisters
or mother or father or children or lands
for my sake and for the sake of the Gospel
who will not receive a hundred times more

now in this present age:
houses and brothers and sisters
and mothers and children and lands,
with persecutions, and eternal life in the age to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모든 희망을 걸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산책하러 나갔다가 길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를 본 개가 사납게 짓는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짖음에 깜짝 놀라 움찔했습니다. 솔직히 그렇게 놀랄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가 키우는 개보다 훨씬 작은 중형견이었고, 주인이 개 목줄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성적인 생각과 달리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목줄을 놓쳐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라는 ‘혹시’나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가 사라진 적이 있을까요?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불안과 공포를 안고 살지도 않습니다.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방법을 찾으면서 더 나은 삶을 향해 묵묵히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따라서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며 자신 없는 마음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를 극복할 힘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자라는 나무는 매일 부는 바람에 걱정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나무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의 체력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불안과 공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센 주님과 함께하고 있음에 안심하며,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올바르게 따르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를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 따름은 모든 것을 버려야만 가능했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도 해야만 했습니다. 즉, 세상의 것보다 하느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박해받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사람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분명 꼴찌의 삶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세상의 눈을 뛰어넘어,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삶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제1독서의 베드로 사도 말씀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를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멀리해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겠지만, 이런 세상의 꼴찌 모습이 하늘에서는 첫째의 모습이 됩니다.

사람은 은혜보다 원수를 갚는데 더 열심이다. 감사는 부담이지만 복수는 쾌감이기 때문이다(타키루스).

내가 매일 매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meBPDC2Qis

어제의 복음은 돈이 많은 부자가 예수님을 따를 수 없어 슬퍼하며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재산을 버릴 수 없어서 예수님을 따름을 포기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따르기 위해 버린 것의 백 배를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그 버리는 정도에 따라 첫째와 꼴찌가 결정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에 따라 어떻게 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만나러 갑니다. 그 만나러 가는 대상이 만든 세상으로 들어갑니다. 그 대상이 지옥으로 안내할 수도 있고 천국으로 안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향하는 방향에 있는 대상이 사랑 가득한 분이라면 당연히 그 뒤엔 천국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이 있다면 그 뒤엔 지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두 방향 중 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바로 세상 집착에 대한 욕구가 사라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렸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세상 집착을 버림입니다. 세상 집착이 늘어나는 삶을 살고 있다면 사랑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살려고 하는 욕구를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서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지니고 태어난 대성이를 소개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 키가 매우 작고 몸무게도 10kg을 넘지 못합니다. 손가락도 작고 팔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매우 크고 자유롭습니다.

    동생과 놀다가 동생에게 밀려도 “형이니까 참아야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빠가 “대성이 몸 작아서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으니 대성이는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마, 걱정하지 마!”라고 씩씩하게 말합니다. 모두 자신의 탓인 거 같다며 혼자서 못할 것 같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대성이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려고 합니다.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한 이러한 감미로운 죽음.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도 기도하지 않으면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피나는 싸움을 전제하지만, 부모와 함께할 수 있는 감미로움을 선사합니다. 대성이는 그 불편한 손가락으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림도 열심히 그립니다.  

 

    대성이가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 행위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자신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오히려 부모님을 위로합니다. 이 사실이 대성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대성이는 지금 부모를 향하여 가고 있고 그 부모가 사랑이기에 대성이도 자아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치 뜨거운 용광로를 지나는 것들은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처럼 사랑의 불로 다가가는 모든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욕심이 커지면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에사우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레베카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우리 자신을 상징하고 이사악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 에사우를 먹고 에사우임을 자청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사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야곱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야곱은 7년 동안 일하여 레아와 혼인하고 또 7년 동안 일하여 라헬과 혼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6년은 혼인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가축, 그리고 가족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에사우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에사우 앞에 나설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번 재산을 미리 보내어 에사우에게 다 바칩니다. 그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가족까지 다 바쳐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에사우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는 천사와 씨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힘이 든 시간입니다. 천사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다치게 하여 에사우 앞에서 똑바로 걷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주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나 자신까지도 내어드릴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감미로운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앞에 설 힘을 줍니다.  

 

    야곱은 형에게 나아가며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합니다. 그리고 “정녕 제가 하느님의 얼굴을 뵙는 듯 주인의 얼굴을 뵙게 되었고, 주인께서는 저를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창세 33,10)라고 말하며 자신의 모든 것, 곧 자기 자신까지 에사우에게 봉헌합니다. 에사우는 야곱에게 상속권을 내주기 위해 저주받을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야곱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 다 내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래야만 그분 땅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살려면 그 에덴동산을 주신 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창조주께 나아가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분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믿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갈수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이 힘은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서 ‘꺾인 다리로 전력 질주, 육상선수 상훈 씨’의 사연을 볼 수 있습니다. 상훈 씨는 선천성 소아마비로 갓난아기 때 파출소 앞에 버려져 시설에서 자랐습니다. 늘 방에서 혼자 보내야 했습니다. 시설에 있는 아이들을 그들의 부모가 찾아와서 집에 데리고 가면 상훈 씨도 그렇게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많이 원망하고 많이 그리워했지만, 상훈 씨는 부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상훈 씨는 전북 장애인 달리기 선수입니다. 나이 쉰이 훨씬 넘었지만, 상훈 씨는 언젠가 만날지 모르는 부모에게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자신과 싸워나갑니다. 아직 장애인 전국체전에서 달리기 금메달을 따지 못했기에 부모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서 있기도 힘든 그 다리로 매일 달리기 연습을 합니다. 낮에는 자신과 같은 중증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만약에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이렇게 잘 커서 잘 지내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요.”

 

    그런데 부모님이 상훈 씨를 TV에서 보았다고 해도 상훈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는 양심상 그럴 수 없습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위해 자신과 싸우고 있는데, 부모는 상훈 씨를 키우기 위해 자신과 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상훈 씨는 부모를 찾겠지만 부모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어두운 곳으로 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훈 씨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자신을 부모의 뜻대로 봉헌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를 따로 하지 않아도 이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상훈 씨와는 반대로 우리의 부모가 되어주시기 위해 매일 당신 외아드님을 십자가에 죽이십니다. 그래야 우리 양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이런 분께 나의 모든 것, 나 자신을 내어 맡기지 않으면 나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금씩 더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분 앞으로 나아갈수록 나는 더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분으로부터 수백, 수천 배의 상을 받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의 열매, 교회의 현실과 민족 복음화의 미래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ZOvW3ugNqY

어려서부터 율법은 잘 지켜왔지만 가진 재물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었던 부자 청년과 달리,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 보상이 어떨 지에 대해 여쭈었습니다(마태 19,27). 그에게 돌아온 예수님의 대답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29-30).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버린 것의 백 배나 되는 큰 보상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과연 초대교회 신자들은 부활 신앙 위에 세워진 공동체의 현실에서 이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삼일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실 보상에 있어서 또 다른 차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이룩해야 할 겨레 사랑의 결과로서, 민족 사회의 공동선이 회복되고 민족 복음화가 이룩되는 미래입니다. 

 

  삼일절은 우리나라가 국민이 주인인 나라로 독립을 하겠다고 선언한 날로서, 오랜 왕정통치의 역사를 마치고 백성이 스스로 다스리겠다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젖힌 뜻 깊은 날입니다. 이 독립선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하여 백성을 총칼로 억누르던 일제의 엄혹한 식민통치 하에서도 평화적인 만세운동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주권재민의 민주주의를 위한 인류 역사의 거대한 실험이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의 독립운동은) 위대하고 비장한 동시에 명료하고, 민의를 사용하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세계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삼일만세운동 당시 베이징대학 교수로서 신문화운동을 이끈 천두슈도 증언한 바 있습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뜻을 대외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인정받는 삼일만세운동은 천도교 신자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보다 16년 전에는 그들이 무력을 사용하는 동학혁명을 일으켰는데, 그들도 3만여 명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거니와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여 식민지배로 나아가게 만드는 명분을 제공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들은 천주교에서 믿는 하느님 신앙과 만민평등 및 남녀동등의 교리에는 찬동하면서도, 천주교가 서양에서 왔다는 이유로 자신들은 서학이 아닌 동학이라고 독자적인 종교로 창립하였으나, 1894년에는 무력으로 일어났다가 실패하였고 1910년에는 평화적으로 일어나서 비록 일제의 무력에 의해 진압되기는 했으나 올바른 민족사의 방향을 제시한 바가 되었습니다. 비록 친일노선을 걷던 그 당시 조선 천주교회 지도부의 반대로 신자들이 공식적으로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역사적으로 평가하자면 조선 왕조의 잔인하고 명분 없는 박해에 대하여 치명하면서도 백 년 동안 평화적인 방식으로 저항했던 천주교 신자들이 피로써 뿌린 민중 운동의 싹이 트인 셈입니다. 소수 권력자들이 탐욕스런 통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백성을 억눌러온 역사를 다수 민중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위대한 시작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의 명예도 아울러 회복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삼일만세운동으로 시작된 우리 겨레의 독립혁명은 아직 현재진행 중입니다. “지난 100년 우리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인류 모두의 평화와 자유를 꿈꾸는 나라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식민지와 전쟁, 가난과 독재를 극복하고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이뤄냈습니다. 4.19혁명과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힘과 방법으로  우리 모두의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왔습니다. 3.1독립운동의 정신이 민주주의의 위기마다 되살아났습니다”(2019년 삼일절 백주년 문재인 대통령 경축사 중에서). 갈라진 민족이 화해하고 통일을 이룰 때까지 이 역사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원동력은 여전히 3.1독립운동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백여 년 전 독립만세를 외쳤던 선조들이 바랐던 꿈과 함께, 이백여 년 전 우리 신앙선조들이 바랐던 꿈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 복음화입니다. 이를 위해 헌신하는 겨레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진정성을 겨레 앞에 증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백 년 전 삼일만세운동 대열에 뒤처졌던 바를 보속하는 의로운 선택일 뿐만 아니라 이백 년 전 백 년의 박해를 신앙적으로 견디어 내고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어낸 거룩한 역사를 계승하는 선택일 것입니다. 의로운 선택은 기본이요, 거룩한 선택은 필수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권고하다시피,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5). 

  교우 여러분! 
하느님 신앙의 목표는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부활 신앙으로 거룩하게 사는 것이 목표립니다. 그리고 그 의롭고 거룩한 선택의 보상은 민족의 복음화입니다. 

-조재형신부-

 

신문 홍보를 위해서 출장을 가기도 하고, 신부님들과 여행을 갈 때가 있습니다. 출장을 가거나, 여행을 할 때는 준비물이 필요합니다. 신문 홍보를 위해서는 신문, 구독신청서, 볼펜, 홍보 현수막을 가져갑니다. 여행을 갈 때에는 여권, 운전면허증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이 늘 가져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벌 옷, 세면도구, 면도기, 충전기, 상비약, , 노트북을 가져갑니다. 미리 짐을 챙겨두면 마음이 편해지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교회는 연중시기를 잠시 멈추고 내일부터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시기라는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떠나신 것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라는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우리에게 필요한 준비물은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던 베로니카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사순시기에 필요한 준비물이 4가지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1시간만이라도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아버지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교회는 사순시기에 특별히 십자가의 길기도를 권고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유혹이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회개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유다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죄를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은 부자는 하늘나라에는 머물 자리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쌓는 방법은 어려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은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네 번째는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평소에 즐겨하는 것을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담배를 끊어도 좋고, 절주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절제하는 시간에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행복은 좋아하는 것만을 해서는 얻기가 어렵습니다.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단식과 절제를 통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은 누가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사순시기를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좋은 준비물을 알려줍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요셉 성인의 한결같은 충실성과 우직함의 결과, 주님 구원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수도회 입회 때가 생각납니다. 각오가 비장했습니다. 주님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즐겨 마시던 술도, 잔뜩 폼 잡고 피우던 담배도, 칼같이 끊어버렸습니다.

 

친구들에게 다 버리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세상도 가족도 뒤로 하고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겠다고 외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허세가 대단했습니다. 그 시절 돌아보니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수도회 입회를 해보니? 버린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원 없이 공부할 좋은 기회를 주셔서 유익한 공부 참 많이 했습니다. 한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좋은 일 자리와 직책을 주셔서 좋은 아이들, 좋은 사람들 참 많이 만났습니다. 더 크고 많은 가족 친지들이 생겼습니다. 국제 수도회인 관계로 직무를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으며, 시야와 지평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버린 것은 쥐꼬리만큼이었는데, 얻은 것은 소머리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성 요셉 성월을 시작합니다. 요셉 성인의 생애를 묵상해보니, 그분도 참으로 큰 것을, 그리고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마르코 복음 10장 29~30절)

 

요셉은 주님 구원 사업의 성취를 위해 마리아의 약혼자로서의 평범하고 단란한 결혼생활을 포기했습니다. 요셉이라고 어찌 인간적이고 소박한 꿈이 없었겠습니까? 마리아와 혼인해서 남들처럼 자신의 피가 흐르는 자녀들, 후손들이 번성하는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참 많이 버렸습니다. 주님의 계획을 위해 자신의 계획을 버렸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자신의 뜻을 과감히 접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 희망, 꿈, 그 모두를 남김없이 내던졌습니다.

 

몽땅 버린 요셉의 부모님이나 가족, 친지들이 받았던 충격을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부모님은 상심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했을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상야릇하다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겉으로는 쉬쉬했지만, 돌아서서는 수근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성적으로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가 뭐래도 도통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습니다. 걸어가라고 하시면 걸어갔습니다. 한결같은 우직함과 충실성의 결과 주님 구원 사업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요셉 성인의 삶과 생애를 깊이 있게 묵상하고, 작은 것이나마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성 요셉 성월을 보내면 좋겠습니다.

<"~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부자청년 이야기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하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마르 10,29-30)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버린다는 것’의 의미가 단지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에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소중한 것들을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버려야만 하는가?

그 대답은 먼저 ‘예수님이 누구신지’, ‘복음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예수님과 복음’이 그 모든 것들을 버릴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를 비록 잘 모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채 알지 모르면서도 매료당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끊임없이 복음과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복음을 넘어, 진정 복음인 복음을 알아가면서 진정 예수님이신 예수님을 알아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차차 예수님과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 이외의 것들을 조금씩 버려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리 값지고 좋은 것들도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또한 나에게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일은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사랑이 작아서일지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버릴 수 있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중심이요 궁극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도 아빌라의 데레사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 예수님과 복음을 사랑한다면,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대변혁이 생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구하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한 다른 것을 구하는 데서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님과 복음과 사랑이 늘 첫째가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마르 10,28)

 

주님!

모든 것을 버리되 버리고 온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되 당신을 따르고 있는 제 자신도 버리게 하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께서 목숨을 버리시며 이루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당신의 것이 되어 온전히 당신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출세하기 위해서」

-반영억신부-

 

세상 사람들은 소위 출세를 하려고 애를 씁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며 권력을 누리려고 합니다. 부정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출세라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랐습니다.”(마르10,28)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 받는다는 것을 출세하는 정도로 생각하였나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자랑 삼아 말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버렸으니 한자리 주십시오.’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 예고하셨을 때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길가에서 논쟁한 것에서 드러났고, 세 번째 예고를 하셨을 때에도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청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린 이유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버려야지, 자신을 위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복음을 위해서 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려면 예수님을 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진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권력을 지닌 것을 첫째로 여기지만, 하늘에서는 많은 것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를 봅니다. 무엇을 위해 썼느냐가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룰 수는 없지만 버려야 할 것을 하나씩 기쁘게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재물이든, 권력이나 명예든 지금 첫째라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 마음에 드는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여 마침내 천상에서 첫째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것에서 마음을 비우고 주님만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얻을 것입니다. 비우는 만큼 그분께서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1베드1,13-15의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따름과 보상』

-송영진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버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따름’에 대한 보상입니다.

‘버림’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에서 보상을(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고,

‘따름’은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고,

‘버림’은 잘 따르기 위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버리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목적과 방법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버림’을 실천하면서도 ‘따름’을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소유’를 실천하지만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소유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준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에서,

‘강조점’은 ‘모든 것을 버리고’가 아니라 ‘따랐습니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강조점’은 ‘버린 사람은’이 아니라,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에 있습니다.

버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버리는가? 누구 때문에 버리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서, “‘버림’을 실천하지 않는 ‘따름’은 가능한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로 모든 것을 버려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가?

우선 먼저, 복음서에서 말하는 ‘버림’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버림’은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버림’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 ‘버림’을 실천해야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직업은 버렸지만,

카파르나움의 집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을 숙소로 사용하셨습니다.)

또 베드로 사도는 선교 여행을 다닐 때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1코린 9,5).

바오로 사도는 거의 모든 것을 버렸지만, 직업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는데,

돈이 필요할 때에는 그 일을 했습니다(사도 18,3).

그처럼 신앙인의 ‘버림’은 맹목적인 무소유가 아니라, 즉 소유물을 무조건 버리고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세속에 대한 초월, 이탈, 자유’입니다.

 

그렇긴 해도 실제로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이 말씀에서 ‘미워하다.’ 라는 말은,

현세적이고 육적인 애착심을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가족을 진짜로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족에 대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애착심’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족은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변질되어서,

구원이 아니라 멸망을 향하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잘못된 욕망입니다.

바로 그 잘못된 욕망과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목숨’에 관한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2) ‘영원’과 ‘허무’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허무’를 버리고 ‘영원’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가지고 싶어 하고, 욕심내고,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 욕심과 집착 때문에 영원한 것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면,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능동적으로 버려야 합니다.

 

3) ‘목숨’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잠시 맡아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버림’과는 조금 성격이 다른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넓은 뜻으로 ‘버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우리는 가지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 그것도 ‘버림’입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백배의 보상’은 현세에서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풍성한 은총’을 뜻합니다.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는다는 말은 풍성한 은총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라는

말 때문에, ‘박해’와 ‘보상’을 모두 현세에서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뒤의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을,

‘박해도 받겠지만’의 뒤로 옮겨서 읽어야 뜻이 정확해집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겠지만, 내세에서는 ......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 31)
-한상우신부-


3월
첫날이다.

봄이
되어간다.

우리의 생활은
우리의
현실이 된다.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위해
버린 것이
하나도 없다.

끊임없는 변명과
헛된 구호만
펄럭일 뿐이다.

버림에 대한
반성과
따름에 대한
화해가
필요한
시간이다.

예수님을 보고
우리 생활을 보니
우리자신이
참 한심하다.

걸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따름의 기쁨이다.

예수님의 손을
다시 잡는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먼저 아신다.

우리의 현실을
이끌고 가시는
주님의 따뜻한
손이다.

사람이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

하느님의 사람은
매순간 순간을
버리고 따르는
이들이다.

사람이
되는 것이
첫째와 꼴찌보다
더 중요하다.

다시 버리고
다시 기쁘게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버림이 우리를
씻어주고
따름이 우리를
채워준다.

십자가를
지나야만
참된 따름이
있음을 다시
보게 된다.

십자가의 꼴찌와
십자가의 첫째
모두 십자가에서
철이 들고 있다.

십자가가
이러한
우리자신을
받아주고 있다.

3월의
십자가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삼월의 첫날이다.

반가운
버림과
따름이다.

말씀 나누기 - 연중 8주 화요일-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복이다. (ofmkorea.org)-김찬선신부-

 

연중 8주 화요일-주님께서 주시는 것은 다 복이다.

어제 부자 청년이 가진 많은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 주님 따르기에실패한 것을 보고 오늘 베드로는 그와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주님을 따랐음을 얘기하고 이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매우

www.ofmkorea.or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