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가 1,46-56)
“My soul proclaims the greatness of the Lord;
my spirit rejoices in God my savior.
for he has looked upon his lowly serva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한나는 사무엘을 주님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이라며 그를 주님께 바치겠다고 엘리에게 말한다(제1독서). 마리아는, 전능하신 분께서 자신에게 큰일을 하셨다며 주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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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애가 좋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형의 동생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었지요. 그런데 형이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게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다. 내 재산을 이렇게 정리해주었으면 한다. 네가 원하는 만큼을 형수에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렴.”
형이 하늘 나라에 가고 나서 재산을 정리하니 30억이었습니다. 동생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형수에게 1억을 주고, 자신이 29억을 가진 것입니다. 형수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결국 법정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동생에게 “본인이 원하는 돈은 29억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동생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지요. 그러자 판사는 “그러면 형수에게 29억을 주고, 동생은 1억을 가지십시오. 왜냐하면 형이 ‘동생이 원하는 만큼을 형수에게 주고, 나머지는 동생이 가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마음을 잘 품지 않는 우리는 아닐까요?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가지지 못한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의 노래를 듣게 됩니다. 이 노래는 성모님께서 천사의 기쁨의 인사와 엘리사벳의 찬양의 인사를 받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에 흠뻑 젖어 절로 읊은 응답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와 엘리사벳은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인사하였고, 성모님도 성경에 있는 말씀을 회상하면서 응답송을 읊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하신 위대한 구원사업에 감격하여 마음과 정신이 온통 하느님께 찬미의 정으로 휩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관이며 예언자였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제1독서에 볼 수 있듯이, 아기를 못 낳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통해 사무엘을 낳게 되자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요. 성모님도 같은 맥락에서 온 세상 하느님의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읊으신 것입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런 노래가 가능했을까요? 순간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세상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하늘 나라의 행복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을까요? 성모님과 같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참된 행복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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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보면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늘의 새와 들에 핀 꽃 이야기를 하시지요. 여기서 우리가 묵상해 볼 것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냥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하늘의 새를 보면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어렸을 때 집에 제비집이 있어서 제비의 움직임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바쁘게 돌아다니는지 모릅니다. 둥지를 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새끼가 부화하면 곤충과 벌레를 잡아 새끼 주둥이에 쉴새 없이 넣어줍니다.
들에 핀 꽃도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지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즉 깊은 신뢰와 커다란 안정 가운데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죽음을 마치 전기가 끊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며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단계로 보기에 희망 속에서 두려움을 없앨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주님께 희망을 두며 확실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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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묵상 동영상
자기 성취가 커질수록 기쁨이 줄어드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주님께서 당신을 도구로 쓰시어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들이 성령으로 기뻐 뛰게 하심을 보며 당신도 기쁨에 넘쳐 “내 영혼이 주님을 찬미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찬미를 올립니다.
성모님은 참 기쁨이 자기 뜻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기쁨의 원천은 나를 만드신 분이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내가 그분 뜻에 나 자신을 맡겼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나에게 실현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 기쁨입니다.
나의 힘으로 성취한 일은 오히려 행복을 갉아먹습니다. 성공과 함께 자아도 커져서 나의 기쁨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로 현대에도 유명해진 궁예는 천민으로 태어나 가장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루어낸 엄청난 성취는 그에게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초대 왕이 되었음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가 미륵불이라 자처하며 부처와 같은 수준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성취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가 관심법이라는 명상을 하고 있을 때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인가?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 말이야!”
한 신하가 말합니다.
“소인이옵니다. 폐하.”
“참으로 딱하구나. 짐이 지금 관심법을 하고 있는데 어찌 기침을 할 수 있었느냐이 미련한 것아.”
“송구하옵니다, 폐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가만히 보니 네 머리에는 마군이(불도를 방해하는 온갖 번뇌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가 가득 찼구나. 여봐라. 저자 안에 있는 마군이를 때려죽여라!”
이렇게 신하뿐만 아니라 여인들까지도 철퇴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마군이를 죽이기 위해서였을까요? 자아가 너무 커져서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대로 무언가 성취한 사람은 그 성취와 함께 자아도 커지기 때문에 기쁨을 외부 사람들의 인정과 존중에서 얻으려 합니다. 그리고 존중해주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세상에서의 성취는 나의 자아와 함께 성장하기 때문에 마치 ‘아귀’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덩치는 커지는데 목구멍은 작아져서 몸이 커질수록 점점 배가 고파지는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마 세상에서 가장 기뻤던 때는 시험을 너무 못 보았는데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받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얼마나 갔을까요? 하루도 못 간 것 같습니다. 바로 등록금을 걱정 해야 했고 대학에 들어가니 또 군대와 취직 걱정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룬 기쁨은 이렇게 오래 걸리고 또 짧게 끝납니다. 그리고 옆에 나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간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은 바로 끝나고 맙니다.
반면 책 『단순한 기쁨』은 빈민구호 단체인 ‘엠마우스’를 만들어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평생을 보낸 아베 피에르 신부님의 일생이 왜 기쁨을 수밖에 없었는지 적은 책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부유한 상류층에서 태어나 19세 때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엠마우스를 만들어 평생 고통받는 가난한 약자들을 위해 사신 분입니다. 지금의 엠마우스는 전 세계 44개국, 350여 개의 단체가 되어 수많은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분이 엠마우스를 시작할 때 첫 조력자요 협조자였던 사람은 자살 직전의 위태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을 불러 가보니 그 사람은 자살 외에는 더는 살 의미를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 사람의 일생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정부였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정부였지만 주인이 죽으면서 물려줄 재산을 받을 친척이 없자 주인은 가정부인 그 사람의 어머니에게 재산을 상속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재산을 노린 많은 남자가 어머니에게 접근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그 사람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혼인했음에도 재산을 아버지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아들이 결혼하려고 하자 모든 재산을 잃을까 봐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을 깨기 위해 편지를 대필하여 아들의 애인에게 보내 둘이 헤어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마련한 한 여인과 아들이 결혼하게 합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안 아들은 총을 들고 아버지와 편지를 대필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를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어찌하다 아버지는 총에 맞아 죽고 편지를 대필한 사람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는 종신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불이 났었는데 그는 목숨을 걸고 다른 죄수들을 도왔고 그 덕분으로 그는 사면을 받게 됩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역시 아내는 모든 재산을 가지고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고 딸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쫓겨난 처지가 된 그는 당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던 결핵에 걸리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 피에르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살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자신을 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엠마우스라는 것을 하려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도 죽기 전에 신부님 일을 조금이나마 도와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15년 동안 엠마우스의 최고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신부님을 도와주고 결핵으로 죽습니다. 그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신부님께서 그때 제게 돈이든 집이든 그저 베푸시기만 했다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살아갈 이유를 자기 자신이 정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진 스마트폰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스마트폰에 이성이 있어서 살아갈 의미를 알아서 정하라고 하면 그 스마트폰은 올바른 살아갈 의미를 정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살아갈 의미는 자신을 만든 이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살아갈 의미를 살아갈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 ‘기쁨’입니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으로 사용될 때 가장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으로 살아갈 때 가장 기쁩니다. 따라서 나의 힘으로 이룬 성취로 나의 기쁨을 찾겠다는 말만큼 어리석은 말이 없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자아를 공룡처럼 커지게 하겠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는 공룡을 기쁘게 할 만한 음식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삶의 기쁨을 내 뜻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가 작아져서 자신 안에서 주님께서 일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기대하지 못했던 성취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주신 일입니다. 내가 한 일이 아니기에 불만족의 블랙홀인 자아가 설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주님께 나를 내어드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놀라우신 일을 하는 것을 보고는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뭐라고 하건 나는 나를 통해 주님의 업적을 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신 이유가 나에게서 드러나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 뜻을 따르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짧은 고통은 있지만, 아주 오랜 기쁨이 뒤따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빼앗아갈 수도 없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이룬 성취는 오히려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조금이나마 있었던 기쁨과 행복도 갉아먹는 독이 됨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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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년 새로운 한해를 준비하면서 ‘본당사목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가정, 복음화, 선교, 영성, 청소년’ 등을 주제로 본당사목 지침을 만들었습니다. 사목지침이 만들어지면 각 분과에서는 사목지침에 따른 행사, 피정, 교육, 전례를 기획하였습니다. 본당사목은 행사, 전례, 영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본당에서 절두산 성지까지 도보순례를 했습니다. 날씨도 좋았고,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모습도 아름다웠고, 성지에서 봉헌했던 미사는 거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의 뜻을 따라주시고, 함께 해 주신 분과장님들과 본당 교우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해야 할 바를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후배 사제들을 위해서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마음에 본당사목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뜻을 받아들여 주셨고, 지금은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두 가지를 중점에 두려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의 귀를 열어주셨고, 말하지 못했던 사람은 듣게 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영적으로 닫혀있는 신앙의 귀를 열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탈리타꿈(일어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어있던 소녀를 살려주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근심에서 기쁨으로 일어나도록 힘과 용기를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은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각 후보들은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움직이는 마음이 표가 될 수 있도록 정책, 공약을 발표할 것입니다. 본당사목 지침과는 규모와 예산이 다를 것입니다. 분배와 복지를 위한 정책도 필요합니다. 성장과 발전을 위한 정책도 필요합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국가를 위한 유연함과 대범함도 있어야 합니다. 코로나19의 위기에서 보듯이 국가적인 재난을 슬기롭게 풀어가는 역량도 갖추어야 합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위한 지원도 필요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투자도 있어야 합니다.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정책은 사라져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모함, 비방은 사라져야 합니다. 현명한 국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후보를 식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인카렘에서 엘리사벳을 만난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는 오늘 세상을 향해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오늘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저의 사목지침 발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성서를 읽으면서 마리아의 꿈이 계속되고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는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마리아의 노래는 예수님의 선포로 완성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가브리엘의 노래, 베드로의 노래, 리디아의 노래, 레지나의 노래를 만들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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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위업(偉業)을 찬미하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
-양승국신부-
나자렛의 마리아와 아인카림의 엘리사벳이 서로 상봉하는 장면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참으로 기구하고 비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길을 걸어 찾아온 여인은 10대 미혼모입니다. 맞이한 여인은 놀랍게도 노산(老産) 중의 노산을 앞둔 호호백발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서로 상봉하자마자 기쁨 충만한 찬가를 주고받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두 여인의 뱃속에 든 아기들도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더 이상 불행할 수 없는 만남인 듯 한데,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그 비결은 활기차고 충만한 성령의 현존 때문입니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이스라엘의 옛 백성 전체를 대변한다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새 백성 전체를 대변합니다. 이로써 인류의 두 위대한 어머니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찬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대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의 서막을 찬양하는 동시에, 마리아의 놀라운 믿음을 칭송하고 축복합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엘리사벳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마리아가 어떤 분이신지 명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신 분.’ ‘주님의 어머니.’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노래에 이어 마리아께서도 응답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신약 성서 내 여러 찬가 중에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는 찬가로 손꼽히는 마리아의 노래는 라틴어로 ‘찬미하다.’(Magnificare)라는 동사의 3인칭 Magnificat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성모의 노래는‘마니피캇이라고 부릅니다.
마니피캇은 하느님을 향한 마리아의 찬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놀라운 위업(偉業)을 노래하는 동시에, 인류의 구원을 위한 역사(役事)하심, 그분이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보증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전반부는 개인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부족한 자신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후반부는 공동체적 차원의 감사의 찬미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펴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이루어진 데 대한 감사의 찬가입니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성모님께 공경을 표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노래요 기도이기에 적극 추천합니다. 저희 수도자들이나 사제들은 하루 일과가 끝나가는 해질 무렵, 매일 저녁 기도 때마다 마니피캇을 노래하며 성모님께 공경의 예를 표합니다.
매일 저녁, 그 옛날 나자렛의 성모님을 기억하고, 성모님과 한 마음으로, 성모님의 지극히 겸손한 덕을 본받겠다고 다짐하며 마니피캇을 노래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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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들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 노래요, 화답송은 그때 드린 한나의 기도요, 복음의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루카 1,47)
이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8)는 하바꾹 예언자의 희망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희망이 지금 마리아에게서 실현된 것입니다.
또한 이는 “내 마음은 주님 안에서 강해지고, 내 뿔은 주님 안에서 높여지고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나이다.”(1사무 2,1-2)라는 한나의 기도요, “내 영혼은 주님 안에서 기쁨을 찾을 것이고 그분의 구원으로 즐거워할 것이다.”(시 35,9)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토록 마리아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 자비를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찬미합니다.
욥처럽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이루신 “측량할 수 없이 큰 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일”(욥 5,9)을 찬미합니다.
이는 막연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 안에서 큰일을 이루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이러한 구체적인 찬미를 말합니다.
그는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하느님의 거룩한 장막 안에 머무는 길로 제시합니다. (‘수도규칙’ 머리말 30)
결국 이는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는 그분을 찾아 맞아들이고 그분을 찬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만약 오늘 우리가 주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활동을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요, 우리가 자비롭지도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모님은 당신의 노래를 통해 진정 우리가 자비를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영광을 입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불러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9)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루카 1,54)
주님!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찬미합니다.
제 안에 베푸신 측량할 수 없이 큰,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당신의 자비를 찬미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여 찬미하는 일이 제 삶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자비의 노래 외엔 아무것도 아니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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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1,46-56: 마리아의 노래-하느님 찬미가
-조욱현신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뛰니”(47절) 마리아는 자기 자신의 모든 것, 영혼과 마음으로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 자체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습이다. 이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의 일과 생각과 말로 키울 때, 우리는 올바로 주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다. 우리의 모습 안에서 그분은 더 우리의 삶을 지배하시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의 주체가 되신다는 말이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48절) 이 말은 마리아의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온갖 복을 받은 것은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겸손을 굽어보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그 여인에게 큰일을 하셨고,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50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대대로’라는 말은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모든 나라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 10,34-35)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51절) “당신 팔로”는 “당신의 힘을 쓰시어”라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힘으로 통치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교만함을 흩으시고 그들이 율법의 포로로 만든 이들을 당신 나라에 받아들이셨다. 이 통치자들은 하느님의 힘이 필요하지 않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힘 있는 자들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53절) 굶주리는 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이다. 부유한 자는 교만하고 자기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려면 성전에서 빈손으로 내쳐지는 부유한 자 바리사이와 좋은 것들로 배부르게 될 굶주린 이를 볼 수 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교만의 악취를 내뿜는 부자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했던 그의 마음은 그가 눈을 두지 못한 바로 그곳에 있었다.(루카 18,10-14 참조)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54-55절) 여기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그분이 거두신 이스라엘은 허울뿐인 교만해진 육에 따른 이스라엘이 아니다. 그 이름의 참뜻대로 당신의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믿고, 약속과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하여 그분의 자녀가 된 이들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혈통에 따른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고,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는(창세 22,18 참조)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히브 2,16 참조)이며 그분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을 받게 되는 우리 구세주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시어,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56절) 마리아는 석 달 정도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며, 요한이 탄생한 다음 엘리사벳을 위해 봉사하시고 집으로 가셨다. 그리스도를 낳아주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성탄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즉 사랑을 실천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로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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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 49)
-한상우신부-
큰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우리자신이
보게 된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가
알게 된다.
새로워지는
우리의
오늘이다.
소중과
존중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새로운 마음의
하느님이시다.
온통
기뻐해야 할
시간이 된다.
만남은
나눔이 되고
나눔은
찬미가 된다.
찬미는
또 다시
만남을
비추어주는
마음이 된다.
복음은
거래가 아닌
참된 만남의
기쁨이다.
만남의
기쁨은
더욱
소중해지는
은총이 된다.
참된 만남으로
감춰진 구원의
신비가 우리에게
환하게 드러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반겨준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존중으로
들어높여 주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삶의
행복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대림이다.
하느님을 향한
찬미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다.
비천함과
믿음 사이에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히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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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12월 22일-굽어보시는 하느님을 우러러보는 찬미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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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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