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Margaret K 2021. 12. 19. 07:11

2021 12 19일 대림 제4주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39-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축복을 받으신 성모님

-키엣대주교-


성모님의 인사를 하자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 요한은 기뻐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 역시 성령으로 가득차 주님의 어머니신 성모님께 축복을 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드린 축복의 의미를 되새겨보겠습니다.

축복을 받으신 성모님

성경에서 축복을 받은 여인은 야엘과 유딧 오직 두 명뿐입니다.

시스라가 물을 청하자 야엘은 우유를 주고 손을 뻗어 말뚝을 잡고 왼손에는 일꾼들의 장도리를 쥐고서 시스라를 죽임으로써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이스라엘사람을 해방시킨 야엘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카인족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 천막에 사는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어라.” (판관기 Tl 5,24-26).

아시리아 군대의 대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이스라엘민족을 해방 시킨 유딧입니다. “딸이여, 그대는 이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가장 큰 복을 받은 이요.” (유딧기13,18).

성모님은 예수님께 인간을 죽음과 죄로부터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온전한 축복입니다. 영혼의 악령으로부터의 해방이 사악함의 근원을 없애는 것입니다. 축복받은 성모님은 저주받은 이브에게 화해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악한 뱀의 말을 들은 이브는 세상과 인간에게 죄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에 순종한 성모님은 하느님의 축복을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성모님께 드린 엘리사벳의 두번째 축복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예수님을 잉태하셨기에 성모님은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축복의 원천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축복의 원천이신 예수님

태중의 예수님은 세상을 밝히시고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태중의 세례자 요한 또한 원죄의 사함을 받았기에 기뻐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하였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모님도 기쁨의 ‘Magnificat’으로 하느님과 조상과 민족을 칭송하였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목자가 나타날 것이다. 목자는 새로운 사람들을 모아 그 나라를 번영과 평안으로 이끌 것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바로 엘리사벳의 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태중의 예수님과 주님을 칭송하는 주님의 자녀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민족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새로운 민족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기쁨에 충만한 사람들은 다시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행복의 원천을 전달하신 예수님

제2독서의 두루마리에 적혀있는 글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모으고 행복의 원천으로 인도하는 예수님 당신의 법을 볼 수 있는데 어떤 강력한 규제와 법이 아닌 단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효성스런 아들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항한 이브와 달리 예수님은 언제나 겸손하고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경배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브가 불화의 민족의 뿌리를 만들었다면 예수님은 하느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효성스런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성모님은 효성스런 주님의 백성 첫번째분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이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열어주신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뜻에 순명하는 삶, 효성스런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 그로서 그들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대림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지막 준비만 남았습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순결한 영혼을 준비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열어 주신 길, 주님의 뜻을 따르는 효성스런 자녀의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성모님께서 당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꿀과 메뚜기만을 먹은 것’처럼, 엘리사벳이 자신의 아들을 ‘주님이 지어주신대로 요한’이라고 짓고 천사의 지시대로 음식을 먹은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한다면 이 분들이 예수님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께서는 엘리사벳의 집에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준비한다면 우리도 아기 예수님께서 오실 때 큰 축복과 행복의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엘리사벳이 성모님께 드린 축복과 야엘과 유딧의 축복을 비교해 보세요.

2.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사람을 모으는 목자가 되셨고 주님의 길로 들어간 첫번째 자녀는 성모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3. 예수님께서는 행복의 길을 어떻게 여셨습니까?

4.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효성스런 자녀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말씀의 실천

1. 이번 주 가능하다면 장례식에 방문하여 가신 분의 영혼과 육체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2. 예수님은 행복의 원천이십니다. 어떤 일을 하기전에 자문해보십시오. ‘만약 예수님이 여기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그리고 그 대답을 실천해보십시오. 축복이 함께 할 것입니다.

3. 베트남의 바닷가 Bac Lieu의 Ganh Hao 성당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해 야전 병원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베들레헴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사진을 보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코로나로 인해 희생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상은 공평한가요? 아니면 불공평한가요? 당연히 불공평합니다. 저의 자발적 선택 없이 삶의 시작부터 많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국적, 성별, 부모 형제, 가정환경, 외모, 건강, 재능 등등…. 저의 선택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시작부터 불공평한 삶임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아가야 하는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것만 모두 공평할 뿐입니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을 거부하고 불평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며 나만의 삶을 만들며 살 것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불평불만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가서 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이로써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과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불평만 하기에는 자기 삶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성모님께 주어진 일 역시 성모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무조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불공평의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불공평의 상황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일이기에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 기쁨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사촌인 엘리사벳을 찾아 기쁨을 함께 나누기로 결심하고 발걸음도 바삐 유다의 땅을 향합니다. 서둘러 가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기쁨이 넘쳐서 발걸음이 가벼웠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잉태해서 무거운 몸이었기에 다리도 아프고 무척 고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은 기쁘기만 합니다. 기쁨의 성령이 인도하는 발걸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엘리사벳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머니라 불릴 나이였던 엘리사벳이 앳된 동생 마리아의 방문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기쁨이 바로 성모님의 노래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기쁨은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요? 불공평해 보이는 하느님의 일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 불평하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라봤기에 참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의 불공평을 지금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안창호).

공평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불공평.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역사상 가장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났습니다. 이 공격으로 자그마치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람들은 집단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희생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보상금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똑같이 보상금이 주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 달리 보상금은 25만 불부터 최대 700만 불까지 액수가 제각각이었습니다. 죽음의 가격이 다르게 책정된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되었습니다. 나이, 경력, 교육 수준, 직군, 인종 등으로 그 차이가 생겼습니다.

최고의 지위에 있는 CEO의 죽음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행려자의 죽음을 하느님께서 다르게 보실 리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불공평을 만드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세상에 만연된 불공평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에 지치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성모 마리아께 이렇게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끊임없이 도전하다 그 실패에 좌절하고 맙니다. 자아는 도전하게 만듭니다. 도전하게 하려고 항상 지금 불만족스럽게 만듭니다. 만족하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지칩니다.

    “열심히 살다 보니 삶이 피폐해지는 느낌이다.”, “더 잘하고 싶은데 진도가 안 나간다. 모든 일이 힘들기만 하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등의 생각이 든다면 삶이 지쳤다는 증거입니다. 왜 지칠까요?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쉬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은 이성의 동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적당히 일하고 쉬며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화성의 인류학자』란 책에 이런 사례가 나온다고 합니다. 순행성 기억 상실증 환자인 그레그에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슬퍼할 사이도 없이 그는 이 사실을 금방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레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나오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만 갔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해도 나를 조정하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은 축적되어 나를 지배합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기억도, 지성도 아닙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실패했다는 기억도, 연인과 헤어졌다는 기억도 아니란 것입니다. 나의 감정입니다. 자아는 불만족의 감정을 주고 믿음은 감사와 기쁨의 기분을 줍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로, 강릉 방송국의 PD이자 DJ로 일하는 은수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항상 라면을 먹는데 이는 둘의 사랑이 라면처럼 금방 끓고 라면처럼 금방 불어버리는 사랑임을 암시합니다. 은수는 이미 결혼 경력이 있는 여자이고 상우는 진지한 사랑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이 식는 것을 느끼자 은수는 차갑게 돌아섭니다. 하지만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상우는 분노합니다. 홧김에 은수가 산 새 차를 긁어버리는 유치한 행동도 합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위로는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는 상우를 아껴주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십니다.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감정에 그리 매몰될 것이 없음을 깨닫고 현실로 돌아옵니다.

 

    이때 은수는 다시 상우가 생각이 납니다. 상우와 화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드리라며 화분을 들고 상우를 만납니다.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하지만 상우는 할머니의 죽음도 모르는 은수와 다시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화분을 다시 돌려주고 헤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의 소리를 모읍니다. 그 소리 하나에도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에서 영원히 외로울 사람은 은수입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삶을 사는 여인이고, 상우는 이제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지금 있는 자연의 소리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바람 소리, 새소리, 맑은 공기에 감사합니다. 가진 것에 감사한다는 말은 그것을 나에게 주신 분에 게 감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창조자에 대한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성모님께서 “믿으신 분”이 되신 이유는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믿게 되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어린아이처럼 지치는 일이 없습니다.

 

    돈이 행복지수에 관여하지 않으면 부탄이란 작은 나라는 매우 높은 수준의 행복지수를 나타냅니다. 부탄의 4대 국왕인 지미 싱게 왕축은 “국민총행복지수가 국내총생산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1729년에 만들어진 부탄 왕국의 법전에는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 이유가 없다”라고 쓰여있습니다. 부탄은 국민총행복지수(GNH)라는 부서를 따로 만들어 부탄에서 행하는 모든 정책에 실제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탄이 말하는 GNH 행복지수는 심리적 웰빙, 건강, 시간 사용, 교육, 문화적 다양성, 굿 거버넌스, 공동체 활력도, 생태학적 다양성 및 회복력, 생활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부탄은 400년 전인 15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동차와 도로는 전혀 없었고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국가에 의사가 단 2명밖에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38세, 개인당 국민소득은 51달러로 최빈국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탄은 국민행복지수를 국가 기본 정책으로 정한 이후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1인당 국민소득은 3천 달러가 못 되는 최빈국 수준이지만 국민의 삶의 질은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국가에서는 실력에 따라 고등교육을 제공하며 현재 국민 기대수명은 69세입니다.

 

    물론 현재는 TV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자신들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알게 되어 젊은이들은 도시로 몰리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여 청년 실업률이 증가했으며 외국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었던 세계의 유일한 부탄도 이제 돈이 행복이라는 세상 물결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부탄처럼 행복을 위한 정책을 지금 바로 우리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라도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지금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정책을 펴면 됩니다. 내가 나를 믿고 도전하다 보면 실패를 거치며 나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지만, 주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실패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나를 조종합니다. 지금 감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은 나를 믿는 시간이고 분명히 지쳐 쓰러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칠 수 없는 이유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감사로 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서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의 종살이를 하기 때문입니다.

 

 

◈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다

 -이기우신부-


⒈ 말씀의 초점

우리가 묵주기도를 할 때 환희에서부터 빛, 고통, 영광의 신비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주어로나 목적어로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단이 있습니다. 바로, 환희의 신비 제2단입니다: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합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 두 여인의 만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제1독서인 미카 예언서 5장의 말씀은 그 배경을, 제2독서인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은 그 의미를 밝혀줍니다. 

 

⒉ 마리아의 방문 신비

마리아는 요셉의 청혼과 수락, 약혼식에 연이어 자신을 찾아온 천사에게서 성령의 은총으로 구세주를 잉태하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갈을 통보받았습니다. 아직 정식으로 혼인하기도 전에 아기를 임신하게 된 그가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사람은 사촌 언니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알려졌던 그 언니가 아기를 가진지 벌써 여섯달이나 되었다고 천사가 알려주었으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곧 해산하게 되면 도우미가 필요하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혼전임신이라는 이 놀라운 소식을 부모님이나 약혼자에게 알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서둘러 길을 떠나 유다 산악지방에 살던 엘리사벳에게로 찾아갔던 것입니다. 

 

⒊ 엘리사벳의 인사말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면서 놀라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천사를 시켜 알려주셨으므로(루카 1,41). 그는 놀라움보다는 부러움과 기쁨으로 마리아에게 이렇게 인사하였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불과 며칠 전에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하고 천사가 인사하면서 마리아를 한밤중에 느닷없이 찾아왔던 방문의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세주의 잉태. 

 

⒋ 엘리사벳의 처지

엘리사벳도 늙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남편 즈카르야가 어느 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던 중에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께서 아이를 낳게 해 주시리라는 뜻밖의 전갈을 받은 후 임신한 지 여섯달이 된 처지였습니다. 자신도 자연의 섭리로는 도저히 임신할 수 없는 나이에 하느님의 섭리로 임신하게 되었으므로 태어날 그 아기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리라는 것은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세상에 오시기로 된 메시아께서 자신보다 더 특별한 방법, 즉 동정의 몸이라 하더라도 성령의 기운으로 오심에 대해서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엘리사벳의 믿음이 두드러졌습니다.

 

⒌ 미카 예언자가 내다본 아나빔들의 처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왕이나 사제들, 궁정 예언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게 처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재야에서 출현한 여러 예언자들이 이미 공개적으로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카를 비롯한 많은 예언자들은 그런 거짓 목자들과 달리 하느님을 겸손하게 섬기며 살아온 이름없는 아나빔들과 영적으로 통공하며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메시아를 예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사야와 같은 시대에 활약한 미카 예언자 역시 메시아 시대가 오면 아나빔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새 역사가 펼쳐질 것을 내다보았으며,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기 7백 년 전에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이라는 보잘것없는 마을에서 탄생하시리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이나 그의 남편 즈카르야, 마리아는 물론 그 약혼자인 요셉, 또 마리아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 등은 모두 미카와 같은 예언자들이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수백 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메시아를 기다려오던 아나빔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아니었다면 메시아는 세상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⒍ 인사말에 담긴 축복의 의미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건넨 축복의 인사말은 히브리서 10장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마리아께서 잉태하신 아기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약속과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목자들로 말미암아 뒤틀려온 역사를 바로 잡으실 분이고,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가 되실 분이기 때문에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마리아께서 여인 중에 복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이나 속죄 제물 따위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시는 단 한 번의 제사로써 인류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서 인류를 거룩하게 하실 분이시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⒎ 샤를르 드 푸꼬의 영성

젊은 시절 출세를 지향하며 몹시 방황하던 샤를르 드 푸꼬는 뒤늦게 복음을 깨닫고 회개한 후에 이 방문의 신비에 주목하여 일생을 낮은 자리에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주목한 바는 그 때 마리아께서 홀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태중에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갔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처럼 푸꼬는 예수님을 알리기보다 모시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기보다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방문과 만남의 초점이 누가 누구를 만나는가 하는 인간관계에 있지 않고 그 관계가 모시고 있는 분에 대한 것이라고 푸꼬는 굳게 믿었습니다. 

 

⒏ 인간 관계와 만남에 대한 성찰

우리도 무수히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아갑니다. 모든 일이 만남에서 비롯되지요. 그런데 인간 관계도, 만남도 천차만별입니다. 지금은 시성을 앞두고 있는 복자 푸꼬 신부의 깨달음은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하나의 빛입니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인간 관계의 내용과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만남의 질에 대해서 눈을 돌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나, 우리가 입으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전하는 글 이전에, 우리네 삶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찰이 귀한 이유는, 이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내세우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네 삶을 보고 우리가 그분을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일, 이 대림 제4주일에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묵상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은 한국에서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뉴욕에서 운전하기 위해서는 필기시험, 실기시험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필기시험은 영어와 한국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3번 정도 문제를 풀어보았고, 대부분 예상 문제에서 출제가 되었습니다. 한국어로 된 예상 문제가 있어서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실기시험은 강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평행주차가 중요했고, 공식을 배웠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하는 습관은 버리고, 처음 운전을 배우는 마음으로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다행히 감독관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제게 강복을 청했고, 저는 감독관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실기시험을 보았고, 역시 한 번에 통과했습니다. 어느덧 뉴욕에서 면허를 따고 운전한지 2년이 되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의 기준인 성공, 명예, 권력은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는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지난 3주간 대림시기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림 제1주일의 주제는 ‘깨어있음’입니다. 신앙인은 두 가지 차원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물리적인 시간을 기준으로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 지구의 역사는 45억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가치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는 것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에서 시를 만들어 냅니다. 가수는 흘러가는 구름에서 노래를 만들어 냅니다. 화가는 흔들리는 꽃을 보며 그림을 그립니다.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깨어남입니다.

 

대림 제2주일의 주제는 ‘인간의 권리’입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로 정했습니다. 사람은 성별, 이념, 세대, 피부색, 계층으로 차별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 가장 헐벗은 이, 가장 아픈 이, 감옥에 갇힌 이에게 사랑을 주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질 것입니다.’원의 중심에서 원의 둘레는 모두 같은 거리에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지위도, 능력도, 업적도, 학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만, 욕심, 허영, 이기심이라는 언덕과 산을 깎아 내려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나눔, 헌신, 희생으로 골짜기를 채워야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이 되신 후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투사’였습니다. 교황님이 이민자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신 후, 이민자들의 무덤이었던 람페투사는 이민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대림 제3주일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또 다른 말은 ‘공감’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시는 이유는 바로 ‘죄, 악,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동방박사는 4명이었다고 합니다. 3명의 박사는 별을 따라서 길을 갔지만 4번째 박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강도를 당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가져간 보물을 팔아서 강도당한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헐벗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옷을 사 주었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물을 팔아서 옥에서 풀어주었습니다. 보물을 모두 팔아버린 4번째 박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예루살렘 언덕에서 4번째 박사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박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내가 강도당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 함께 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비록 아기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강도당한 이들에게서, 헐벗은 이들에게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서 이미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다면, 공감의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 4주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신비’를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는 것은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부족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별로 잘한 것도 없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모든 권능과 모든 권세를 가지진 분이 아주 연약한 아이의 모습으로 비천한 마구간에 태어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쁜 꽃이 그 고운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두운 땅속에서 끊임없이 양분과 물을 찾아 고생하는 뿌리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건강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기쁘게 생활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이렇게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우리를 사랑한 고마운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주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주어진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기쁘게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에도 분명 주님께서는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엘리사벳과 마리아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지...

 -양승국신부-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새삼 깨달은 바가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환대하고 배려하며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길고 지루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들 답답해하고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이 되어드리자는 각오로 찾아오시는 분들을 기쁘게 환대하고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이 힘든 분들을 위해 단 한 분이라도 기쁘게 버스터미널까지 픽업 서비스를 해드립니다. 맺힌 사연들, 그 어디서도 털어놓기 힘든 사연들 훌훌 털어놓으시도록 기꺼이 배려하고 동반해드립니다.

 

꽤나 무거웠던 짐들을 훌훌 털어놓고 환한 얼굴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바라보며, 이 천 년 전 아인카림에서의 환대 장면이 제 머릿속에 겹쳐졌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까지는 직선거리로 120Km, 그나마 걷기가 나은 요르단강 옆길을 따라 우회하면 160Km, 나귀를 타고 갔을 경우 적어도 사나흘,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여행길이었습니다.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였는데,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이영근신부-


대림 4주일입니다.

성탄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오실 분’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복음에서는 오시는 분이 어떻게 오시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오실 분’에 대한 네 가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미카 5,1)에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는 인간의 능력에 따라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에 따라 오신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해산하는 여인의 아기”(미카 5,2)로 태어날 것, 곧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셋째는 “목자로 나서리라.”(미카 5,3)는 것, 곧 그분께서 백성을 인도하고 먹여주고 보호해주고 안전하게 하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요, 넷째는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미카 5,4)는 것, 곧 그분께서는 평화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평화이신 당신을 건네 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2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시는 분’이 짐승의 피로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내놓으실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이요, 그것은 ‘당신의 뜻’이며 바로 그 뜻을 이루러 왔다고 말합니다.(히브 10,7)

 

오늘 복음은 제2독서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라는 말씀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곧 오늘 복음에서는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문장에 다 같이 들어있는 말은 “이루다”는 단어인데, 앞 문장에서는 능동형으로, 뒤 문장에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오시는 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안에서 그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며, 우리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이 당신의 뜻에 따라 일하시도록 수락하고 승복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주인이 되시어 일하시도록 허용해드리는 일이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뢰의 극치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느님의 뜻’을 확실하고 이해하고 명확하게 알고서 응답하려 합니다.

마치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알기만 한다면 그것에 응답할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마음이 불신에 가려졌거나, 그 뜻을 알아야 하는 자신을 앞세우거나, 자신이 그 뜻을 이루고 싶어서 ‘하느님의 뜻’의 불확실성을 탓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은 본질적으로 계시되어 있지만 동시에 신비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뜻’(마태 11,26; 루카 10,21)을 지니신 주님의 사랑과 호의에 의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있습니다.

영성 안내자로 살아가고 있는 존 캐버너가 자신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캘커타에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에, 수녀님께서 물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존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 되물었습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이 “확실하게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자 수녀님께서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수녀님께서 웃으며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느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길은 우리가 이끌려가게 될 곳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 목적지를 알려주거나 지도를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떠나라”라고 하셨고, 그는 아무 것도 확실한 것이 없지만 신뢰로 믿음의 길을 갔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좋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믿음의 길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의 동행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선한 뜻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었던 샤를르 푸코의 기도를 함께 드려 봅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 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의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제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은 제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알고 이해하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행할 때 실현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는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리아가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이나 바람을 이루어진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누구 다른 사람 없소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한없이 주고 싶어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구체적인 사랑을 체험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마리아라는 한 인간의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서 오셨습니다. 이 시간 믿음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탄 준비를 다 하셨습니까? 트리를 만들고 구유장식을 하였고, 카드를 보내고 선물 준비를 했다고 성탄준비가 끝났다고 할 수 있나요? 아직도 마음 안에 시기, 질투, 미움, 원한을 품은채로 이기적이고 자만심이 가득 찬 채로인데....그 안에 예수님께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을까요?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하느님의 일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했는데...희생, 봉사, 사랑의 실천에 소홀하였는데 어떻게 그 안에 주님께서 기쁘게 거처하실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외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보다 맑고 깨끗이 정돈된 마음,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마음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 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11,17)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번제물을 바치러 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아들 이사악이 “아버지! 불씨도 있고 장작도 있는데,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메어지는 물음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데 아들이 그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차마 ‘제물은 바로 너다’ 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번제물로 드릴 어린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신단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 자리에서 체험케 되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주님께서는 롯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천사들을 통해 그 가족들의 살길을 알려줍니다. 롯의 사위들은 그 소리를 우습게 여겼고, 천사들은 결국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잡고 성읍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말했습니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19,17). 마침내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퍼부어졌고 온 성읍들과 온 들판들이 땅 위에 자란 모든 것들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창세19,26). 돌아보지 말라고 했으면 돌아보지 말아야죠. 왜 돌아봅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께서 살려주신다고 길을 알려주었는데 그대로 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렸다고 원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자초한 것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민수기 21장4절 이하에는 구리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대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 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21,5) 그러자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것들이 백성들을 물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뱀을 치워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21,9) 그러나 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믿음은 그렇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대로 하는 사람은 새로 태어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 역시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산에 올랐다가 어둠을 맞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내려가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벼랑아래로 미끄러졌습니다. 가까스로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위에 누구 없소? 누가 날 좀 구해줘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를 구해주리라.” 젊은이는 이제 살았구나! 하며 “당신이 거기 계시니 정말 기쁩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네가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거라”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젊은이가 긴장하며 “그렇지만… 하느님..…” 주저하는 젊은이에게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는 나를 믿느냐?” 그러자 젊은이가 “예, 하느님, 당신을 믿습니다. 제가 당신을 믿기 때문에 매주 성당에도 나가고 성경공부도 하고 매일 기도시간도 가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어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젊은이가 아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기, 누구 다른 사람 없소?”

 

주님의 가르침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 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천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를 알면서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말하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뜻대로만 움직여야 합니다. 종에게는 주인에 대한 의무만 있을 뿐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을 자처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말한 대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에” 행복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은 성모님을 예수라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이기 때문에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예수님께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9)

 

믿음은 이리저리 계산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때 상상하지 못했고,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 행하지는 않으면서 능력을 먼저 보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 바를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2독서 히브리서 10장 9절의 말씀대로 “보십시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왔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 노력하는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주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주님의 탄생을 가져왔듯이 이제 우리의 믿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 예수님을 낳아드려야겠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만큼 우리 모두가 믿음의 사람,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가정이건 직장이건 어디에 서 있든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느 시골 마을에 스스로 자기자신을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그 아이도 선물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나만 못 받으면 왕따가 되는 데….” 그러다가 예수님께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앞으로 착한 아이가 될 테니 선물을 꼭 보내주세요!” 그렇지만 싸우거나, 거짓말을 안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쓰던 편지를 찢어 버리고 성당으로 갔습니다. 성당을 한참 돌아보다 작은 성모님상을 훔쳐 달아나서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 예수! 내 말을 잘 들어라. 협박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지금 내가 네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있다. 그러니 네 어머니를 살리고 싶거든 24시간 이내에 선물을 보내라.

선물을 보낼 장소는 000이다.”

 

우리는 때때로 믿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고 협박하고, 흥정하고 달라고 떼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11,24) 라고 말씀하시지만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이번 성탄의 아기예수님께 드리는 선물은 빛의 삶을 사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 되어 또 하나의 작은 예수님이 되십시오! @@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송영진신부-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간 것은,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리고 엘리사벳의 출산을 돕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에게 이루어진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에게 ‘어떤 인사’를 했을까?

아마도 엘리사벳의 임신을 축하한다는 말과 엘리사벳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사말과 함께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과 자신의 성령 잉태를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반응을 보면, 축하받는 사람의 일반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임신이 아니라, 성모님의 성령 잉태에 초점을 맞추어서

성모님이 받은 은총을 축하하고, 찬양합니다.

(그래서 성모님 입장에서는 축하하려고 갔다가 축하를 받게 된 상황입니다.)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태 안의 아기가 반응할 정도로, 엘리사벳이 큰 기쁨을 느꼈다는 것.)

엘리사벳의 기쁨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성령에 사로잡힌 로봇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선명하게 깨닫고, 믿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마도 엘리사벳은 ‘동정녀의 성령 잉태’ 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금방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큰 소리로 외쳤다.’ 라는 말도 엘리사벳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인들 가운데에서’ 라는 말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인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복을 온 인류에게 전달하는 통로로 선택되신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복되신 분인 이유는,

온 인류에게 구원이라는 복을 가져다주시는 메시아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 첫 번째 인물입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에는, 성모님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태중의 아기가 주님이시니까 성모님은 ‘주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큰 기쁨을 표현한 말입니다.

(‘주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방문해 주신 것에 대한 기쁨도 들어 있지만,

기쁨의 핵심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의 방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라는 말은 ‘복되십니다.’ 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이라는 말은,

성모님의 ‘믿음’과 ‘순종’과 ‘응답’을 모두 칭송하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메시아 강생과 메시아께서 하실 일에 관한 말씀들’(루카 1,31-33)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고,

천사가 전해 준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듣고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금방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루카 1,29).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순종했습니다.

사실 자신이 메시아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청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동정녀로서 성령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한다는 것도 알아듣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물론 성모님도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서 직접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순종과 응답은 놀라운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믿음은 순종과 응답으로 이어져야만 가치가 있습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고 생각으로만 믿는 것은,

즉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성모님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는 일을 한

‘첫 번째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은 ‘첫 번째 신앙인’이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지만,

신앙을 기준으로 하면 성모님 다음으로 ‘두 번째 신앙인’입니다.

두 어머니의 만남이 중요한 것은,

‘증언’과 ‘선포’가 그 만남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증인이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증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모르게 비밀리에 만난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에게 일어난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증언했습니다.

어쩌면 엘리사벳은 나중에 요셉이 성모님의 성령 잉태를 믿을 수 있도록

요셉을 도와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성모님도 엘리사벳의 임신이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고 증언해 주었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이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성모님에게 알려 주었는데(루카 1,36-37),

성모님은 그 말을 그대로 엘리사벳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 증언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효력이 살아 있는 증언이고,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해 주는 증언입니다.

따라서 두 어머니의 만남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함께 기뻐하자고 지금 우리를 부르는 초대장 같은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 다해

 -조욱현신부-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엘리사벳의 이 말은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의 느낌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의 전례는 깨어 기다림의 표본이 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복음 전 노래를 부른다. 이 마음의 자세는 새로운 강생의 기적이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필요한 자세이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태어나시지 못한다면 이 성탄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복음: 루카 1,39-45: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미가서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의 내용이다. 오늘 복음에는 마리아와 엘리사벳 모두가 아기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내용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태중에서 뛰었다는 것은 역사가 이미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서둘러 간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29절)은 나자렛에서 150km 이상 되는 예루살렘 서쪽 6km 지점에 있는 ‘아인카림’(Ain-Karim)이다. 마리아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이 컸었음을 말해 준다.

 

마리아가 걸음을 서둘러 길을 떠난 것은, “그 예언을 의심해서이거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이 불확실해서거나 그 증거에 대한 의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기뻤고 바로 그 내적인 기쁨에서 오는 열정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헌신적으로 수행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으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때문이다”(S. Ambrosius, In Lucam 2,19). 곧 해산하게 될 늙은 친척을 돕기 위한 이 먼 여행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강생을 통해 자기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보다 힘든 여정에 대한 완곡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41절)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마리아를 만났을 때는 이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인식하고 있었다(43절). 그리고 성서는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를 구약의 계약의 궤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벳은 자기 집으로 그 하느님의 현존이 옮겨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큰 소리로 마리아께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42절) 분이라고 찬양한다.

 

마리아가 이렇게 위대하게 된 것은 그녀의 신적인 모성(母性)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녀의 완전한 신앙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신앙으로 ‘계약의 궤’가 되었고 ‘주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여기서 엘리사벳은 최초로 축복의 인사를 한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아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언자를 거쳐 마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러 내려온 이 신앙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 하느님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하신 대로’(루카 1,38)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그분께 온전히 맡겨드림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알고 또 그렇게 실천하여야 한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보다도 더 온전히 당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바치시기까지 하셨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뜻을 항구히 아버지께 봉헌함으로써 가장 이상적인 희생을 실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브 10,10). 주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이 희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곧 다가오는 성탄의 축제를 통해 거행하게 될 강생의 신비는 근본적으로 파스카 신비에 정향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로부터 받은 육은 성금요일의 희생적 봉헌을 위한 것이며, 부활 날 다시금 그 몸을 둘러싸게 될 영광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마치 엘리사벳이 한 것처럼 마리아도 받아들이게 된다. 마리아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즉 ‘길을 떠나 서둘러’(루카 1,39) 이웃으로 향할 수 있을 때, 비록 그 여정이 험하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 즉 사랑을 낳아줄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또한 십자가의 신비와 파스카의 기쁨도 아울러 충만히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쁨 때문에 우리는 더욱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릴 수 있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리아께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아 주실 수 있었던 그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그 삶을 본받아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한상우신부-


하얀
눈꽃송이
피어난
사랑의
새아침이다.

생명조차
아깝지 않은
사랑이 있다.

삶의 전부가
되시는 사랑이
있다.

소중하고
귀한 것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대림이다.

마리아는
여인에서
어머니로
탄생한다.

어머니의 탄생은
자식을 향한
최우선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삶의 탄생이다.

언제나
기쁜 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신다.

어머니가
계시기에
자식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전부가
사랑이라는 것을
또 다시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은총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드러난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의
세월을 통하여
어머니를
빚어 만드셨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계시기에 삶은
기쁨이 된다.

그 사랑을
본받는
행복한
시간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머니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하시는
말씀 그리고
사랑이 있음을
믿는다.

사랑은
말씀을 믿는
사랑의 대화로
익어간다.

말씀을 믿는
그 가운데에
어머니가 있고
탄생이 있다.

탄생!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
이루어지는
믿음의 시작이다.

마리아를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 탄생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고 사랑이
되신다.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있다.

끝내
이루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내뜻이 아닐 때 하느님 뜻이라고 믿는

 -김찬선신부-


대림 제4주일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상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두 분은 친척간인데 하나는 늙은이이고 하나는 아가씨입니다.

너무나 대조되는 이 두 분의 공통점은 애를 낳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고

그런데 지금 애를 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분의 상봉을 상상하면 저는 웃음이 나옵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뒤늦게 임신하여 벌써 여섯 달이 되었고

마리아가 찾아올 때는 배가 제법 불러와 배를 내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엘리사벳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많이 부끄러웠거나 적어도 겸연쩍었을 것입니다.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이지 애를 배고 있으니 말입니다.

 

옛날에는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가 며느리와 같이 애를 낳았는데

그때 시어머니는 너무 부끄러워 애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며느리가 도련님 젖까지 먹이곤 하였지요.

 

저의 누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날 저의 누나한테 전화가 왔는데

"나 임신했어. 어떻게 하지?"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저는 "그래 신부한테 물으면 애 떼라고 얘기하겠어?"하고

저는 매몰차게 잘라 말하였습니다.

 

저의 누나는 자신이 부끄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 아이가 태어나 할머니 같은 엄마를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그 때문에 잘못되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고

부모가 일찍 죽어 아이가 고아가 되면 어떻게 될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이 아이가 임신된 것을 보면 하느님의 뜻이야.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누나의 실수인 것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누나의 실수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 아이를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야.

그러니 태어날 아기는 누나의 아이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이야.

하느님의 아이를 누나가 어찌하면 안 되지.

하느님의 아이니까 이제 내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줄 거야."

 

이렇게 얘기하고는 제가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은 세속명도 요한이고 세례명도 요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오는 경험을 많이 합니다.

그때 우리는 뭐가 잘못돼서,

또는 내가 무엇을 잘못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봐야 하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인간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임신을 한 분들이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임신을 한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분의 임신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에 의한 임신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령으로 가득 차 우리가 매일 바치는 성모송을 기쁨에 넘쳐 부르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성모를 칭송합니다.

 

그러나 이런 칭송은 성모 마리아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벳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분이고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도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분들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싫고 두렵지만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성령이 임하고

그 성령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