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루카 7,24-30)
“What did you go out to the desert to see ?
a reed swayed by the wind?
Then what did you go out to see?
Someone dressed in fine garmen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엾이 여기시어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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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네가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면서 의지가 없어서 우울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정신의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보려는 노력이 자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어둠 속에만 머물려는 유혹은 생각보다 큽니다. 그 유혹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주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주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실행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그들보다 훌륭하며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영광은 복음에 따라 사는 이들의 영광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드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을 예언자로, 예언자보다 위에 있는 인물로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율법에 따른 의로움에서 그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이며,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온갖 축복과 선물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나누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믿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의지를 세워서 보려고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도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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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구상 시인의 ‘꽃자리’라는 시입니다. 내 환경이, 조건이 모두 엉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이 나를 피하지 않고 다가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 앉은 자리가 꽃자리였습니다. 지금의 힘듦을 스스로 극복해낼 때 보이는 나의 자리였습니다.
나의 자리인 꽃자리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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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보다 먼저 등대를 찾아야 하는 이유: 예수님보다 세례자 요한>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마지막 부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세례자 요한을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시어 사람들이 그분께로 오는 길을 닦게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침묵’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침묵’이 됩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침묵시키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노력하면 침묵할 수 있다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출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김상운, 21세기 북스]
이는 김상운 씨가 방송일을 할 때 실제 접했던 사건이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아가 우리에게 한없이 떠들며 두려움을 주는데도 그 목소리를 잠재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뱀에게 계속 물립니다. 뱀의 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자아의 목소리를 끊으려고 노력하면 끊어질까요? 만약 그랬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환경학 최고의 고전이라 불리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파괴되는 야생생물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공개했습니다. 침묵의 봄은 살충제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새들이 사라져 봄이 되었는데도 새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인 제목입니다.
사이언스지에 따르면 최근 50년간 북미에서만 새들이 32억 마리가 감소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이 인간 때문인데, 인간으로 인한 온난화로 서식지가 파괴되고 먹이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살충제로 새들의 먹이인 곤충을 사정없이 죽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뿌린 살충제들이 조금씩 축적되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귀찮은 벌레들을 죽이기 위해 쓴 살충제가 인간에게 해롭지 않은 줄 알았지만 결국 피해는 인간 자신이 본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를 괴롭히는 곤충들이 있습니다. 그 곤충들을 내 힘으로 죽이면 괴롭힘도 없고 새들도 지저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도 죽습니다. 사실 나는 자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아를 죽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평온했을 때가 있습니다. 아빠 엄마 품에 안겨있을 때입니다. 이는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가 정착할 항구가 있느냐, 없느냐와 같습니다. 언제든 돌아갈 항구가 있는 배는 바다에서도 고요합니다.
그러나 표류하는 배라면 생존을 위해 매우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면 항구 없는 배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영원한 항구는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죽음 뒤는 책임져줄 수 없는 불완전한 간이역이 부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저를 침묵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면 잡념이 사라져서 잠도 잘 오고 다음 날도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랐지만,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자신을 보며 주님께서 더 울고 계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버린 부모까지도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 항구를 알려주는 등대인 세례자 요한이 필요한 것입니다. 김희아 씨에게는 구세군 보육원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적이 있는데, 한 수녀님이 유학 와서 첫 해를 공부하고 너무 힘들어 되돌아가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뜻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일주일 동안 알프스의 산자락에 있는 지인의 집에 머물며 ‘에델바이스’를 보게 해 주시면 한 해 더 해보고 아니면 돌아오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알프스를 걸으며 에델바이스만 찾았습니다.
그러나 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떠나기 전날 밤에 다음 날 출발하기 위해 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인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녀님, 저기 봐봐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수녀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알프스산 꼭대기에 둥그렇게 구름이 걷혀 별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아, 에델바이스가 알프스의 별이란 뜻이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며 주님께서 응답해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부부터 시작하여 석사까지 모두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요해질 수 없습니다. 수녀님이 알프스로 가서 산행할 때 침묵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로 초대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스케일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광야로 불러내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까지가 세례자 요한의 역할입니다. 마치 바다의 등대와 같습니다. 항구를 찾지 못한 배는 평화가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항구로 이끌어 참 평화를 줍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만나 항구에 머무는 사람은 또 누군가의 등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등대를 통해 항구를 발견하면 ‘감사’로 그 항구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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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파란 감이 가을이 깊어 빨갛게 되면 늙어간다고 하지 않고 익어간다고 합니다. 잘 익은 감은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늙어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익어간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는 것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던 시메온과 한나는 신앙인으로 잘 익어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대사제들과 헤로데는 추하게 늙어갔습니다. 예전에 선배 사제들과 모임을 가질 때입니다. 젊은 사제였던 저는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무척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사제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아침이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사제로서 잘 익어가셨습니다. 어느덧 저도 다음 날 아침미사를 생각하며 일찍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의 눈에 잘 익어가는 사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시골 고모부 댁으로 갔습니다. 고모부는 사촌들을 부를 때면 ‘세례명’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이름도 있지만 세례명이 ‘본명(本名)’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명으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친척 어르신들도 제게 ‘본명’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저는 늘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에 오면 3가지 이름을 가지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서 부르던 이름, 미국에서 정한 이름, 그리고 세례명이 있습니다. 이중에 본명은 ‘세례명’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2년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준비합니다. 21세기의 교회는 많은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각 지역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합니다. 예전 공소의 모습으로 돌아 갈 수 있다면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은 해결 될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인 본명을 불렀습니다. 주일에는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본당까지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신앙의 단순함을 회복하는 것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지름 길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광야로 나갔습니까?’ 재물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 있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예언자를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것들을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 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구름 뒤에 비추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이 바라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낮은 자세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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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력과 상상력의 힘, 구원과 희망
-이기우신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구분하는 개념 중에 차원이 있습니다. 차원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점과 선과 면입니다. 점이 움직이면 선이 되어 1차원 현실을 이룹니다. 또 선이 움직이면 면이 되어서 2차원 현실을 이루고, 다시 면이 움직이면 입체를 이루게 되어 3차원 현실을 이룹니다. 대개 여기까지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입체가 움직이면 4차원이 되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시간의 현실이 이때 펼쳐집니다. 이 4차원에서 과거와 미래의 일을 현재로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데 과거에 있었던 입체적인 현실을 끌어오는 힘을 기억력이라 하고, 미래에 있을 입체적인 일을 끌어오는 힘을 상상력이라 합니다.
먹고 살아가는 일에 매달리다 보면 현재 당면한 현실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난 과거도 돌아볼 겨를이 없고 다가올 미래를 내다볼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런 소시민들에게 예언자는 기억력을 통해서 과거를 상기시키고 상상력을 통해서는 미래를 보여줍니다. 실로 이 기억력과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을 사람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차원과 소통하게 해 주는 정신적인 힘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역사상 가장 절망적이었던 과거의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앞으로 메시아께서 오실 미래는 행복하리라는 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활약한 기억을 더듬어 그를 가장 훌륭한 예언자로 인정하시는 한편 그보다 한층 더 차원 높은 현실에 대한 상상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즉, 요한은 유배에서 돌아온지 4백 년 동안이나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 모처럼 나타난 예언자였습니다. 군중이 알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시면서 그가 이사야를 비롯한 이전의 어느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한 인물임을 일깨워 주시면서도, 바야흐로 당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는 군중에게 그 기억보다 더 차원 높은 미래의 현실임을 상상하도록 시야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8).
당시의 군중은 요한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고 예수의 참 모습도 알아보지 못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예수 부활로 예수에 대한 기억이 새로워졌고, 성령 강림으로 교회에 대한 상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기억력이 체계화되면 역사의식이 되고, 상상력이 성숙하면 사명의식이 됩니다. 오묘한 섭리로 신앙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오랜 박해를 견디며 신앙을 증거하도록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를 지켜주신 지난 과거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의 오랜 역사에서 일어난 참으로 기적적인 현상임을 알아보는 역사의식을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이제껏 갈라져 있는 민족을 복음화시켜서 아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 미래에 대해서는 사명의식을 견지할 필요도 생겨나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땅에 신앙 진리를 들여오고 백 년 박해 속에서도 그 진리를 증거하고 전해주신 신앙 선조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이 진리로써 우리 민족과 아시아인들에게 전할 하느님 나라의 미래 현실은 훨씬 더 찬란하리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역사의식과 사명의식을 갖출 수 있는 교회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역사의식, 선교적인 사명의식을 갖추면 우리 현실을 단지 입체적으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훨씬 더 차원 높은 현실을 앞당겨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대림의 영성이요, 지금은 민족의 대림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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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라는 질문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성취를 통해 당신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 예언자냐?
그렇다.”
(루카 7,24-26)
이는 그는 “예언자”라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밝히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그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루카 7,26-27)
이는 그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메시아에 앞서 와서 길을 닦으러 온 사자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후에 산에서 내려왔을 때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루카 7,28)
이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주지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구약의 한계에 속한 인물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이’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쌀쌀한 찬 겨울, 우리는 대림을 지내면서 어디에 나와 있는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광야에 나와 있는지, 왕궁에 나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러 나와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나와 있는지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만나고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무엇을 찾고 누구를 보았는지 말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지, 헐벗은 옷을 걸친 예언자인지, 혹은 세상에서 큰 자인지, 하느님 나라의 작은 자인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루카 7,24)
주님!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끌려 나아갑니다.
오시기에, 오시는 임에 끌려 나아갑니다.
떠나야 당신을 만날 수 있기에, 힘껏 저 자신을 박차고 떠나갑니다.
의심도 흔들림도 화려함도 껍데기도 벗어버리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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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
-반영억신부-
예수님과 젊은이 3명이 달리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한발 앞선 사람이 있고, 동시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고, 한발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칭찬받을 사람일까요? 모두가 다 칭찬받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앞길을 닦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며,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각기 역할이 다양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또 인정받고 산다는 것은 즐겁고 뿌듯한 일입니다. 더더욱 사랑받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른 이를 위로해 줄 수 있고, 인정해 주며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이 큰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고(마태21,26),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기 될 것이라고 예언한바 있습니다(루카1,76-78).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3,16-17).하며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7,28).고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얼마나 헌신 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이요, 선택된 사람이었으니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몽땅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7,28).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 진다해도 그는 결국 오실 ‘가장 작은 이’,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하게 오셨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위로해 주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눈에 드는 삶이 중요합니다. 많이 사랑받기보다 많이 많이 사랑하는 오늘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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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
-송영진신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4-27)”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속 풍조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
또는 세속의 처세술에 능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라는 말씀은, “처세술 같은 것이나 배우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즉 “하느님 말씀은 세속의 처세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은 구원을 위한 말씀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자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헤로데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세례자 요한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고운 옷을 입은 사람,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세속적으로 성공해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라는 말씀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왕궁으로 가면 된다.”,
즉 “세속의 부귀영화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은 외면하고 세속의 부귀영화만 추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간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전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도록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은 ‘위대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이 한 일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자들이 하지 못했던 일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아의 일과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일입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이 말씀은 당신이 곧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신성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8-30).”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메시아와 함께 살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의 수는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5).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몇이나 ‘참된 회개’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도(요한 3,17)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라는 말씀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였다.’는 ‘믿었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요한의 증언과 인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은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차별 당하는 사람도 없고,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위선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고, 회개하면 받게 될 구원도 거부한 것입니다.)
회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또 구원받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이 은총일 수는 없습니다.
은총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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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7,24-30: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하신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몰려갔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절) 물으신다. 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불모지 광야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의 무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들리는 갈대란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흔들리는 생각을 하는 인물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여자와 같은 사람, 비단옷을 입은 왕궁의 궁인들과 같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러 건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요한 세례자였다. 이 요한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신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26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절) 하신다. 어떻게 요한은 모든 예언자보다 큰 인물일 수 있을까? 예수님도 예언자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신명 18, 15.18)이라 말하고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사도 3,23)이라고 한 그 예언자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자기와 태생 조건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본성이 다른 분과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느님과 인간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을 하느님과 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그들이 보러 나간 것은 예언자이며 성인이다.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라고 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에 앞서 올 분이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28절) 어째서 그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세례자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더는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여인의 자식의 차이이다.
지금 내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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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주님의 아내가 되는
-김찬선신부-
"너를 만드신 분이 너의 남편, 그 이름 만군의 주님이시다.
정녕 주님께서는 너를 소박맞아 마음 아파하는 아내인 양
퇴박맞은 젊은 시절의 아내인 양 다시 부르신다."
지금까지 지나쳐 읽던 구절이 오늘 눈에 들어왔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의 남편이라는 것,
이스라엘이 한 때 소박맞았지만 본래 주님의 아내였고
그래서 이제 다시 부르실 거라는 구절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우리도 감히 주님의 아내라는 생각,
주님의 아내로서 주님의 자녀들을 많이 낳을 생각을 해야겠습니다.
우선 우리도 주님의 아내라는 정체성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 있지만
다른 잡놈의 아내가 아니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노예는 하느님의 자녀를 낳을 수 없고,
다른 잡놈의 아내여도 하느님의 자녀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때 다른 잡놈과 놀아나다가 주님으로부터 소박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다시 당신 아내로 부르시겠다고 하시니
다시 신분 회복이 되면 우리는 이제 주님의 자녀를 낳는 아내,
왕성하게 임신과 출산을 하는 아내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내요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라는 부르심을
이 대림절에 받고 성탄 때는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을 낳는 사람이 되라는 초대를 받은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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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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