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마태오 1,1-17)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Jacob the father of Joseph, the husband of Mary.
Of her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the Chr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자 아들들을 불러, 유다에게서 훗날 왕권을 차지할 후손이 생길 것이라고 말한다(제1독서). 신약 성경의 첫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예고된 메시아이심을 말하려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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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매년 총고해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러 신부님이 오셔서 신학생들의 고해를 들어주셨지요. 끝기도가 끝나고 성찰을 한 뒤에 저 역시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고해소로 향했습니다. 고해소마다 신학생들의 줄이 길게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고해소는 어떤 신학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됐다.’라는 생각을 하며 이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곧바로 왜 신학생들이 이 고해소에 들어오지 않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자마자 한참을 혼났습니다. 고해를 하자, 제대로 성찰하지 않았다면서 결국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들은 이 신부님이 고해소에서 어떻게 성사 주시는지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고해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매우 속상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미움의 감정이 잘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저 역시 신부가 되면서 오히려 이 신부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절대로 고해소에서 화를 내지 않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는지를 기도하면서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는 갑곶성지에서는 미사 전에 1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줍니다. 미워하고 원망했던 그 신부님이 오히려 저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켜 준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는 말로 시작하는 ‘족보’는 우리 방식으로 번역된 말이고, 본뜻은 출생 내력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출생 내력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명칭은 구세주 메시야의 대명사적 호칭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구약성경 사상이고 예수님은 인류를 대표하여 인류 전체의 운명을 한 몸에 책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족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하느님의 약속은 견디기 어려운 기나긴 밤이 지나고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왔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족보 속에는 이방인 또는 죄인으로 이름난 여인 넷이 끼어 있습니다(타마르,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예수님께서는 완전무결한 혈통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죄와 이방인의 피를 받아 태어나셨습니다. 죄인을 구하러 오시기 위해 똑같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들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뜻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족보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그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충분히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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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먹을 게 없던 시절,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아는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는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목에 칼을 차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자신이 되려는 그 무엇은 그저 운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하나하나 이겨냈을 때 얻는 훈장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남탓, 운 없음을 탓하기보다는 성실하지 못해 변화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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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모든 기억을 감사의 역사로 바꿔야 하는 이유: 현재의 감사를 알아보기 위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의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족보는 이렇게 결론맺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6-17)
루카 복음에도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오 복음처럼 정확히 십사 대씩 자르지는 않습니다. 족보를 십사 대씩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족보 안에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이 들어있음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계속 인류구원을 위해 역사 속에서 섭리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과정은 분명 죄와 벌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나 결과는 ‘그리스도’라는 축복으로 끝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과거가 온통 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현재를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웨이 프롬 허’(2006)는 ‘기억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그랜트와 피오나는 결혼한 지 44년이 된 행복한 노부부입니다. 그러나 피오나가 치매에 걸려 프라이팬을 냉장고에 넣고 글 읽는 법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편의 짐이 될 것으로 생각한 피오나는 스스로 요양원에 머물기를 고집합니다. 그랜트는 차마 아내를 떠나보낼 수 없어 주저하지만, 급기야 그녀가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요양원에 가는 것에 동의합니다.
요양원 적응 법규상 한 달은 누구의 면회나 전화 통화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한 달 뒤 피오나를 만난다는 설렘에 요양원을 방문하지만, 피오나는 왠지 그랜트를 대하는 것이 시큰둥합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남편을 잊은 채 오브리라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랜트는 매일 방문하여 피오나에게 자신이 남편임을 기억하게 하려 하지만 피오나는 자신의 얼굴을 그려주는 오브리에게 더 큰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당신의 남편인 것을 잊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오브리의 어떤 면이 좋냐는 그랜트의 질문에 피오나는 말합니다.
“그 사람은 나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아요. 전혀.”
그랜트와 마찬가지로 오브리의 아내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갑니다. 오브리와 피오나는 부둥켜안고 슬퍼합니다.
피오나는 그랜트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려달라고 합니다. 집은 요양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급격히 쇠약해져 갑니다. 그랜트는 아내의 슬픔을 덜어주려 다시 오브리를 데려오려 고군분투합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랜트가 오브리를 그녀 앞으로 데려오는 순간, 피오나의 기억 하나가 깜빡이며 남편을 알아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날 버릴 수도 있었는데, 지켜주어서 고마워요….”
사실 이 장면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피오나에게 정말 기억이 돌아온 것인지, 그동안 그냥 오브리가 좋아서 그랜트와의 기억을 잊은 것처럼 연기한 것인지.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오브리가 아니라 그랜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하는 표정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은 과거에 사랑했던 기억을 하지 못하면 나이가 들어도 다시 육정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좋은 기억이 없어도 김희아 씨처럼 모든 기억을 감사한 하느님 섭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작업도 묵상기도에서 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기억을 감사로 바꾸지 않으면 현재를 살 수 없습니다. 과거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현재에 머무시는데 항상 과거에만 머물면 주님을 만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도 영화 ‘가지니’(2008)는 한 남자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애인이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도 머리를 크게 다친 산제이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산제이는 머리를 심하게 다쳐 15분 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집니다. 다만 복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온몸에 새겨넣어 잊지 않으려 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이름과 어떤 사람인지를 적어놓습니다.
현재를 포기하고 자꾸 과거에만 머물려 하는 산제이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과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 섭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그 큰 상처들을 어떻게 감사로 바꿀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과거가 모두 감사가 되지 않으면 자신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도 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항상 지금-여기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 때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나를 과거에 묶어놓은 기억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감사로 바꾸는 작업부터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과거에 분명 세상눈으로 안 좋은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제가 지금 사제생활을 하는데 큰 재산이 됩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마지막 피정을 할 때였습니다. 저는 피정 내내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으면 표징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일주일 넘게 그런 표징을 바랐지만, 주님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과거에서부터 저를 부르고 계셨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피정 마지막 날도 종일 혼자 산에서 묵상하다가 저녁 식사에 맞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앙상하게 죽은 작은 나무에 나뭇잎 하나만 간신히 달린 모습이 보였습니다. 왜인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 생각도 나며 그 밑을 지나칠 즈음에 그 마지막 잎새가 제 바로 앞으로 툭 하며 휘날리듯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나뭇잎 주위로 시간과 공간이 흡수되는 듯 하며 소름 같은 것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였습니다.
“너는 행복이란 것으로 할머니의 죽음 때부터 너를 부른 줄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네가 사제가 되기 직전에 그런 청을 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네 앞에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게 함으로 난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너를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바로 네가 지나갈 이 자리에, 그리고 이 시간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도록 이 나무가 심어지고 그 잎에 떨어지도록 한 것이다.”
말로는 설명해도 그 느낌을 다 전달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저는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믿었고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그런 사건 속에서도 내가 침묵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있다면 주님은 반드시 만나주시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방향을 헛갈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과거의 기억들을 감사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현재에 서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후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기억을 감사와 찬미로 바꾸고 지금 여기에 계신 주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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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해 생각합니다. 정규직은 내년에도 일 할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됩니다. 회사의 성과급에도 해당이 되고, 명절이면 선물도 지급됩니다. 비정규직, 계약직은 내년에도 일 할 수 있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다시 계약을 하지 않으면 능력이 있어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성과급에서도 제외되고, 명절의 선물도 못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지난 30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내년에는 미사를 못 드릴까 걱정한 적은 없었습니다. 아파서 병원에 갈 때도 교회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 뉴욕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운영할 수 있는 것도 서울대교구라는 교회조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분들이 내년에도 걱정 없이 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태양이 모든 곳을 골고루 비추듯이 주님 성탄의 기쁨도 모두에게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장그래는 물건을 팔아 오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시장에서 양말과 팬티를 싸게 사서 팔기로 합니다. 잘 아는 선배에게 물건을 팔려하지만 선배는 거절합니다. 술을 사 줄 수도 있고, 시간을 내 줄 수도 있지만 양말과 팬티는 사 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필요 없는 물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일했던 기원에 가서 양말과 팬티를 팔려고 합니다. 그러자 기원의 원장님이 거절합니다. 가족 같기 때문에 양말과 팬티를 사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회사에서 바라는 바가 아닐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었던 선배에게도 거절당했고, 가족 같았던 기원에서도 거절당한 주인공은 사우나 앞에서 자리를 깔았습니다. 사우나에 오는 사람들은 양말과 팬티를 필요로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사우나에 오는 손님들은 젊은 사원이 소리 내며 양말과 팬티를 파는 것을 보고 격려도 하고, 사주었습니다. 양말과 팬티는 지하철에서는 팔리지 않았습니다. 거리에서도 팔리지 않았습니다. 양말과 팬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우나 앞에서는 팔렸습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곳은 화려한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금수저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거처할 방이 없어서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목동들이 양을 돌보는 베들레헴의 들판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대사제가 아닌,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경에는 권력, 명예, 성공, 능력, 업적이라는 병풍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처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던 목수 요셉이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여행을 마쳤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흙수저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곁에 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죄를 지어서 돌에 맞을 뻔 했던 여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루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상처일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삶의 마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성탄은 그저,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탄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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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어린 시절 성경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약성경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창세기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어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읽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럼 짧은 신약 성경을 먼저 읽어야지, 하면서 마태오 복음서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이번에는 발음하기도 힘들고, 생소한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는데..,아무튼 어린 제게 성경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통상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탁월한 업적이나 고귀한 인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의 약점이나 흑역사는 가리기 마련입니다. 자녀나 후학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수치스러운 인물들, 가문에 누를 끼친 인물들은 적당적당히 감추거나 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십시오. 위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불의하게 결합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문과 전통,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유다 역사 안에 그녀들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사가는 적절치 못함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족보에 넣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한 인간 본성을 정화하기 위하여 그 본성과 혈연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병든 인간 본성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 본성을 위로 들어 높이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타마르, 밧세바 외에도 족보에 등장하는 특별한 여인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서 보하즈를 낳고” 바로 라합입니다. 예리코의 임금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낸 정탐꾼과 사절을 죽이려고 했을 때, 라합은 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주었습니다.
한때 라합은 유흥업에 종사하던 이방인 여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스라엘의 딸이 되었습니다. 자기 겨레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했고, 충실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던 살몬과 혼인합니다.
한때 우상숭배와 타락한 생활로 바닥살이를 전전했으나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지체가 높아지고, 아리따운 시온의 딸로 변화된 라합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표상입니다. 거룩한 창녀!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구중궁궐 까마득히 높은 옥좌에 좌정해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처투성이인 꼬질꼬질한 우리네 인생사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자리 잡고 계십니다.
비록 오늘 부끄럽게 살아가지만 거룩한 갈망을 지닌 채, 어떻게 해서든 거듭나보려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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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할 몫
-반영억신부-
집안에 있는 족보를 보면서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져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한때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는 어떤 관계냐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유엔 반씨'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윗동네 사시는 어른이었지만 저는 잘모릅니다. 그래도 훌륭한 분이 가문에 계시니 자랑거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산다 해도 내가 잘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분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분명 다릅니다. 누가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가문을 자랑하기보다 내가 좋은 가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훌륭한 가문이라는 우리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 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를 위한 당신의 구원의지를 보여주십니다.
이제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10,20).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살아야 할 몫이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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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조욱현신부-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육에 따라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남아 계시면서, 하느님이시기를 그치지 않으신 채로 사람이 되셨다. 마태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음을 밝히고 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전투에서 뛰어났고 힘이 넘쳤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낳으셨지만, 요셉을 마리아와의 혼인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이유로 마리아와의 혼인관계를 파기하지 않았다. 또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이다. 아들을 입양했어도,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은 아니라도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에,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따라서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맞이하러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이 시기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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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한상우신부-
시작과
완성 사이에
우리가 있다.
족보의
마디마디를
거슬러
올라가면
뜨겁게
만나게되는
한 처음의
하느님이시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재창조 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숨결
모든 사랑에는
가장 좋은
은총의 사연들이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고
변화였어도
바뀌지 않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다시 묻게된다.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
우리가
살고 있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에게서
멀리있지 않다.
하느님의 빛이
사람의 마을로
내려오신다.
때가 무르익듯
때맞춰
하느님께서
우리들 안에
탄생하신다.
하느님의 구원은
때를 놓치신
적이 없다.
이와같이
사랑의 역사는
강생과 육화로
멈춤이 없이
사랑으로
흐르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하느님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잡아야 할
삶이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우리들
삶이 된다.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시간이란 없다.
아파하며
우리가 걸어온
그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하느님의
탄생으로
모든 시간과
모든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닌
가장 알맞은
은총이 된다.
저의 과거
저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시작과 완성을
이어주는
예수님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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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12월 17일-앞으로 남은 한주일에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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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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