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8일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제1독서).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고, 요셉도 이에 순명하여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버는 사람과 만 원을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백만 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의 행복을 얻는 사람과 한 푼도 쓰지 않고서 한 달 이상의 행복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영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 연구가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감사의 인사하기,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불필요한 소비재 사지 않기, 친절 베풀기, 밝게 웃어주기 등등….
돈 들이지 않고 행복할 방법이 참 많습니다. 소위 ‘명품’이란 이름이 붙은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명품’이 될 때, 행복도 오래 지속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오지요. 하지만 그의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서 마리아가 곤욕을 보는 역경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22)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간음한 여자’로 신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명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에 기초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2.jpg)
보석감정사가 되기를 원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보석의 달인을 찾아가 비법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보석감정사는 거절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진득함과 끈기가 없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자신은 다르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보석감정사는 한 번 기회를 주겠다며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잡아 주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습니다. 온종일 다이아몬드만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렇게 일주일 동안 다이아몬드를 손에 쥐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묻습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저는 언제부터 배울 수 있습니까?”
“곧 배우게 될 거야.”
열흘째, 청년은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으면 집어 던지고 포기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석감정사는 오늘도 손바닥에 다이아몬드를 올려놓는 것이 아닙니까? 청년은 화가 나서 다이아몬드를 집어 던지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어제까지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잖아요.”
보석감정사는 웃으며 말합니다.
“이제야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군!”
기다림의 중요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섣부른 판단보다는 확실한 결과를 위한 기다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https://blog.kakaocdn.net/dn/czxPz1/btqQZxs9bnZ/J23mFn0UOV0oKcs5Md6HZk/img.jpg)
소리기도와 관상기도 사이에서의 묵상기도의 역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말하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 말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임마누엘’과 연결합니다(이사 7,14 참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함께 계셔주심은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바꾸려 한다면 나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칫 이것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키프로스의 조각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의 문란한 모습을 보고 여인과의 사랑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순결한 여성을 만들기를 원했고 상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로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면을 갖춘 여인이라 믿으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키스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으며 비싼 옷과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을 아내라 불렀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위한 축제의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아프로디테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상아로 만든 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키스하자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훗날 파포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사랑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조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랑 이야기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인간이 된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혼자 남겨두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계속 눈앞에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잠시 떠나있으며 인간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한계는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육체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감독이 여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제프 폰 스턴버그’ 감독과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관계입니다.
스턴버그 감독은 당시 무명 배우였던 디트리히를 과감하게 ‘푸른 천사’의 롤라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디트리히를 완벽하게 스타로 재탄생시킵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를 할리우드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시킵니다.
우선 몸무게를 13kg이나 빼게 했고 이를 뽑아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눈썹을 잡아당겨 높게 하고 코에 명암을 주어 콧방울이 좁아 보이도록 했으며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도 손수 골라서 입혔습니다. 스턴버그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디트리히의 얼굴만 있으면 숨 막히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오래갔을까요? 그나마 오래갔습니다. 둘은 8년을 연애했습니다. 문제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스턴버그의 소유욕과 집착이 둘의 관계를 파경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훗날 디트리히는 “그는 나를 자기의 갈라테이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버그는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감독으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닉 부이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깊이 생각하며 내린 결정은 나중에 거의 바뀔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묵상하여 주님을 자의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이 더 증가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감소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일찍 그 관계를 접는 게 낫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참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kGlZb/btqQLk9XeuV/PLoxdwj4IhavjF6aNKLW0K/img.jpg)
◈ 메시아 파견을 위한 하느님의 개입 작전
-이기우신부-
죄악에 물들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메시아를 보내시는 데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의 두 차원에서 입체적이면서도 치밀하게 일하셨습니다. 우선 신성의 차원에서는 성자를 메시아로 보내시고자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잉태시켜 인간으로 탄생하게 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써 성자의 강생과 부활로 인류를 새로이 창조하시려는 구원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또한 인성의 차원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서 아브라함과 야곱, 유다와 다윗,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씀하심으로써(히브 1,1) 하느님께서 마귀의 방해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 주시고 ‘아나빔’으로 불리운 소수의 백성들이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시키셨습니다. 메시아의 강생과 부활이라는 구원계획이 신성 차원에서 세워졌다면,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해 주시리라는 아나빔들의 믿음과 이 구원을 이루시러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가 인성 차원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두 번에 걸친 하느님의 개입이 필요했습니다.
우선 나자렛에서 요셉과 마리아를 함께 이웃으로 살게 하시어 만나게 하시고는 지켜보셨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은 이웃에 살던 마리아의 믿음과 성품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혼기를 미루어가며 마리아의 혼기가 차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성년이 되었을 때 청혼한 요셉은 마리아의 동의를 얻자 1년 후에 혼인하기로 유다교의 의식을 통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혼식이 끝나기를 기다리신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시어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하여 출산시키려는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며 천사는 마리아에게 동의를 구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 정식 혼인을 하기 전인 동정의 몸으로 잉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지 않았지만, 이미 어려서부터 기다려온 메시아였기 때문에 그분을 잉태하리라는 천사의 전갈을 믿고 순명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자마자 사촌 언니인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떠났습니다.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한지 여섯 달이나 되었다는 천사의 전갈이 사실인지 확인하고도 싶었을 것이고, 또 출산이 임박하면 도울 일도 있을 것 같아서였겠지만, 무엇보다 동정 잉태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당장에는 부모나 약혼자에게 알릴 자신이 도저히 없기도 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낸 후 돌아오자 마리아는 이미 임신 3개월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도 요셉도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고, 아마 마을 사람들에게도 이 소문이 돌았을 것입니다. 마리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였습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되자 몹시 괴로웠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장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불길한 예감은, 만약 자신이 이 사실을 회당장에게 고발하게 되면 마리아의 신변에 닥칠 수도 있는 끔찍한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한 끝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의 의로운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게 되면 하느님의 메시아 파견 작전이 허사가 될 다급한 상황에서 또 다시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개입하셨습니다(마태 1,20). 다행한 것은 요셉도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나빔 중의 한 사람이었고, 메시아라면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식으로 보내실 것임을 믿었으며, 또 마리아라면 충분히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고도 남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개입하신 이 타이밍이 절묘했던 이유는, 이렇게 해야 태어난 구세주가 다윗 가문의 후손이 될 수 있어서 아브라함 이래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대대로 약속하셨던 바를 지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마리아와 그 정혼자인 요셉이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과 명예와 믿음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그만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중요했고, 또 그 언약을 지키시려던 하느님의 의지가 강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가 전해준 내용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23,5-7). 예언자의 이러한 전갈을 들은 백성들도 기대와 희망을 간직하며 기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
이렇게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메시아를 보내시려던 하느님의 개입은, 신성과 인성의 두 차원에서 아슬아슬하게 동시에 입체 작전처럼 이루어졌고, 다행히도 이 어마어마한 구원계획이 아나빔들의 믿음 덕분에 성공적으로 나자렛 성가정을 이루는 데까지 착오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tmMw7/btqQNqB8L1l/rhrcD8ICJ4cQKKFF61Phpk/img.jpg)
-조재형신부-
예전에 ‘친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복잡한 일이 생기자 친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잠시 하와이엘 다녀와라. 그러면 여기 일은 내가 처리할게!’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가 가라 하와이’ 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입니다. 친구가 병원으로 면회를 왔습니다. 당시는 서품 받은 지 1달이 안 되었을 때입니다.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성령이 충만할 거야! 죽으면 하늘나라 갈 거야!’ 친구가 한 위로의 말이었지만 들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먼저가라 하늘나라.’ 벌써 30년이 지난 일입니다. 시장에 가면 덤으로 콩나물을 더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제게 덤으로 시간을 주셨고, 아직까지는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제가 있는 뉴욕에는 한국에서 온 신부님들이 있습니다. 대전교구, 대구교구, 부산교구, 서울교구입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는 것은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줄이 없으면, 연줄이 끊어지면 연은 곧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신부님들이 뉴욕에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교구라는 연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뉴욕에서 신문을 만들 수 있는 것도 본사에서 지원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면의 60%는 본사에서 보내 줍니다. 편집의 방향도 본사에서 정해 줍니다. 뉴욕에서는 본사에서 정해준 방침을 중심으로 미주지역의 소식을 편집합니다. 본사의 지원이 없다면 신문을 만들기 어려울 것입니다. 지구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태양계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달이 없다면 지구의 생태계는 지금과는 무척 다를 것입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의 아름다움은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날이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유배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날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그날이 오는 걸까? 아니면 내가 그날을 만드는 걸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로운 요셉은 마리아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꿈에 천사를 만났고, 천사는 요셉에게 성령의 뜻이니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날은 도전에 굴복하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센 도전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으로 그날은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내가 성탄을 향해 가야만 성탄은 나의 성탄이 될 겁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GjXzL/btqQ3hb1iTh/xutxVJ5NkfhKPkXPqa0kB1/img.jpg)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양승국신부-
대림 시기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한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살짝 등장하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을 소개할 때 언제나 교회는 그를 의인, 과묵한 사람, 침묵의 성인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 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던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 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구원사업은 큰 무리 없이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7Bmx/btqQR639cyl/JGJM4DOChl0lWM0LwhV0k0/img.jpg)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이영근신부-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복음은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https://blog.kakaocdn.net/dn/cswrAV/btqQPymrFCZ/zEyWRW2HhaaZcbYEObpR01/img.jpg)
예수, 임마누엘
-반영억신부-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 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 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로마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이사43,1-2). 하신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k3jPd/btqQNpwnxfv/NTOk7L2MpFvNzh19qs9kCK/img.jpg)
복음: 마태 1,18-24: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
-조욱현신부-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것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은 시간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고, 그분께서 아드님이심은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비롯한다. 주님은 당신의 보이지 않는 신성을 보여 주시려고 눈에 보이는 육신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1,1)으로 나셨고 우리가 태어나듯이 “여인에게서”(갈라 4,4) 태어나셨지만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요한 1,13)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으므로 우리의 태어남보다 위대한 태어남이다. 여기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날 새로운 태어남에 대한 암시가 담겨있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이다.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약혼한 동정 교회에서 태어나며 마리아는 그래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동정 교회는 성령으로 아들을 잉태하시고 낳으신 마리아의 표상이다.
우리는 여기서 질투심이 아닌, 남다른 자제심을 지닌 요셉을 볼 수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모르고 있던 요셉에게는 난감한 일이었다. 마리아를 자기 집에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는 것은 마리아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었다. 요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요셉은 율법보다 더 높은 법을 따르기로 한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19절)
이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주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치고 신비라는 선을 받아들여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 이름은 어떤 죄와도 연관된 적이 없다. ‘요셉’이라는 말은 ‘흠잡을 데 없는’이란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 하셨기 때문이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23절)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고, 그분은 하느님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렇게 요셉은 기쁘게 천사의 말을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을 따른다.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겠다.
![](https://blog.kakaocdn.net/dn/cszlap/btqRawtsryG/5Cj13kkS1wfiP8uOVkeBeK/img.jpg)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마태 1, 21)
-한상우신부-
내려놓은 적
하나 없는
우리들 삶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이
오고 있다.
맞아들임과
받아들임 사이에
우리가 있다.
내려놓음과
함께함 사이에
우리가 있다.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함께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열리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의 참된
중심이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제 색깔을 찾게된다.
탄생은
제 색깔을
찾는 기쁨이다.
사랑은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이다.
누군가의
받아들임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다.
받아들임은
감사이며
기도이다.
말씀은
받아들임을 통해
우리들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성 요셉의
받아들임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거기에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우리의 삶이란
우리의 뜻을
내려놓는
여정이다.
내려놓기에
우리가 되고
받아들이기에
임마누엘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기에
보이는 성탄의
신비이다.
우리의 색깔도
내려놓기에
활짝 열리는
꽃이 된다.
내려놓음과
받아들임이
사라지면
성탄도 없다.
내려놓음이
성탄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된다.
자신을 뜻을
내려놓는
성 요셉의
눈물에서
아래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탄생이 있다.
내려놓는 말씀이
받아들임의 탄생
말씀의 사람이
되신다.
![](https://blog.kakaocdn.net/dn/bk3jPd/btqQNpwnxfv/NTOk7L2MpFvNzh19qs9kCK/img.jpg)
또 하나의 요셉
-김찬선신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인과因果, 곧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흔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것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잘해서 그 일이 생겼고,
내가 잘한 것이 없을 때에는 다른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나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라거나
나의 탓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조상 탓이나 남 탓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생각지 않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의 대표가 바로 불교의 연기론으로서
인과응보, 자업자득, 업보와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온 거지요.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도
나든 너든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가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마음 안에 이미 결과가 있다는 유심연기론唯心緣起論까지 있지요.
예를 들어 마음보를 곱게 써야 좋은 일이 생긴다거나 복이 온다고 하지요.
인간이 마음만 먹었어도 그 안에 선 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선 또는 악의 결과가 열매를 맺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차이인 겁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기에 하느님 없이
모든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인과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일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믿고,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와의 전쟁에서 져 포로가 되고,
감옥 생활 후 1년을 중병을 앓다가 살아난 뒤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젊은 나이에 전쟁과 포로 생활과 병상 생활이라는 큰일을 내리 겪으면서도
이 일들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또 전쟁터로 간 겁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뜻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지요.
결국, 환시를 보고서야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이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의 뜻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지 못한 채 마리아와 약혼을 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을 알지 못한 채
인간적인 이유로 그리고 자기 계획에 따라 약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모른 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합니다.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고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거나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성공이나 실패이겠지만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면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다만 하느님의 뜻일 뿐입니다.
내게 벌어지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보며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요셉이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szlap/btqRawtsryG/5Cj13kkS1wfiP8uOVkeBeK/img.jp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2월 20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0) | 2021.12.20 |
---|---|
2021년 12월 19일 대림 제4주일 (0) | 2021.12.19 |
2021년 12월 17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0) | 2021.12.17 |
2021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0) | 2021.12.16 |
2021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0) | 2021.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