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2. 15. 06:51

2021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루카 7,18ㄴ-23)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or should we look for ano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느 자매의 사연을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 자매가 한밤중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너무 아파서 끙끙댔지요. 어머니를 깨워 병원에 갈까 했지만, 이렇게 끙끙대도 나오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피곤하신 것 같아서 혼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다음 날 저녁, 어머니에게 어젯밤 너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어머니는 “알고 있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딸은 기가 막혀서, “알고 있는데도 나와 보지 않았어?”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엄마가 새벽 일찍, 일 나가야 하잖아.”

딸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잘못된 모습만 계속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엄마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사실 완벽한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완벽함만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게 되고 힘들어지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나’일 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예언자적 생활과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전함으로써 예수님보다도 먼저 많은 제자가 따랐고 그 세력도 꽤 컸습니다. 그래서 헤로데가 요한을 위험인물로 여겨 체포한 것입니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은 엄격한 영성 생활을 했고, 그의 말은 자뭇 준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중심의 말씀으로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활은 일상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도 어울리고 금기의 집에도 드나들었습니다. 이 모습에 세례자 요한은 혼란을 겪었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에서는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당신이 누구신지 신분을 밝혀 달라고 질문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루카 7,22)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틀에만 갇혀 있어서 예수님을 알아뵐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마음을 자극하는 단 하나의 사랑의 영약, 그것은 진심에서 오는 배려다(메난드로스).

중요한 것.

학창 시절에 담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화장실 청소를 깨끗하게 하도록 했던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화장실과 요즘의 화장실을 비교하면 천지 차이임이 분명합니다.

당시는 주로 재래식 화장실이었지요. 야외 건물에 듬성듬성 칸막이해놓고 직사각형 구멍만 뚫려 있었습니다. 밑에는 구더기가 꿈틀대고 무엇보다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대단했습니다. 지금의 수세식 화장실은 완전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냄새난다고 또 지저분하다고 화장실에 안 갔을까요? 오히려 웃으면서 친구들과 화장실에 갔었습니다. 생리적인 문제가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것보다 더 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일도 많고 그래서 커다란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도 많습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역시 받아들이면서 더 중요한 것을 실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수적인 것들을 우위에 두면 중요한 것들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은 이 중요한 것을 사랑 실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자주 질문하는 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제자 두 명을 불러 예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합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고 있었고, 세례 때 하늘에서 성령이 내려오시며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인정하시는 목소리도 들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들을 예수님께 직접 보내어 그분께 질문하고 직접 답을 들을 수 있도록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질문 안 하기로 유명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서 특별히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질문하라고 했지만, 한국 기자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한 동양인 기자가 일어나 아시아를 대표해서 자신이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중국 기자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 한국 기자들의 시간이니 앉으라고 했지만, 그 기자는 한국 기자들이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기회를 넘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자 결국엔 중국인 기자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떤 교수님이 첫 대학 강의를 하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선배가 아주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괜찮아. 학생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조언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그저 말하고 학생들은 받아적었습니다. “질문 있습니까?”란 교수의 말은 “수업 끝났으니 가방 싸세요”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저도 외국에 나가 수업을 듣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겸손해서일까요? 질문할 필요가 없는 교만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해야 하는 일을 다 알려주고 세상으로 나가면 남이 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질문할 이유도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질문은 누군가 믿는 사람에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거짓말쟁이에게 질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학생들이 질문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지 타인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이기고 구원될 기회도 잃을 수 있습니다.

 

    영화 ‘페르마의 밀실’(2007)입니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네 명의 수학자가 위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달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대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제한 시간인 1분 이내에 문제를 풀지 못하면 사방이 오그라드는 밀실뿐입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문제를 푸는 것뿐이지만 아무리 천재들이라 해도 역부족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네 명 중 한 명이 이 장치를 만들어 꾸민 짓이었습니다. 35년 동안 어떤 가설을 증명하려 했는데 증명 10일 전에 그 기회를 젊은 수학자에게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젊은 수학자는 골드바흐 가설을 증명하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관심을 끌려고 풀었다고 한 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일인자가 되지 않는 이상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이런 일을 벌인 그 사람을 어떤 사람이 분노로 기절시켜버립니다. 방은 점점 줄어들어 시간은 없는데 유일하게 나갈 방법을 안 사람을 기절시킨 것입니다.

    그 방을 만든 사람이 그 방과 함께 죽기를 원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자신들에게 이 고생을 시키고 있다며 유일한 탈출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묻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아서 해결해보겠다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기절시킵니다. 하지만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녀가 주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자녀들이 하느님께 질문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부모는 자신보다 아는 게 없다고 여기게 되고 하느님께 물을 줄 모르게 되면 이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자기 자신이 내린 해답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나에게 묻고 내가 내린 답대로 하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고 부모에게 이것저것 다 물어볼 때 아이는 행복합니다.

 

    이런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위에 내리는 구름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성막도 이동하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성막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막은 감사의 봉헌으로 내 안에 만들어진 주님의 집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는데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나를 향한 당신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그분의 뜻에 나를 맡길 때 내가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뜻이 일치하면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을 하느냐와 누구에게 질문하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참다운 스승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누구에게 질문해야 할지 제대로 알려주는 스승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커져 온전히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믿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스승이요, 부모가 됩니다.

 

    하느님께도 질문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만 믿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주 예수님께 질문을 던져야 교만에서 벗어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 믿음과 깨달음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더 자주 예수님께 질문합시다.

 -조재옇신부-


한국에서 손님이 왔는데 공항에서 “BTS 공연 보러 왔느냐?”라고 물었답니다. 한국의 BTS가 미국에서 공연하는데 그것을 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공항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기생충, 오징어게임, 미나리’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의 문화가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2년째 팬데믹 상황을 지내는 과정에서 한국은 ‘추적, 검사, 치료’라는 체계적인 대응으로 코로나의 파도를 잘 견뎌냈습니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백신접종도 80%를 훌쩍 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은 원조 받는 나라였습니다. 한국의 수출품은 가격이 싸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문화는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일본의 물건은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독일의 제품은 튼튼하였습니다. 유럽의 도시는 그림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화, 시민의식, 예술, 경제, 정치에서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가톨릭평화신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구독과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신문이 사랑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미주 지역 공동체의 활동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 보편교회의 가르침과 소식을 충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신문의 인쇄상태가 좋아야 합니다. 신속하게 배송되도록 해야 합니다. 구독자를 늘리기 위해서 홍보를 열심히 다녀야 합니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부족함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도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사제가 주어진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합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예비자를 모집하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 가정에서 복음이 자라야 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서 한국교회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습니다. 교회 구성원의 고령화, 성소자의 감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시노달리타스’를 통하여 경청, 식별, 참여의 과정을 거쳐서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지혜가 모여지지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오시기로 하신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표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귀 먹은 자가 듣게 되고, 눈이 먼 자가 보게 되고,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갇힌 이에게 해방이 선포되고, 묶인 이는 자유를 얻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죽은 이들이 되 살아날 것입니다.’ 내가 보여주는 표징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그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도록 하십시오.” 어떤 이는 들의 꽃에서도, 하늘의 구름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합니다. 매일 기도하시는 어머니는 날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계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한다면, 미움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다면,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바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고, 비록 고난 중에 있었어도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대림시기에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성모님에게도 나타나고, 요셉에게도 나타나고, 즈카리야에게도 나타났습니다. 같은 운동경기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는 경기에 더 관심이 있듯이 저도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 성서 말씀을 들을 때 더 관심을 갖곤 합니다. 가브리엘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고 ‘대천사’라고 합니다.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를 좋아합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 제가 있는 공동체, 또 제 자신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싶습니다. 저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전하는 지식과 지혜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존재 자체가 기쁜 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기쁜 소식은 어떤 일의 결과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쁜 소식은 우리의 전 존재가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통이 교차하는 세상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나의 지식과 지혜가,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기쁜 소식’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세상 앞에 서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저희가 운영하는 주말 힐링 피정에 참석하셨던 한 수녀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박삼일간 저희와 함께 숙식하시며 피정하신 수녀님께서는 시골 영감 수도자들이 외딴 바닷가에서 알콩달콩, 아옹다옹, 깔깔깔깔, 재미있게 살아가는 모습에 느낀 바가 많으셨나 봅니다. 식탁에서 하시는 말씀, “우리 공동체 식사 시간도 이렇게 재미있었으면...”

 

깜짝 놀란 저는 수녀님께 여쭈었습니다. “아니, 왜요? 수녀님? 수녀님네는 식사 시간이 어쩐데요? 많이 썰렁한가요?” “썰렁한 걸 넘어서 완전 시베리아예요. 소화가 잘 안 될 지경이예요.”

 

저는 농담 겸 위로 겸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수녀님, 너무 우울해하지 마세요. 사실 저희도 별반 다를 바 없어요. 도진개진이예요. 수녀님들 떠나시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모두 염원하는 충만하고 역동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적 삶이 어떤 것인지 묵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마음 편히 식사할 수 있는 편안한 공동체, 그래서 구성원 모두 소화가 잘 되고 건강한 공동체, 상호 간의 용서와 친교, 희생과 나눔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께서 주인공이시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는 공동체, 그래서 공동체 존재 자체로 세상의 등불이요 희망이요, 치유의 원동력인 공동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예수님의 공동체가 딱 그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루카 복음 7장 21절)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명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들의 물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 공동체적 삶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역동적 치유의 현장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목격합니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의 시달림으로 인해 오랜 세월 고통당하던 이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해방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이를 통해 그분의 메시아성을 명료하게 인식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 역시 구구절절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구체적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날의 특별한 질병, 사랑의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친교와 일치로 충만한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보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를 건설해나가야겠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이영근신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루카 7,19)

 

“오실 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시 118,26; 다니 7,13;9,25-27; 말라 3,1;사도 19,4; 히브 10,37; 묵시 1,8;4,8).

 

그런데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아마도 그는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요한은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씀하셨고,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메시아 예수님께 대한 의혹과 혼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혼란과 의구심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 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 곧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라는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 내가 그다’라는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예언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이 “오실 분”임을 증언하십니다.

곧 당신이 손수 하신 일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증언하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한자들아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루카 7,22)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루카 7,23)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동시에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입니다.

곧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는 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처럼, 말씀의 실행을 통해 자신의 신원을 증언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루카 7,19)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의 실행을 통해 “오실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제가 당신의 제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을 통해 제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이 깨달아 알도록 하셨듯이, 제가 하는 일을 보고 제가 당신의 제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반영억신부-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송영진신부-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7,18ㄴ-20)”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품었고,

그런 요한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23절).”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정말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의심했을까?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한 일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 받아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했다면, 그것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의심한 것과 같고, 그 계시를 내려주신 하느님을 의심한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언자 자격이 없습니다.

또 만일에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고 있었다면,

그는 증언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라고

묻게 한 것은, 요한 자신이 못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본다면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 입장에서는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떠나서

예수님에게로 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요한 3,28-30).

안드레아 사도는 원래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는데,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요한 1,35-42).

안드레아 사도 외에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더 있었을 텐데,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고,

요한의 제자들은 대부분 요한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을 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1-23)”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당신이 하시는 일들을 그대로 나타낸 말씀이기도 하고,

이사야서에 있는 예언들을 인용하신 말씀이기도 한데,

당신이 바로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되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현재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부터 시작된 일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고, 종말에 완성될 일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과 자비를 ‘지금’ 나에게

베풀어주시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성탄절은 아주 먼 옛날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맞이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는 모든 날이 대림절이고, 모든 날이 성탄절입니다.

그렇다면 왜 특정일을 성탄절로 정해서 경축하고 있는가?

사실 12월 25일이라는 특정 날짜는 인위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날짜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날’이 아니라, 그 날이 가리키는 그 ‘일’입니다.

그 ‘일’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나를 구원하려고 찾아오신 일입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는 복되다.”이고,

뜻은 “나를 믿는 이는 복되다.”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예수님만’을 메시아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는 것만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짜 신, 가짜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보다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 같은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그래서 그것들을 따라가게 만드는 ‘유혹’입니다.

그 유혹들을 물리쳐야 예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기도가 금방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예수님에게 의심을 품지 않고 믿는 것,

또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들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그냥 믿는 것, 그 믿음이 우리를 궁극적인 은총으로 인도해 줍니다.

‘궁극적인 은총’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완성입니다.>

 복음: 루카 7,19-23: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하고 묻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을 예고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세례자 요한이 생각했던 그 오실 분은 마지막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내가 메시아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당신이 ‘오실 분’임을 보여주는 기적들을 일으키신다.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21절)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당신의 권능과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셨다. 그리고는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22절) 바로 옛날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이루지는 것, 즉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여러 시대에 예언자들이 예고한 일들이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 유다인들이 그분을 의심한 것은, 신비의 깊이를 몰랐거나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지고 바위에 부딪혀 쓰러지고(참조: 이사 8,14; 로마 9,33),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참조: 루카 20,18)

 

그들은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을 보고도 그분께 돌을 던지며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요한 10,37-38)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곧 그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도 역시 이 요한의 질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가 변하는 기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 22)

-한상우신부-

기다림의
정점에 있는
만남이다.

그 만남으로
시달리며
아파한 우리의
시간들이
다시
뜨거워지며
되살아난다.

간절함의
막바지에는
언제나
새로운
삶이 있다.

기다림과
그리움이 만든
복음의 시작
성탄이다.

복음은
또 다른
삶의 기쁨을
일깨워준다.

사람이
사람이
되는 것은
철이 드는
깨달음의
여정이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진정 찾게된다.

가난함과
진실함에서
만나게되는
기다림의
참된 고백이다.

고백의 계절에서
우리의 가난함을
구구절절 만난다.

가난하기에
복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복음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어떤 사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는지를
아프게 반성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는 엄청난
이 사실과

아픈 이들이
제대로 걷고
제대로 보고
다시 깨끗해지고
되살아나는
행복의 이야기를

이제 우리가
나누는 것이다.

우리의 행복이
주님의 행복이다.

우리의
간절함으로
주님의 탄생은
뜨거운 심장이
된다.

새로운 고백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행복의
노래로 삶은
더이상 메마르지
않다.

심정(心情)과
심장(心臟)
사이의 고백이며

그 고백이
복음을 믿는
우리 모두의
행복이다.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살아있는
복음이다.

 말씀 나누기 - 대림 3주 수요일-행복도 불행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