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12. 14. 07:40

2021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1542년 스페인 아빌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체험한 그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하다가 사제가 되었다. 이후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영성 생활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1591년 세상을 떠난 그는 1726년에 시성되었고, 1926년에는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등은 영성 신학의 고전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
마태오 21,28-32)

 

 “Amen, I say to you,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en 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 righteousness,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di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시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믿지 않았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요한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잘 이용합니다. 예전처럼 지도를 펼쳐서 이 길을 맞는지 확인할 필요 없이, 편하게 운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내비게이션을 이용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가려는 곳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만약 상호만 알고 정확한 위치를 모르면, 전혀 다른 지방의 어느 낯선 지역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를 모르면 당연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 없습니다.

이 목적지는 반드시 운전하는 사람이 알아야만 합니다. 다른 이의 도움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알아야지만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삶 안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 삶의 목적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되는 대로 산다면서 아무런 목적 없이 살고 있습니다. 목적이 없으니 다른 이의 도움도 받을 수 없고 그래서 힘든 삶의 연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삶의 목적지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빠르더라도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엉뚱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의 목적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받아서 제대로 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도밭에서 일할 것을 명한 아버지와 그 두 아들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성경에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을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의로움을 실천하겠다고 약속만 하고 이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더 낫냐고 물으십니다.

처음에는 일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고서 나중에 생각을 바꾼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반대로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아들은 꾸지람을 듣게 됩니다. 이 모습이 바로 유대인의 지도자들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리와 창녀들이 믿은 뒤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목적지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적지를 모르니 지금의 세세한 것에만 집착하면서 그냥 살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순간의 만족만을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요한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던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보고서도 당연히 믿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변명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굳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 나라라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으며, 이를 향해 제대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떳떳해질 수 있습니다.
변화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며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다(한근태).

나의 뇌를 길들이기.

새로운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아주 특별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뇌는 워낙 게을러서 새로운 행동을 받아들이는데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 없이 보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생각을 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거부하려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결심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작심삼일은 우리 뇌의 게으름 때문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게으른 뇌이지만 능력은 뛰어납니다. 이 능력은 거부 반응이 사라지고 나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포기를 하지 않네. 그냥 해야겠다.’라며 능력 발휘를 하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3주 정도 된다고 합니다.

어떤 좋은 습관을 익히려고 할 때, 최소한 3주만 버티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뇌가 여러분을 도와줄 것입니다. 해도 안 된다며 자신의 능력 없음을 탓합니다. 그러나 끈기 없는 자신의 나약함 의지를 먼저 꾸짖어야 합니다.
 

 

 

<동방의 별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역할에 대해 말씀을 이어가시며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세례자 요한을 믿어서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을 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이 얼마나 모욕적인 말입니까? 오늘 비유 말씀에서 맏이는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는 아버지의 말에 처음엔 반대했지만 나중엔 갔고, 다른 아들은 처음엔 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엔 가지 않았습니다. 왜 마음이 바뀐 것일까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묵상’을 한 것이고 한 사람은 그저 자아와의 대화인 ‘생각’을 한 것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맏이는 그동안 아버지께서 해주신 일들에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하는 묵상 기도를 했고, 가겠다고 했던 다른 아들은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말에 따를 필요가 없겠다는 불만족인 마음을 품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감사’뿐입니다. 왜냐하면, 한 인격체는 ‘뜻’으로 다가오는데 뜻을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에게 고마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맙지 않으면 어떤 뜻도 따라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께 감사가 나오게 하려면 의지적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을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프라 윈프리’의 ‘감사일기 쓰기’나 김희아 씨의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 찾기’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감옥까지 가는 인생에서 감사일기를 쓰면서 인생을 역전시켰습니다. 그리고 김희아 씨도 감사할 거리를 찾으려 해도 우리로서는 전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살려고 감사를 찾다 보니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게까지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이밖에도 여기저기, 감사로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 사례도 허다합니다.

 

    감사가 없다면 예수님을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사실 매일 성체를 보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못 본 것으로 생각되는 이유는 예수님께 마음으로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아무리 보려 해도 보지 못합니다.

 

    문학가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단편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과거에 은혜를 입혀준 몇 종류의 사람을 그 후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엮은 것입니다.

    

    처음 예수는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소?” 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내가 절름발이였을 때 나를 일으켜 걷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이요. 그동안 직업을 구해 보았으나 만족한 직업이 하나도 없었소.”

 

    그다음 예수는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 받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소?”

창녀는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이오. 나는 더욱 고독해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소.”

 

    그 후 예수는 한 불량자가 정신없이 이웃과 서로 매질을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여보 청년,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준 소경이었소. 그러나 눈을 뜨고 무엇을 보라는 거요? 보이는 것이 모두 신경을 돋우고 귀찮고 화나는 세상이 아니오? 결국, 나는 화풀이도 하고, 마구 치고받고 하는 생활이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였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 만난 사람들일까요? 만나지 못했습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감사가 좋은 줄 알면서 우리는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유럽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날 하늘의 두 천사가 각각 바구니를 하나씩 가지고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한 천사는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 자기의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를 거두어 바구니에 담고, 또 다른 한 천사는 찬송과 감사의 기도를 걷어 바구니에 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중 소원의 기도를 거두는 천사의 바구니에는 세상을 다 돌지 못했는데 벌써 차고 넘쳤으나 찬송과 감사의 기도는 세상을 다 돌아서도 바구니에 차지 못했다고 합니다.

 

    감사를 나중에 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자아는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무언가를 먹게 되면, 어떤 위치에 서게 되면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일입니다.  

    ‘지금-여기’에서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가져도 하느님이 되지 않는 이상 불만족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쫓던 ‘별’은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감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선악과를 감사히 바치게 만드는 일입니다. 생명 나무까지 가는 길에 감사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 감사의 방법이 선악과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봉헌인 십일조의 필요성을 말하는 ‘악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가 오늘 복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가려고 하는 것은 별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만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하늘을 보고 감사해야 길을 잃지 않습니다. 모든 감사는 그리스도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로 향하게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뇌과학자 알렉스 코브(Alex Korb)는 감사와 뇌의 변화에 관한 연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뇌에 인간의 감정을 담당하는 핵심부위인 전대상피질이 있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입니다. 생각보다는 감정으로 행동합니다. 그래서 생각하면 그러지 말아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보통 부정적 감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감사를 거치면 이후에 그것들이 기쁨과 사랑과 같은 감정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비밀'에 출연한 세무사 박점식 씨(64)는 근육위축증 장애가 있는 아들에게 자격 미달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일반 가장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 감사일기를 10개씩 쓰고는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자녀와의 사이도 좋아졌고 직원들도 감사일기를 쓰게 하여 회사 분위기도 좋아졌고 능률도 향상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멈추지 않고 장모님께 감사한 것 100개를 적어 선물하였습니다. 그런 선물을 받는 장모는 얼마나 기쁘고 또 그런 선물을 하는 남편을 아내는 얼마나 사랑하겠습니까? 둘을 이어주는 다리는 어쨌거나 감사밖에 없습니다. 

 

    그는 책도 펴냈는데 어머니 살아생전에 1,000가지 감사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쓰는 중에 돌아가셔서 어머니 생전에 마치지 못하고 관에 쓴 것까지만 넣어드렸는데, 99번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1,000가지 감사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의 거대한 사랑, 철학, 교육관, 가치관을 확인하지 못하고 영원히 묻어둘 뻔했습니다. 이것 역시도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얻게 된 감사 덕분이고 행운입니다.”

  

    사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 만났을 때 진정 만난 것입니다. 그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길이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쫓는 별이 감사입니다. 그 감사를 일어나게 만드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이고 교회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감사의 봉헌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감사의 꼬리를 잡지 못하면 감사는 잡을 수 없습니다. 꼬리를 잡으면 머리도 딸려옵니다. 그러나 머리를 잡으려면 영원히 감사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엠이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4부부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나눔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토론토에 있을 때도 엠이 모임에 함께 했었고, 외국 생활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부부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의 기쁨을 보았습니다. 그날 나눔의 주제는 ‘최근에 배우자가 나에게 해 준 일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었습니다. 나누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들도 나눔을 통해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아내의 부탁을 받고 한국으로 물건을 보내기로 했는데 깜빡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아내는 남편을 구박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참 고마웠다고 합니다. 시댁 식구들을 알뜰하게 챙겨주는 아내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정성껏 아침을 챙겨주는 아내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남부럽지 않게 생일잔치를 챙겨주는 아내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늦게 들어와도 야단치지 않는 아내가 고마웠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이 고마웠다고 합니다. 먼저 들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고 합니다. 불멍할 수 있도록 장작을 마련해 준 남편이 고마웠다고 합니다. 남들 앞에서 아내를 칭찬하는 남편이 고마웠다고 합니다.” 작은 일들이지만 서로를 아껴주는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생각하니 저도 고마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손님이 와서 3박 4일 머물게 되었습니다. 숙소는 어떻게 마련하였지만 뉴욕 시내 구경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예약하는 것도, 안내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기꺼이 힘든 일들을 해 주었습니다. 자유의 여신상, 전망대, 미술관의 입장권을 인터넷으로 쉽게 예매 해 주었습니다. 월스트리트, 타임스퀘어, 부르클린 브리지, 성 패트릭 성당, 센트럴파크, 월드 트레이드 센터, 허드슨 야드, 록펠러 센터, 브라이튼 파크까지 친절하게 안내 해 주었습니다. 오랫동안 가이드를 하는 사람보다 뉴욕을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덤으로 뉴욕의 야경을 구경하였고, 마지막 날은 맛있는 저녁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마치 뜨거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손님도 무척 고마워하였습니다. 선을 베풀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남에게 원하는 것을 그 남에게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고 축하했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던 헤로데와 신하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자랑했던 대사제들도 아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러 왔던 박사들이었습니다. 밤을 새워 양을 돌보던 목동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성전에서 기도하였던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기쁨은 지위와 권력으로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기쁨은 갈망과 열정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능력과 지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은 갈망과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권한에 대해 논쟁을 마감하신 후에, 세 개의 비유, 곧 ‘두 아들의 비유’,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모두 하느님 나라가 왜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를 거듭 밝히십니다.

 

이 세 비유에는 ‘아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싫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일하러 간 아들과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서도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원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예수님께서는 ‘누가 응답한 사람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실천한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곧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십니다.

자기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인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완수하는 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으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4,34)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 2,17.26)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마태 21,31-32)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에서 가서 일하는 것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응답은 하여 포도밭에 오기는 하였지만 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하며 믿는 이들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수도원)라는 포도밭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것에 해당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 이들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누가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였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마태 21,31)

 

주님!

당신의 뜻을 제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응답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실행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당신 말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당신 의로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양승국신부-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특강과 판공성사 시즌을 맞아, 한동안 바쁜 순간을 지내다가, 이제야 겨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팬데믹 시대 점점 위축되어가는 신앙생활 앞에 힘겨워하시는 교우들의 눈망울을 보며 큰 안타까움과 함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열심히 뛰어 다녔습니다.

 

고백소에 들어갈 때마다 크게 느끼는 바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저나 교우들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잘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년 고백성사의 내용과 올해 내용이 거의 똑같다는 것입니다. 늘 같은 죄, 같은 고민을 평생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회 입회 때 안고 있었던 고민을 아직도 안고 있습니다. 거의 매번 고백하는 죄의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지도 신부님께도 부끄럽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하니...

 

그러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성장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은 절대 주어지지 않습니다. 각고의 노력, 그야말로 뼈를 깎는 자기 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수원을 운영하는 농부는 어떤 노력을 합니까? 이른 봄에 묘목들만 딱 꽂아놓으면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고 나서는 즉시 충분한 수분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넉넉한 퇴비도 필수입니다. 강풍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대도 세워줘야 합니다. 때로 병충해 예방약에 성장촉진제도 투여합니다.

 

그래야 묘목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몇 년 뒤에는 꿈에 그리던 품질좋은 과일을 풍성히 수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멋진 묘목을 본 농부의 마음은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반드시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각자 각자에게 주어지는 아주 중차대한 의무가 있는데, 각자 안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을 성장시키는 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세례받은 후 40년, 5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조금도 성장하지 못하고 세례 때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을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얼마나 딱하게 여기실까, 걱정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성전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을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신앙은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메시아로 자신들의 목전까지 다가오신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몰라본 것까지는 좋은데, 철저하게도 메시아를 거부하고 배척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과오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매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명품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의 신앙이 성장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매일의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많이도말고 딱 두 가지,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영적 계획을 한번 세워보면 좋겠습니다.

 말을 들어라

 -반영억신부-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하였을 때 말을 들은 사람은 포도밭에 가서 일한 사람입니다. 대답은 하고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는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러므로 언제나 삶으로 말하십시오. 사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 소위 한자리하는 사람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21,32). 고 한 말씀은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하라는 요한의 말을 들었고, 들은 그대로 행함으로써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소위 내로라하는 사람들,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결과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헛똑똑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의 부름은 주어졌고, 하느님나라의 문이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이들은 받아들였고, 스스로 똑똑한 이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으며 끝내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아는 게 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9-30). 내 뜻을 접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회개의 초대에 기쁘게 응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은총이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길을 걷기를 거부하는 이상 하늘 문은 늘 닫혀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며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그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으로 들읍시다.

 

오늘 기억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을 깨닫고 하느님의 전부를 사랑하기에 나를 무로 만드는 것과 비우고, 없애는 삶을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습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사랑의 합일을 위하여 모상이신 하느님을 닮아 내가 하느님이 되어가는 삶을 갈망하셨습니다. 나는 무입니다. 하느님은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비움으로써 전부인 그분으로 채웁니다.(갈멜의 산길). 그리하여 충만한 삶을 살아갑니다.  "완덕이란 영혼이 모든 육을 끊고 벗고 비우는 데 있는 것이다" (갈멜5,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송영진신부-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28-32)

 

‘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오복음 7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바로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했지만 가지 않은 ‘다른 아들’은,

예수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싫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 ‘맏아들’은

‘죄 속에서 살다가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또 마태오복음 23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다른 아들’의 모습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사람들, 즉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여러분도 보다시피,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창녀 라합도 심부름꾼들을 맞아들이고 또 그들을

다른 길로 내보냈을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4-26).”

<‘죽은 믿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힘(생명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음으로 보이지만,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라는 질문은,

뜻으로는 “이 둘 가운데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입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세리와 창녀들’은 인간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죄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어떤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그 상태 그대로는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너희’는 ‘사제들과 원로들’인데, 일반적으로 거룩한 이들로 여겨지는 사람들,

그러나 위선자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사람’이라고 존경받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진실하게 회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잘하고 있다.”는 착각과 오만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참되고 성실한 회개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는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입니다.

회개는 구원을 받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은 ‘의로운 길’입니다.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은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지만”이고,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는 “세리와 창녀들은 회개했다.”입니다.

<진실하게 회개했다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회개는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해서 의인이 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회개하기 전에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는 나라입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라는

말씀에서 ‘그것’은 ‘죄인들이 회개해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씀에는,

그들이 죄인들의 회개를 회개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고,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착각을 버리지 않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는 “너희는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다.”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회개는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두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아들들의 모습은 바로 나의(우리의) 모습입니다.

신앙인 공동체 안에는 죄 속에서 살았지만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도 있고,

겉으로만 잘하는 척 하는 위선자들도 있고,

자기는 정말로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로 좁혀서 생각하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맏아들이 될 때도 있고, 다른 아들이 될 때도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죄를 지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고, 그랬다가 또 실수하고...

아니면 진심으로 잘하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을 때도 있고, 그랬다가 그것이 오만이 되고 위선이 되기도 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충실한 신앙인으로 사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지나가버린 날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날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바로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모습’을

내가 바라는 나의 ‘마지막 모습’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비유이다. 첫째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노아의 후손들인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작은아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맏아들이 바리사이들을,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포도밭은 우리의 본성에 심어진 정의를 뜻한다. 그래서 포도나무들은 각기 다른 정의를 나타내며 각 사람은 자신의 덕에 따라 포도나무들을 많게 또는 적게 가꾼다. 그러니 포도나무 전체를 잘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맏아들은 “싫습니다.”(29절) 하였지만, 나중에 일하러 갔다. 아버지 앞에 “싫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과 그분의 정의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진 이교인들이 ‘우리는 당신에게서 배운 정의를 실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먼저 자기 마음속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싫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정의를 실천하러 포도밭으로 간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30절) 작은아들로 묘사되는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세와 세례자 요한에게 지시를 받았을 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딴 나라 사람들이 저를 속였습니다.”(시편 17,45 칠십인 역)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 거짓말을 했다.

 

“이 둘 가운데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31절) 라는 물음에 그들은 “맏아들입니다.”(31절) 대답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함으로써 이 비유의 뜻을 자기들한테 불리하게 해석하고 만다. 아버지의 뜻을 행한 맏아들은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를 실천하겠다고 약속하고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하셨다. 이 말씀은 유다인들에게 자극을 주어 그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말씀이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32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라고 하신 적이 많다. 우리도 잘못 살면 주님께 그러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마태 21, 32)

-한상우신부-

반대 방향에도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목마름을
꿰뚫고
믿음의 모순을
꿰뚫는 주님의
말씀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는
세리와 창녀들을
먼저 받아들이신다.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바닥에서
피어나는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꽃들이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다.

소중함을
되찾아
돌려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 모두를
보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아픈 사람을
먼저 만나시는
하느님이시다.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서는
위로 올라올 수 없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막혀 있지 않다.

믿음으로
열리는
믿음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마저
우리들에게
내어주시는
사랑이시다.

세리와
창녀들 마저도
기다려주시는
기다림이시다.

믿음이란
부여잡고 있는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나눔이다.

놓아버리고
내어주는 것이
믿음이다.

사람들의
믿음 안에서
길이 열린다.

믿음은
하느님의
시간이다.

저마다에게
가장 알맞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신다.

우리의
갈망(渴望)은
하느님 나라에
맞닿아 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이다.

믿음으로
다시 채워지는
믿음이다.

대림은 믿음으로
다시 깊어진다.

 신학자와 할머니 중에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이 저에게 하시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요.

이 질문은 분명 저에게도 하시는 질문인데

저는 종종 그에게 또는 그들에게 하신 질문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제가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신학을 하는 사람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기도와 신학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신학할 때의 주님은 객관자 그분이시지만

기도할 때의 주님은 상대자 당신이십니다.

 

신학할 때의 주님은 제게 관념의 대상이지만

기도할 때의 주님은 제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신학할 때 배운 주님 말씀은 제게 이론이지만

기도할 때 들은 주님 말씀은 제게 실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오늘 주님의 비유를 바꿔봤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냐?

일생동안 신학을 공부한 사람과 일생 배워 안 것은

주님의 기도밖에 없어 그 기도만 줄창 한 할머니가 있는데

누가 더 하느님을 사랑하고 누가 더 하느님의 뜻을 실천헸겠느냐?“

 

단언컨대

공부한 적 없고 기도한 할머니가 기도 안 하고 공부만 한 신학자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천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종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15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