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12. 11. 07:12

2021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lijah will indeed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tell you that Elijah has already come,
and they did not recognize him

but did to him whatever they pleas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년에 어머니께서, 그리고 올해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동안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또 하늘 나라에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의 무상함도 크게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들고, 순간의 만족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 한 직후는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노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찰나의 즐거움이 모여서 내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야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엘리야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재림도 영광 속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는 메시아관은 고난과 부활이 함께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막연한 영광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어디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특별한 상황,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상황만을 요구하지 말고, 매 순간에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듭니다.
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인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고질적인 질병은 육체적 쾌락이 고통을 능가하도록 허용한다(에피쿠로스).


열매 줍기(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시성 타고르의 멋진 시입니다. 솔직히 이런 기도를 잘 바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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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현재의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의 용서를 받게 하고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리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로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남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으니 한번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와 동생이 자신의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곳에 있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일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조재형신부-


캠핑 중에 작은 사고로 왼쪽 발목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집이 생기고, 연고를 바르면서 조금씩 좋아졌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습니다. 즈음에 오른쪽 발가락에도 염증이 생겼는지 아팠습니다. 지금은 다 좋아졌지만 그렇게 아픈 1주일가량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조금만 조심했으면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평화신문을 보면서 일부러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중인 출신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격이 모났던 이보현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신앙인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박해의 칼끝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잔치를 베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포졸에게 잡힌 이보현은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드러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웃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끝까지 참아 천국에서 만날 것을 전하였습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어도 옥에 들어가서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예수의 수난을 증언했습니다. 관장은 이보현을 장터에서 조리돌림 하게 한 뒤, 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게 하였습니다. 이보현은 27살에 장열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며칠 뒤 그의 시신을 거둘 때 마을 사람들이 가서 보니, 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보현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고, 난국에 빠져 방향을 잃었던 조선 교회의 명맥을 잇게 하는데 소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현존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두 팔 없는 석창우 형제님은 7년 째 성서를 필사하고 있습니다. 1984년 10월 29일 감전사고로 두 팔과 두 발가락을 잃었다고 합니다. 2015년 환갑을 맞으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두 손이 있던 30년과 두 손 없이 살아온 30년 중 두 팔 없이 산 30년이 훨씬행복했다고 합니다. 석창우 형제님은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쁘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감사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 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이영근신부-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그리고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리고,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반영억신부-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17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횃불처럼 예언하다 - 공동선을 위한 사도직의 조건

 -이기우신부-


횃불처럼 타오르는 예언자의 열정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공동선을 향할 때 필요한 은총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역사 안에 그리스도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되어 최고선의 가치를 실현하고 수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별 신자들이 기복신앙에 매몰되지 않고 교회 전체가 교세 증가에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세상 사람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소금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섯 가지 양식으로 계시된 주님의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적인 변화를 이룩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화로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사도직 활동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서 공동선을 수호하는 사도직 활동에 이르러서야 인간화와 민주화를 거쳐 복음화의 과업이 이룩될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주님의 현존 양식이 주로 종교적이고 교회적인 구조인데, 사도직 활동이 더해져야 활력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사도직 활동은 거창할 필요 없이 작아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만 하면 자그마한 겨자씨가 겨자나무로 자라듯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인간화와 민주화를 거쳐 복음화로 나아가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직 활동이 결코 포기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며, 사도직 활동의 질적 수준을 담보해 주는 가치가 바로 공동선의 가치들입니다. 

 

그 초점은 어디까지나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을 때부터 그분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꼬임에 빠져 온갖 우상을 하느님인 줄 알고 숭배하거나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까지 하던 차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사람이 되게 하시어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인권 유린 현상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네 역사 안에서 현존시키는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 그리고 신앙 감각을 존중하면서 공동으로 합의하는 교회야말로 인간 존엄성을 이룩하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의 가치들을 짓밟는 우상숭배가 워낙 흔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선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도직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 가치는 재화의 보편 목적에 충실하여 재화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대전제 하에 자본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사조와 대결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우상숭배적 경제 질서의 희생자인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인간을 위한 경제와 복음적인 경제 질서의 표본을 만드는 일이 그 다음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직 활동은 보조성과 연대성이라는 방법 원리를 필요로 합니다. 

 

보조성이란 국가 정부가 정책적으로 수호하고 증진시켜야 하는 공동선에 대하여 비록 보조적일지라도 당사자들 역시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되 간섭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공동선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도 그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자선 행위만으로 충분치 않고 당사자인 가난한 이들 자신이 자각하고 자립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 전체의 공동선에 대하여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조성 원리는 자율성과 자주성일 뿐만 아니라 참여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들고 마귀들린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실 때, 반드시 그들의 이름을 물으신다든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는지 하여 당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셨으며, 일방적으로 도와주시는 법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치유나 구마의 기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당신의 신적인 기적 능력이 99% 작동했을 터인데도, 1%에 지나지 않을 당사자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보조성 원리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원리가 연대성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있어서 서로 연대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의 질서가 강자들 위주로 편성되고 운영되고 있어서 이를 개선하려면 약자들이 뭉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조성 원리에 따라 주체성을 지니게 되고 최소한의 생존을 담보하게 된 가난한 이들은 거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하고 더 약한 이들을 위해 일어서야 하고, 이 경우에는 반드시 연대의 힘으로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할 다짐을 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계급투쟁이라든지 거리 시위에 필요한 물리적 연대의 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보다 선이 더 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선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여론이 형성될 수 있지요.

 

이렇게 공동선의 가치에로 투신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엘리야의 모범이 깃발입니다.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한상우신부-


신앙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의
빈약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에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는
마음의 대림이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는 거기에
아파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또 아파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성탄의 길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사랑이다.

목숨을 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뻣뻣한 교만이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애타게 오시는
예수님을
늘 배척하는
우리들이다.

끝끝내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을
알 턱이 없다.

우리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하느님께는
늘 야박하다.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을
하느님께로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고난을
동반한다.

아픈 것과
더 아픈 것
사이에
우리가 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엘리야도
요한 세례자도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아픈
시간이다.

신앙은
소모품이 아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사랑해야 할
인격이다.

그래서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의 대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닌 버려지는
신앙을 되찾는
한줄기 간절한
마음이다.

먼저 와야
할 것도
마침내 와야
할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다.

마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제멋대로
다루는 아픈
마음을 위해
기도드린다.

 바로잡아주는 사람

 -김찬선신부-


오늘 집회서는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다시 오리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거짓을

바로잡은 것같이 세례자 요한도 그러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싸워 이겼지만

세례자 요한이 싸워 이겼나요?

살해당했으니 싸움에 진 것이고

그러니 바로잡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요?

 

다시 돌아온 엘리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고 하시며 당신도 같은 운명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잘못이나 거짓을 바로잡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든

수난을 당하든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도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벨에게 쫓기지 않았습니까?

도망가지 않았으면 그도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설사 알아봤더라도 사람들이 바로잡는 사람을 내버려둘까 생각합니다.

 

한번 나에게 적용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가 나를 바로잡아주면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겠습니까?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여기서 성인은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성숙한 어른이라는 뜻의 成人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의 聖人입니다.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사람은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에

당장은 비록 입에 써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마워할 터인데

그건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싫어하는 것을 욕먹어 가며

바로잡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해코지까지

당할 것 같으면 더더욱 바로잡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나를 바로잡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사람도 웬만한 사람은 한두 번 바로잡아주다 통하지

않으면 나를 포기하고 떠나는데 계속 옆에 있으면서 잡아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진정 사랑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진정 지혜로고 성숙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12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