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오11,11-15)
“Amen, I say to you,
among those born of women
there has been none greater than John the Bapti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그들의 구원자시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으며, 그는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시 방학을 마칠 때쯤 되면, 학생들은 집에서 방학 숙제를 하느라 정말로 바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밀린 방학 숙제 중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일기 쓰기’였습니다. 일기의 장점이 많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문장력이 좋아지고, 또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강압적으로 쓰는 일기라서 그런지 항상 일기 쓰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자신의 고칠 점을 하나씩 적어나가면서 고치려고 노력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면 어떠했을까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는데도 불구하고 실천하지 않습니다. 실천을 통해서만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면서, 늘 뒤로 미루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특히 주님의 일을 지금 당장 행하는 우리가 될 때, 후회하지 않는 삶 그리고 가장 행복한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위대한 예언자들이 광야에서 살았고 그의 말을 들으러 광야로 사람들이 몰려갔습니다. 그러니 광야에 나가서 사람들이 본 요한은 바로 예언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며, 요한은 예언자 중에서도 보통 예언자가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언명하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역할을 했습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광야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훌륭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제자들, 그들을 도와 초대교회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들, 그들과 함께 교회 안에서 믿음을 같이 했던 교우들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이어받아 일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지금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인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도 드러났지만, 우리나라 양궁은 세계 1위가 분명합니다. 세계 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다는 것보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좋은 성적을 얻어 선발되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렇다면 오랫동안 세계 1위를 유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동이(東夷)라는 활을 잘 다루는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활쏘기를 많이 해서일까요?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훈련에 있었다고 합니다.
뱀이 꿈틀대는 방 안에 가둬져 다리를 타고 뱀이 기어오르는 섬뜩함을 참아내고, 뜬눈으로 꼬박 3일을 버티기도 한답니다. 이런 극기 훈련을 하는 이유는 경기 중에 일어날 모든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활을 쏘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많은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외적인 것에만 집중하면 어떤 긍정적인 변화도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이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려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주변인인데도 외롭지 않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 가장 큰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도 그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이는 무슨 말일까요? ‘경계에 선 인간’이란 뜻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고 천상에서는 가장 낮은 사람보다 낮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베레스트는 이 지상에서 가장 높지만 하늘의 가장 낮은 곳보다 낮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언자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서게 됩니다. 문제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만, 또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매우 외롭습니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친구들이 생깁니다. 그 친구들은 천국으로 올라갈 준비를 그 경계선에서 합니다.
요즘 읽은 책, 안나의 집 김하종 신부의 『사랑이 밥 먹여준다』에서 이탈리아인으로서 한국에 뼈를 묻겠다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러 온 경계인으로서의 세례자 요한과 같은 모습을 김 신부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와 가족들을 떠나 한국에 왔지만 한국에서도 외국인으로 취급받으며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소외감은 익숙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을 때는 사람들이 나를 ‘스파게티’라 불렀고, 영국에서는 ‘마피아’라고 불렀다.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나를 ‘촌놈’이라 불렀다. 아프리카에서는 나에게 거리를 두고 ‘투오밥’(백인)이라 불렀다. 나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1990년대 초, 눈이 내리는 일요일이었다. 성당 앞마당에 축제 준비를 하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밴드 연습이 한창이었고 한복을 입은 몇몇은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의 리듬은 하얀 눈발도 춤추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할머니를 한 분 모시고 내게 왔다. 사제에게 축복받고 싶어 하는 할머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굳은 얼굴이 되었다. 나를 한번 쭉 훑어보더니 화가 난 목소리로 ‘외국 신부한테서는 축복받기 싫네’하고 어깨를 돌리셨다.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다. 여러 지역에서 겪었던 일이라 적응할 때가 됐는데도 말이다.
집에 돌아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외국인, 순례 그리고 나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을 보면서 ‘외국 사람’이라는 단어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렇구나. 나의 얼굴, 눈, 피부색은 한국 사람과 다르구나. 나는 이 땅에서 아직은 ‘손님’에 불과하구나.’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한 분이 내 턱수염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서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대한민국에서는 유교의 전통이 있어 젊은 사람들은 수염을 기르지 않는다네. 수염을 깎아요.’
나는 곧 답을 드렸다. ‘네, 깎겠습니다.’
그날 저녁에 수염을 깎았다. 사실 내심 멋진 수염이라고 생각했고 스스로 수염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러나 어르신의 의견을 존중하는 한국 문화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수염을 기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김 신부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거나 통장에 거액의 돈을 가지지 않고서는 취득할 수 없는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 노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한국에 함께 온 마우로 신부님과 나는 한국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다. 사실 난 쌀 요리를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먹어본 김치는 신맛이 강했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양념들은 경험해보지 못했던 독특한 맛이었다. 특히 찌개와 떡은 너무 낯설었다.
세네갈에서 봉사할 때 나이 드신 선교사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다.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면 이 나라 언어가 배우기 쉽다고 할 것이고, 사람들도 너무 착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너에게 보내신 이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 언어가 너무 어렵다고 할 것이고, 음식도 맛없고 이 민족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생각했다.
‘아직 이 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식 맛이 없다고 느꼈구나.’
그 말씀을 떠올린 후 한국 음식들을 사서 맛보며, 익숙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면서 한국 음식의 참맛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음식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고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힘이 있다. 쌀밥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밥을 전해주는 신부가 됐다. 정말 먹기 힘들었던 음식 두 가지였던 ‘찌개와 떡’은? 내가 지금 가장 잘 만드는 요리는 ‘김치찌개’다. 노숙인 친구들도, 함께 사는 신부님들도 내 솜씨를 인정해준다. 그리고 특별한 날, 떡이 빠지면 섭섭하다. 나는 같이 환갑을 맞은 노숙인들과 환갑잔치를 함께 했는데, 무엇보다 많은 분과 떡을 나누어 먹을 수 있어 참 행복했다.”
3년 넘게 노모와 형제들, 조카들을 보지 못한 김 신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도 한국의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는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조금은 열심히 따르는 우리가 모두 어느 정도 겪게 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주 겸손한 이들이 친구가 됩니다. 왜냐하면, 경계지역엔 아무나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하종 신부님이 임대 아파트 단지에서 학원비가 없어 학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자들과 공부반을 운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아직도 이탈리아 국적으로 한국에서 주변인으로 느끼면서도 열심히 한국의 가난한 이들과 하나가 되려는 중이었습니다. 처음엔 영어만 가르쳤는데 그다음엔 수학, 국어, 농구 교실, 기타 교실, 영화 감상 교실 등도 운영했습니다. 봉사자 40명이 모였고 총 72명의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이러는 사이 아이들도 외국인 신부님을 좋아하게 되었고 신부님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들을 좋아했습니다.
1996년의 무더운 여름, 나눔 교실 아이들이 학부모를 대동하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감사패를 준비해 온 것입니다. 감사패에는 72명 아이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고 중앙엔 이렇게 씌어있었습니다.
‘목련마을 청소년 나눔 교실 지도 신부로서 정열과 성의를 다하여 청소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고 사랑을 몸소 가르쳐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72명의 뜻이 담긴 이 패를 드립니다.’
신부님은 감사패를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해맑게 웃던 아이들, 마음 한편에 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자리했구나. 머리를 맞대고 나를 기쁘게 해줄 방법을 오래 생각했구나.’
김용규 님의 책 『숲에게 길을 묻다』에서 숲에도 경계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숲과 바다, 혹은 숲과 도시의 경계를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가려면 경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경계는 모호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열려 있기에 자유롭습니다. 이 경계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커다란 나무보다는 작은 관목들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또한 부드러운 가지를 좋아하는 고라니나 산토끼, 이빨을 수시로 갈아야 하는 들쥐나 설치류들도 많습니다. 사람들도 산나물 등을 채취하기 위해 많이 드나듭니다.
그리하여 이 경계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대부분 가시를 지닌다고 합니다. 자신을 동물들에게서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작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이 동물들과 덤불들은 서로 도와가며 이 경계지역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합니다.
김하종 신부는 고향을 떠나 한국인이 되어 한국에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한국 국적을 한국에 온 지 25년 만인 2015년 11월에 받게 되었습니다. 법무부에서 특별 공로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두 명 중 한 명에 뽑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지역에 머물며 어쩌면 숲 한가운데에서 함께 몰려다니지만 결국은 외로운 인간관계가 아닌 겸손한 작은 이들을 보호하는 작은 가시덤불이 되어 더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세상을 연결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전에 알던 사람들과는 단절되는 아픔도 있지만 결국 그 경계까지 도달한 겸손하고 작은 사람들과 공생관계를 맺는 새롭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 몸에서 난 가장 큰 사람이면서 하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작은 예언자직을 사는 우리 모습입니다.

-조재형신부-
‘낙엽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것입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났습니다. 꽃과 낙엽이라는 시입니다. “꽃이 말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낙엽이 말했다. 사랑의 끝은 먼 이별이라고./ 꽃이 말했다. 사랑한다면 꺾어서 소유하라고 낙엽이 말했다. 꽃잎이 마르면 낙엽보다 진한 그리움만 남는다고./ 꽃이 말했다. 사랑은 영원한 꽃을 피울 것이라고 낙엽이 말했다. 사랑이 뜨거운 것은 이별이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꽃이 말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낙엽이 말했다. 이제 나를 즈려밟고 가세요.” 화려한 꽃으로 사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낙엽이 되어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실패한 많은 사람은 떨어지지 않는 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많은 사람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10년간 서울대교구를 이끌었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이임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교구장 재직 중에 보람 있었던 일 3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당시에 교구청에 있었습니다. 교황 방한 준비는 제게도 기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조성이었다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헌신적인 사랑,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삶이 우리나라에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의 장례를 치룰 수 있었던 것 이라고 합니다. 장례를 준비하면서 추기경님의 빈 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부족함 때문에 상처 받은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했고, 부족했지만 열심히 살았던 사제로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낙엽처럼 내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떠나는 뒷모습도 아름다웠습니다.
한문으로 ‘宗敎’라는 말은 으뜸가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영어로 'Religion'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어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다시 풀어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엉켜있다면 이 또한 풀어서 평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으뜸가는 가르침의 핵심은 ‘비움’입니다. 내가 집착에서 벗어날 때, 참된 평화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엉킨 실타래는 무엇으로 풀 수 있을까요? 이 또한 비움입니다. 내려놓음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의 비움은 ‘회개’와 ‘회심’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을 정하고, 순위를 정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열정이 있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양심을 따라서 살았느냐를 생각합니다.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였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정원 제한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순위를 정해서 시험을 치르듯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쟁과 업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협력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반영억신부-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 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고, 예수님께서 하늘이셨지만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제 욕심과 탐욕,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일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먹질이나 욕설만이 폭력이 아니랍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잘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15,5).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영근신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11)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전과 후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으로부터 주어지는 은총이 구약의 시대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메시아가 오리라는 것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와 계심을 알렸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이미 그분과 함께 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 새로운 질서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가련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갈증을 풀어주고,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들리라.’
(이사 41,17-18 참조)
그렇지만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고,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한 1,9-11).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 11,12)
사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의 모습입니다.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는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침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 귀 기울여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 지십시오.
~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위한 준비의 신을 신으십시오.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잡으십시오.
~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인내를 다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며 깨어 있으십시오.”
(에페 6,10-18)
그러니 믿음의 귀를 지닌 우리는 이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요한이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다.” (마태 11,14)라는 말씀은 곧 당신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미리 오기로 한 엘리야라면, 당신이 오시기로 한 구세주이심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늘나라를 폭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방치하거나 빼앗겨도 안 될 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마태 11,15)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마태 11,12)
주님!
기쁨과 정의와 평화의 하늘나라가 불의와 거짓과 미움으로 폭행당하지 않게 하소서.
물질의 나라가 권세를 부리며 당신의 나라를 침략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다스림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 안에 와 계신 당신을 거부하거나 폭행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이오니, 당신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1-1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이 바로 엘리야’ 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은,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당신 자신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였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17장에 있는 다음 대화에 연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마태 17,10-13).”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일을(마태 17,1-9)
체험하고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메시아보다 먼저
온다는 엘리야가 정말로 왔는가? 왔다면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라는
말은, “저희는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보다 엘리야가 먼저 온다는 성경의 예언은 어찌 된 것입니까?
엘리야가 이미 왔어야 하지 않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성경의 예언대로 진행되고 있는가? 라는
의문에서 나온 질문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엘리야는 예언대로 이미 왔고,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다.” 라는 뜻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뜻인데,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대화에서도 세례자 요한이 당한 고난이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난에 대해서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일을 준비한 예언자이면서,
동시에 메시아께서 겪으실 고난을 미리 겪음으로써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보여 준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했던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구약시대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구약시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것은,
신약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앞의 9절-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마태 11,9-10)”>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신약시대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늘나라’ 라는 말은 신약시대를 뜻합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시대는 아직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의 시대였고, 신약시대는 메시아께서
오셔서 사람들을 직접 구원하시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런 위대한 시대를 준비한 예언자였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받은 박해와 당신이 받고 있는 박해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박해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박해한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는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세례자 요한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은 대부분
하느님께 충성(봉사)한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요한 16,2).
그렇지만 어떻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고 막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하고 막는 것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 것과 같은 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하늘나라를 빼앗지 못합니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를 거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박해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 마지막 예언자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이 구약시대 마지막 예언자로서
신약시대를 준비한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동시에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이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은 구원받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안다면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믿는 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요한 세례자를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하였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에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이기우신부-
평화가 사라지는 이유는 폭력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평화를 상징하는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힘 없는 백성들은 속절없이 폭행에 짓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로마 군대의 위세에 눌려서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고, 이런 위장된 평화 상태를 두고 로마인들은 ‘로마의 평화’, Pax Romana라고 부르며 자화자찬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평화에 대한 기대는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로마 이래로 세상이 기대하는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에 그칩니다. 따라서 침략을 받거나 공격을 당할 때를 대비하는 것이 평화에 대한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던 시절이 없었고, 따라서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양성하지 않고서는 평화를 바랄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질 대로 굳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모순적인 것은, 그러면서도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 행위를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치명적 결함입니다.
전쟁은 정의가 훼손되었을 때 훼손된 정의를 회복시키려고 일으킵니다. 또는 정치적이거나 영토적인 야심 때문에 침략을 하거나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 이제까지의 인류 역사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나서도 탐욕을 멈추지 않고 더 가지려고 획책함으로서 약소국과 피해국의 보복 심리를 자극하여 또 다른 전쟁의 불씨를 계속하여 키우고 있는 것이 국제 정치의 유치하고도 해묵은 현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폭력의 악순환 현상이 커질 대로 커져서 이제와서는 대량 살상무기가 발달하고 핵무기가 퍼지고 퍼져서 자칫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인류 전체가 공멸할 수도 있는 어리석은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대 문명의 어리석은 모순입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거짓 평화를 쳐부수시고 참된 평화를 가르쳐 주셨으며 또 실제로 참 평화의 씨앗이 되셨습니다. 그 씨앗이란 사랑과 정의, 섬김과 희생이고, 이를 통털어 십자가라고 부르며 서로가 먼저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것이 정신적 자세라면, 사회적으로는 양보를, 경제적으로는 손해를 감당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장 손해를 보시고, 가장 양보를 크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도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어가도록 휴전 상태에 있습니다. 평화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전쟁의 종식에 합의하는 정전선언과 평화를 보장하는 평화협정이 바람직해도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이룩하지 못하는 그래서 불완전한 거짓 평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느님의 평화를 실현시켜 줄 수 있는 하늘 나라는 거짓 평화를 획책하는 자들에 의해서 폭행당해 왔습니다. 그들은 거짓 평화의 가르침으로 하늘 나라를 가로막고는 그 나라를 빼앗아서 감추어 두고, 자신들이 꾸며 놓은 거짓 평화를 강요해 왔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동족에게 하느님의 평화에 대해 가르치면서 매우 인상깊은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이렇게 부르면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벌레 같은 유다인들과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오른손으로 붙잡듯이 확실하게 도와주시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움도 떨쳐버리고, 가련하고 가난한 이들을 먼저 도와주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하면 광야를 못으로, 메마른 땅을 수원지로 만드시는 하느님께서 유다인들과 이스라엘의 앞길을 개척해 주시리라고 장담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극찬하시기를,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을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배를 받던 나라들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국제연합에서 공인받은 일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또한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서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한 1990년대에 붕괴된 냉전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처지로만 보면, 벌레 같다던 유다인들이나 구더기 같다던 이스라엘보다 나을 것이 없는 한심한 상태인 것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 민족의 처지에 대해 깊은 연민의 정을 지니고 계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9년에 세계 성체대회를 우리 교회가 개최하도록 권하시면서 대회의 표어까지도 직접 골라주셨습니다. 그 표어가,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는 평화가 사라진 세계를 상징하고, 되찾아야 할 세계 평화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민족 간 평화의 강물이 흘러나오게 될 평화의 샘이 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역설하였습니다. 그 후 30여 년이 속절없이 흘렀습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만만치 않고 심상치 않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상호 간 갈등과 긴장이 팽배한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치 군사적으로 패권을 움켜쥐고 있는 미국이나, 경제 문화적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과 중국 등 이웃 나라들에게 평화를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누룩 같고 겨자씨 같은 우리의 평화 노력을 크게 쓰실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키재기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인물론을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는 세례자 요한이 세종대왕이나 징기스칸보다 위대한 것은 물론
구약의 엘리야나 이사야 같은 위대한 예언자들보다도 위대하고,
심지어 아브라함이나 모세보다도 위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위대함의 기준을 생각하게 되는데
우선 세속적 기준과는 다릅니다.
세속적 기준은 당연히 하느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고
이 세상에서의 성취나 업적이 그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둘로 나뉠 것입니다.
곧 자기 성취형과 사회 공헌형입니다.
자기 성취형은 징기스칸이나 알렉산델처럼 세상을 넓게 정복한 자들이고,
그러기 위해 힘을 키우고 그 힘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며
많은 사람을 죽인 자들이고 세례자 요한도 이런 자들의
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의 대표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회 공헌형은 그 반대로 사람을 살리는 데,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과학자나 위대한 발명가들도 이 부류입니다.
이런 사회 공헌형의 사람들이 세속의 기준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보다
당연히 위대하다고 하겠지만 하늘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이들이 결코 위대하지 않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하자면 그 크기를 잴 때 땅으로부터 재지 않고 하늘로부터 재는 것,
곧 키재기가 땅으로부터의 키재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키재기입니다.
또 하느님 은총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기준으로 하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많이 공헌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 건설에 더 이바지하는데
하느님 은총은 이 세상에서 크다고 일컬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지요.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
곧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거라고 했는데
물은 높은 곳에 고이지 않고 아래로 흐르고 흘러 가장 낮은 곳에 고이고,
그래서 가장 낮은 바다가 가장 크다는 뜻의 얘기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상선上善은 프란치스코가 지상선이라고 한 하느님이고,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젠가 영성 강의를 하면서 프란치스코가 말한 지상선이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물었더니 地上善이라고 하여 웃은 적이 있는데
프란치스코가 말한 지상선은 상선 중에서도 상선이라는 뜻이며,
이 지상선至上善은 모든 선의 원천이시고 그래서
모든 선이 거기서 나오는 하느님이 상선 중의 상선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 이런 기준에서 위대한 인물은 성인들인데
성인들 중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장 위대하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고요?
그것은 그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러 오신 당신 앞길을 마련했기 때문이고,
주님은 커져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0) | 2021.12.11 |
---|---|
2021 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0) | 2021.12.10 |
2021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0) | 2021.12.08 |
2021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0) | 2021.12.06 |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 (0) | 2021.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