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 5,17-26)
And some men brought on a stretcher a man
who was paralyzed;
they went up on the roof
and lowered him on the stretcher through the tiles
into the middle in front of Jesus.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As for you, your sins are forgi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며 그를 고쳐 주시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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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때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에 나온 내용이 생각납니다.
미국의 어느 대학교 교수가 볼티모어의 빈민가에 사는 200명의 청소년을 만난 뒤에 그들에 대한 미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너무 가난해서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25년 후, 다른 사회학 교수가 이 평가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 학생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사람들을 제외한 180명 중 176명이 변호사, 의사, 사업가 등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성공의 비결을 묻자, 한결같은 답변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할머니가 된 선생님을 찾아가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 비결을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결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했습니다.”
사랑보다 더 큰 교육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랑으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이 사랑을 받아들여야 제대로 된 교육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진정한 성공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온 갈릴래아 땅 전체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주옥같은 말씀과 놀라운 표징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 편인지를 알아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같은 편이라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계속된 충돌이 일어나는데, 오늘 복음이 첫 번째 충돌이었습니다. 즉,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입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 이름조차도 들먹일 수 없을 만큼 지엄하신 분인데 감히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시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내지는 중풍 병자를 보시며,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아’는 믿음을 가상히 여길 때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셨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죄를 용서해주셨으며,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보여주시며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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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로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를 낮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책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쉽지 않은 문제라고 하더군요.
세계보건기구 연구 결과를 보면, 1명이 자살할 때 주위의 5~10명에게 자살 충동을 심어준다고 합니다. 국내의 경우 하루 40여 명이 자살하므로 200~400명에게 자살 충동이 유도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가족은 어떻겠습니까? 그 자살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찾게 되고 그래서 뒤따라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살은 자신을 사랑해 준 많은 영혼까지 함께 죽이는 살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겠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생명의 영역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 생명을 지키는 노력이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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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왕권과 관련된 문제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병의 치유보다는 죄의 용서가 먼저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병의 치유와 함께 일어납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이 있었던 그 사람들은 중풍 병자가 죄를 용서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죄책감을 들게 만드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갖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책감은 나쁜 것이고 죄의식은 좋은 것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을 구분하는 법은 단순합니다.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죄의식은 신에게 용서받으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희한하게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도 있고 죄의식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나의 선택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죄책감을 선택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받을 방법은 매우 어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용서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말은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인데 자아에게 순종한다는 말은 자아를 하느님보다 높은 위치에 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죄를 짓게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이 하느님이 되어 자기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나’와 ‘심판하는 맛을 즐기는 자아’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됩니다. 둘 다 결국 자신이기에 나는 슬프면서도 기쁜 이상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죄를 지으며 내가 자아를 더 높여준 까닭에 나는 ‘자아의 기분’을 더 따라주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모두 태어납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중풍 환자처럼 영원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합니다.
구원이란 내가 왕으로 치켜세워 그것으로부터 심판받는 나를 불쌍히 여겨 자아의 왕관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의 힘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늘 중풍 병자의 모습입니다.
요즘 넷플릭스 ‘지옥’이 인기이다 보니 지옥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이비나 하는 것이라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오늘 중풍 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오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심판보다 강조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심판을 무시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문제는 ‘구원’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지옥 고지를 받으면 그냥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죄책감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용서가 있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죄의식’을 알게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의 죄를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했다면 어땠을까요? 하느님은 바로 용서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대의 잘못이라고 말하며 서로 심판하였습니다. 이들은 죄책감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책감으로 사람을 심판하거나 어떤 목표를 이뤄내기 위한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 죄책감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무지’(無智)에서 나옵니다. 아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어떤 일에 있어서 내가 나의 탓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심판은 항상 우월한 사람이 더 낮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내 안에 나를 심판해도 된다고 허락해 놓은 우월한 존재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우월한 존재가 자아임을 압니다.
그 사람들은 자아를 왕으로 여기며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중풍 병자를 주님 앞에 놓이게 만들어 ‘죄의 용서’를 받게 합니다. 죄의 용서를 받게 만드는 이유는 자기의 죄가 자아의 탓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그놈의 왕관을 벗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그분을 새로운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가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이라면 죄의 용서는 그 왕관을 벗겨 그리스도께 씌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용서를 청하는 것은 자아의 왕관을 빼앗아 주님께 드리고 자아를 왕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는 것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1807년 완성한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마치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생생한 사실적 표현이 일품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며, 당대 사람과 참석자들은 대관식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이 작품에서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대관식의 한 장면을 그대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실제 상황과 세부적인 표현이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여럿 있습니다. 대관식이 가장 잘 보이는 발코니에서, 위엄 있게 차려입고 대관식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귀부인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귀부인은 나폴레옹의 어머니인 레티치아입니다.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책이라 생각했고,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폴레옹이 권유한 정략결혼도 거부했다가 쫓겨나다시피 했던 남동생 뤼시앵 쪽의 편을 들었습니다.
레티치아가 나폴레옹에게 돌아온 것은 나폴레옹이 폐위된 뒤였습니다. 이를 두고, 레티치아의 전기인 『나폴레옹 어머니 레티치아』에서는 레티치아가 무조건 가장 고난에 처한 아이의 편을 든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 레티치아는 나폴레옹의 대관식에 끝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 뒤쪽에 흰 제의를 착용하고 앉아 있는 인물은 교황 피우스 7세입니다. 교황이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친히 파리까지 왔지만, 나폴레옹은 결국 스스로 관을 써버렸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런 일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인지 피우스 7세는 대관식 내내 소극적으로 대처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교황은 손을 들어 친히 나폴레옹을 축복하는 손짓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역사기록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림의 스케치 단계에서도 교황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지만, 레티치아 부분과 마찬가지로 도중에 일부러 훨씬 노골적으로 나폴레옹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쪽으로 그림을 수정한 것입니다.
[출처: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다음 블로그, ‘이리에시아의 이야기’]
나폴레옹이 그랬듯이 죄는 자기 스스로 자아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을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교회도 어머니도 저버린 죄를 어떻게 갚으면 될까요? 어머니에게 돈을 많이 드려야 할까요, 아니면 교회 건물을 지어주면 될까요, 혹은 그림만 수정하면 될까요? 왕관을 벗어 교회에 주며 교황과 어머니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밖에 없습니다.그것만 하면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죄에서 돌아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게 누구도 그런 제안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의식을 갖게 할 진정한 믿음을 가진 친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 감히 나폴레옹이 스스로 쓴 왕관에 손을 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폴레옹의 믿음이 한순간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어렸을 때는 신앙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겠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조금씩 뜨거워지는 물에서 개구리가 익어버리는 것처럼 영원히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이 때 첫 고해를 했을 때의 죄의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아의 힘에 사로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청해야 자아의 왕관이 벗겨져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기도를 쉼 없이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이 기도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인입니다. 누가 화가 없고 성욕이 없고 소유욕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간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의식을 심어주시는 이유는 끊임없이 용서를 청함으로써 자아에 왕관을 씌워주지 못하게 하심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의 죄의식을 고취해 사람들을 고해성사실에 보내는 이들이 오늘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https://youtu.be/lexAalnrR8Y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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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주님의 탄생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림과 기억은 ‘시간’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시간이 없다면 기다림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었다면 기억도 없을 것입니다. 기억은 시간 속에 생겨난 추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확인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약속을 하고, 시간 속에서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은 변화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그렇습니다.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은 모두 시간의 ‘틀’에 갇혀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은 우리들 기억의 산물이다.” 우리의 기억이 없다면 시간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에 대해서 뉴턴은 우주의 공간에 좌표처럼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좌표는 미분과 적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시간에 대해서 칸트는 허구이며 관념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2가지 차원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하루 24시간을 사용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삶의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역사가 기록되고, 문화와 문명이 만들어집니다. 나이는 물리적인 시간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늙고, 병들어 죽게 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결혼기념일, 서품기념일, 생일, 축일, 은경축, 본당 설립기념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시간과는 다른 시간입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술, 문학, 철학, 종교는 의미의 시간 속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살면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오직 인간만이 의미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성서는 의미의 시간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도 같나이다.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버리나이다. 사람을 진흙으로 돌아가게 하시며 인간의 종락들아 먼지로 돌아가라. 주님 당신만이 영원히 계시나이다.(시편90)”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미의 시간입니다. 참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물리적인 시간 속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이 ‘현실’이 되도록 함께하는 이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들은 예수님께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이웃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저는 봉성체를 다니면서 10년 이상 자리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가족들도 함께 아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풍병자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이 함께 할 때, 중풍병자는 힘을 얻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5년 동안 ‘중풍병자’인 아내를 위해서 헌신 하시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말도 하고, 비록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니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꿈과 희망은 혼자일 때는 그대로 꿈과 희망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함께 할 때면 꿈과 희망은 현실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함께하는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노력을 보시고,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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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웃이 되어라
-반영억신부-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 사람끼리 서로 돕고 의좋게 지내는 모습이 멀리 있는 사촌보다 더 가까운 사이로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살아가면서 이웃을 잘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잘 만나 복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웃에게 복이 되어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길 바라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 복을 지어 줄 수 있는 마음이 커지기를 희망합니다.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붕으로 올라가 천정을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 받았다”(루카5,20).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육체적인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병과 허약함 뿐 아니라 그 속을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고 판단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영혼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의 뿌리를 다스리시고 부족함을 충만하게 채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명의는 원인을 치료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고 말씀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는 군중이라는 장벽과 지붕이라는 걸림돌을 넘어 예수님의 능력을 만났습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넘어야 할 산을 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예수님시대에 병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그리된 것이라 여겼으니 ‘죄를 용서받았다’는 선언은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이웃을 잘 만났습니다. 그는 이웃이 있었기에 능력의 주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고 모두를 얻었습니다. 그야말로 잘 만난 이웃사촌이 복덩이 입니다. 중풍 병자의 믿음도 믿음이지만 이웃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수고와 땀이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웃의 믿음을 보고도 은총을 허락하시니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도 다 복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큰 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는 것을 미심쩍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시는 데 사람은 용서보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판단하고 심판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 마음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을 드러내셔서 믿도록 해주셨습니다. 판단과 심판에 앞서서 용서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놀라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두려움에 차서 신기한 일을 보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일은 오늘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신부님 고맙습니다. 제가 성경에 맛들이게 되었습니다.”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날, 몸이 많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안수를 받으며‘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몸이 많이 아팠지만 아픈 것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때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밥 대신 성경을 챙겼고, 성경을 읽는데 말씀이 꿀같이 달았습니다.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저는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게 되었고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이 ‘대단한 학자가 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되었습니다.”
큰 믿음에 바탕을 둔 행동에 신기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이고 구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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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용서하는 권한>
-송영진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선포되어야 한다.”는 “선포하여라.”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죄를 용서받는(구원받는) 일”입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 일을 증언하고 선포한 사람들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12월 6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 또는 “당신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
이라는 증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기 위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일은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회개로써 예수님의 구원에 응답해야만,
즉 ‘예수님의 구원’과 ‘나의 회개’가 하나로 합해져야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7-20)”
이 이야기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무슨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은 아니겠지만,
병에 걸린 일이 계기가 되어서 자기의 죄를(또는 자기의 처지를)
더 잘 의식하게 되었을 것이고, 회개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그 병자를 평상에 누인 채로,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 일은 병자 자신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사람들에게 막혀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은 병자에게는 극복해야 할
‘시련’으로 작용했는데, 그 상황을 병자의 믿음과 간절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상황 설정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은,
병자 자신과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모두 보셨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병자 한 사람만 ‘용서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라는 말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모두
‘용서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회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를 “사람아” 라고 부르신 것은,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듯이
그를 맞이하신 것으로 해석되는데, 인간이라는 존재는 누구나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나는 너의 죄를 용서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기 전에 죄의 용서를 먼저 말씀하신 것은,
그의 몸의 치료보다 영혼의 치료가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병자 자신이 몸의 치료보다 영혼의 치료를 더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치료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먼저 그의 영혼부터 치료하고 나서 그의 몸도 고쳐 주는 것이
예수님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건강한 영혼과 건강한 몸이 모두 필요합니다.
만일에 부득이한 상황에서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영혼의 건강인데,
그렇다고 해서 몸의 건강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시대 때처럼 영혼만 중시하면서, 극기고행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몸을 함부로 학대하는 일들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몸도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5,21-26).”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라는 말씀은, “둘 다 어렵다.”,
즉 “둘 다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둘 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둘 다 쉬운 일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둘 다 쉽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심으로써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고, 그 일을 통해서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서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라는 표현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증명해 보이려고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그들의 의심과는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중풍 병자를 고쳐 주려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권한’은 어떤 일을 할 권한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은 곧 구원하지 않을 권한도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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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으로,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 때문에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신 그분은 그의 영혼의 병을 먼저 고치신다.
그러나 그 옆에 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21절)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단죄하며 판단하고 있다. 이 판단이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나의 이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나의 잣대로 재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한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23-24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것과 일어나 걸으라는 명령 중 어느 것이 더 쉬운 것이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아니다. 두 행위 모두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며,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가능한 일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심으로써 밝혀주고 계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유다의 지도자들이 있었고, 군중들은 그 기적을 보고 두려움에 싸이지만,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26절) 한다. 여기서 오늘이란 루카가 구원의 미래성이 아닌 현재성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지상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누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 한다. 중풍 병자를 데리고 예수께 갔던 친구들의 희생으로 치유를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받은 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자세를 갖고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앙의 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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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루카 5, 26)
-한상우신부-
우리의 오늘은
그냥 오늘이
아니다.
어느 누군가의
소중한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은총의 살아있는
오늘이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참된
용서의 날이며
어루만져 주시는
치유의 오늘이다.
내어놓기 싫은
아픔을
내어놓는 것에서
용서는 시작된다.
용서는
믿음과 함께
가난한
이 여정을
걸어가는 것이다.
아픔도
예수님같이
아래로 내려와야
서로를 살리는
믿음이 될 수 있다.
믿음은
주님과의
소통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께서도
소통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
끝내 용서를
알게되는
소통의 오늘이다.
용서는
막힘 없는
복음의
소통(疏通)이다.
그래서
맡겨드려야 할
복음의 오늘이다.
아픔과 믿음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는
우리들에게
용서를 주시는
주님이시다.
용서로
우리 일상의
관계는 다시
은총이 되고
다시 건강한
소통이 된다.
우리에게는
용서의
평상(平床)에
실려
우리를
주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내는
믿음의
이웃들이 있다.
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믿음과 용서의
공동체이다.
오늘이
신기한 것은
함께 살아가며
맛보게 하시는
용서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기쁘고 고마운
것이다.
즉시 일어나
믿음을 들고
용서의
하느님을
찬양하는
용서의 오늘이다.
용서가
찬양이다.
말씀 나누기 - 대림 2주 월요일-함께 찬양하는 일이 많아지기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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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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