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12. 3. 07:35

2021년 12월 3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37년에 사제가 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의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고,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였다.
1662년에 시성된 그는 흔히 바오로 사도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로 불린다.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다니며 선교에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은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마태오 9,27-31)


Then he touched their eyes and said,
“Let it be done for you according to your faith.”

And their eyes were ope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야곱이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두 사람의 간청을 들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다음,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고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시며 눈을 열어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서칭 포 슈가맨’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식스토 로드리게스는 2집 앨범까지 내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그의 열렬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팬 2명이 수소문하여 그를 찾아 나서는 내용입니다.

가수 로드리게스는 미국에서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6장만 팔릴 정도였지요. 그런데 우연히 그의 노래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 못지않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정치적 부패에 맞서던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지요.

이렇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사는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인기를 전혀 몰랐습니다. 저조한 음반 판매로 소속사와 계약 해지가 되었고 가수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그가 라이브 무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신비적인 가수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음반을 발매한 미국에서는 그 어떤 인기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는 엄청난 인기와 모든 이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태 19,30)

이 세상 안에서는 꼴찌의 삶이겠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첫째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이나 좌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실 것입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자비의 청을 목청 높이 외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많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이 어디 있는지 잘 확인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이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통해 커다란 자비를 얻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소경을 눈뜨게 해 주셨는데 그 조건으로 당신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묻습니다. 믿음이 구원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대목이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습니다.
백 살 가까이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져요. 남을 위해 살았던 갓만이 보람으로 남습니다(김형석).

라이벌 의식.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처음에 조그맣게 시작했던 병원이지만, 입소문이 나서 계속 확장해서 꽤 큰 규모의 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은 몇 명의 의사를 채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다행히 새로 뽑은 의사들은 모두 성실했고, 환자들에게 친절하게 다가가며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당연히 병원은 더 유명해졌고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몇몇 환자들이 원장님께 의사를 정말로 잘 뽑았다면서 새로 뽑은 의사들이 잘하고 있는 점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장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 의사들을 하나둘씩 해고했습니다. 환자들의 사랑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만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이 동료 의사들에게 나눠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병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은 의사는 사라지고 원장에게만 아부하는 불친절한 의사만 남았습니다. 병원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져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원장의 라이벌 의식 때문입니다. 굳이 갖지 않아도 될 라이벌 의식으로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과의 경쟁의식을 피해야 합니다. 그보다 나와 함께 할 협조자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가 세상에 나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해 주십니다그 전에 예수님은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믿음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다는 것도 있지만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있습니다사실 사랑이 곧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믿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왜 우리를 사랑하시면 알아서 다 해 주셔야지 굳이 당신의 능력을 믿고 청하는 이들에게만 은총을 주실까요이는 능력 있는 분의 특징입니다바로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되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에덴동산을 내어주시되 선악과는 바치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없으면 넌 죽어그래서 다 해주냐물론그러나 내가 하느님임을 잊지 마네가 선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에게 선악과 하나는 좀 바쳐줄래?”입니다.

  

    만약 부모가 다 내어주기만 하되 부모로서의 권위와 경계를 알려주지 않으면 어떨까요사람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그러면 큰일입니다내가 다른 사람을 경계 없이 침범할 수도 있고 또 나도 그렇게 침범당해도 되는 줄 압니다.

  

    『벼랑 끝상담에 시누이로 인한 피해망상이란 사례가 있습니다남편의 위로 누나가 5, 아래로는 여동생이 1명 있는데 아내는 시누이들이 자신을 감시한다고 여깁니다특별히 큰 시누이는 돈이 많아서 결혼할 때 도움도 받았기에 거의 엄마뻘 되는 큰 시누이에게는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며 살았습니다. 

 

    시누이들은 학벌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그래서 대학을 다닌 동생의 아내를 무시하고 깔보고 핍박했습니다더군다나 남편이 몇 년 동안 외국으로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는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도 못하고 꾹 참다가 결국 조현병 증상까지 온 것입니다.

  

    시누이들도 물론 문제지만 피해자인 아내도 문제입니다큰 시누이가 들어와서 자신의 낡은 옷들을 시누이 맘대로 꺼내 버리고 자기가 좋은 옷 사준다고 나가서는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들만 사주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입니다시누이의 횡포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시누이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시어머니의 역할이 컸습니다그렇게 하는 것을 함께 살면서 묵인했던 것입니다어머니는 딸들에게 사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알려주지 못했습니다딸들에게 무언가 항상 못 해 준 것이 많다는 생각에 선을 설정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미안한 마음이 자신과 자녀와의 경계선을 허물고 자신은 자녀에게 집착하고 자녀는 부모의 영역까지 침범해도 된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불완전한 부모는 있어도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어쨌든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그렇다면 못 가르쳤다고딸만 많이 낳았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오히려 그런 미안해하는 마음이 자녀들을 망칩니다.

  

    부모는 에덴동산의 주인과 같습니다이미 다 주었습니다그런데도 자녀가 만약 선을 넘으려 한다면 어떻게 할까요온유하고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어야 할까요능력 있는 부모라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그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이미 주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애정을 갈구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자녀가 겸손하게 청하는 것이 아니라면또 그것을 꼭 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녀를 돕지 않습니다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이지 부모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어떨까요‘EBS 육아교육에서 의존형 아이를 만드는 엄마들의 심리에 대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단어들로 문장 만들기를 하는 것인데미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아이들의 일이니 아이들에게 맡깁니다그러나 한국 엄마들은 자주 간섭을 합니다아이들의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 엄마들이 관여합니다어떤 아이들이 자존감이 큰아이로 성장할까요당연히 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어준 미국 어머니의 자녀들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다 내어주고도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그럴 필요 없습니다아이들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교육해 주어 세상에 내보내면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나머지는 자녀들이 혜택이라고 여겨야 합니다자녀들이 부모에게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해야지해주면 해 줄수록 더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교만해져서 아무리 많이 해줘도 부모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자녀가 부모에게 불만을 품으면 그것은 부모 탓입니다자녀의 교만을 너무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부모의 능력을 믿고 부모에게 겸손하게 청할 때만 들어주어야 합니다남들은 눈이 다 보이는데 나만 안 보여서 하느님께 불만을 품는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은총을 주지 않으십니다왜냐하면생명을 주었으면 고마워해야 하는데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마십시오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아무리 많이 해줘도 결국 그 자녀는 부모까지 잡아먹게 됩니다휘둘리지 않는 힘도 자존감입니다그런 자존감 있는 부모에게 자존감 있는 자녀가 태어납니다부모는 자녀에게 미안하면 안 됩니다그러면 자녀가 사람과 하느님그리고 사람 사이에도 질서와 경계가 존재함을 배우지 못합니다예수님도 아버지와의 경계를 존중하시며 사셨습니다부모에게서 경계존중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는 세상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https://youtu.be/j13f6BpUy7g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흔히 볼 수 없는 일을 보여주는 프로였습니다특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프로였습니다어떤 이야기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찡하기도 합니다어떤 이야기는 지극한 정성에 가슴이 뭉클하기도 합니다주인을 기다리는 개의 이야기도 있었고몸이 아픈 할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있었고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지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욥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성실했고하느님을 섬겼던 욥은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었습니다재물도 잃어버리고자식들도 행방불명이 되고몸은 병들었습니다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모든 일을 받아들였습니다마리아에게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다남자를 모르는데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지난 10월입니다한 달 사이에 구급차를 2번 탔고응급실에도 2번 다녀왔습니다동창 신부가 시카고에서 잠시 놀러왔습니다뉴욕 구경을 시켜 주려고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다니려고 했습니다기분 좋게 자전거를 탔는데 15분 만에 자전거가 벽에 부딪치는 사고가 났습니다동창신부는 부상을 당했고구급차를 불러서 응급실로 갔습니다뉴욕 구경 대신 엘머스트 병원에서 2일을 머물다가 동창신부는 시카고로 돌아갔습니다저는 보호자로 구급차를 탔고응급실에서 동창신부와 함께 있었습니다다행히 동창신부는 보험을 들었기에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없었습니다.

 

이정도면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그런데 2주 후에 이번에는 제가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갔습니다파란불이라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좌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못보고 운전하였고저도 피하지 못하고 차와 부딪치고 말았습니다운전하던 사람이 경찰과 구급차를 불러서 저는 빨리 응급실로 가서 사진도 찍고 검사를 받았습니다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어서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물리치료를 받는데 플러싱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사고를 낸 운전자는 보험이 없다고 합니다난감해진 저는 방법을 찾으니 저의 자동차 보험에서 병원비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자동차 보험에 연락을 하니 저의 자동차는 회사 명의로 되어 있기에 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 사고가 난 경우는 보험 혜택을 받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그러면서 뉴욕 시에 치료비를 청구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변호사에게 의뢰를 해서 뉴욕 시에 병원비 청구를 하고 있습니다정말이지 세상에 이런 일이 제게도 있었습니다그래도 감사할 일입니다몸에는 큰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도 세상에 이런 일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이 오면 생길 놀라운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서 내 손의 작품인 자녀들을 보게 될 때 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리라." 비록 지금은 남의 나라 땅에서 멸시 받고무시당하지만 언제고 주님의 날이 오면 여명의 눈동자처럼 햇빛이 환하게 드러나듯이 기쁨과 행복이 찾아오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이사야 예언자의 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걷지 못하는 이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병고에 신음하는 이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오늘 눈이 먼 사람들은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고통 중에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우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어둠 속에서좌절과 절망 속에서시련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기다림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기다림은 나와 만나는 모든 것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양승국신부-

 

정말 오랜만에 가까운 친척들을 만났습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수도생활한답시고 바쁜척하며 미루다 미루다 보니, 거의 40여 년 만에 만나 뵌 것입니다. 사람 도리도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회한도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데 저희 이태석 신부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늦게라도 종교를 가지고 싶은데, 이태석 신부님 때문이라도 선택하라고 한다면 성당에 나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동료 수도자인 저보다 더 이태석 신부님의 생애며 신부님과 관련된 최근 돌아가는 동향을 더 잘 꽤뚫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남기신 삶의 흔적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감동과 영향을 끼쳤는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비록 짧은 삶을 살다 가셨지만 참으로 우리 교회와 사회를 위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을 하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생전 이태석 신부님께서 월간 생활성서에 기고하신 글을 묶은 책, ‘친구가 되어주실래요?’(생활성서) 이후 이태석 신부님과 관련된 괄목할만한 필독서가 최근에 발간되었습니다.

  

제목은 ‘신부 이태석’(김영사)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기를 집필하는 등 전기 문학의 대가이신 이충렬 작가께서 오랜 시간 공과 정성을 들여 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작가께서는 집필 과정에서 저희 살레시오회의 충실한 자문을 구하셨고, 여러 관련 자료들을 세심하게 수집하고 분석하셨을 뿐 아니라, 이태석 신부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참고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역작이요, 이태석 신부에 대한 공식적이면서도 최종적인 전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감에 찬 이태석 신부는 제임스 신부를 따라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된 마을을 방문했다. 그러나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는 악취를 참지 못하고 빈 들판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리고 톤즈의 너른 벌판에서 의술만 믿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와 선교 사제가 되겠다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하겠다는 마음이 먼저 필요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우러나왔다. ‘인간 이태석’이 무너지고 ‘사랑의 선교 사제’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늘 동방의 위대한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눈이 열렸으면

 -반영억신부-

 

지난 밤엔 비가 내렸습니다. 꿈나라로 가야 할 시간에 창문이 흔들리고 빗방울이 문을 때려도 추위를 두려워하는 서민들과 동안의 가뭄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이른 아침 피정 강의를 위해 길을 떠나면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강원 산간지방에는 하얗게 눈 덮인 세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오늘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듯하다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면서 먹구름 뒤에 분명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우리마음의 어둠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어 곧 백옥같이 희어지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 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예, 주님!”하고 대답하자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믿음의 열매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어 주시는 주님께 협력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맡기지 않으면 결실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를 하면서 정말 믿음으로 하고 있는 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서도 효과 있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입으로는 기도하지만 온 마음을 다해 믿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되리라.’고 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먹구름이라도 그 뒤에 밝은 태양이 있듯이 어둠 속에서도 분명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찾기도 전에 그분이 먼저 나를 생각하고 찾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눈뜨는 것보다 먼저 믿음에 눈떠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눈뜬장님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감고 그분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눈을 뜨십시오! 믿음으로 눈을 뜨십시오. 신앙의 눈, 영적인 눈이 뜨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눈! 표정의 90%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이 슬프면 그것은 슬픈 표정이다.

사랑의 시작은 한 쪽 눈을 감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윙크라고 한다.

사랑의 완성은 두 눈을 다 감는 것,

사람들은 그것을 눈이 먼다고 한다.

두 눈 다 뜨고 맨 정신으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정철-

콩깍지가 덮이면 어떻게 되는 줄 알죠? 보이는 게 없답니다.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셨을 때, 그들은 “예, 주님!”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치유해 주셨다(27-30절). 이 소경들 치유의 기적은 하나의 “표징”으로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앞에 “빛”을 필요로 함을 가르쳐주고 있다.

 

두 눈먼 사람들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직 참된 빛, 곧 율법과 예언서가 예고한 하느님의 외아들을 볼 수 없었다.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자마자 시력을 되찾았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심을 믿으면 오류라는 눈멂이 사라지고 곧 참된 빛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눈먼 이들이 외치는데 예수님께서는 얼른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물음을 던지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으로 가신다. 그리고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쳐 주시며 아무에게도 일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군중들에게서 칭송을 받는 것을 경계하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듣기만 하고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으로 이 기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눈멀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그때 일어난 일을 알리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지만, 그 일을 알렸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루카 8,39) 하셨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느님께만 영광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소경들의 되찾은 시력은 우리가 항상 청해야 할 신앙의 빛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내지도 못하면서 너무나 쉽게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 빛은 우리가 청하고 받아들일 자세만 되어있다면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우리 인간의 역사 내에 오심의 신비를 거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것이며,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인 “빛=밝음”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 소경들의 치유 사화는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그 신비를 이해하고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것을 체험할 수 있으려면 이 소경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큰 믿음의 “빛”이 필요한 것이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 29)

-한상우신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떠나는 것이
다시 만나는
참기쁨이다.

새로운 만남을
복음으로
만들어내시는
기쁨의
하느님이시다.

만남과 떠남이
있기에
삶은 아름답고
간절하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붙들어
가두어놓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떠남이 있다.

복음을 위해
떠나는 이들이
있기에 사랑은
단절이 아니라
이어주는 기쁜
소식이 된다.

하비에르
선교사의
발자국이
우리를
위로한다.

생명과 바꿀
선교의 길에서
생명의 길을
뜨겁게 다시
만난다.

삶을 내어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선교는
가장 간절한
기도이다.

간절한 기도는
이국땅에서
하느님께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것이다.

기도가 있기에
목숨을 걸
하느님이 계시고

선교가 있기에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알게된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이들에게
기다림의 사랑을
함께 살아가는
사랑이다.

기다림이
선교이고
기다림이
사랑이다.

이 위대한
선교사의
발자국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다시 배우는
대림이다.

 교만, 영적인 시각 장애

 -김찬선신부-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은 주님께 쫓아오며 자비를 청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자비와 관련한 성찰을 해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청원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일 좋아하는 청원 기도라고 했지만

2-30대 때는 제일 싫어하던 기도였지요.

자비를 달라는 제가 불쌍하다고,

더 나아가서 참 비참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저는 제가 불쌍한 것을 인정할 수 없었고,

하느님께도 그런 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교만했던 겁니다.

 

그런데 교만함, 이것이 참으로 불쌍하고 제일 비참한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먼 것은 교만함에 비교하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첫째로 교만은 자기의 본모습이랄까 전모를 못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런데 참으로 모순입니다.

 

왜냐면 교만은 자기 밖에는 모르는 지독한 자기 집중인데

그렇게 자기를 보는데도 자기를 제대로 못 보기 때문이고,

제대로 못 보는 것은 자기의 죄와 비천함은 보기 싫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주제를 모르고 날뛰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비참함과 비 구원을 모르고

자비를 청하지 않음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비참함과 비 구원을 보고 인정해야,

그리고 이 비참함과 비 구원은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구원자에게 구원을 청하고 자비를 청할 텐데

인정치 않으니 그야말로 구제불능이지요.

 

그렇습니다. 교만은 자기만 보고 자기 밖에는 못 보게 합니다.

그런데 자기 밖에는 못 본다는 말은 자기의 안과 밖이 있는데

자기 밖에 수많은 사람이 있고 하느님이 계셔도 못 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만한 사람의 무시無視 현상입니다.

한자에서 무시를 그대로 풀이하면 시력이 없다는 뜻도 되고,

우리말의 업신여김의 뜻처럼 있는 것을 없다고 보는 뜻도 됩니다.

 

제 생각에 업신여김은 없이 여긴다는,

분명히 사람이 있는데도 투명 인간처럼 없이 여김의 준말입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엄청난 폭력이요 죄이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심각한 장애입니다.

 

이 장애는 인격적인 장애일 뿐 아니라 영적인 장애입니다.

인간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믿을 수 없고 볼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눈먼 이들,

오랫동안 눈먼 것 때문에 한껏 겸손해진 눈먼 이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 주님!"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은 겸손하고 믿었기에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의 능력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눈이 멀었어도 주님을 알아본 그들이 부럽고

눈이 멀쩡해도 주님을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제가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늘 눈먼 이들처럼 저 또한

"주님,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