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0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베드로 사도의 동생이다. 갈릴래아의 벳사이다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였다(마태 4,18 참조).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이끌었다(요한 1,40-42 참조). 그는 그리스 북부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하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마태오 4,18-22)
Come after me,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의 말씀은 선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아에게,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자,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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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교에서 몇 년 동안 강의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하다 보면 좀 더 관심이 가는 학생이 생기더군요. 이런 학생에게는 좀 더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게 되고, 관심을 가지고 더 주목해서 보게 됩니다. 공평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특히 더 관심이 가는 학생은 꼭 있었습니다.
어느 미술 학원에서 선생님의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관심이 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학생이 연습하는 작품을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소묘 연습을 시키고는 잘하는지 둘러보다가, 관심이 가는 학생의 스케치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탄을 잡고 특별히 수정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이날 후로 미술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더는 그림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학생은 선생님의 도움이 자신의 그림 솜씨가 형편없어서 해주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른 학생은 아무도 이런 식의 수정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호의가 오히려 이 학생에게는 나쁜 쪽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를 통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이, 뒷걸음질하게 만드는 절망의 생각이 아닌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르심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제자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세속적인 마음만 가득했다면, ‘제자가 된다고 돈과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제자가 되어서 뭘 하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부르심에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들의 모습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하다 말고 그물을 버리고 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긍정적인 마음이 가득 찼으며,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부르심에 온전하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자기 마음의 상태를 보면, 온전하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해야 하며, 절망의 생각이 아닌희망의 생각으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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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년필로 글 쓰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현재 보유하고 있는 만년필의 수도 20자루가 넘습니다. 아주 고가의 만년필은 없지만, 그래도 만년필을 계속 구매하게 됩니다. 괜찮은 만년필로 글을 쓰면 글이 더 잘 써지는 느낌이거든요.
이 만년필을 발명한 사람은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 큰 보험 계약을 성사시키려는 순간, 고객이 계약서를 작성하다가 잉크를 엎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새 계약서를 다시 가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경쟁 보험설계사가 고객을 빼앗아 계약한 것입니다. 그는 ‘잉크가 엎질러지지 않았으면….’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펜 안에 잉크를 담는 만년필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경쟁 보험 설계사,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계약한 고객 모두가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긍정적인 방법을 모색했기에 그는 새로운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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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무책임과 우울함을, 필연의 책임과 기쁨을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네 명의 사도들을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중에 안드레아가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첫 제자였습니다. 처음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하는 말을 듣고는 곧바로 그를 따라가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라고 시작합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께서 ‘우연히’ 거니시다가 그들을 발견한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은 아무 생각 없이 다니시다가 우연히 제자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과 안드레아는 그런 분임을 알고 있었고 비록 그렇게 보이더라도 이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인 부르심임을 믿고는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필연으로 여기면 ‘책임’이 따릅니다. 따라서 신앙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주님 뜻으로 여겨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로 쓰시는 이들에게 하시는 첫 번째 일은 ‘우연은 없다’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야 당신이 우연처럼 부르시는 것에도 생명을 걸고 나서기 때문입니다.
저도 뒤돌아보면 태어나서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이 저에게는 ‘행복’을 찾는 시작이었고, 우연히 접하게 된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행복은 주님을 따름에 있음을 알게 하여 사제가 되기로 하게 된 것도 실제로는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속성 안에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자녀에게 하는 일이 우연일 수 있습니까? 우연히 자녀를 임신하고 우연히 낳고 우연히 기르는 어머니는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가 비록 어머니가 우연히 자신에게 해 주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이 담긴 필연입니다.
아이가 어머니가 나에게 해 주신 말이 우연이라고 느끼면 그것은 은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필연으로 다가오면 아이는 그 말씀 때문에 자신에 대한 책임 있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어머니께서 제게 “엄마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거다. 앞으로 네가 잘 돼도 네가 잘해서 잘 된 것이고, 다쳐도 네가 잘못해서 다친 것이다.”라고 말해주신 것이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여겼다면 저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저는 우연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해 주신 말씀으로 들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에 책임을 지려 살아왔고 그것이 저에게 자존감을 주고 저를 성숙시켜 왔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기쁨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라는 책을 쓴 임세원 교수는 2018년 12월 31일 조울증 환자가 휘두른 칼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의사이십니다. 이분은 피할 수 있었으나 간호사가 위험할까 봐 나와서 피하라고 알려주다 그런 변을 당하였습니다. 이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우울증이 무엇인지 몰라요.”
그렇게 오래 공부하고 많은 환자를 접했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환자들이 하면 힘이 빠지고 화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임 교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몸에 원인 모를 통증이 찾아오고 일상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살 시도를 합니다. 소주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먹고 반병은 몸에 뿌리고 반병은 차에 둔 채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계획하고 실행하려는데 차 열쇠가 없는 것입니다. 열쇠를 찾으려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잠자는 아이들을 보고는 한없이 울고 다시 살아보자, 나에게 기회를 다시 주자는 마음으로 3년 정도의 극한 우울증을 극복해내었습니다.
이분이 우울증이 오는 원인을 ‘왜?’라고 찾았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왜 우리 자녀만, 우리 부모만? 다른 사람들은 죄짓고 잘도 사는데…?’ 등의 물음에 해답을 할 수 없을 때, “그냥!”이라는 해답을 주면 이것들이 쌓여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접 우울증을 극복해본 분이라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 하루하루를 적극적으로 살아보자는 노력입니다. 명상하고 운동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사람들을 만나는 등의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이라고 여기면 지금 내가 할 일은 없어지지만 그것이 삶을 우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다 주님께서 주시는 필연이라고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2000년 중국 산둥성에서 한 남자가 의료 사고로 뇌사상태가 된 아내를 극진히 간호해 8년 만에 깨어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 몸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지만 2008년 장 씨의 아내는 임신하게 됩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아기를 낳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죽어있는 저를 살려주었습니다. 제가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이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다행히 건강한 딸을 출산했고 산모도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장 씨는 아내와의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책임이 따릅니다.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런 믿음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아마 이 결혼을 우연이라 여기고 다른 사람을 만나 살았어도 지금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필연적이라 여기면 희생해야 할 것도 생깁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나에게 축복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필연으로 믿는 이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매 순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일곱살 때 제게 해주신 말씀이 어머니는 저에게 그냥 우연히 말씀하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있었고 저는 사랑이 담겨있는 어머니의 말씀과 행동에는 우연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우연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임있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것이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냥 우연으로 해답 없이 넘길 것인지, 아니면 필연으로 믿고 응답할 것인지.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엑스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 동안에도 며칠 동안 설교를 하며 단 한 명이라도 더 회개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순간도 필연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필연은 자신과 이웃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는 것은 축복에서 제외되지만 필연적이라 믿는 것은 모든 것이 축복이 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https://youtu.be/IftBTS9tIIQ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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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오늘은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신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입니다. 돌아오는 12월 8일 새 교구장님의 착좌식이 있으면 전임 교구장님들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혜화동의 주교관으로 자리를 옮기시리라 생각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추기경님께서는 1970년부터 51년 동안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2002년부터 10년 동안 보좌주교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2012년부터 9년 동안 교구장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신했던 것처럼 추기경님께도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8년 동안 추기경님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었습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교구 사목국에 있으면서 주교님 곁에 있었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교구 성소국에 있으면서 교구장님 곁에 있었습니다. 사목국에 있을 때는 주교님을 모시고 지리산 산행을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지구력과 뚝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 근처에 5층 건물이 나왔습니다. 관리국에서는 원로사목자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청소년국에서는 담당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저는 예비 신학생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놓았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교구의 미래를 위해서 예비신학생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할 일입니다. 2014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한국 방문이 결정되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방한 중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교황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영성, 신심분과의 일을 맡았습니다. 시복식의 장소에 대한 의견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여의도의 다리 위에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체육관에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광화문에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광화문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최선의 결정이었습니다.
서품 대상자들과의 면담에서 교구장님께서는 3가지의 질문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부제님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대답을 하였고, 사제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부족하지만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두들 진지하게 본인이 누구인지 고민하였고, 교구장님께 있는 그대로 자신들의 모습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주변의 모든 물건들은 ‘정체성’이 있습니다. 스피커는 소리를 전달하는 것이고, 스탠드는 불을 밝히는 것이고, 컴퓨터는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고, 인터넷은 정보를 검색하고, 소통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교구장님의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두 번째는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끄셨고, 나는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입니다. 학생들은 신학교에서 기도 중에, 친구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부를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진흙과 같았던 자신들을 질그릇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어떤 학생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지금 나는 혼자의 힘으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교구장님의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이끄셨을까? 나는 또 어떻게 변화 되었을까?
세 번째는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였습니다. 학업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나이가 많은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건강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고, 시기와 질투가 십자가인 친구도 있었습니다.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교구장님의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일까?’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이끌어 주셨고, 나는 어떻게 응답하였는가? 지금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를 묵상한다면 11월의 마지막을 피정하는 기분으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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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름으로써 얻게 되리라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사도의 모범적 삶을 잘 살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지향은 어떤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인 의지로 따름으로써 끝까지 가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순명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리재고, 저리재고 하지 말고 "곧바로" 버리고 떠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저한다면 그것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응답할 수 있는 영혼은 자유롭습니다. 도전할 때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순명과 실행을 통해서 주님의 섭리와 안배를 깨닫게 됩니다. 나의 힘을 빼는 것이 믿음이고, 그리하면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나를 믿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셨습니다. 믿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름으로 확고하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따를 수 있는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다’‘나를 뽑아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며 형에게 말하고 예수님께 자신의 형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마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주님을 따름으로서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먼저 우리의 믿음을 다져야 하겠습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께서 크신 분이셨듯이 우리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의 모범과 표양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과 줄다리기를 하지 말고 곧바로 따릅시다. “예,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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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4,18-22: 즉시 그물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다.
-조욱현신부-
안드레아는 “남성적인” 이란 뜻으로 친절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고 열린 마음을 가진, 열심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벳사이다의 요나의 아들이며(마태 16,17), 베드로의 동생이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거기에서 사도 요한을 알았으며 그와 함께 처음으로 예수를 따랐고,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하였다(요한 1,35-42).
사도단에서 안드레아 사도의 역할을 그리 많지 않으나 매우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굶주린 군중 앞에 안드레아는 예수께 어린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아이가 내어놓은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행하셨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소위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는 X형으로 된 십자가 위에서 Patrasso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보관되어 있던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를 동방 교회에 되돌려 주었고, 후에 Patrasso로 옮겼다.
안드레아 사도는 사도 중에 첫째 “선교사”였다. 처음 부름을 받을 때 함께 있던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즉시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그리고 그를 예수께 데려갔다. 우리의 성체성사도 “우리는 주님을 만났다!”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지향으로 미사에서 출발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그들이 우리와 함께 아버지의 식탁에 모이도록 서두르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고 계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그물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즉각적인 순종을 바라신다. 그러면 이 가난한 두 어부가 버렸으면 무엇을 얼마나 많이 버렸겠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사람의 재산보다도 그 마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탐내는 마음과 무엇을 소유하려는 마음을 버렸을 때, 그들은 많은 것을 버린 것이다. 자기가 소유한 것과 그것을 가지려는 마음 자체를 버리는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른 그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아 마음대로 탐낼 수 있었던, 그들보다 잘사는 사람들이 가진 것만큼 많이 버렸다. 그 버림을 얼마나 큰마음으로 이루었느냐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19절) 이 말씀을 따라 어부들은 하늘의 아버지를 얻기 위해 세상의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세속적인 낚시에서 거룩한 낚시로 바뀌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물고기를 낚듯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깊은 오류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낚도록 부르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세상,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의 그물로 사람을 잡도록 사도로 삼으셨다.
사도들은 즉시 그물을 버림으로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채로는 누구나 거룩한 것에 도달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이렇게 살면서 결국은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하고 자신 있게 말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의 복음선포는 은총 체험을 통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믿음과 순종을 보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은 한창 일하던 중이었지만, 미루거나 꾸물거리지 않았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라갔을 때 그랬던 것처럼(1열왕 19,20-21 참조), 그들은 ‘집에 가서 식구들하고 이야기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20.22절) 하느님의 뜻 앞에는 한 치도 망설임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모습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응답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듣기는 하면서도 실천을 올바로 하면서 그분을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우리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생활을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고 주님 앞에 나의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할 것이다. 좀 더 우리의 삶의 자세를 하느님 안에 이어가게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 교만 그리고 집착을 피하면서 주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을 드리며 실천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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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태 4, 20)
-한상우신부-
그물에 집착하면
그물에 갇히고
그물에
막혀 버린다.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실천은
묶여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따른다는 것은
가장 소중한
우리 삶의
현재진행형이다.
허상과 모순을
떠나지 않고서는
새로운 만남이란
있을 수 없다.
참된 만남은
언제나
새로워지는
만남이다.
새로워지는 것이
서로를 올바르게
이끄는 변화이다.
버리고
따르는 것이
깨어있는
순명의 참된
삶이다.
제대로 보게
될 때 제대로
따를 수 있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또한 따름의
기쁨이다.
삶을 새롭게
보게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변화이다.
삶의 의미는
우리의
선택과 결심으로
더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자아(自我)를
버리는 것이
서로를 살리는
길이 된다.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실천이다.
성 안드레아
사도를 통해
우리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새벽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것이다.
삶이 주는
최고의 기쁨은
주고 받는
사랑의 기쁨이다.
주님과 하나되는
일체의 기쁨이
따름의 정수이다.
목마른
우리자신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대림(待臨)같이
성숙의 여정을
걸어간다.
성장과 성숙이
빠져버린 사랑은
다시 그물에
걸리는 노예의
아픔이다.
따른다는 것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의
가슴벅찬 뜨거운
일상의 만남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과
따르는 가운데
다시 만나게되는
갈릴래아의 일상은
아주 딴판으로
다가온다.
따름은
놀라운 일상을
건져올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이다.
대림의 발걸음이
성탄의
기쁜 만남을
낳는다.
실천없는 신앙은
새로운 일상의
예수님을
가로막는
또 다른
그물이다.
그 그물을
곧바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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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길손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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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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