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2. 1. 07:28

2021 12 1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Great crowds came to him,
having with them the lame, the blind, 
the deformed, the mute,
and many others. 
They placed them at his feet, 
and he cured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광야에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독서의 중요성을 거의 모든 사람이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난 양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이 담긴 책을 출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책이든 저자의 엄청난 내공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내공이 담겨있는 책을 읽고 따르면서 자신의 내공도 높일 수 있기에 독서는 정말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집 센 사람입니다. 고집이 너무 세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기에 책을 읽어도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 발전도 있고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과 같은 내용만 읽으면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됩니다.

저 역시 다양한 책을 읽으려 합니다. 다양한 책을 통해 다양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고집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통한 은총이 얼마나 컸는지 사흘이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가리키는 말로, 성경을 보면(창세 40,13; 여호 1,11 참조) 하느님의 도움은 사흘 후에 내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즉, 이제 사흘이 지났으니 하느님의 도움이 드러날 시간이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있었던 군중이 가다가 지쳐버릴지 모른다는 현실 생활을 지적하면서 빵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남자만도 사천 명(마태 15,32 참조)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전에 빵 5개로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4천 명이면 빵 3~4개면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있는 것을 가지고 필요한 사람을 먹이신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할 것이 3~4개의 빵만 있었다면 이것으로도 충분히 배불리 먹이실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봉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헌의 마음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봉헌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는’(이사 25,8 참조) 분이십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이기에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겸손한 마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키케로).

죽음

죽지 않는 약을 찾아 처절한 노력을 기울였던 중국의 진시황제는 생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었던 것으로 유명하지요. 따라서 몸에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챙겨 먹었을까요? 실제로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을 동쪽 나라로 파견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는 나이 쉰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사인은 오래 살기 위해 장기간 복용했던 단약 때문이었습니다. 이 단약에는 수은이 들어 있었고, 이로 인해 이른 나이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지 않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는 삶이 행복할까요? 어느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죽지 않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기적의 날이라며 너무 좋아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축복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일 30만 명이 사망했는데, 죽는 사람이 없어 인구증가가 계속 이루어졌고, 식량부족으로 이어져 4개월 뒤에는 사회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죽음이 없어야 할까요? 죽음은 살아있는 이에게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살아있는 이에게 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이로써 또 다른 세계인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죽음은 절대로 부정의 단어가 아닙니다. 

 도전을 멈출 때 사랑도 멈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4’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이 기적이 이뤄진 곳은 갈릴래아 부근의 산입니다산이기는 하지만 광야로 표현된 것을 보니 척박한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집에 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습니다갈릴래아 부근이라면 사실 조금만 가면 동네가 나오는 곳이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어떻게 이리 광야에서 머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심지어 배고픔까지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그러면 이들은 본인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일까요그렇습니다그래야 주님과 오래 머무를 수 있고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이들은 자신들에게 해 주시는 기적들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였다고 합니다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런 축복을 얻은 이유가 있습니다이 기적 바로 위에 예수님께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이들은 무작정 병자들을 데려왔고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병자들을 산으로광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어쩌면 엄청난 모험입니다도전입니다이들이 안식의 빵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마태오는 바로 이들이 병을 고치기 위해 그 먼 곳까지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도전합니다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영화 코다’(2021)는 루비라는 노래를 좋아하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의 이야기입니다루비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부모님과 오빠의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바로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일이었습니다형편이 좋지 않아서 인부를 쓸 수 없었고 루비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청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무전을 받을 한 사람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생선 냄새가 난다고 왕따를 시킵니다하지만 루비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따라 합창부에 들어가려 합니다합창부 선생님은 매우 엄격하신 분이고 친구들이 쳐다봐서 루비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도망칩니다그러나 다시 용기를 내서 음악부에서 노래합니다.

  

    루비의 음악 실력을 알아본 선생님은 자신의 모교인 버클리 음대에 도전해보자고 합니다대학 갈 돈이 없다고 말하니 장학금을 타면 된다고 합니다그러나 루비는 집안일과 음악수업을 병행할 수 없습니다여기서도 혼나고 저기서도 혼이 납니다하루는 배에 함께 타지 못했는데 해경에게 잡혀 어업을 못 할 지경까지 갑니다이에 부모님은 루비 탓만 합니다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비도 마지막 음악 발표회만 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발표회에서 루비가 행복하게 노래하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마음을 바꿉니다자신들이 집은 어떻게든 꾸려가겠다 마음먹고 루비 모르게 버클리 음대 입학원서를 낸 것입니다

    실기 시험이 있는 날 가족들도 함께 학교로 갑니다그러나 루비는 혼자서는 실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선생님도 올라와서 루비를 도와줍니다가족들은 위층으로 몰래 올라와서 루비를 응원합니다. 그것을 본 루비는 수화로 가족들에게 노래를 불러줍니다그러자 제 목소리가 나옵니다가족에게 말하듯이 노래할 때 억눌렸던 목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루비는 유일하게 가족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그렇게 대학에 합격하고 가족은 루비를 떠나보내며 행복의 포옹을 합니다.

  

    루비에게 가족은 짐이 되는 존재처럼 여겨졌습니다하지만 가족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루비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그러니 가족을 떠나도 가족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도전해야 더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들도 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하느님을 힘입어 산다는 말은 하느님 없이는 어떤 능력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그러니 하느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어떤 능력을 발휘해 보아야 합니다그리고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 하느님과 함께 할 때 엄청난 능력이 발휘됨을 느낀다면 그분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됩니다이것이 빵 일곱 개를 먹고 일곱 바구니곧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도전해서 성공하면 행복하다고 합니다실패하면 현명해진다고 합니다도전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도 합니다그러나 우리는 이런 목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분과 오래 머물 수 있는 힘을 지니기 위함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입니다주님의 힘으로 도전해서 성공해야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로라 윌킨스와 같은 사람이 그 대표적인 인물일 것입니다그녀는 중국인이 휩쓸던 다이빙 종목에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했고 7주간 병원에 입원하며 연습을 할 수 없었습니다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이 말은 주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이것을 알면 그분께 붙어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안식의 빵을 먹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아픈 사람을 고쳐달라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서 주님께 대한 찬양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주님의 힘으로 매일 도전합시다아기는 걷기를 도전하면서 부모를 더 사랑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더 사랑하게 됩니다도전 없이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증가하지 못합니다.


  https://youtu.be/UyDNVgTMXG0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바둑 용어 중에 미생(未生)’이란 말이 있습니다살아 있지만 아직 완벽하게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잠시 방심하면 상대방의 공격에 의해서 죽을 수 있는 돌을 의미합니다잘 관리해서 2집을 확보하면 바둑판에서 살아 있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실수해서 2집을 확보하지 못하면 바둑판에서 죽은 돌이 되어 사라질 수 있습니다우리의 주변을 보면 미생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는 치료가 잘 이루어지면 일반병실을 거쳐서 퇴원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잘못되면 생을 마치면서 영안실로 갈 수 있습니다그러기에 중환자실 에 있는 환자들은 더욱 각별히 돌보아야 합니다모판에 있는 벼는 모내기를 통해서 논으로 옮겨 심습니다논으로 옮겨진 벼는 땅에 뿌리를 내려야 비로소 가을에 곡식을 만들어내는 벼가 될 수 있습니다농부는 옮겨 심어진 벼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예전에 방영되었던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대기업에 입사한 인턴들의 이야기입니다인턴은 일정기간 일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실적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능력과 실적을 인정받은 인턴은 정식직원이 되어서 일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인턴 기간 중에 능력과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식직원이 될 수 없고다른 회사를 알아보아야 합니다드라마 미생은 직장생활의 애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총과 칼은 들지 않았지만 전쟁터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는 치열함이 있습니다신앙인에게 은 아직은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현세의 삶은 어쩌면 모판에 심어진 벼와 같습니다인턴이 능력과 실적을 통해서 정식직원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까지 기도와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인턴은 동료들과 경쟁해야만 정식직원이 될 수 있습니다신앙인들은 경쟁할 필요는 없습니다하느님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익숙한 사회는 난민들을 경쟁에서 도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사람을 이익과 발전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적자생존양육강식의 경쟁이라는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은 난민을 보듬어 주려하지 않습니다진화의 법칙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것입니다자연을 다스린다고 하면서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언젠가는 썩어가는 연못 속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르면서 말입니다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을 지출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아픈 이들에게 약을 주고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에는 인색할 것입니다세상을 바꾸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그럴 힘도 없습니다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만이라도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세상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면 좋겠습니다우리가 변하는 그만큼은 세상이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꽁꽁 얼은 강에는 어김없이 숨구멍이 있습니다그 숨구멍이 있기에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있다고 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충분합니다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늘 부족합니다.’ 요즘 우리들은 성서 말씀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래와 꿈을 듣게 됩니다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날에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기준에서는 성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니셨고그 꿈을 이웃들과 나누셨으며가난한 이들과 아픈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오늘 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통해서 희망을 찾고위로를 얻으며그분과 함께 할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울 충분한 것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세상의 기준에서 성공을 바라기 보다는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얻을 수 있는 보람과 기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그럴 때우리는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공을 벗어나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당신의 막대와 지팡이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이번 대림 시기는 크게 전례의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11월 28일~12월 16일까지가 전반전이라고 할 수 있고, 12월 17일~24일까지가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의 전례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깨어 기도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반면 후반전의 전례는 임박한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전반기 매일 미사 첫 번째 독서는 이사야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언자 중의 예언자, ‘예언자들의 왕’으로 손꼽히는 이사야는 기원전 765년에 태어나, 742년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으며, 700년대 신앙과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던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단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동과 우여곡절의 시절, 갈팡질팡하던 백성들에게 희망과 격려의 언어로 위로했던 참 예언자였습니다.

  

40여 년간 예언자로서 백성들의 영적생활을 동반했던 그의 메시지 핵심주제는 주님을 향한 백성들의 불충실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결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듣기 좋은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잡기 힘든데, 가슴을 후벼 파는 ‘지적질’과 듣기 싫은 멸망과 심판을 선포하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겨웠을까, 상상이 갑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언어는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예언은 심판하고 부수는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소생시키고 부활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 예수님의 도래를 가장 세밀하고 밝히고 계시한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주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서 깊이 통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진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메시지가 얼마나 참되고 강렬했으면 예수님께서도 즐겨 읽으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사야 예언서 안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인생 드라마 각본의 원본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각본에 따라 당신의 인생을 장엄하게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은 너무나 신랄하고 강렬해서 청중들의 가슴을 칼로 후벼 파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는데, 다른 한편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없이 부드러운 어조로 백성들을 달래고 격려하며 신속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가 그렇습니다.

  

“그날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이사야서 25장 6~8절)

  

보시다시피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찼습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마음을 건드렸고, 삶을 변화시키도록 자극하였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에서 이사야 예언자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름 위의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이 삶의 현장에서 직접 느끼고 아파했고 살았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한 언어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언어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니라 인생의 선배이자 동료 인간으로서 건네는 희망과 생명의 언어, 위로와 격려의 언어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분의 말씀에는 허점이 없습니다. 또한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실제 삶에서 살고 계시니 그 말씀에 힘과 생명력이 넘칩니다.

  

교황님께서 매일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종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시대 여타 수많은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빈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대한민국 사회는 어쩌면 그 옛날 이사야 예언자가 살았던 시절과 비슷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또 다시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 속을 헤쳐 나가고 있습니다. 정말 ‘깜’도 안 되는 이, 정말 파렴치한 이, 어쩌면 그렇게 얼굴 두꺼운 이까지 나서서 스스로를 향해 적임자 운운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서슬 퍼랬던 이사야 예언자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우리나라입니다. 사심이나 자신의 안위에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 그저 이 나라 이 백성이 삶의 전부인 그런 지도자의 등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반영억신부-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어 ‘코로나19’의 종식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베풀어 주셔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합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바라보시며 지니셨던 마음은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간장이 녹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공명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예수님의 기적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장애인들과 말 못 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 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 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말씀 나누기 - 대림 1주 수요일-산 위에서 굶주린 다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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