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9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오8,5-11)
Lord,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only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종을 고쳐 주시기를 청한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많은 사람이 모여와 하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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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회사에 부서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각 부서는 상대 부서를 힘으로 눌러 자기 부서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한 부서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한 승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다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든 힘겨루기를 계속하면서 다음번에는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카인이 아벨을 죽여서 승리자가 된 것 같지만, 결국 둘 다 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벨은 목숨을 잃었고, 카인은 자존감과 평화를 잃었습니다.
이렇게 힘에 의한 갈등 해소는 더 큰 갈등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가지고 갈등 해소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갈등 해소는 사랑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교도이면서 로마인의 장교로 알려져 있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자기 종을 고쳐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종이 아픈 상황의 갈등 구조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인 행동은 아주 의외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찾아가 부탁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가족이 아닌 거느리고 있는 많은 종 중의 한 명에 불과한 종을 위해 직접 찾아가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만큼 그가 종을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을 낮췄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의 구조를 자신의 지위를 통해 나타나는 힘이 아닌, 종에 대한 사랑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이 직접 갈 필요 없이 한 말씀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등 구조에서 보여 준 백인대장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커 보이는 폭력과 힘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기본으로 있어야 하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을 향한 굳은 믿음이 있을 때 도저히 풀기 힘든 갈등도 풀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고 있을까요? 백인대장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갈등을 깨끗하게 해소하면서, 평화 속에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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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꼬마 아이가 놀다가 자그마한 나무 가시가 발뒤꿈치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따가웠고, 그래서 까치발을 하고 느릿느릿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가서 가시를 뽑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엄마는 핀셋을 가지고 왔습니다. 순간 아이는 겁이 났습니다. 핀셋이 커다란 주사처럼 보였고, 뽑을 때의 통증이 너무 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네가 원한다면 가시를 그냥 둘테니 뽑을 준비가 되면 다시 오렴.”이라고 말했습니다.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발뒤꿈치의 통증으로 뛸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놀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다시 엄마에게 가서 핀셋으로 가시를 뽑았습니다.
가시를 뽑는 순간의 통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신나게 놀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에도 가시가 박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과의 갈등, 사랑을 실천하기 힘든 마음, 부정적 생가 등의 가시 말이지요. 이를 어떻게 하십니까?
시간이 해결해 줄까요? 뽑을 때의 아픔을 감수하고라도 지금 당장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곧바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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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대해 묵상한다고 다 믿음이 증거하는 것은 아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나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중풍에 걸린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그는 굳이 오시지 않아도 한 말씀만 하시면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그들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면 분명 그분의 종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묵상으로 얻어진 믿음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우리도 마지막 때에 주님께 참믿음으로 살고 왔다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위해 하느님의 대리자라 여기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청할 줄 아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백인대장처럼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될까요? 우선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도 묵상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선 우리 묵상이 ‘주님은 계신가, 계시지 않은가?’를 확정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계심을 믿어도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심을 믿는 사람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 믿음의 걸음을 받쳐줄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성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어떤’ 성품을 더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의 성품을 묵상한다고 믿음이 다 증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흥행하는 ‘지옥’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어떤 사람이 몇 날 몇 시에 지옥에 갈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괴물이 나타나서 그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정진수라는 인물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죄에서 벗어날 것을 설파합니다. ‘새진리회’라는 종교단체까지 생겨나고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커집니다.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형사도 있습니다. 그런데 형사의 딸이 새진리회의 추종자입니다.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이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 10년밖에 살지 않고 출소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지옥을 만드신 분이 반드시 정의를 실현한다는 새진리회의 교리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정진수란 인물도 사실 고지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 ‘나는 무슨 죄를 지었나?’를 되새기며 그 고지가 틀렸기만을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공포가 자신을 죄짓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사의 딸과 함께 범죄를 저지릅니다. 죗값을 다 치르지 않고 나온 형사 딸의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함께 납치합니다. 그리고 지옥의 사자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 사람을 불태웁니다. 어차피 지옥의 사자가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자신들이 그런 정의를 집행하거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점점 더 세상은 지옥이 되어갑니다. 이것을 통해 돈을 버는 새진리회, 그리고 자신이 고지받은 것을 알면 가족이 다칠까 봐 몰래 죽으려고 외딴곳으로 숨는 사람들, 또 그런 신의 계시를 방해하는 이들을 또 방해하는 세력들. 이렇게 세상은 정말 지옥이 되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의에만 집중하고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느님의 자비보다 정의에 집중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정의로우신 분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다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니고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는 것도 믿음이 아닙니다. 지옥에 있는 것들도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렇다고 구원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자비를 묵상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같이 유다인이 아니어도 좋은 것을 청한다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만으로도 자기 종의 병을 낫게 하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믿음은 자비가 곧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은 전능하심을 믿은 것입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반도의 유일한 1946년생 근육할아버지’란 제목의 비디오가 있습니다. 70이 다 되어가시는 근육 할아버지의 근육은 젊은 사람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완벽합니다. 그만큼 큰 노력을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50년간 소싸움을 하는 직업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지고 나면 그 패배감을 술과 담배로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다 건강 악화로 위, 장, 쓸개, 맹장 수술을 해야 했고 아내는 할아버지의 병수발과 함께 생계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크게 깨달은 할아버지는 아내의 고생하는 모습에 자신도 땀 흘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아내는 할아버지가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며 할아버지의 근육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의 부정적인 면을 묵상하고 정의로워지려고 하지만 이 두 부부는 서로서로 상대의 고생을 묵상한 것입니다. 상대의 자비와 사랑을 묵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은 천국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면 상대에게 서운하지 않은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가 긍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생기게도 하고 사라지게도 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도 자비를 묵상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상황이지 그것만을 묵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밝은 면, 자비와 사랑을 묵상할 때만 커집니다. 부정적인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어차피 내가 믿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묵상하고 믿으면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감소합니다. 믿음을 성장시키려면 항상 하느님의 긍정적인 속성을 묵상하여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https://youtu.be/xKe5qjOh0pw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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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지난 10월 29일입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로마의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은 교황님을 만난 자리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기도를 청하며 휴전선의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선물했습니다. 교황님은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기꺼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대통령의 방문에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모마리아 경당에서 ‘철조망 평화가 되다.’라는 주제로 136개의 십자가를 전시하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분쟁과 갈등의 상징인 휴전선의 철조망을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남과 북의 허리를 가로막는 철조망이 평화와 일치를 드러내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136이라는 숫자는 남과 북이 휴전 중인 68년을 더한 숫자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셨듯이, 철조망을 녹인 십자가가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휴전전의 철조망을 녹여 만든 십자가를 보면서 몇 가지 상상을 해 봅니다. 북한이 바티칸에 교황님의 방북을 원하는 초청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미국이 지원한 코로나19의 백신을 한국의 선박을 이용해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북한의 주민들이 교황님이 선물한 코로나19의 백신을 접종하는 것입니다. 백신을 매개로 북한과 미국이 수교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창을 녹여 낫을 만들 듯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남과 북을 가로막던 모든 철조망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긴장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군사분계선은 생태계가 보존된 평화 공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평양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출발한 기차가 평양을 거쳐 부산으로 오는 것입니다. 상상을 마치면서 교황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남과 북은 같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나는 기꺼이 남과 북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몇 천 년을 함께 살았던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동질감이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휴전선을 평화의 상징으로 물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휴전선은 축제와 화합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강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기적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열면, 희망의 문을 열면, 사랑의 문을 열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품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비오니 그분께서 저희를 찾아와 문을 두드리실 때 깨어 기도하고 찬미하며 그분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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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8,5-11: 한 말씀만 하소서.
-조욱현신부-
백인 대장은 예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 백인 대장은 종을 예수께 데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 하는데, 종이 숨을 거두려 한다는 말 같다. 루카 복음에는 그가 “죽게 되었는데”(루카 7,2)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낸(루카 5,19)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했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일을 하신다. 발 벗고 그 종을 치유해 주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 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그냥 종을 치유해 주셨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 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하고 대답한다. 여기서 백인 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백인 대장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믿은 그의 지성을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람으로서 제가 다스릴 권한을 받은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권한을 받은 당신께서는 말씀만으로 틀림없이 병을 떠나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 대장은 예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 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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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 8)
-한상우신부-
마음이
무너진 곳에
필요한 것은
말씀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시고
누구보다도
먼저 기도하여
주시는 도움의
주님이 계신다.
삶의 아픔과
괴로움을
고쳐주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은총의
대림시기는
무엇보다도
우리 주위의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다.
기도가 멈추면
사랑도 멈춘다.
눈에 보이는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들 믿음이다.
믿음은
진실한 한 마디
말씀에서
치유되지 않던
관계의 아픔까지
낫게 되는
은총이다.
믿음의 문을
열게하시는
말씀이다.
그저
말씀다운
한 말씀이
필요한 말씀의
여정이다.
참된 믿음은
말씀으로
서로를 살린다.
말씀 안에
희망이 있고
감동이 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말씀이 사람이며
사람이 말씀이다.
믿음은
말씀의
힘이다.
말씀이
빠져버린
믿음은
힘을 잃는다.
말씀의 나눔이
희망의 도착이
된다.
말씀과 마음이
만나니 감탄이
된다.
한 마디
말씀이 필요한
여기에
우리가 있다.
오늘을
구원하는
말씀의
실천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말씀이 되는
믿음의
신비이다.
지나칠 수
없기에
간절히
기다리고
기도하는
말씀의
대림이다.
마음과 몸에
필요한 말씀이
우리를 다시
오늘을
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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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대림 1주 월요일-주님의 산 등산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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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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