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8일 대림 제1주일
대림 시기는 ‘예수 성탄 대축일’ 전의 4주간을 말한다. ‘대림’이란 ‘오시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이 용어는 ‘도착’을 뜻하는 라틴말 ‘아드벤투스’(Adventus)를 번역한 것이다. 오실 분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미 이 세상에 오셨던 분이시다. 그런데도 교회는 전례를 통하여 그분의 탄생을 매년 되풀이하고 있다. 그분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를 새롭게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한 해의 ‘전례 주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교회 달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올해 대림 시기에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린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열망하며 기다렸듯이,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한편 대림 시기는 종말에 오실 예수님도 묵상하게 한다. 이 분위기는 대림 첫 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의 전례에 많이 나타난다. 성경 말씀도 ‘깨어 기다리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그러다가 12월 17일부터 성탄 전야인 12월 24일까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 초점이 모아진다. 이렇듯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두 부분으로 묵상하게 한다.
대림 시기에는 사순 시기와 마찬가지로 ‘대영광송’은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노래한다. 사순 시기는 회개가 강조되는 시기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뜻에서 노래를 생략한다. 하지만 대림 시기는 기다림과 희망의 시기다. 인류 구원의 메시아께서 오시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25-28.34-36)
Be vigilant at all times
and pray that you have the strength
to escape the tribulations that are imminent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그날과 그때에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게 하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날이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늘 깨어있으라고 하신다(복음).
다시 오시는 주님은 두 개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키엣대주교-
다시 오시는 주님은 두 개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세상.. 태어난 모든 만물은 사라집니다. 작고 나약한 것만이 아니라, 해와 달처럼 거대하고 견고한 것들도 모두 사라집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지금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현재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느라 영혼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진정 새로운 세상, 영원한 세상을 원한다면 지금 바로 영혼의 삶을 돌아봐야합니다.
우주 역사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만물에게 한시적인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 주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 순간이 되면 심판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주님의 권위가 드러나실것입니다. 과거의 세상이 소멸되는 참혹한 순간 인간은 다시 새로운 희망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절대 끝나지 않고 단지 변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짧고 허무한 세상에서 견고하고 영원한 세상으로, 상대적인 세상에서 절대적인 세상으로 가는 것일 뿐입니다.
운명은 스스로 결정됩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참행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나 자신에 달려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과거의 세계는 쇠퇴할 것이기에 그 세계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많은 고통을 받고 비참해 질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알고 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사람은 행복을 얻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 행복’을 위해 언제나 ‘깨어서 기도”해야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항상 주님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인 명성과 이익,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고 고귀한 세계로 올려지기 위해 다음 세상을 준비해야 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체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정신은 다음 세상의 영원한 가치를 지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묶여있는 육체를 깨우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깨어있음을 알도록 기도하십시오. 기도만이 물질의 세계에서 벗어나 영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총을 간구하십시오. 인간은 고단하고 무거운 육체 때문에 세상에 묶여있습니다. 신성한 세계로 올라가기위해서는 물질에 얽매인 이 세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총뿐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깨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순간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즉시 일어나 주님을 맞기 위해 언제나 깨어있어야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인도만이 주님께서 계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깨어서 기도한다면 지금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만날 수 있고, 돌아 올 성탄미사 중에 반드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할 때만이 세상이 끝나는 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주님께서는 참 행복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시어 영원한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대림시기를 맞이하여 간절이 주님을 맞이할 영혼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주님, 저희를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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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오신 주님을 매년 다시 오시기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주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걸 느끼고 경험해보았습니까?
3. 깨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깨어서 기도한다”는 의미를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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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복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를 어떤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1) 남에게 기대하지 않기.
2) 나에게 기대하지 않기.
3) 작은 보폭으로 노력하기.
남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인생의 커다란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힘든 일의 7~80%는 남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게 그러면 안 되지. 부모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 아냐?’ 등등 남에게 기대하는 척도에서 부족함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아예 기대하지 않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도 해당합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실망하는 것도 결국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 실패를 반복하는 것,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모두 그럴 수 있는 일입니다. ‘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게 되면 커다란 성공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커다란 노력이 곧 커다란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요. 그리고 큰 성공이 반드시 큰 행복으로 이끌어주지도 않습니다. 자그마한 노력으로 이룬 자그마한 성취들이 모여서 행복을 만들어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를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특히 주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에 맞게 생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장 큰 행복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하고 있을까요? 혹시 남에게 계속 기대하고, 나에게 기대하고, 무엇보다 커다란 성공만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찾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속량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21,28). 그래서 세속적인 만족을 가져오는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을 몰아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대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주님 앞에 바로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4.36 참조)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중요한데,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엉뚱한 행복만을 찾으면서, 잘못된 기도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대림 제1주일로, 교회력으로는 새해에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올 한해, 주님과 함께 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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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습니다(창세 21,5 참조). 솔직히 가능할까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엘리사벳도 노년에 세례자 요한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예순에 낳았다고 성경은 전해줍니다.
생물학적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나이 많은 이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구원 역사에서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다’라는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노년에 아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노년에 어떤 사명이 주어짐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떤가요? 노년에 어떤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꺼릴 때가 많습니다. 주위 사람의 시선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저 나이에 뭘 하려는 거야?’라면서 그냥 편안히 쉴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은 죽기 전까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온 몸을 사용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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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왜 해야 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부터는 전례력으로 ‘다해’가 시작되고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한 해의 시작. 우리는 어떤 결심을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내용이 같습니다.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지막이 시작입니다. 태아가 태중에서의 마지막이 바깥세상에서의 첫날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대비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앞에 설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그 사람의 뜻을 따라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주님을 뵐 힘을 잃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생존 욕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은 인간의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에 생기는 욕구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이상 이 욕구는 우리 사랑을 방해할 것입니다. 자아가 가장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어린이처럼 겸손할 때입니다. 그럴 때가 아니라면 이 삼구(三仇)가 사랑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한 편 있는데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입니다.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 폭풍이 와 모두 자리를 뜨는데 죽음을 앞둔 한 할머니가 딸에게 벤자민 버튼에 관해 이야기해줍니다. 사실은 어머니가 죽어가며 자신의 딸에게 딸이 모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벤자민은 노인의 외모, 노인성 질병을 지니고 태어나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젊어지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벤자민의 어머니는 벤자민을 낳다 죽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벤자민을 괴물이라고 여겨 요양 시설에 버립니다. 요양 시설의 퀴니는 벤자민을 양아들로 삼아 지극정성으로 키웁니다.
외모는 늙었지만, 마음은 어린 벤자민에게 같은 동심을 느낀 소녀 데이지는 벤자민 할아버지를 좋아합니다. 벤자민도 실제 자신과 같은 또래의 데이지가 싫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할아버지, 그러나 실제로는 같은 연령대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벤자민은 성장할수록 자유로운 인생을 동경합니다. 세상을 모험하고 싶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항해하며 전쟁도 경험합니다. 그리고 데이지의 순수한 사랑보다는 길거리 여인을 만나기도 하고 또 우연히 만난 자신과 같은 꿈을 지닌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데이지는 이것에 실망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가는데 아버지 토마스 버튼이 아들을 버린 죄책감에 아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재산을 물려줍니다. 유산을 받은 벤자민은 첫사랑 데이지를 찾아갑니다. 다시 만난 데이지는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지만 어릴 적 동심과 순수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벤자민은 자신만을 사랑해줄 사람이 아님을 직감하고 다시 그녀를 떠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를 다칩니다. 더는 발레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벤자민은 더 젊고 잘생긴 외모가 되어있었고 데이지는 더 나이 들고 못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온 벤자민을 문전박대합니다. 그렇게 둘은 또 헤어집니다.
몇 년 후 회복된 데이지는 벤자민을 찾아옵니다. 벤자민은 그녀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랑을 나눕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생깁니다. 벤자민은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가 아기가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딸이 아빠가 아이가 되어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벤자민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데이지와 딸에게 남기고 자신은 오토바이 한 대를 끌고 세계 일주를 떠납니다. 딸의 생일이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엽서를 보냅니다.
거의 소년이 되어버린 벤자민은 데이지를 다시 찾아오지만, 딸에게는 그냥 아는 친척이라고 소개합니다. 데이지는 재혼하였습니다. 그래도 둘은 사랑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벤자민은 또 떠납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치매에 걸린 한 남자아이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벤자민입니다. 데이지는 벤자민을 잘 보살핍니다. 벤자민은 아기가 되어 그녀의 품 안에서 잠이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마치고 데이지도 딸이 보는 가운데서 조용히 잠이 듭니다.
둘이 결국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시간이 엇갈리기는 하였지만, 자신을 더는 떠날 수 없는 ‘아기’가 되었을 때입니다. 둘은 처음과 끝만이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삼구가 사라진 상태, 이 상태가 어린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군가와 순수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려면 벤자민처럼 끊임없이 어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벤자민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면 됩니다. 이것을 기도라 합니다. 하느님 안에 머물면 방탕과 만취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타임머신’에 타는 것과 같습니다. 2002년 영화 ‘타임머신’에서는 한 과학자가 과거에 잃었던 애인을 구하기 위해 4년 동안 공들여 타임머신을 만듭니다. 그런데 과거로 돌아가 아무리 애인을 구하려해도 애인은 그 시간에 죽습니다.
그는 왜 운명을 바꿀 수 없는지를 묻기 위해 미래로 갑니다. 그러나 미래의 발달한 문명의 인간들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러나 곧 그는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을.
그는 시간 여행자로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의미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현재의 것에 집착할 이유를 잃습니다. 그러며 애인을 잃었던 아픔도 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할수록 타임머신이 아니면 자신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겸손해지고 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신 주님 안에 머물러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세상 것들로부터의 집착에서 벗어남을 체험하게 되고 집착의 고통에서 조금씩 해방되며 진정한 ‘감사’가 솟아 나오게 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먼 미래에 가서 미래의 두 인류를 만납니다. 하나는 현재와 같은 인류이지만 하나는 악하게 변한 인류입니다. 악하게 변한 인류가 착한 인류를 착취하고 정복합니다. 그는 더 먼 미래로 가봅니다. 그러자 악한 종족의 세상, 곧 지옥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타임머신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찾아냅니다. 타임머신을 악한 종족 가운데에서 폭파해 그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착한 인류만 남습니다. 대신 그는 과거 자신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착한 인류를 위해 타임머신을 폭파합니다. 그리고 착한 종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새 삶을 시작합니다.
저도 대학 입시 시험 때 수학이 잘 풀리지 않아 다리를 떨며 저도 모르게 안 좋은 소리를 내어 옆 사람이 시험 보는 것에 피해를 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몰랐지만 지금 일반대학 다니던 친구들이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때는 그 순간 대학에 붙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배려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때 그랬으면 안 됩니다. 어차피 사제가 될 것인데 왜 저만 생각했을까요?
이렇듯 시간을 뛰어넘는 하느님 안에 머무는 기도를 하다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다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은 ‘사랑의 지향’만이 남습니다. 그렇게 기도 안에서 사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자만이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다시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줄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도로 남는 것은 감사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나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없으신 주님 안에 머묾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겸손해지며 결국 의미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음을 알게 되어 지금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되고 다시 에덴동산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내가 받는 은총과 진리로 나만의 타임머신, 곧 기도방을 내 안에 만들어야 합니다.
https://youtu.be/ZUzvdFg8A6g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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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한국은 하나의 시간을 사용하지만 미국은 땅이 넓어서 3개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서부와 동부는 3시간 차이가 납니다. 회의를 해도 서부가 2시면 동부는 5시입니다. 동부에서 서부로 이동하면 3시간이 줄어듭니다. 서부에서 동부로 이동하면 3시간이 늘어납니다. 뉴욕에서 시애틀로 가는데 6시간이 걸리지만,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3시간 이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시애틀에서 뉴욕으로 오면 6시간 걸리지만,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9시간 이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국과 미국은 하절기에는 13시간, 동절기에는 14시간 차이가 납니다. 미국이 서머타임을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동절기인 요즘 미국이 오후 2시면 한국은 다음날 오전 4시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시간은 우리가 정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2개의 시간을 사용합니다.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교회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12월 31일에 끝나고, 새로운 한 해는 1월 1일에 시작됩니다. 우리의 모든 약속은 이 물리적인 시간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다른 하나는 의미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이 시간을 ‘전례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교회의 시간은 예수님의 탄생인 12월 25일의 4주전에 시작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시간을 대림시기라고 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교회가 전례력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물리적인 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의미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는 2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에 대한 기억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죄, 악, 죽음으로 하느님과 멀어지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회개하여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드러내셨음을 기억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기억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등잔에 기름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이하였듯이, 우리들 또한 구원의 등잔에 믿음의 기름, 희망의 기름, 사랑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구원의 등잔에 회개의 기름, 나눔의 기름, 희생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구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순례자가 되면 좋겠다고 합니다. 순례자인 우리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그곳이 순례자의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순례자가 가져야 할 태도를 이야기 하십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세상에는 깨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깨어 있음으로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깨어 있음으로 양심을 속이고, 깨어 있음으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 있음의 목적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 것이며 그것이 순례자의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아름다운 가사가 기억나는 ‘순례자의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생은 언제나 외로움 속의 한 순례자. 찬란한 꿈마저 말없이 사라지고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나뭇잎 바람이 부는 대로 가네. 잔잔한 바람아 살며시 불어다오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들의 꽃 피었다 사라져 가는 것,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세상을 언젠가 떠나리라./ 인생은 언제나 주님을 그리는가 보다. 영원한 고향을 찾고 있는 사람들 언젠가 만나리라.”
순례자가 되어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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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저희 공동체 전례 담당자이신 어르신 신부님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림 시기 시작하는데, 대림환 어쩔거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 키 만한 큰 초들을 쇠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었습니다. 시골스럽게 대성당과 소성당에 대림환을 설치해놓으니, 그제야 어르신 신부님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았습니다.
대림환 장식은 초기 양성기 형제들이나 젊은 형제들, 아니면 봉사 오시는 자매님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깊은 시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직접 다 해야 합니다. 열심히 초를 자르고 깎던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초를 깎는 마음으로, 나를 깎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늘을 찌르는 교만을 깎고, 나태함과 게으름의 나를 깎고,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불충실한 나를 깎으며 그렇게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돌아보니, 지난 한 해도 어김없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의 삶, 실패와 부끄러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내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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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다해
-조욱현신부-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된다. 대림이란 인류가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하여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그리스도께서 정의와 평화를 주시는 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준비하고 바라고 희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셨던”(요한 1,14) 그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분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그분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분은 이제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대림”을 살아야 하고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예레미야서는 인류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다윗의 정통 왕손(싹)”(예레 33,15)으로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희망인 생명의 “싹”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이 이 메시아를 일으켜 주실 수 있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바로 그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적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 ‘정의와 평화’를 이룰 사명, 정신적 육체적 모든 악을 치유해야 할 사명은 우리가 느끼듯이 성취되어야 한다. 그래서 대림이란 신앙인의 본질적 차원인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21,25-28.34-36: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복음도 ‘기다림’의 자세를 알려주고자 한다. 이 ‘기다림’은 성탄을 넘어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대한 것이다. 오늘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종말론적 담화’의 내용이다. 복음에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들어 신앙인들의 준비된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있다(25-26절).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27절) 이때 세상은 새로워져, 낡은 세상은 가고, 악과 죽음의 세력은 더는 그 영광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28절).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지만, 인간의 거룩한 삶과 깨어 기다림으로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34-36절) 말씀하신다. 세상 걱정에 휩싸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것에 매여 하느님께로 가기보다 죽음의 길로 가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날은 어느 때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는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만났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영광스러운 만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깨어있는 삶을 언제나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하신다(36절).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나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계속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의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바로 대림의 삶인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는 분이시며, 이제 우리의 매일의 삶을 통하여 잘 준비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 준비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쓸데없는 마지막 날에 관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이 순간을 잃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까지 잃을 수도 있다. 주님께서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사는 현재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체험할 수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시간 안에 살면서도 시간을 초월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이 순간의 삶은 바로 하느님 앞에 영원한 가치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이 세상을 새로운 하늘과 새 땅으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즉 참된 구원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이러한 선물도 인간의 협력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분을 기다리는 우리의 삶 역시 하느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이 삶은 구원을 체험하는 장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삶에서 사랑의 삶을 노력해야 한다. 이 사랑의 삶이 곧 깨어있는 삶이며, 깨어있을 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사랑의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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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한상우신부-
예수님 성탄을
기다리는 새해
첫날,
새아침이다.
어제가 흘러
새로운 속량의
오늘이 되었다.
우리의 속량은
다름아닌
주님의 탄생을
만나는 행복이다.
주님의 탄생은
행복해야 할
우리를 회개와
변화의 삶으로
이끈다.
우리의
신앙또한
새로운 탄생이
필요한 새로움의
간절한 여정이다.
새로 태어나는
마음들이 모여
우리신앙을
자라게한다.
묵은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워지는
사랑이다.
새로움이란
좀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만나는 행복이다.
좀더 낮은 곳에
좀더 좋은
행복이 있다.
내려오시는
주님의 행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사람이 행복이고
사람이 말씀이다.
이 새로운 한 해가
서로가 서로에게
참된 기쁨이 되는
한 해이길
기도드린다.
주님께서는
아낌없는 사랑을
새로이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사랑을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새 해
새아침이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희망과
기다림으로
살아가는
대림(待臨)의
존재이다.
기다림이
사랑이고
기다림이
설레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것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새 해
새 아침의
맑은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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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2021년 11월 28일 대림1주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ofmkorea.org)
-고도미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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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대림 제1주일-이번 대림은 잃은 주님 찾기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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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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