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에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루가 21,29-33)
Consider the fig tree and all the other trees.
When their buds burst open,
you see for yourselves and know that summer is now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the Kingdom of God is nea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밤의 환시 속에서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시며,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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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잘 받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적은 것을 읽었습니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스스로 노력해 자신을 돕는다.
2) 도움받을 만한 가치를 보인다.
3)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린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 번째인 자신의 노력이라고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신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어느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깥의 일이었는데, 특히 쓰레기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레를 이용할 때가 많았습니다.
한 번은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끌고 가는데, 친구 2명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제가 끌고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 친구 2명이 다른 일을 하러 갔고, 저 혼자 수레를 끌어야 했습니다. 수레는 너무 무거웠고, 경사진 오르막길을 혼자가 끌기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저 혼자만 있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는데,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도와줄까요?”라면서 수레에 붙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의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도 반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겁다고 또 힘들다고 포기했다면 사람들의 반응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력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삶이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도움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은 없습니다.
무화나무의 비유 말씀을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잎이 돋는 것을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힘들다고 불평불만 하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기 때문에,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께서 제일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할 때, 다른 이들도 함께할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과 함께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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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한눈을 팔다가 엄마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제 엄마가 없어서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좋아했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그냥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었을까요?
이 아이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 두려워졌고 그래서 “김서연”이라는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엄마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사람도 많이 있는데 엄마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되겠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기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가 엄마를 부르면 다 나를 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만 나를 보라고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
아이의 지혜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문득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갈 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눈에 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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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대에 해답은 유대인이다.
-전삼용신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갑작스럽게 오지 않고 ‘순차적’으로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고 전체적으로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곧 겨울이 오겠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봄이 왔고 여름이 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도 눈만 감고 있지 않으면 다 알 수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의 가장 확실한 표는 이스라엘의 재건입니다. 2천 년 이상 나라가 없이 떠돌다가 다시 나라가 재건되는 경우는 역사에 없습니다. 인원이 많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1,300만 정도 됩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3 수준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1948년 독립국으로 되었고 전쟁을 통하여 이전 땅을 회복했습니다. 10억이 넘는 주위 아랍 나라들도 전쟁을 하면 천만 명의 이스라엘에 집니다.
성경에 예언된 순차적인 진행은 이렇습니다. 일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고, 나중엔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이스라엘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4)
이는 예수님만 그렇게 예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똑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 25-26)
하느님께서 당신을 배척할 이스라엘을 정화하기 위해 2천 년의 시간을 이용하신 다음 그 정화가 끝난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실제로 외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을 볼 때 이제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유지하는 이스라엘은 덜 고통을 당할 것은 뻔합니다. 우리도 지혜가 있다면 이스라엘과 닮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어쨌건 유대인이 답입니다.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모세와 예수님과 프로이트, 그리고 마르크스와 아인슈타인이 하늘에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토론주제는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가 무엇인가?’였습니다.
먼저 모세가 십계명을 손에 들고 말했습니다.
“법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당신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사랑이 전부죠.”
셋째로 프로이트가 자신이 쓴 『꿈의 해석』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습니다.
“무의식과 섹스가 전부에요.”
마르크스가 밥을 먹다 숟가락을 놓으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밥이 전부죠. 돈이 전부에요. 이게 세상을 움직인다고요.”
그러자 아인슈타인이 조용히 칠판에 ‘E=MC²’이라 휘갈겨 쓴 다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여기의 모든 등장인물이 모두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주는 유대인식 조크입니다.
유대인들에 세상에서 보여주는 역량에 대해 말하자면 입만 아플 뿐입니다. 발명가 에디슨, 20세기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 전설의 앵커 래리 킹,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컴퓨터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래리 페이지,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 스타벅스의 하월드 슐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인재들이 유대인일 뿐 아니라, 재산 10억 달러 이상인 미국인 가운데 1/3이 유대인이고 미국 유명 대학 교수 중 1/5이 유대인이며, 노벨상 수상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0.2%가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머리가 좋아서일까요? 핀란드 헬싱키 대학의 연구 결과 유대인의 평균 IQ는 95이고 한국인은 106입니다. 그들이 이런 성과를 올리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근본적인 이유 하나를 말하라면 ‘자존감’입니다. 피카소도 유대인인데 유대인은 어머니만 유대인이면 유대인이 됩니다. 피카소의 말을 들어봅시다.
“ 내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가 군인이 된다면 장군이 될 것이고 네가 성직자가 된다면 너는 교황이 되겠지.’ 대신에 나는 그림을 그렸고 피카소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존감 때문에 이런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될 수 있다고 믿으면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는 것입니다. 피카소는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잠재적으로 같은 양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낭비한다. 나는 내 에너지를 단 한 가지, 그림에만 집중한다. 그림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한다.”
이런 자존감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종교교육’에서 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녀에게 자존감을 주려고 하더라도 ‘넌 내 자식이야!’라고 하면 ‘인간’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신 “넌 하느님 백성이야!”라는 자존감을 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다 해냅니다. 그들은 바다를 가른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하는 것은 자녀를 하느님께 끊임없이 봉헌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도 성전에 봉헌되셨고 예수님도 봉헌되셨습니다. 12살 성인식 때는 아들이 사라져도 부모는 사라진 줄도 몰랐습니다. 이미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 때 대학 등록금 정도를 유산으로 물려줍니다. 그리고 믿어줍니다.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입니다. 부모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라고 시키면 아이들은 ‘아, 나는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혼자 할 수 없는 존재구나!’라고 느끼게 되고 자존감이 바닥인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그의 머리에는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이 박혀있습니다.
유대인드은 자신이 멋진 자녀들을 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자녀를 많이 낳습니다. 이것도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럽이 출산율이 높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절반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꼴찌입니다. 아이를 키울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결국 잘 지키고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이스라엘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가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이때 성경에 예언된 대로 믿으면 마지막 때에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종교교육을 통한 자존감 높이는 가정교육을 본받아야 합니다. 결국, 미래는 우리 자녀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돈만 많이 벌면 뭐하겠습니까? 집값도 오르고 물가도 오르고 교육비도 오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도 사는 것이 힘든 것은 똑같습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져 올수록 유대인들이 비록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기는 하나 결국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기에 유대인들을 연구하고 본받아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버린 벌로 받았던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https://youtu.be/J-eJLRPcUmc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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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이 예언한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죽음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하늘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졌던 권력을 빼앗길 줄 알았던 헤로데가 있습니다. 그동안 누렸던 기득권을 빼앗길 줄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두려워했던 빌라도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거짓된 선동에 휩쓸린 군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었지만 죽음을 넘어 부활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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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21,29-33: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그 시기가 언제인지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즉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즉 성경이 전하는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벌로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새로운 세계를 완성하시는 과정으로서의 죄 많은 인간과 세상이 겪어야 하는 진통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 결정적인 모습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신경을 써서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나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그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때 그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흥청대며 허송세월한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나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 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이 깨어있는 삶이 우리를 항상 그분 안에 있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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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 32)
-한상우신부-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마지막에는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의
말씀만이
남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살다가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를
묻게된다.
사람이 죽으면
하느님께로
가게된다.
나무또한
마지막처럼
햇볕을 향하여
가지를
뻗어나간다.
햇볕이
되어주시는
주님이시다.
언제나
사람의 표징은
사람이다.
사람보다
더 큰 표징은
없다.
사람과 함께
걸어가는
표징이다.
우리
현실에서
만나게되는
주님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내어주시는
진정한 사랑이
표징으로 드러난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표징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따라가는 우리들
삶의 여정이다.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다.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사람이
되어오신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며 하느님
나라의 징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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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종말의 경고들 속에서 희망을 보게 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로 알아라."(루카 21,31)
예수님께서 나무에 잎이 돋으면 곧 여름이 온다고 아는 것처럼 하늘과 땅의 표징들이 보이거든 하느님 나라가 온 줄 알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잎을 볼 때 그 잎에서 사고를 멈추지 않고 잎이 돋아나게 하는 순리, 곧 여름을 고대합니다. 이처럼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전쟁과 천재지변 들이 일어나더라도 두려움과 공포에 갇혀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 나라, 구원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으면서 때때로 그 포장지에 놀라고 자지러져 정작 선물은 열어보지도 못하고 도망가거나 포기하고 절망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두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그날"을 허락하시는 건 우리를 괴롭히시려거나 겁주고 파멸시키시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의도시지요. 그런 하느님의 뜻을 알면, 파릇하게 돋은 잎을 보면서 여름을 꿈꾸듯 당장의 고통이 품은 미지의 열매를 고대할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극적으로 상반되는 두 개의 환시 내용이 이어집니다.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짐승 네 마리가 바다 위에서 올라왔다."(다니 7,3)
먼저 다니엘 앞에 혐오스럽고 무시무시한 네 짐승이 등장합니다. 그것들은 끔찍하고 흉포스러우며 거만하기까지 하지요. 이 짐승들의 힘이 이 세상을 덮친다고 생각하면 두렵고 절망스럽기까지 할 겁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바로 뒤에 이어지는 환시에서는 천상의 대관식이 장엄하고 영광스럽게 펼쳐집니다. 섬기는 이들이 무수히 늘어선 가운데 천상 어좌로 나아오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앞에 인도되어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를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세상을 위협하고 황폐하게 만드는 흉포한 짐승들의 통치는 잠시입니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하고 유한한 것은 영원 앞에서 맥없이 스러지기 때문이지요. 잠시 지나는 독하고 악하고 공포스러운 현실에 무너지지 말고 그 뒤에 오실, 그 안에 숨어계신 구원의 얼굴을 보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일 겁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고되고 지치고 두렵기까지 한 각자의 현실 속에서 구원의 표징을 찾고 눈을 들어 하느님의 나라를 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유한하고 불순하고 악한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요. 지금 죽을 듯이 힘들고 아프다는 건 구원이 가까웠다는 뜻이니, 영원하신 말씀을 꼭 부여잡고, 끝까지 믿고 희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복음 환호송)
지금 고통 중에 힘들어하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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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금요일-하늘과 땅이 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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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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