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4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뒤에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루가 21,12-19)
You will be hated
by all because of my name,
but not a hair on your head
will be destroy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벨사차르 임금의 잔치에 나타난 손가락이 쓴 글자를 풀이하며, 바빌론 왕국의 운명을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인내로써 생명을 얻으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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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940년 9월 7일. 348대의 독일 폭격기가 영국 해협을 횡단해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9개월에 걸쳐 런던 지역만 8만 개 이상의 폭탄이 투하되어 100만 채의 건물이 파손, 파괴되었으며, 영국인 4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몇 개월에 걸친 폭격으로 사람들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 이상을 일으키리라 생각했습니다. 슬픔과 분노는 분명히 컸습니다. 그러나 정신병동은 텅 비었고, 오히려 이 기간에 정신건강이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줄었고, 자살하는 사람도 평상시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전쟁 후에 이 대공습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서로 도왔고, 정치적 입장도 또 빈부의 격차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인간은 자기 본성의 모습을 찾는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 의견에 공감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본성은 분명 주님의 속성인 ‘사랑’에 맞춰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수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 때가 바로 자기 본성을 찾아 나서는 소중한 시간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시련과 어려움으로 상징되는 박해에 대한 설명을 하십니다. 박해는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힘든 시간, 가장 무서운 시간일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이 박해에 어쩔 수 없다면서 배교를 해야 할까요?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내 목숨이 살고 봐야지 라면서 주님을 모른다고 말할까요?
지금은 그런 박해가 없어서 이에 따른 피의 순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박해는 계속해서 찾아옵니다. 즉,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배교이며, 희생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 역시 주님의 뜻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배교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도 있어.’라며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마음 역시 배교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런 배교의 유혹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배교를 하게끔 유혹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렇게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모든 유혹을 이겨내는 인내입니다. 이 인내로서 생명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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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중에서 장수하는 동물의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유순하고 한가로움을 즐긴다고 하더군요. 특히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이를 보십시오. 거북이는 초조함을 전혀 모릅니다. 그에 반해서 맹수는 어떨까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를 잘 내고 성급한 사람은 대체로 단명한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독일의 한 탄광이 무너져서 광부들이 갱내에 갇혔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된 상태에서 1주일 만에 겨우 구조되었는데, 사망자가 딱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 사망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바로 시계를 통해 얻게 된 불안과 초조였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어떤 분은 이 세상 안에 미련이 없다면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죽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도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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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가까울 때 성령께서 충만히 오시는 이유: 명의는 작은 병에 움직이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어제 복음은 세상 종말이 언제 올 것이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죽음을 현재화하여 자신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사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그러면 어차피 죽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세상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 더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신 안에 생존을 위한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을 채우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죽음을 현재화하여(Memento mori) 살다 보면 당연히 두려움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가지면 하느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원한다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는 것이 좋고 그렇게 성령님께서 오시면 내가 주님을 증언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주 말씀드리는 김용태 신부님의 서품 준비 피정 중에 있었던 체험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지막 이전에 항상 당신 제자들이 박해를 당하게 될 텐데 그때 성령의 힘으로 주님을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김용태 신부가 부제가 되기 위한 한 달 피정을 하던 중에 “순교를 할 수 있느냐?”라는 주제가 떨어졌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이 주제는 어렸을 때부터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기 때문에 상상으로 순교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이슬람 테러범들이 등장하였고 지독한 고문 기구들이 있었으며 배교하지 않으면 드릴로 머리를 뚫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참아보려 했지만, 순교 직전에 매번 기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신학생들은 다 이 과정을 통과하였지만, 김용태 신부만은 사흘이 지나도 머리로 뚫고 들어오는 그 드릴의 칼날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정과 서품을 포기할까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젠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밤에 혼자 성체조배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다시 같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또 드릴이 머리로 오고 또 포기하려고 할 때 즈음, 온 방 안이 사랑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담아보겠다고 그렇게 애썼던 잔이 바다에 빠진 느낌과 같았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자신이 온통 채워지는 느낌이었고 주님께서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순교 다음의 세상이었습니다. 이 은총을 체험한 후에 순교를 받아들일 힘이 생겼습니다. 이 체험은 사제로 살아가는 내내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만약 김용태 신부가 며칠 동안 계속 죽음을 현재화하는 두려운 상황을 묵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총이 주어졌을까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사제도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은 죽음의 현재화이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성령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순간 당신을 증언하는 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음 이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는 수도자나 성직자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며칠 전 제게 1년 전에 남편을 뇌종양으로 여읜 아내와 20살 먹은 딸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이 외국을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갑자기 암이 찾아왔고 1년 10개월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습니다.
연년생 고3 여동생과 중학생 남동생을 둔 맏딸은 외국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아버지의 병환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대로 일단 대안학교에 입학하기로 하였는데 시간도 없고 어찌하다 보니 개신교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여동생과 자신, 단 둘만이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어느 날 수련회에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학교이기 때문에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맏딸은 사진 찍는 일을 하며 약간 그런 기도회를 바라보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무슨 말이라도 하며 기도를 해보려 했습니다.
당시에 장녀라는 부담과 아버지가 아프시지만, 어머니가 아버지로 인해 고생하는 것을 보며 이럴 바에 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미술이라는 특기가 있지만 자신은 앞으로의 삶이 조금은 막막한 상태였습니다.
이때 김용태 신부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 친구 말로는 성령께서 쑥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과 위로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와서 귀에 대고 계속 기도를 해 주셨고 그 기도 말이 꼭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담대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성령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강한 적도 없다면 하느님은 그 강한 적을 이기게 하실 때 가장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감정은 점점 식어만 갔습니다. 무언가 모를 불안과 죄책감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이길 힘을 얻었지만 죽음 이후를 극복할 힘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미사를 가서 성체를 영하고 기도를 바치려 하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기도가 안 되어 그냥 눈을 뜨려는데 환시와 같은 것을 봅니다. 빛과 같으시고 엄청나게 크셔서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예수님께서 서 계시고 그 앞에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겨있는 아기처럼 행복한 모습의 아버지셨습니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맏딸로서의 부담, 그리고 아버지가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죄책감, 또 외국에서 생활하다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느껴야 하는 청년으로서의 막막함 등을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극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운 이유를 말하며 엄마까지 위로합니다. 앞으로도 절대 주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지금은 동생과 함께 싱가포르에 있는 대학을 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황창연 신부님의 강의 중에도 성당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던 형제가 갑자기 봉사를 마치고 집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어머니가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아버지가 아이 꿈에 나타나서 천국 앞까지 같이 걸어갔던 이야기를 오히려 해 주어서 어머니가 놀랐다는 이야기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에게 주님은 힘을 주십니다. 죽음을 이길 힘은 성령뿐입니다. 하느님은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이에게 오십니다.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명의가 굳이 약국에서 사 먹어도 낫는 병을 고치겠다고 그 집에 방문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일, 곧 죽음을 이기는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을 현재화하고 그 고칠 수 없는 병을 극복하려 한다면 주님은 분명 성령을 주시어 이 세상에서 끈기 있게 당신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현재화하여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고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https://youtu.be/eKOIlx2Ruy0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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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본의 아니게 한 달 사이에 구급차를 2번 타고, 응급실도 2번 다녀왔습니다. 한번은 보호자로 갔었고, 한번은 당사자로 갔습니다. 이번 경험으로 미국의 긴급 의료 시스템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단 환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비용은 나중의 문제였습니다. 보험이 있으면 보험으로 해결합니다. 보험이 없고, 가난한 사람은 사회복지사와 상담한 후에 치료비를 산정합니다. 두 번째는 신속하게 퇴원할 수 있도록 합니다. 동창 신부님은 하루 입원하고 퇴원하였습니다. 저는 3시간 만에 퇴원하였습니다. 병원에서 조치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바로 퇴원 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경찰의 도움입니다. 경찰은 사고의 경위를 신속하게 조사하였고, 사건의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그 번호를 가지고 병원에 가면 쉽게 치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아픈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픈 사람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완벽한 제도로 2000년 역사를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2000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건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낡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제도는 때로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피와 땀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성인품에 올리는 절차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죽음을 기억하는 증언과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전구함으로 하느님의 표징이 드러나야 합니다. 증언과 기록이 정확하고, 하느님의 표징이 드러나면 교회는 시성식을 통해서 성인으로 공경하게 됩니다. 우리가 왜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분들의 삶이 우리가 보기에 행복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갔고, 감사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문학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묵시문학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조직과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악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나약하고, 작은 나라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니, 강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자분들을 만나면서 많은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녀문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부의 불화로 힘들고 어렵게 지내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알지 못했다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문제들로 가슴아파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묵시문학은 이야기 합니다. ‘이 모든 것들도 다 지나가리라.’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밝은 빛을 보리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인내로서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내하는 사람은 감히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그 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살면서 하느님의 약속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태중에 자라고 있는 아이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다림의 사람들은 항상 깨어 있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샘에서 물을 마시는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 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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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치유 불가능한 깊은 상처와 좌절과 수모를 안겼던 학살자요 군부 독재자가 세상을 떴습니다. 끝끝내 잘못했다, 내 탓이다, 용서를 빈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오욕의 세월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에게 인간이기를 바랐던 우리의 기대가 허황된 것이었던가 봅니다. 그 오랜 세월, 그 숱한 기회를 족족 발로 차버리고, 끝끝내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의 죽음이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는 어찌 그리도 90평생 초지일관, 일편단심 동물처럼 살아왔는지 놀랍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까지도 자기만의 그릇된 신념과 정신세계에 빠져, 끝끝내 사과를 거부한 그의 뇌는 참으로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해 봐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도 밉지만 그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집단적 광기를 지속해온 측근들, 가족들, 배우자, 자녀들의 금수만도 못한 모습 앞에, 분노를 넘어 깊은 슬픔이 다가오는 하루였습니다.
측근들과 배우자, 자녀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지금의 전국민적 분노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망언으로 안 그래도 쓰라린 깊은 상처에 굵은 소금을 끼얹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를 대신해서 진심 어린 사과 한 마디만 해주기 바랍니다.
평생토록 걷지 말아야 할 악인의 길을 걷다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자의 죽음은, 남아있는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큰 것 같습니다.
마치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 같았던 그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죽음의 천사가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주님께서는 떠날 준비가 조금도 되지 않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결국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민주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버린 군부독재자, 국민의 생명을 수호하는 본분을 망각하고 국민에게 발포한 정치군인, 희대의 살인마, 상습 고액체납자, 단돈 29만원, 왜 나만 갖고 그래, 끝끝내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거나 회개하지 않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인간...
그러나 밥 먹듯이 수시로 가슴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주어질 은총과 축복은 엄청날 것입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복음 21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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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이영근신부-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루카 21,13-14)
에수님께서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박해 상황을 감추지 않고 설명하십니다.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이때 제자들이 명심할 점은 미리 인간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언의 기회에 자기 언어로 섣부르고 장황한 변론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담아 주실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즉흥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한 성향이라면 다소 긴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이 문제는 성향의 문제에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박해와 죽음 이야기까지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거라 하시니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쓰실 때는, 우리 힘으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하느님 주권을 의미하고(마태 5,36 참조), 또 이미 아버지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두실 만큼 우리가 그분께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가리킬 때입니다.(마태 10,30 참조) 설령 육체적으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입니다.
제1독서는 어제 등장했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아들 벨사차르 임금 때의 일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6-28)
다니엘은 적대국에 끌려간 유배자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신통력이 있어도 목숨과 안위를 부지하기 위해서는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야 하는 처지지요.
하지만 다니엘은 주님의 집 기물로 술을 마시고 피조물을 신으로 찬양하던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줍니다. 난데없이 글씨가 나타난 이유는 벨사차르 임금이 인간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다니엘은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끝내셔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또 임금은 구원받기에 모자란다고 숨김없이 아룁니다. 다니엘은 독서를 듣는 우리가 가슴 졸일지언정,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떠올려 주신 말씀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다니엘 예언자의 태도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크기이고 신뢰의 무게겠지요. 이 믿음과 신뢰가 충실함으로 표현되는 것일 테고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지닌 믿음의 무게를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리고 권력이나 재산, 신분 등의 인간적 자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믿음 덕분에 담대하고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사건, 말씀과 자연으로 우리 각자에게 써 보내시는 권고에 늘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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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나는 표징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중간에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절)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 황제에게 넘겨졌다. 또한, 교회 역사 안에서 교회는 계속 박해를 당해 왔다. 이 박해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박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에 만연되어있는 죽음의 문화 또한 이 박해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들이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죽음은 영혼에도 육신에도 올 수 있다. 영혼은 죽을 수 없지만, 하느님을 잃으면 죽을 수 있다. 영혼이 육신의 생명이듯 하느님은 영혼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명인 영혼이 육신을 버리면 육신이 죽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영혼을 버리시면 그 영혼은 죽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버리시지 않도록 하려면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시고, 따라서 그 영혼은 죽지 않는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30-31)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굳은 믿음을 청하도록 하여야겠다.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청하여야 할 것이다.
11.24.수.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루카 21, 18)
-한상우신부-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순교는 사랑을 가득 품고있다. 때를 놓친 사랑은 언제나 아픔이었다. 인내를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인내가 사랑이다. 신앙인은 인내의 열매를 먹고 산다. 신앙인의 현주소는 인내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인내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 앞에 머리를 숙인다. 십자가 없는 만남이란 없었다.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준다. 십자가의 빛이 만남의 빛이 된다. 십자가의 승리로 요약되는 순교자들의 삶이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내어드려야 할 사랑의 기쁨이다. 십자가가 사랑의 기쁨이 된다.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인의 삶에서 십자가의 때를 배운다. 십자가 없는 사랑 십자가 없는 열매는 없었다.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삶이란 사랑을 일깨워주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십자가와 함께 사랑을 배우는 것이다. 십자가가 참 스승이다. 십자가에서는 잃을 것이 더 많을 것 같아도 실은 가장 좋은 하느님 사랑을 얻는 것이다. 하나도 잃지 않게 하는 십자가의 사랑, 그 신비이다. 오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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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베트남의 순교성인들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믿음을 촉구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루카 21,13-14)
에수님께서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박해 상황을 감추지 않고 설명하십니다.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될 수도 있다고요.
이때 제자들이 명심할 점은 미리 인간적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증언의 기회에 자기 언어로 섣부르고 장황한 변론을 준비하기보다,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담아 주실 그분의 말씀을 기다리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즉흥보다 사전 준비에 철저한 성향이라면 다소 긴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제 이 문제는 성향의 문제에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박해와 죽음 이야기까지 나왔는데도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거라 하시니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카락"이라는 말을 쓰실 때는, 우리 힘으로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는 하느님 주권을 의미하고(마태 5,36 참조), 또 이미 아버지께서 우리 머리카락까지 다 세두실 만큼 우리가 그분께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임을 가리킬 때입니다.(마태 10,30 참조) 설령 육체적으로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되더라도, 주님을 믿음으로써 온전히 구원되리라는 뜻입니다.
제1독서는 어제 등장했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아들 벨사차르 임금 때의 일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임금님 나라의 날수를 헤아리시어 이 나라를 끝내셨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을 저울에 달아 보니 무게가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 임금님의 나라가 둘로 갈라져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졌다는 뜻입니다."(다니 5,26-28)
다니엘은 적대국에 끌려간 유배자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지혜가 출중하고 신통력이 있어도 목숨과 안위를 부지하기 위해서는 할 말, 안 할 말은 가려야 하는 처지지요.
하지만 다니엘은 주님의 집 기물로 술을 마시고 피조물을 신으로 찬양하던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풀이해 줍니다. 난데없이 글씨가 나타난 이유는 벨사차르 임금이 인간의 목숨을 손에 잡고 계시며 모든 길을 쥐고 계신 하느님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면서요.
다니엘은 임금에게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끝내셔서 메디아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넘어갈 것이라고, 또 임금은 구원받기에 모자란다고 숨김없이 아룁니다. 다니엘은 독서를 듣는 우리가 가슴 졸일지언정,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떠올려 주신 말씀을 숨기거나 감추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다니엘 예언자의 태도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담대함과 용기는 언변과 지혜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의 크기이고 신뢰의 무게겠지요. 이 믿음과 신뢰가 충실함으로 표현되는 것일 테고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지닌 믿음의 무게를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앞당겨 두려워하지 말기를, 그리고 권력이나 재산, 신분 등의 인간적 자원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믿음 덕분에 담대하고 용기 있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길 바라십니다. 주님께서 사람과 사건, 말씀과 자연으로 우리 각자에게 써 보내시는 권고에 늘 깨어 있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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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수요일-인내로써 얻을 것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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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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