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1일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이다. 축일명대로,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이다. 예수님께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백성을 섬기시는 메시아의 모습을 실현하셨다. 스스로 낮추심으로써 높아지신 것이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이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정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해마다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간(올해는 오늘부터 12월 1일까지)을 ‘성서 주간’으로 정하여, 신자들이 일상생활 중에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며 자주 읽고 묵상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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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 요한 18,33ㄴ-37)
"You say I am a king.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 앞으로 인도되는 모습을 본다(제1독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모든 눈이 보리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당신께서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나셨고,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세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상
-키엣대주교_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세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세상
“이 세상을 뛰어 넘는 또 다른 세상, 바로 주님의 나라이며 하늘나라가 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있다”
이 땅의 생명과 삶 모두 아주 중요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무한한 가치를 지닌 주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만일 영원한 생명, 주님의 나라에서 살고자한다면 세상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아야합니다.
세상 무엇보다 높고 고귀한 주님의 권능
거대한 로마제국의 권력을 가진 빌라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권력은 하느님으로 받은 것이오”
세상 모든 권능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거품과도 같습니다. 공기가 없다면 스스로 커질 수도, 동그란 모양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주 작은 바늘에 찔리는 순간 터져버리고 찌그러져 형체가 사라지고 맙니다. 권력도 이처럼 덧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만이 영원하고 견고한 권능입니다.
증오를 이기는 가장 큰 무기는 사랑입니다.
군중들의 증오와 멸시, 비난을 받으시는 치욕의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모든 악을 물리치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최초의 분이십니다. 당신의 승리로 당신의 나라, 하늘 나라, 진리의 왕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진리에 속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거짓과 위선을 이겨내고 정의와 공정, 사랑을 실천한 사람, 그러한 사람이 바로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거짓은 바로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탐욕과 불공정, 증오, 거짓이 가득하지만 진실되고 정의로운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시선을 두는가에 따라 세상은 다릅니다. 좀 더 밝은 길, 진실과 정의가 빛을 발하는 그길로 가야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 그길이 바로 진리의 길,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진실된 정의와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길이 바로 주님의 길이며 그곳이 바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진리와 생명이 넘치는 세상, 정의와 사랑이 영원히 마르지 않은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저희를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1.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있습니까? 2. 진실과 정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3. ‘주님의 나라에 속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합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에게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은 의미를 찾기 힘들 때가 아닐까요? 특히 죽음의 순간에 자기 존재 이유를 잘 모를 때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서도 의미를 찾은 사람은 희망을 품고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죽음의 고통은 정말로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 아프고 힘들 때, “아이고 죽겠네.”라고 자신도 모르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자기의 존재 이유조차 찾기 힘들면 더 힘든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할아버지께서 죽음 직전 신부님께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 정말 고마워요. 제가 하늘 나라에 가면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죽고 나서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 나라에 가셨다고 합니다.
존재 의미를 찾아서 늘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즉,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의미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이 아님을 연중시기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오늘, 임금이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며, 우리 모두의 왕이라고 하시는 분께서는 절대 자신의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봉사하셨고, 철저하게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왕이 아닌 종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초라한 모습의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힘’이라는 것을 통해서는 참된 영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신의 몸 자체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요? 남보다 윗자리에 올라가서 재력과 권력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세상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와 정반대로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랑과 희생으로 철저하게 봉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 영광을 얻는 방법을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이제는 세속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주님의 기준을 바라보고 철저하게 따를 때,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통해 매 순간을 의미 있고 기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사시겠습니까?


어떤 자매님께서 무척 화가 났습니다. 성당에 가서 어느 빈자리에 앉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여기 내 자리야. 일어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자매님께서는 성당에 지정 좌석이 어디 있냐면서 화를 내십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그 할머니가 꼰대질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 알고 보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스피커 바로 옆인 그 자리에만 앉는 거래. 신부님 말씀 잘 들으시려고 한다는데, 어디에서도 잘 들리는 우리가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신부님 말씀을 잘 들으려고 “여기 내 자리야. 일어나!”라고 무작정 말할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의 열정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정을 모를 때에는 ‘꼰대’로 보이지만, 사정을 알면 ‘열정’이 보입니다.

진리보다 진리의 증인
-전삼용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항상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마지막 때에 심판자로 오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왕은 당신의 백성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이들만 마지막 때에 당신의 나라에 살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알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아리송한 말씀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증언자는 분명 진리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면서 이미 진리에 속한 사람만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는 이에게 속하는 것이 곧 진리에 순종하는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리’란 한 마디로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뱀의 증언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결정적 이유입니다.
진리를 다시 회복함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다시 회복함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려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만약 하와가 하느님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뱀의 말 대신 온 에덴동산을 주신 분이 아버지이심을 알려줄 중개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죄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리는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이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고마움을 갖게 해 줄 증언자를 먼저 만났어야 합니다. 그가 곧 하와가 탄생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다 보았던 아담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언이 성경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믿으면 될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증언자를 통하여 레마로 바뀝니다. 로고스가 레마로 변하게 해 줄 증언자를 만나야 합니다. 목동으로 치면 천사이고 동방박사로 치면 별입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고 모두가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나 별을 쫓아온 목동이나 동방박사들만 구원되었습니다. 참다운 증언자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 진리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증언하는 누구에게 속하느냐가 구원의 핵심입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증언하는 예수님께 속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진리를 안다고 착각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휘둘렸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넷플릭스 흥행몰이를 했던 ‘마이네임’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조폭이며 지명수배자인 아버지를 둔 지우는 고등학생입니다. 지우는 자기 생일에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때리고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도망 다니던 지우의 아버지는 지우 생일이기에 전화합니다. 지우는 아빠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진다고 화를 냅니다. 아빠는 경찰들이 잠복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지우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집으로 찾아옵니다. 그때 문 앞에서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살해당합니다. 아버지는 딸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지우를 지킵니다.
진리는 아빠가 지우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우는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누가 아빠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아버지의 유일한 친구인 조폭 두목 무진을 찾아갑니다.
아버지와 무진은 생을 같이하는 친구입니다. 처음에 무진은 지우를 돌려보내지만, 지우의 끈질김에 무진도 지우를 키워주기로 합니다. 지우는 여자이지만 오래전부터 단련한 킥복싱과 무진의 특별 훈련 덕분으로 엄청난 실력을 갖춘 성인이 됩니다.
무진은 총 한 자루를 주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강력계 형사 차기호라고 말해줍니다. 지우는 경찰이 되어 차기호 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합니다.
차기호는 피를 흘리며 지우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지우의 아버지는 자신이 동천파 소탕을 위해 들여보낸 경찰이라고 말해줍니다. 무진이 자신을 구해주었던 지우의 아버지를 굳게 믿었지만, 경찰의 첩자인 것을 알고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우는 믿어보려 했지만 이제 적이 되어 지우의 복수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결국 지우는 무진에게 복수하고 드라마는 끝납니다.
윤지우가 바랐던 것은 아버지의 복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마치 바다의 물고기가 어부가 없이는 우리 밥상으로 올라올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이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우는 아버지의 친구였다는 이유로 진짜 원수를 믿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지우를 사랑했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는 그것을 증언해 줄 믿을 수 있는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믿을 수 있는 대상이란 자신을 경찰이 되게 하여 이용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이여야 합니다. 이 역할을 교회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참 진리에서 어긋나가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교회 밖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 배우면 하느님 사랑을 알아도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제가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할 때 한 교수 신부님은 예수님께서 당시 시대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반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러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교회에서 가르치고 계시지만 실제로 자기 개인적인 해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분을 따라간다면 저도 이상한 해석을 하고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가 저에게 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를 잃는다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기 어려울 것이고 신앙은 힘을 잃게 됩니다.
팩트를 전하는 성경이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주는 진리의 증언자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끕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온전히 해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의 기둥은 무엇일까요?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1티모 3,15)
예수님께서 진리 자체이시면서도 또한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안에 머물러야 진리 안에 머물며 하느님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온전히 증언해 줄 파견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입니다.
나는 하와이고 진리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증언자는 뱀과 아담 둘이 있습니다.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해석하고 가르쳐주는 올바른 증언자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에 영원히 머물려면 뱀이 아니라 에덴동산을 증언해 줄 아담, 곧 교회에 머물러야 하고 그 증언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보다 증언자가 중요합니다. 사랑은 이미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살고 있기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t8MsdG6bhrE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거칠고 황량한 사하라 사막에서는 생명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지리측량 회사인 ‘지오 인포메이션’이 러시아의 과학자들과 인공위성을 이용한 지리탐사 작업을 벌이던 중에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의 지하 250미터의 화강암 암반 밑에 거대한 강이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강의 수량은 식수로 사용할 경우 하루 32,000리터에 해당한 양으로, 실제로 인근주민 5만 명의 식수를 해결 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도 믿음의 강, 사랑의 강, 희망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을 퍼 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것을 목마른 이웃에게 나누는 것은 복음입니다. 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일화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도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주교가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로마에 왔습니다. 그 주교는 로마시내의 한 건물 앞 계단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에게서 시선이 멈춰졌습니다. 더부룩한 수염에 지저분한 옷을 입었지만 그는 분명 주교가 신학생 때 로마에 유학하면서 함께 공부를 하고 서품을 받은 친구 사제였습니다. 다음날 주교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신학교 친구였던 그 거지사제를 만난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주교에게 ‘아직도 그 사제가 구걸을 하고 있거든 제게로 모시고 와 주십시오.’라 말하였습니다.
거지사제를 만난 교황은 주교에게 잠시 밖에 나가서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주교가 밖으로 나오고 거지사제와 교황 단 둘이만 남게 되자 교황은 즉시 거지사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당황한 거지사제는 ’저는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로마 주교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신부님께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드립니다. 제게 고해성사를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꿇어앉은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거지사제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교황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거지사제가 교황 앞에 꿇어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거지사제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교황은 거지사제가 구걸하고 있는 거리의 이름을 묻고 거지사제를 그 거리의 고해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거지사제는 거리의 부랑아들과 거지들의 고해신부로서 누구보다 구걸하는 사람과 떠도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는 아버지로서 존경받으며 충실한 사제로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깊이 던졌던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행위로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여인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주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물을 깊이 던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내면에 있는 열정과 헌신의 강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뜻과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참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밝히신 빛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그 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물, 신분, 편견이라는 껍질에 갇힌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빛 속에서 지내면서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합니다.’ 지금도 거짓된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셨고, 하느님의 모친이 되셨으며,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전구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충실하게 따라서 진리를 증거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에는 아직도 이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기는 짬뽕 같은 제도가 남아있는데, 이른바 천황(天皇)을 계승하는 제도입니다. 황제도 아니고 천황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한 인간에게 그런 엄청난 굴레랄까 올가미를 씌우니 본인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코 공주가 얼마나 어색하고 답답하고 어색했으면 특단의 결정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녀는 황실과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제대로 된 결혼식이나 황실 특유의 대대적인 행사도 취소했습니다. 엄청난 액수의 지참금도 포기하고 쫒겨나듯 황궁을 빠져 나와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황제는 누구며, 하느님은 또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의 왕, 세상의 통치자들, 아무리 난다 긴다 할지라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으며, 큰 실수를 밥 먹듯이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결점과 한계를 지니고 살아가며 언젠가 그 자리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잘못 통치를 했을 경우 국민으로부터 혹독한 심판도 받습니다. 권좌에서 물러서고 나서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모습이 너무나 허전하고 쓸쓸합니다. 결국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한 나약한 인간이 황제며, 대통령이며 수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일국의 황제나 통치자와는 근본적으로 비교가 안 될 분이십니다. 삼라만상을 지배하시는 분, 우주만물을 통솔하시는 분, 잠시 통치하는 분이 아니라 세세대대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당연히 하느님께 우선권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황제와 하느님은 애초부터 비교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크고 존귀하신 하느님께서 취하신 태도는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셨지만, 극도로 자신을 낮추셔서, 제자들의 종이 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군림과 압제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의 왕으로 끝까지 남으셨습니다.
오늘의 왕들, 오늘의 지도자들, 오늘 우리의 목자들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일정 기간 머물며 봉사하다 떠난 후, 본당이나 공동체 구성원들은 우리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목자들의 떠남이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을 흘리고 발을 동동 구를 정도입니까? 혹시라도 반대로 우리의 떠남이 너무 기뻐 박수를 치고 용약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물 좋은 한 자리’를 추구하는 출세주의자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기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긋납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성취나 야욕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리스도교를 망신시킬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맞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동일시되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욕심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권력은 섬김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교회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것 없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

사랑의 왕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외아드님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빌라도는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의 임금이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네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이 얘기해준 것을 말하는 것이냐고 하시며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지만 이 세상의 왕들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고, 왕관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굿간을 벗삼아 오셨고, 조롱섞인 가시관을 쓰셨으며 화려한 궁궐은 고사하고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분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8,20)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기를 홍보하고 과시하기에 바쁘고 그것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동기는 순수한 사랑입니다. 그분은 사랑에서 당신을 비우신 분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과오가 아니라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나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도 자기가 최고의 지도자라고, 스스로 왕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행사하려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왕의 모습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로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왕이라고 내세우지 않았어도 사람들이 이미 왕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고 한 소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고(요한1,14)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 하였습니다. 당신을 낮추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요한13,15)겸손과 봉사의 왕이 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하시며(요한13,34)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면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하고 기도하시며 용서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으시며 백성들을 위한 사랑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18,37)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호소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과 더불어 주님의 모든 것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102가지 이야기}르크리얀스의 국왕 자로가크는 백성들의 풍기가 날로 문란해져가는 것을 매우 걱정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다.
"잘 들어라! 누구를 막론하고 풍기를 어지럽히는 자는 그 형벌로 두 눈을 빼겠다. 그러니 백성들은 문란한 행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모두가 조심해 주기 바란다." 그 후로 로크리얀스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잘 지켜 나라 안의 질서가 잡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이 신하들 앞에서 노발대발 소리를 질렀다. 왕자가 풍기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왕자라 할지라도 일단 국법을 어긴 이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법대로 하겠으니 당장 왕자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라!" 마침내 왕자는 국왕 앞에 불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자로가크 국왕이 서슴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왕자라 할지라도 국법을 어긴 이상 마땅히 형벌을 받는 것이 법을 지키는 도리이니라. 어서 왕자의 눈을 빼라!" 설마 하던 신하들은 왕의 추상같은 명령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아니옵니다. 아무리 국법이 엄하다 해도 단 한 분뿐인 왕자님께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은 이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옵니다. 황송한 말씀이오나 이번만은 왕자님의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 많은 신하가 공손히 엎드려 국왕에게 간청했다.
그러나 국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정한 법은 누구나 다 지켜야 한다. 왕자라고해서 특별히 용서하고 왕이라고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이 법을 지키겠느냐?" 국왕의 표정은 엄숙하고 결심은 굳었다. 신하들은 더 이상 왕자를 위해 나서서 간할 수가 없었다. "자, 국법대로 시행한다. 집행관은 어서 왕자의 눈을 빼도록 하라." 집행관은 어쩔 수 없이 칼을 치켜들고는 국왕의 명령대로 왕자의 한쪽 눈을 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 내렸다.
집행관이 다시 왕자의 다른 쪽 눈을 빼려고 칼을 고쳐 잡자 자로가크 국왕이 손을 들어 중지시키며 말했다. "집행관 듣거라! 법대로 두 눈을 다 빼야 하겠지만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 왕이 두 눈이 없어서야 되겠느냐. 그러나 자식의 교육을 잘못시킨 내가 아비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 나의 한쪽 눈을 빼도록 하여라!" 신하들은 모두 놀라 반대했고 왕자도 국왕에게 매달려 사정했다. "페하, 그건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옵니다. 제발 명령을 거두워 주십시오." "아바마마, 차라리 소자의 눈을 빼십시오." 그러나 자로가크 국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집행관, 어서 내 눈을 빼도록 하라."
집행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명령이 엄해도 차마 국왕의 눈을 뺄 수는 없었다. "어서 명령대로 시행하라." "폐하, 소인이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명령만은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집행관은 그 자리에 엎드려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 도저히 명령이 시행되지 않을 것 같자 국왕은 스스로 칼을 움텨잡았다. "그럼, 내 손으로 시행하지!" 자로가크 국왕은 자신의 손으로 한쪽 눈을 뺐다. 그 후부터 로크리얀스의 백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국법을 잘 지켜 나라가 매우 안정되었다.
자식의 한쪽 눈을 빼서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 자신의 한쪽 눈을 빼 자식과의 사랑을 유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세상이 추구하는 소유와 권력, 지배의 왕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진리와 정의의 왕, 섬김과 봉사의 왕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다음 주는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대림절을 잘 맞이하시고 기쁜 성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사람을 상대할 게 아니랍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 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합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 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홍문택 신부) @@

<예수님>
-송영진신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이 말씀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때에 그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0ㄴ-54)”
이 상황은 박해자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는 것을 막으려고 칼을 빼어 든 사람은
베드로 사도입니다(요한 18,10).
‘이 세상의 나라’는 칼로 다스리다가 칼로 망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나라입니다.
요한복음의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마태오복음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의 군대는, 만일에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정복하려고 하셨다면, 로마 황제가 자기 제국의 군대를 모두
동원해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즉,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속죄 제물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일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라는 말씀은,
“나의 십자가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로 해석됩니다.
또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하신 말씀도 연상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권력을), 백성을 억압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고, 백성에게 권세를 부리는 일에 쓰는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고 계시는 힘을
‘사람들을 섬기고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만물의 주님이신 분’입니다(마태 28,18).
세상의 권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권력)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힘,
즉 주님의 권한과 권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힘없음의 상징’이 아니라,
‘절대자의 낮춤과 섬김의 상징’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만 생각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우주 전체를 지배하는 절대권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하느님이신 분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낮춤’과 ‘섬김’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날이고,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 사실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며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의 주권과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믿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처럼 그렇게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그 실천을 통해서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이 말씀은 열두 사도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여기서 ‘보다.’ 라는 말은, ‘참여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물의 주님으로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 나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그러니 무엇인가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잘난 체 할 것이 없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더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세속의 권력과 명예와 재물은 먼지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고 싸우고 다투는 것은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 6,14-16)”

복음: 요한 18,33b-37 :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조욱현신부-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나약성에서 나온다. 이것이 ‘희생된 어린양’이라는 상징을 통해 나온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나오는 보편적인 구원능력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구원의 은혜는 바로 사랑에서 나왔으며 그 사랑은 절대 패하지 않는다. 그분의 왕권은 사랑과 봉헌과 봉사와 겸손과 화해 그리고 그분을 희생 제물로 만든 모든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항거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랑의 왕국을 원한다. 그러나 너무 이상적이고 어려워 보여서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니엘서에도 이 사고가 드러난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왕국이 이 세상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신다. 빌라도의 첫 번째 질문은 신원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33b).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준 것이냐?”(34). 교활하고 경멸적인 빌라도는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라고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알리바이를 준비하면서, 재판에 넘긴 책임을 “동족과 수석 사제들”(35절)에게 돌렸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왕권을 표명하신다. 그분의 왕국은 천상적인 것이라고 하신다. 만일 세상의 것이라면, 그분의 부하들이 싸워서 그분을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의 왕국은 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신다(36절).
빌라도는 빈정대는 말투로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37a). 예수께서 답하신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37b). 그러나 빌라도는 왕이 무슨 의미에서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증언하려고”(37절) 태어나셨고 세상에 오셨다(참조: 요한 1,1-18). 로마에 있어서도 진정한 왕이시며, 또한 유다인들에게 그만큼 사랑받은 “진리”, 즉 무엇보다도 유다인들에게 먼저 천상적 가르침을 가져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왕권은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맡기신 “진리를 증언하는”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있었다. 어떠한 유혹도 협박도 이해관계도 그분을 물러서게 하지 못한다. 그분은 철저히 당신 자신과 모든 사건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오만불손하지 않으며, 아버지 하느님께 자유롭게 충실하신 분이시다. 여기에서 그분의 왕권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절대 진리이시다(참조: 요한 14,6).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데 구별이 있다. 하느님에게서 나서 하느님의 진리를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받아들이고 따른다고 하신다(37절). 즉 타협이나 양보를 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항상 진리 편에 서는 것이다. 그 왕국은 진리의 왕국이고 영원히 실현되고 있고, 성령 안에서 십자가 위에서, 진실한 증언에 있는 피와 물(19,30.34.35-37)에서 실현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왕권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왕권이다. 그러나 언제나 빌라도들이 진리를 밀어내고 있다.
묵시록에서도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에서 온다고 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당신 자신과 진리에 대해 보여주시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권은 묵시록에서 구원된 모든 이들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그분께 영광과 권능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묵시 1,6). 그래서 교회는 모든 신자가 공통적 왕권을 재인식하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증거하신 사랑과 진리의 모습으로 사회로 침투할 수 있도록 그 왕직을 실행하도록 초대하고 있다(교회 36).
이 왕권은 쉽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실행하는 것도 더 어렵게 느껴진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봉사함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수성이라고 강조하신다. “그리스도의 이 태도로 미루어 본다면 왕이 된다는 것은 종이 됨으로써만 가능하며, 종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된다고 할 정도로 고귀한 영적 성숙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보람 있고 효과적으로 남에게 봉사하려면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제어를 가능케 하는 덕들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왕다운 사명 즉, 그분의 왕다운 직분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스도교 윤리와 인간 윤리의 모든 분야와 밀접히 연관된다.”(인간의 구원자 21항).
여기에 우리의 자세가 중요하다. 진리를 밀어내는 빌라도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자의 모습인가? 그리스도의 왕권은 그분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진리를 끝까지 사랑과 봉사를 통하여 증거한 것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 왕권을 들어 높이는 것은 우리가 모두 그 왕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봉사로 실행하여 세상에 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지만, 그 왕권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의 진리 안에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체험하며, 그리스도 왕께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오상선신부-
거칠고 황량한 사하라 사막에서는 생명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스위스의 지리측량 회사인 ‘지오 인포메이션’이 러시아의 과학자들과 인공위성을 이용한 지리탐사 작업을 벌이던 중에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의 지하 250미터의 화강암 암반 밑에 거대한 강이 흐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강의 수량은 식수로 사용할 경우 하루 32,000리터에 해당한 양으로, 실제로 인근주민 5만 명의 식수를 해결 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도 믿음의 강, 사랑의 강, 희망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강을 퍼 올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것을 목마른 이웃에게 나누는 것은 복음입니다. 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일화를 통해서 우리 내면에도 강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주교가 교황님을 알현하기 위해 로마에 왔습니다. 그 주교는 로마시내의 한 건물 앞 계단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에게서 시선이 멈춰졌습니다. 더부룩한 수염에 지저분한 옷을 입었지만 그는 분명 주교가 신학생 때 로마에 유학하면서 함께 공부를 하고 서품을 받은 친구 사제였습니다. 다음날 주교는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신학교 친구였던 그 거지사제를 만난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주교에게 ‘아직도 그 사제가 구걸을 하고 있거든 제게로 모시고 와 주십시오.’라 말하였습니다.
거지사제를 만난 교황은 주교에게 잠시 밖에 나가서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주교가 밖으로 나오고 거지사제와 교황 단 둘이만 남게 되자 교황은 즉시 거지사제 앞에 무릎을 꿇으며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청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당황한 거지사제는 ’저는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은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로마 주교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신부님께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드립니다. 제게 고해성사를 주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꿇어앉은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거지사제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교황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거지사제가 교황 앞에 꿇어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거지사제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교황은 거지사제가 구걸하고 있는 거리의 이름을 묻고 거지사제를 그 거리의 고해신부로 임명했습니다. 그 거지사제는 거리의 부랑아들과 거지들의 고해신부로서 누구보다 구걸하는 사람과 떠도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는 아버지로서 존경받으며 충실한 사제로서 잘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도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깊이 던졌던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행위로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여인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당신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주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용서를 받았던 여인은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물을 깊이 던지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바오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내면에 있는 열정과 헌신의 강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뜻과 욕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참된 치유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자신을 버리고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밝히신 빛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그 빛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물, 신분, 편견이라는 껍질에 갇힌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빛 속에서 지내면서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합니다.’ 지금도 거짓된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따랐던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은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사셨고, 하느님의 모친이 되셨으며,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전구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충실하게 따라서 진리를 증거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
-김찬선신부-
오해의 소지가 많은데 우리 교회는 왜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낼까요?
그리스도는 당신이 왕이 되려는 분으로 오해받을까 극히 조심하셨고,
실제로 사람들이 왕으로 세우려고 할 때 피하신 분이시며,
오늘 복음의 빌라도도 그리스도께서 유다인들의 임금인지 묻지 않습니까?
사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교회의 영향력이 근대에 들어 약화되자
그 반작용으로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세상의 왕들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하지요.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왕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과 다르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세우려고 했던
하느님의 나라도 세상 임금의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당신 나라를 세우시려고 한 적이 없고,
하느님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세우려고 하신 분이시며
그러나 그 나라가 이 세상 왕국과 다르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의 나라를 옳게 증거했을 때는
교회도 늘 세속의 통치자들과 충돌을 하였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지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세속 임금들과 잘 지낼 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세속화되었던 아픈 역사도 있지요.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함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증거해야 할 우리가
그 백성으로서 어떠해야 할지 성찰하고 반성하기 위함입니다.
우선 저부터 반성합니다.
어떤 때 저를 보면 과도하게 정치판 돌아가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를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무정부주의자나
정치적 무관심자나 정치에 냉소적인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하지만
세속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어도 안 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지 이 세상 나라가 아니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 증거지
파당적이고 지나치게 정치적인 세상 참여가 아님을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다시금 명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오늘 주님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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