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1. 18. 07:28

2021년 11월 18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루가 19,41-44)

 

 

As Jesus drew near Jerusalem,
he saw the city and wept over it, saying,
“If this day you only knew 
what makes for peace?
but now it is hidden from your ey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배교를 강요하는 임금의 관리들을 죽인 마타티아스는, 율법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이들을 모아 광야로 내려가 자리를 잡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시며, 도성의 멸망을 예고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3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고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빨리 변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놀기 바빴습니다. 학원 다니는 아이도 없었고, 선행 학습이라는 말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학원 안 다니는 아이 찾기가 힘듭니다. 선행 학습은 당연한 것이 되어서, 학교에서는 당연히 알 거라면서 진도를 나간다고 합니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또 엄청난 데이터가 그 안에 공개되어 있어서 자료를 찾는데 책보다 검색하는 것이 더 빨라졌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손안에 엄청난 지식을 담고 있으니, 늘 새로운 지식을 소유해야 하는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보며 억지로 하는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억지로 시켰는데 3년만 지나도 옛 지식이 되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공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요? 혼자 공부하는 것을 읽혀야 새로운 지식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부모가 억지로 끌어주는 신앙이 아닌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계속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왜 우실까요? 바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고 우시는 것이 아닐까요? 당신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고자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비유라는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쉽게 설명을 해주셨지만, 사람들은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시지만 트집을 잡더니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는 인간의 모습에 슬피 우는 부모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이 필요한 것을 계속 청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가려고 하지 않고, 그 옛날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달라는 유다인들처럼 기적을 자신에게 달라고만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보려고 하지는 않고 세속의 뜻만을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어떠하실 것 같습니까?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으실까요? 잘못된 자녀를 보고 마음속으로 우는 부모의 마음이며, 빗나간 길을 걷는 당신 백성을 보고 눈물 흘리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이가 주고받는 말은 아름다운 음악처럼 감정을 건드리고, 우리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백수린).

좋은 우리 글 만들기.

중세 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무조건 라틴어로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자국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라틴어 성경을 자기 나라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1521년,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교황청은 강력하게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독일어로 특히 궁중에서 쓰는 고급 언어가 아닌 일반 백성의 언어를 기준으로 번역했습니다. 그 결과 현대 독일어가 탄생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더군요.

많은 언어학자가 언어는 만들어져 가는 도중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한글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실 우리 한글의 역사는 세종대왕 때부터이니 결코 짧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한자에 밀려 언문으로 불렸고, 일본 강점기 때기에는 이 언문마저 제약을 받았습니다.
 

속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속어도 우리의 한글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좋은 우리의 글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는 곧 나의 환경: 나의 환경은 내가 지키는 법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평화를 원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당신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 다음 내용입니다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듯 했지만그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그들이 원하는 평화는 세속적인 평화였습니다그 일시적인 평화를 위해 영원한 평화를 알아볼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우선 평화를 깨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우리의 평화를 깨는 것은 우리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입니다누구나 자신의 생존에 위협을 받으면 평화가 깨집니다. 

 

    얼마 전 평균 고도가 2m밖에 안 되는 작은 섬나라 투발루 외교부 장관이 바닷물 속에서 연설한 뉴스가 있었습니다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는 육지였습니다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의 급격한 상승으로 그 섬나라 주민들은 생존을 위협받게 되었습니다그러니 평화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네팔과 같은 높은 산지에 사는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따라서 그것으로 평화가 깨지지는 않습니다따라서 사람이 불안해지는 이유는 생존이 위협받는 환경에 살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은 바로 환경입니다그런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은 심지어 많은 수가 걸리는 암과 같은 질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한상도 씨는 자연식물식을 하여 1년 3개월 만에 전립선암이 완치되었습니다이 경험으로 펴낸 책이 수술도 없이약물도 없이 사라진 암입니다

     

    2020년 암 진단을 받은 저자는 2021년 식이요법만으로 암세포가 사라지게 하였습니다처음에 의사는 당장 수술을 종용하였습니다그러나 그는 더욱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암이라는 것은 결과물이고 암이 생기게 된 원인과 과정을 돌아보며 수정하고 치유하여 앞으로도 암이 살 수 없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시도입니다수술로 당장 보이는 암을 제거할 수는 있어도 보이는 암은 물론 보이지 않는 암까지 (저절로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암이 생기지 않게 하는 삶의 환경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은 나를 죽여야 내가 산다입니다그리고 “2020년 5월 25나는 나를 죽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암 진단을 받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그를 아는 사람의 대부분은 그가 암에 걸렸다가 나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지금까지의 삶을 살던 자신을 죽이고 생활 태도를 뜯어고친 것입니다. 

 

    “나는 평소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그와 달리 내적인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먹는 음식이 달라지고생활습관이 달라지고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가리는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먹던 습관을 버리고 몸에 좋은 음식을 철저히 가려 먹었다육류와 생선우유계란밀가루가공식품을 완전히 끊었고과일과 채소현미잡곡밥에 채소 반찬을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1만 보 이상 걸었고주말에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고어떤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했다암을 치료한다는 생각 대신 몸과 마음을 재생시킨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그것뿐이다누구나 알고누구나 할 수 있는상식에 가까운 것을 묵묵히 실천했을 뿐이다.” 

 

    나의 생활 태도가 바로 건강을 위한 나의 환경입니다이 환경을 조성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병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습니다그 병이 침투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이것이 평화를 얻는 법을 아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죽음이라는 생존을 위협하는 병은 누구도 이기지 못합니다그래서 결국엔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은 없습니다코로나가 끝나면 안전할까요또 다른 불안이 시작될 것입니다결국죽음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불안은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 안에서 평화롭습니다동물의 새끼들도 어미가 보호해주면 안전하다고 느낍니다우리가 생겨났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바로 어머니의 태중이었습니다태중의 아기는 부모의 태중에 머무는 것 하나만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하지만 그런 삶은 발전이 없습니다.

  

    존 A. 셰드는 항구에 머물 때 배는 언제나 안전하다그러나 그것은 배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부모는 자녀를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자녀를 분리해야 합니다그렇게 하려 하지 않아도 사춘기가 되면 자녀는 더는 부모가 자신들의 평화로운 환경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때 찾아야 하는 것이 하느님입니다하느님이 아버지이시고 교회가 어머니입니다참 평화는 내가 하느님 태중에 있음을 믿는 것으로 얻어집니다순교 성인들은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평화로웠습니다그 이유는 창조자 안에 머묾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창조자를 알 수 있을까요바로 양식과 보호와 가르침을 주는곧 살과 피를 내어주는 대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하느님은 당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리시기 위해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셨습니다이 세상에 하느님이라고 하시며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신 신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았습니다그 이유는 자신들의 피난처를 자신들이 만들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하느님 태중에 머물며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공간이나 그곳에 머물려면 그 공간을 제공하는 이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암을 극복하려면 그것이 침투할 수 없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 공간에 머무는 방법이 자연식물식단법이었습니다어느 공간이나 법이 존재합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을 따름으로써 하느님 품에 머물 수 있습니다그리고 그때 느끼는 평화가 이미 땅이 아니라 하늘에 머물고 있음을 믿게 합니다. 

 

    태중의 아기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그래서 그 공간에서 벗어나려고 어머니의 뜻을 어길 줄 모릅니다그러니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결국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아 스스로 평화를 찾게 만드는 것이 자아입니다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평화롭습니다내가 그분처럼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그래야 불안 자체인 내가 죽고 그분 안에 머물 수 있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서부터 평화롭게 살게 됩니다. 

 https://youtu.be/sMJb9snd5wI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한국은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저도 재외국민으로 투표할 수 있도록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했습니다재외국민이거나투표 당일에 해외에 체류하는 사람은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사전에 투표할 수 있다고 합니다정당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토론을 통해 정책을 이야기합니다정책을 들은 당원들은 경쟁력이 있고좋은 정책을 보여준 후보를 당의 공식 후보로 선출하게 됩니다경쟁이 치열하다보면 때로 상대방의 약점을 들춰내기도 하고인신공격을 할 때도 있습니다그런 경쟁은 자칫 후보와 지지자들 간에 앙금으로 남게 됩니다그러나 정식 후보가 선출되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기 마련입니다아쉽게 경쟁에서 탈락한 경쟁자들도 이제는 한 팀이 되어서 당의 공식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선거운동을 합니다만일 아쉬움 때문에억울함 때문에 독자적으로 대통령 후보로 등록하면 당의 선거운동에도 커다란 피해를 주게 됩니다저는 그런 모습을 몇 번 보았습니다내부의 단합된 힘이 없으면 아무리 약한 상대라도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강대한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의 공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그래서 공식 후보가 된 사람은 아쉽게 탈락한 경쟁자들을 만나 위로하고큰 대의를 위해서 함께 하기를 청하게 됩니다.

 

소금은 물에 녹아듭니다그래서 음식에 맛을 낼 수 있습니다물은 소금이 들어 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소금은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물과 하나가 됩니다그러나 물과 기름같다는 말이 있습니다물에 떠있는 기름은 물에 녹아들지 않습니다물은 기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기름 역시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같은 강에 있으면서도 더 넓은 바다로 가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물과 기름 같은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도 있습니다아름다운 공동체가 때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한국에서의 사목 방침을 고수하면 현지에 있는 신자들은 당황하게 됩니다현지에 있는 신자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에게 현지의 상황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한국에서 온 신부님도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물과 기름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반면에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현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사제 모임에도 잘 참석하면서 이해하고 경청하면 조금씩 현지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현지에 있는 분들이 한국에서 온 신부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새로운 사목의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면 공동체는 더욱 풍요로워집니다물과 소금 같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하나가 되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생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의 지체가 한 몸이 되어서 협조하기 때문입니다만일 우리 몸의 지체가 물과 기름처럼 따로 활동한다면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없을 것입니다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몸의 지체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우리의 몸은 혈관신경척수를 통해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습니다오늘 독서에서 마타티아스는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어기며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는 동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그때에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하느님을 따르는 마타티아스는 율법과 계명을 지켜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움에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과 기름처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나의 신앙이 물과 기름 같은 신앙으로 겉도는지물과 소금 같은 신앙으로 풍요로운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하느님께서 바로 ‘나’ 때문에 우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롭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온전히 유화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도 인간 조건을 지니신 채, 우리처럼 한 인간으로 살아가셨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 나와 똑같은 얼굴을 지니셨다는 것,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느끼는 삶의 희로애락을 똑같이 느끼셨다는 것, 하느님께서도 마치 저처럼 야심한 밤, 출출함에 못 이겨, 피곤에 지친 얼굴로 라면을 끓이셨다는 것... 

 

아마 예수님께서도 우리처럼 한 상 잘 차려진 잔칫상 앞에서 눈이 휘둥그래지고 얼굴도 환해지셨을 것입니다. 맛있게 음식을 드셨고 포도주잔도 기울이시고, 옆 사람과 잔을 마주치며 건배도 하셨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 뱃속만 가득 채우느라 정신이 없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부르르 분노에 떠셨을 것입니다. 절친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슬펐던지 큰 소리를 내며 울기도 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십니다.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둔 어느 날, 결코 올라가고 싶지 않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십니다. 당신의 죽음이 슬프거나 두려워서가 아니라,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당신의 가련한 백성들이 불쌍해서 우십니다. 머지않아 철저하게도 파괴되고 유린될 당신의 성전의 모습을 미리 내다보시며 슬퍼서 우십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루카 복음 19장 43~44절)

  

아마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울고 계실 것입니다. 끝끝내 당신을 멀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실 것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귀를 막고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양떼를 보시고 우십니다. 지상의 평화와 일치를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파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보고 우십니다.

  

우리의 죄, 우리의 결핍, 우리의 방황, 우리의 죽음을 결코 견딜 수 없었던 주님께서 오늘은 우리 때문에 우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왕의 왕, 삼라만상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가련한 한 인간, 바로 ‘나’ 때문에 우신다는 것, 얼마나 감사롭고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눈물을 닦아드리자 

 -반영억신부-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비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청한다고 하지만 그분은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고 계시며 그 범주에서 벗어날 것을 염려해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지 않고 있으니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애끊는 바로 그 마음입니다.

예루살렘도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아프셨습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 평화를 갈망해야 할 사람들이 그 본연의 것에는 관심이 없고, 적개심과 더불어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평화의 길을 걸었으면 좋으련만! 그들의 완고한 마음은 자신의 삶을 돌이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우십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소리에 우십니다.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평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자니 눈물이 납니다. 이기심으로 가득 차서 주님을 생각할 틈이 없으니 참된 평화는 영영 멀기만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마음의 무질서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신다.”는 약속을 믿는 이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고요를 누립니다.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구애 없이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것을 기뻐합니다. 그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주님의 참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 평화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렇게 사사건건 마음의 혼돈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텐데 …. 주님께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고 또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미움은 미움을 낳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 구원을 갈망하며, 구원을 살게 됩니다. 주님의 눈물을 씻게 됩니다. 참으로 올바르게 주님을 믿는 이에게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에서 평화를 갈망합니다. 재물이나 명예, 건강, 외모, 자식 등이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에 전력투구하며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합니다. 결국, 그것이 참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참 평화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만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주시고, 그것을 믿는 이는 그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찾지 말고 한 번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근본에로 돌아가서 믿음으로 주님의 눈물을 씻겨드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주님의 눈에서 눈물을 그치게 해드리고 웃음꽃이 피게 할 수 있는 새 삶이 지금 여기서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우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1-44)”

 

예수님께서 우신 일은,

인간들이 멸망을 향해서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그 안타까움은, 구원과 생명의 길을 알려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멸망 쪽으로만 가는 인간들의 ‘고집’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그 안타까움은, 당신의 능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권능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니,

당신의 능력으로 인간들의 멸망을 막고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데리고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붙잡아서 끌고 간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든지 멸망을 당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오늘’은 ‘오늘이라도’로 해석됩니다.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너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이고,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는

“너 자신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입니다.

 

앞의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시는 당신의 심정을

다음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 13,34).”

예수님의 심정은, 죽을병에 걸려서 누워 있는 자녀에게

‘특효약’을 먹이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와 같은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거나,

그 사랑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 하느님, 영혼, 내세,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겼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도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사라져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자신의 생명도, 남의 생명도, 다른 피조물의 생명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질 뿐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22).”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라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사도 17,18),

바오로 사도를 비웃기만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사도 17,32).

(오늘날에도 과학만능주의에 빠져서 종교와 신앙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바리사이들이 바로 그런 오만과 위선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감추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죄의식 자체가 없거나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자기가 지은 죄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정말로 모르거나 잊었다면 옆에서 깨우쳐 주면 됩니다.

(모르거나 잊었다고 해도 죄는 죄입니다.)

그런데 “나는 죄가 없다.” 라고 주장하면서,

옆에서 깨우쳐 주는 것도 거부한다면, 죄가 자꾸 커지기만 할 뿐입니다.

(모르는 것과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3) 자신의 죄를 인식하긴 하는데,

자기는 충분히 회개했다고, 또는 회개를 마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그것도 교만죄이고, 신성모독죄입니다.

회개를 충분히 했는지, 또 회개한 다음에 보속을 충분히 했는지,

그것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죄를 짓고 나서 고해성사 한 번 보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용서를 전달해 주는 성사이지

회개가 끝났다고 선언하는 성사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경우에,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뒤에도 평생 ‘회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회개가 완성되었다는 선언을 듣는 때는 심판 때입니다.

하느님(예수님)만이 그 선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보지 않고서 어떤 개인적인 체험만으로

“나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고해성사를 세우신 예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4)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또 그 죄를 뉘우치고 후회하면서도,

회개하기를 포기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 죄를 뉘우쳤지만,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가 자살한 일은 회개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을 포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그렇게 끝나버린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복음: 루카 1941-44: 네가 평화를 가져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참 행복에 대해 당신이 가르치신 것을 몸소 증언하신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마태 5,5) 그분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다. 그분은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며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신”(에페 2,14-15), 그래서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신 분이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10) 그분은 우리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분만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은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참된 행복을 몸소 보여주셨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1)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이다.

 

그분은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42절)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복음 사가들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버릴 것이다.”(43-44절) 이 일은 말씀하신 지 40년 후 서기 70년에 그렇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루카 21,23-24) 또한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하셨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예루살렘과 똑같은 운명에 떨어지고 만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그분의 뜻을 실천하려 노력하여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초대하신다. 이 순간은 우리에게는 참으로 은총의 순간이 된다. 이 초대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며, 그리스도를 맞이하고 그분을 닮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분께 문을 열어드려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루카 19, 42)

-한상우신부-


평화는
십자가를
닮아간다.

평화는
자기방어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며
말씀하신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
예수님의
아픈 죽음이
있다.

십자가속에
평화가 있다.

사랑이
깊으면
십자가도
깊다.

영원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아가
무너져야
숨지 않는
소통의
사랑이 된다.

사랑보다
욕심이
앞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때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느님께
머물 수 없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픔이
욕심이다.

예루살렘을
내려놓아야
예루살렘이
보인다.

위령성월은
우리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다.

무너져야
다가설 수 있는
은총이다.

평화의 관계는
참된
사랑의
관계이다.

우리가 사랑한
욕심의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린다.

무너져야
다시
보게된다.

우리가
잊고 사는
평화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평화이다.

막을 수 없는
평화이다.

오늘 우리의
참된 평화가
이하루를
새로이 여신다.

평화는
십자가와 함께
사는 은총이다.

평화의 기쁨!
바로 오늘이다.

 -오상선신부-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평화'를 추구하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네가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십니다. 안타까움으로 애가 타시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도성이며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정작 평화에 대해 무지하다니요...

지금 이스라엘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향해 활짝 열린 계시가 예루살렘의 눈에는 아직 봉인되어 있는 셈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4)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지요.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지만, 예수님을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알아본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권력과 세도에 흑심을 품은 제자들은 자리 경쟁에 골몰하고 군중은 정치적 메시아를 꿈꾸었지요. 그리고 종교 기득권자들은 자리를 보전하려 음모를 꾸밉니다.

하느님께서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 관념 안에 새겨진 하느님 상이 각자의 야망과 욕망을 반영하는 탓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이와 약자, 고아와 과부, 병든 이와 소외된 이의 보호자임을 알게 되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릴 것입니다. 힘과 권력, 성공과 재물 등 그들이 바라는 무사 무탈 풍요 안위의 평화와 결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루카 19,43)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여 파괴한 실제 역사를 예견합니다. 세상이 보장하는 평화에 취해 칼을 주러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분 백성은 실제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다섯 아들과 함께 독립 항쟁을 시작한 마타티아스를 소개합니다.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1마카 2,18)
배교를 강요하는 관리들이 마타티아스를 회유합니다. 그가 성읍의 지도자이고 동족의 존경을 받는 큰 사람이어서 그의 배교가 적잖은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측근이 되고 세속의 재물까지 누리는 삶은 안전하고 풍요롭기까지 할 겁니다. 그야말로 세상이 주는 평화에 길들여지는 삶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안에서는 하느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으로 이미 충분하고 흡족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필요 없으니까요.

"정의와 공정을 추구하는 많은 이들이 광야로 내려갔다."(1마카 2,29)
세상이 주는 평화를 거부한 이들은 광야로 떠납니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삶의 결핍과 가난을 껴안는 장소이고 기회입니다. 하느님께 신의를 지키기 위해 광야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평화를 지키는 삶은 종종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과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놓고 영육의 가난을 떠안은 이들은 이미 하느님과 닿아 있기에 누구도 그 평화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나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화의 길을 헛짚고 헤매일 때 슬피 우십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진정한 평화가 던지는 도전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무뎌지지 않도록 마음을 성실히 벼리고 닦아나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벗님과 함께!

 나를 보고도 우시지 않을까?

 -김찬선신부-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지를

알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모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신 때도 모르고,

아무튼, 그 모름이 멸망의 이유인데

제 생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주님이 오셨는데도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논법인지 모르지만 저는 자주 이런 논법으로 얘기하곤 합니다.

 

불행이 무엇이냐?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행복의 길도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행복을 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같은 논법을 멸망이란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고,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래서 구원을 배척한 것이 멸망이다.

 

궁지窮地에 몰렸습니다.

아니, 사지死地에 몰렸습니다.

이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알려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와서 그 길을 알려주었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하면 죽게 되겠지요.

 

사는 길을 아는 사람, 그것이 말하자면 도사이고,

주님이야말로 도사道士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과 심판.

 

주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배척하면 구원을 배척하는 것이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멸망을 영접하는 것임을 가르침 받는 오늘 우리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도 우시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