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11. 16. 07:31

2021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자케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가 19,1-10)

 

 “Zacchaeus, 
come down quickly,
for today I must stay at your hou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는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묵으시며,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많이 읽습니다. 특히 하루에 350페이지를 읽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이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로는 책을 아주 급하게 읽게 됩니다. 이렇게 급하게 빨리 읽다 보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에 다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읽는 데에만 몰두해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이해하려면 잠깐 책을 덮고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책과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성급하게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도 성급하게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 위해서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나의 입장만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이해하는 시간이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8,25 참조). 그런데 부자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은 부자냐 가난이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자캐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만 애썼습니다.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로라하는 부자가 채신머리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면서 자캐오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명예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법정).

인간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명절 때가 되면 가게 앞에 또 마트에 가도 많은 과일 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커다란 과일 상자에는 과일 몇 개만 달랑 들어있는 것입니다. 과대포장이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상자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과일이기 때문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커다란 상자에 드문드문 담는다는 것입니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사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적당한 틈이 있어야 상처를 받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인간관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당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전삼용신부-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돈에 대한 욕심입니다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은 굳이 돈 욕심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참 창조자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왜냐하면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고아인 (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수학법학역사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램보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어쩔 수 없이 윌은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윌이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지만 숀이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 그렇게하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의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의 마음도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려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부모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16년 전의 기억입니다당시 저는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 담담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사목국에는 사제가 10명 있었습니다젊고열정이 많은 사제들이 모였으니 활기가 넘쳤습니다교회를 바라보는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에 때로는 의견의 충돌도 있었지만 그렇게 다름은 우리의 안목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습니다가끔씩 연수를 가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앞으로의 일정을 기획하였습니다양평에 있는 한화콘도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다들 양평으로 왔는데 한 신부님이 늦게 왔습니다신부님은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로 착각했습니다차 안에서 묵주기도를 했고음악도 듣고 기쁘게 출발했지만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못했습니다양평을 용인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라는 말이 있습니다계약서도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자칫하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닉스 한인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공항으로 마중 나온 신부님과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신부님은 아시아 마트를 내비에서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저는 내비에서 아시아 마트를 찍었고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신부님은 맞는다고 하면서 내비가 알려주는 데로 갔습니다. 30분을 달려갔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나중에 찾아보니 피닉스에 아시아 마트는 2개가 있었습니다하나는 그렌데일에 있고다른 하나는 메사에 있었습니다우리는 메사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가야했는데 그렌데일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갔습니다결국 식당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고우리는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짐을 풀고 편하게 먹으니 더 좋았습니다. 17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사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말을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명품은 기능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명품이어야 하고마무리도 명품이어야 합니다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전선하신 분입니다우리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90세의 노인 엘아자르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엘아자르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엘아자르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겉으로는 율법을 어겨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 같지만사실은 정결한 음식을 주기로 하였습니다그렇게 하면 엘아자르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엘아자르의 인품과 덕망에 대한 배려였습니다그러나 엘아자르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비록 본인은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엘아자르가 이교 음식을 먹은 것으로 알고 따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렇습니다이교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평판이 문제였습니다엘아자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저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길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세리였던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자캐오는 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그릇된 길을 돌아서 올바른 길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회개입니다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삶의 방향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입니다회개한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야고보 사도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셋째는 순명입니다이제는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청했던 마리아의 삶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청했던 예수님의 삶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던 엘아자르의 삶입니다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걸어갔던 삶입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

 -양승국신부-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반영억신부-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는 부자였지만, 즉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할 ‘낙타’였지만(루카 18,25),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바늘귀’로 들어간 사람이고,

‘잃은 양’이었지만(루카 15,4),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되찾은 양’이 된 사람이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새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변화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고(루카 9,9), 결국 만났지만(루카 23,8),

새롭게 변화되기는커녕 더 나쁜 상태로 떨어졌습니다(루카 23,11).

그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자캐오가 애썼다는 말은,

그의 마음속에 간절한 갈망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그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기득권층 사람인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또 영적으로는 소외계층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것은 그의 처지와 열등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키가 작은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상징적인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은, 그가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군중’과 자캐오 자신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난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는 군중은 여기서는 ‘자칭 의인들’이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자캐오의 모습에서 5장의 중풍병자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루카 5,17-19).”

(이 이야기에서도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간 것은

아마도 병자 자신이 그렇게라도 해 주기를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잃은 양’ 자신도 목자에게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목자를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5-10)”

 

자캐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자캐오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전부터 잘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즉 그의 처지와 상황도, 그리고 그의 마음속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4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도, 또 주님을 믿기 전에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난 일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속에 ‘부르심’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쓴 일은 ‘응답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시자 그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맏아들인 일과

자기의 재산을 모두 내놓은 일은 ‘응답’을 본격적으로 실천한 일입니다.

 

“왜 전 재산을 내놓지 않고 ‘재산의 반’만 내놓았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기 위해서

‘재산의 반’을 남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인 자캐오는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갔을까? 그는 자기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써 곧바로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기로 하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자캐오는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구원을 받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나라의 입구로 데려다주었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 6)

-한상우신부-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이 여정이 멀다.

고운
단풍잎이
먼저 아래로
내려앉는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다.

내려와야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

내려와야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할 수
있다.

부여잡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게된다.

버리지 않고서는
내려올 수 없다.

내려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이다.

내려오니
가야할 길이
보인다.

언제나
회개의 마지막은
예수님께 기쁘게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는
자캐오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오늘의 길을
되찾아준다.

내려와야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져 내려
오셔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이시다.

자캐오 드디어
예수님께로
내려와
내려오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얼른
기쁘게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온 거기에
기쁜 회개가 있고
기쁜 오늘이 있다.

삶의 해답은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변화이다.

단풍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앉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카 19,3-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유한 세리 자케오입니다.

군중보다 키가 작은 탓에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자 자케오는 예수님께서 가실 방향을 미리 앞질러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오르지요. 한 도시의 세관장이 연배로 보나 지위로 보나 쉽게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 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케오는 세상적으로도 참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과 이권을 향해 성실하게 달렸겠지요.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보물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성공을 향해 열심히만 달리면 된다고 여기는 어리석고 눈먼 열정가들의 전형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달립니다. 물질이 아닌 사람, 그것도 하느님의 사람을 보려고 달린 일이 과연 그의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이제야 자케오는 물질이 아닌 의미, 육적인 일이 아닌 영적인 일을 향하기 시작한 겁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시고, 친히 그의 집에 머무르시니 자케오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키시지도 요구하시지도 않은 일을 자청해 선언합니다. 자기 삶을 돌이켜서 허물을 기워갚고자 이웃에게 나눔과 보상을 약속하는 겁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 것을 향해 뛰느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해치며 살던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달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발견해 그분과 머무르자 가난한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엽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열심히 살았던 그가 이제야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마음이 가는 방향과 결을 같이하게 된 것이지요. 구원입니다!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 하권은 유다 민족의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의 순교를 다룹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이교 제사 책임자들은 "하는 척만 해도 살려 주겠다"고 그를 회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을 받는 원로 스승인 그의 변절이 이교 문화 수용에 엄청난 기폭제가 될 터였지요. 하지만 그는 잔인한 고문에도 물러서지 않고  고결한 의지를 발휘해 고통을 용감히 견디어 냅니다.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영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찰나의 안위 때문에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거래 불가한 가치이기 때문이지요. 위선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정향하며 살아온 엘아자르는 길을 돌이켜 위선으로 퇴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구원의 방향을 찾은 자케오가 다시는 죄악의 진창으로 되돌아갈 이유도 없는 겁니다.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으니 멈춤 없이 후퇴 없이 그저 충실히 나아갈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얼굴을 보고자 몸과 마음과 영혼이 힘껏 달려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필요하다면 체면일랑 잊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도 좋습니다. 영혼이 사랑하는 주님을 꼭 붙들고 결코 돌아서지  않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늙어서도

 -김찬선신부-


오늘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는 나이 많고 풍채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인격도 고매하고 신앙심도 대단한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도 나이는 많을 것이지만

키가 작아서 풍채는 볼 품 없고 당시 멸시를 받던 세관장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은 나이 많은 것은 같지만 대조되는 인물들인 셈입니다.

그래서 늙은이들의 모범으로 두 사람을 한 번 다뤄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아자르는 그저 자존심 강한 늙은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를 너무 얕이 보는 것이고 제대로 평가한다면

자기 인격을 하찮은 것에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찮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 하찮은 것이 자기 목숨이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가장 소중한 것이고,

그러니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저는 이 대단한 사람을 별로 닮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사람은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닮고 싶지 않고

특히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 비교하면 더더욱 닮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 제게 엘아자르라는 존재는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너무 완벽하고,

그러니 너무도 완벽하지 않은 저와는 이미 너무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간미랄까 사람 냄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 학자이기 때문인지

율법적인 옳음이 느껴지지 복음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저와 마찬가지로 흠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의화하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성장해가고 그래서 늙어 성숙해지는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 옳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이고,

그러나 사랑을 원하고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느님 사랑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는 작은 사람입니다.

키만 작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작은 사람입니다.

 

너무도 다행인 것은 그 나이에도 나무에 오를 정도로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주님 사랑에 가 닿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장이 멈추고, 굳어지고, 화석화되며,

사랑이 시들해지는 것이 보통인 늙은 나이에도 나무에 오름으로

주님을 자기 집에 오시게 한 자캐오가 무척 부럽고 닮고 싶은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