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밤낮 부르짖는데도
올바르게 판결해 주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그대로 내버려 두실 것 같으냐?
사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who call out to him day and night?
Will he be slow to answer them?
I tell you, he will see to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주님의 자녀들은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에게 졸라대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여름의 막바지에 휴가를 떠났었습니다. 특별히 부친상을 치르면서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충북 단양에 걷기 좋은 길들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푹 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동시에 많이 걸으면서 몸도 마음도 회복할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지에서 출발해서 막히는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쭉 가다가 드디어 고속도로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했기에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가 쉬면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지갑이 없는 것입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지갑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돈 한 푼 없고, 신용카드도 없어서 밥 한 끼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2시간 갔던 거리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충북 단양까지는 8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무조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챙겨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 가는 것도 입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가겠다고 말하면 그만일까요? 꼭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과부는 돈도, 그리고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공정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그리고 성가시게 재판관을 조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이 여인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떤가요? 나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안돼’라는 포기의 마음으로 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가난한 과부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님 앞에 나가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한 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혼자 휴가 가는 것은 참 좋습니다. 사제로 살기에 많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랜만에 혼자의 시간을 가지며 침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식당에 들어갈 때 깨닫게 됩니다. 휴가 중이라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데, 대부분 2인 이상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의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요? 장점과 단점의 조화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장점만을 보면서 기쁘게 살고, 또 다른 이는 단점만 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휴가 중에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걷다가 오전 11시 20분쯤 그 식당에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딱 한 자리가 남아 앉았는데, 그 뒤 더 많은 사람이 밖에서 대기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없고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아져서 바빠지니 싫은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화도 자주 내서,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힘들다는 단점만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와 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복음말씀으로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게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https://youtu.be/bfj5XlghYdM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관을 닫으려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집중하기기 위해서 그렇게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족 중에 한명이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미사이고, 곧 땅에 묻히니 관을 닫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바람을 듣고, 관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집중하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족이 원하면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다른 종교의 장례 예절을 잠시 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유족이 원한다면 반대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인과 유족들의 청을 무시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두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강의하는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입니다. 성삼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중에 한 명입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장에서 그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절명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에게 인생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충절을 드러내는 죽음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 환란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주교님께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고 하나이다.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과 김대건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입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입니다. 김대건의 죽음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지난 세월 뒤돌아보니 별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많이들 불러주셔서 강의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자꾸 밖으로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공동체 생활에 소홀하게 되고, 어느 순간 강의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더군요. 할 수 없이 일정 기간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꼭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시며 이해를 해주셨는데, 한 수녀님께서는 정말이지 집요하셨습니다. 전화를 열 번도 더 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속으로 웃으면서 수녀님의 이미지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끈질긴 과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사실 과부는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기 위해 뇌물을 제공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 번을 거절당한다 할지 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반영억신부-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8,1-8: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한상우신부-
삶이 있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가 있기에
삶은 더더욱
풍요롭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해답을
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참된 기도는
절실하기에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기도는
우리의
삶 자체를
비추어준다.
그래서
기도는 생활이며
생활은 기도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일상이다.
기도가 없으면
내적 기쁨도 없다.
모든 것의 출발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자신이
바뀌게된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평화를 체험하게
한다.
이와같이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사랑이며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자세를
낙심에서
희망으로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과의
내적교감에
이르게한다.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기도이다.
기도로 하루를
새롭게 연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에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한 내용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거나 분노하며 다른 신(?)을 찾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요. 하지만 기도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어느 부족의 기도 성공 비결처럼, 이루어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줄곧 드려야 하는 겁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비유 속 과부가 오만하고 무심한 재판관을 줄곧 찾아가 졸라댑니다. 누군가와 분쟁에 휘말린 듯한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대개 재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자기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라지만 그녀는 다릅니다. 올바른 판결의 수혜자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일지 모르지만 재판이란 모름지기 끝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되기 마련이지요.
"올바른 판결"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은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의 바람이 신앙과 사랑, 공동선에 합치되고 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우리 각자의 소명과도 일치한다면 그 기도에는 반드시 올바른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하물며 사람도 인내와 끈기로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하느님은 어떠시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아버지는 절박한 처지에서 부르짖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마음을 다해 도와주는 분이심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구심점인 파스카의 밤이 언급됩니다.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5)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시고 역사에 개입하신 장면이 펼쳐집니다.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와 맺으신 계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다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3-25)
이 내용이 바로 오늘 지혜서 대목이 있게 된 배경이고, 아울러 복음에서 말씀하신 기도의 응답에 관한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신앙 역사의 원천이고 정점인 파스카가 그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며 이 믿음을 통해 정체성을 다집니다.
"그들은 ...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지혜 18,9)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에 기뻐 뛰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파스카를 겪으면서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는 가장 절박하고 처절했던 순간에 자신이 주님께 올려드렸던 울부짖음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면서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기 기도가 응답을 받았음을 인식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기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기다리는 응답은 또 무엇인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장은 하느님게서 우리를 잊으신 듯 더딘 응답에 갈망만 깊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원체험이 된 각자의 파스카 순간을 기억하며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좋겠지요. 인내와 끈기로 주님만을 향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체 없으신 하느님
-김찬선신부-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 세상에서 과연
찾아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아무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그간의 우리 경험 때문입니다.
기도하자마자 그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제게는 한 번도 없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렇기에 주님께서도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매번 지체 없이 들어주셨다면 낙담하지 말라고 하실 필요가,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다른 뜻이고
우리가 청하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의 주인은 주님이신 하느님입니다.
언제 들어주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빨리 들어주십사고 청하고 요구한다고 빨리 주실 분이 아니고
당신께서 생각하실 때 가장 좋을 때라고 생각하실 그때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을 때가 언제인지 너무도 잘 아시고
우리보다 잘 아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 생각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계시고,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고 믿는 것도 참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오늘 주님께서 물으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즉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그럴 때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며,
즉시 들어주실 때 지체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때의 주인이시고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더 좋은 것과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거나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아직 안 들어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즉시 들어주실만한 때가 되면 지체 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떼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이 그대로 보입니다.
얼마 전 한 아이가 밥 먹어야 할 때 밥은 먹지 않고 게임하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먹으면 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럴 때 현명한 엄마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써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아기가 마음 바꾸기를 바라다가 바꾸면 즉시 들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옳고 좋은 것을 바라게 되면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닐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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