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4일 연중 제33주일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마르코 13,24-32)
"Learn a lesson from the fig tree.
When its branch becomes tender and sprouts leaves,
you know that summer is near.
In the same way, when you see these things happening,
know that he is near, at the gat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재앙의 때가 올 것인데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세상을 바꾸는 참회
-키엣 대주교_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사도행전 1,7)
오늘 예수님께서도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마르코13,32)
언제 세상의 종말이 오느냐고 묻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지막 날을 알려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그날이 올거라는 것을 믿고있습니까? 세상의 종말은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사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류를 위해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세상은 공정의 사회,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세상으로 ‘선택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입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모든 것이 끝나는 그날은 영원한 세상의 시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언제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보며 삶을 정리해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주님의 길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기 위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나의 작은 실천이 사랑과 정의,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해도 나와 같은 작은 힘이 모인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지혜와 부를 재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의 크기를 재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은 천상의 언어입니다. 사랑을 아는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 주님의 사랑은 천상의 시민이 가져야 하는 신분증입니다.
아주 옛날 거대한 왕국을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나라 전체를 둘러보고 싶어서 길을 떠났는데 돌멩이도 많고 길이 울퉁불퉁했기 때문에 궁에 돌아왔을 때 그의 양발은 상처가 나고 엉망이되었습니다. 왕은 모든 길에 모피를 깔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든 관리들이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관리가 용감하게 진언을 했습니다. “폐하, 우리 나라가 왜 그렇게 헛된 것에 국고를 소비해야 합니까? 폐하께서는 왜 소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을 생각을 하지 않으시는지요? 가죽신을 신으면 돌멩이가 많은 길을 걸어도 아프지 않을 것이고 나라는 많은 물자를 절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가죽 신발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엉망이라고 탓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기전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참회의 시작입니다. 내일로 미루지말고 지금 바로 생각과 삶의 변화를 시작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1. 당신은 운명을 믿습니까?
2. 당신은 점과 손금, 관상을 보고 믿고 있습니까?
3.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3.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어떤 교우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학사님! 학사님은 늘 행복해 보여요. 그래서 학사님을 보면 기분이 좋아요. 앞으로도 쭉 행복하세요.”
당시 저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신부의 길을 계속 갈 수 있겠냐는 불안감과 성소에 대한 의심으로 부정적 생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저를 향해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이분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이분의 말씀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기에 그 자체로 행복해 보인 것입니다. 즉, ‘조명연’이라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조명연이 함께 하는 주님을 보셨기에 제가 행복하게 보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주님과 함께하기는 그 길이 쉽지 않지만, 그곳에 늘 행복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대부분 행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판단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느님의 가치를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는 뜻보다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스스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분명 다른 이로부터 행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행복의 길이었음을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실제로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끝나는 날 다시 오실 때의 상황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큰 환난에 이어서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두려움 속에 살라는 것일까요? 우리를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 이끌기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진짜 행복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십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그 누구도 모르는 시간이므로, 주님 말씀에 따라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행복의 길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 다니엘 예언자가 말하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다니 12,1 참조).


신학생 때 어느 신부님의 강론 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신학생이 버스를 탔습니다. 그리고 빈자리가 있어서 자리에 앉았는데, 다음 정거장에 너무나 아름다운 아가씨가 탄 것입니다. 그 미모에 자꾸 시선이 갔습니다. 얼른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세요.”
이 아가씨는 빈자리를 찾다가 신학생 옆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잠시 뒤, 이 아가씨가 피곤했는지 졸다가 신학생 어깨를 베개 삼아 자는 것입니다. 신학생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유혹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유혹은 분명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유혹은 이겨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포기해야 할까요? 우리 삶을 더 힘들게 하기에 안 됩니다.
이겨내기 힘든 유혹이지만 어떻게든 힘을 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이겨내면 다음에는 훨씬 이겨내기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가까워집니다.
어렵고 힘듦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겨냈을 때의 기쁨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훨씬 힘이 납니다.

나의 멸망: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전삼용신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이때 우리는 세상 종말과 심판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복음으로 듣습니다. 많은 학자는 이대로 가면 지구는 100년 이내에 멸망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종교가 망하고, 한 나라가 망하고, 온 인류가 망하더라도 우리는 구원되어야 합니다. 커다란 흐름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흐름대로 가면 안 됩니다.
망하는데도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그리고 이런 종말에 관한 것은 우리 각자의 세대에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시기 위해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 멸망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법칙을 말씀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해와 달과 별이 사라지면 인간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관계가 단절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태양이 어두워졌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한 아홉 번째 재앙이 어둠이었습니다. 모두가 소경이 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되면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면 우리는 사람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안 본다고 여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하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 세상에 자기 혼자 남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엔 언제나 죄를 짓고 주님을 잃어 이렇게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외로움에 지쳐 자살을 시도합니다. 지구가 멸망하여 자기가 유일한 생존자라 믿습니다. 그의 꿈은 누군가와 접촉해서 자신도 인간임을 느끼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살 직전에 라디오 주파수에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힘든 몸을 이끌고 그 주파수를 따라갑니다. 아파트 단지가 나옵니다. 몇 시간 동안 모든 방을 뒤집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 한 방을 뒤졌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죽어있었고 카세트테이프가 무한 재생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그 여자 옆에 잠이 듭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시까지 봅니다. 아기가 자기 품에 안겨 있습니다. 자신도 미쳐가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인까지 다시 나타납니다. 죽은 여인의 환영이라 생각한 그 남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도망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남자는 방금 그 여인은 사람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아 어떻게 말해야 하는 줄도 모른 채 그 여자를 쫓아갑니다. 여자는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줄 알고 그 남자에게 총을 쏩니다. 그렇게 그 남자는 죽어갑니다. 마지막 그 여자가 남자의 눈을 감겨줍니다. 남자는 그 접촉만으로도 행복하게 죽어갑니다.
‘FINITE’라는 단편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으면 죽는 편이 낫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인간이 살아있고 주위에 사람이 많다고 모두 서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똑같이 이웃과의 단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영향력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종말이 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다른 게 필요 없습니다. ‘삼구’(三仇)만 있으면 됩니다.
이것을 멸망의 법칙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돈을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 이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이 서 있는 것을 보거든 ─ 읽는 이는 알아들으라. ─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라.”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만들어 성전 안의 장사꾼들을 쫓으셨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성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마음이 중심을 잡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이건 종교이건 나라건, 세상이건 멸망의 단계를 밟기 시작한 것입니다. 솔로몬도 결국엔 돈에 집착하여 여러 나라 우상을 섬기고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육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시다!’, 또는 ‘보아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자기 내면에서 구원을 찾으려 하지 않고 외적인 데서 구원을 추구합니다. 당시 유다인들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자기 내면엔 자아가 왕으로 있기에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탐할 정도로 육적인 인간이 되어 아들에게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내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육적인 인간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오는 것이 세 번째 법칙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이 떨어지니 폭력을 쓰는 것입니다. 부모든 자녀든 서로에게 자유를 빼앗는 폭력을 쓴다면 서로 멸망으로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친교는 무력으로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자기 영향력을 지키기 위해 도전자로 보이는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폭력을 쓴다는 것은 이미 영향력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리비아에서 40년 넘게 독재를 했던 카다피는 국민의 총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리비아의 모든 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사치스러웠습니다. 육체적인 타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선글라스를 왜 끼느냐고 할 때 자신의 미래가 너무 밝아서 낀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쓸 수밖에 없었고 폭력으로 망했습니다. 그는 실제 너무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삼구로부터 자유로웠던 분들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예수님은 무력을 쓰지 않으셨는데도 많은 이들이 따랐습니다.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고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력을 쓰지 않는데도 영향력이 컸습니다. 이분들은 멸망의 법칙과 반대로 갔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삼구는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세상에 살면서 혼자가 되는 고통을 겪게 만들고 그렇게 멸망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말은 현재 우리 각자가 맞게 될 종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 중심에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 안에서 주님과 사귈 줄 알기 위해 육체를 절제하며 겸손하여 누구의 자유도 강요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주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외롭다, 외롭다 하다가 갑자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에게 영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제 주위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의 밑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태양이신 것입니다.
삼구를 좇으며 있거나 말거나 한 사람, 오히려 사라졌으면 좋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향력이 떨어지면, 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 나는 멸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필요해서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멸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사람의 기억에서 잊힐 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멸망일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산수를 배울 때는 수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수학을 배우면서 수가 점차 어려워졌습니다. 수에는 유리수와 무리수가 있습니다. 유리수에는 음의 정수, 0, 양의 정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집합으로 표현하면 수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어린이와 어른이 있습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있습니다. 이것도 집합으로 표현하면 사람이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습니다. 시간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도 집합으로 표현하면 시간이라는 전체집합이 있고 그 안에 부분집합과 교집합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3차원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틀’에 머물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에서 문화, 역사,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것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번식과 생존’이라는 ‘틀’에 머물며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이야기합니다. 현재의 삶의 결과에 따라서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입니다.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면 좋은 환경에서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악을 행하고, 욕심을 채우면 나쁜 환경에서 추한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이런 윤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윤회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2가지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아들이 죄, 죽음,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2,000년 전에 이 세상으로 오셨다는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던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 우리들 또한 부활 할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삶이 윤회의 과정을 거친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한번이지만 그 한 번의 삶을 충실하게 살면 하느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부활한 사람을 눈으로 보지는 못하였지만, 신앙은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믿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순교자들의 죽음도, 우리의 신앙도 헛된 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3가지 차원의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에 머물며 살아가는 현실의 세상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어서 육체는 땅에 묻히지만 삶의 결과에 따라서 가는 세상입니다. 교회는 그런 세상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야기합니다. 지옥, 연옥, 천국은 장소의 개념일 수도 있지만 상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곳은 이 곳에서도 이미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잃어버린,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지 않는 곳은 이곳에서도 이미 지옥입니다.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멀어진다면 그곳은 아마 연옥일 것입니다. 복자 황일광 시몬은 백정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을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교우들이 천민이었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 그러나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사람이 영원한 치욕을 받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제는 날마다 서서 같은 제물을 거듭 바치며 직무를 수행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 나라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선택받는 사람과 버림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구원 받는 길은 특별한 수행을 해야 하고, 많은 공부를 해야 하고, 세상의 삶에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글을 모르는 사람도, 세상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진리의 길은, 깨달음의 길은 구원의 길은 아주 평범한 곳에 밝혀 놓으셨다고 합니다. 하늘의 별, 구름, 들의 꽃,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하느님의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내가 변하는 만큼 세상은 그만큼은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구원의 문제도 그리 큰 숙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

전 생애를 통하여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 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는 가운데 영생의 희망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막판 뒤집기’를 아십니까? 잘한 것이 없는 데 마지막에 한건 올려서 동안의 손해를 만회한다든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별반 열심히 사신 것 같지 않은데 돌아가시기에 앞서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받고 성체까지 모시고 떠나시는 것을 보고는 ‘막판 뒤집기’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동안의 삶이 어떠했든 마지막에 하느님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중에는 그것을 이용하려는 분이 계시니 큰일입니다.
지금은 돈도 벌고 마음껏 즐기다가 나중에 동안의 모든 것에 대해 한꺼번에 용서를 청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막판 뒤집기의 기회도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을 때 추수의 기쁨을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13,27)…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13,32). 결국은 선택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언제가 될지 모르니 뒤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의 때를 아무도 모르니 만큼 늘 깨어서 할 일을 다하고 있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방심하면 하필 그때가 심판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 순간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른다는 사실이 우리를 늘 긴장하게 만듭니다. 다니엘서에서는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12,2)고 했습니다. 결국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신다”(로마2,6)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징조를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마르13,24) 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2베드로 3장13절에서 15절에서 “그 날이 오면 하늘은 불타 없어지고 천체는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만큼 티와 흠이 없는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을 두려워 말고 지금 이순간을 흠도 티도 없는 마음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구원은 막판 뒤집기로 얻는 것이 아니라 전생애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구체적으로 정해 놓고 휴거를 기다린 사람도 있고 천년왕국을 얘기하며 세상의 대 이변을 말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이든 인류의 종말이든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종말은 우리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일생의 의로움에 따라 천국이나 연옥, 지옥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 순간이 소중합니다. 그야말로 인생에 연습은 없습니다. 사실 마지막 날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 1독서는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다니12,3) 고 적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13,43)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나의 삶이 빛나는 삶이 되어야 나중에도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지옥 갈까 봐 두려워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지옥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지상에서 지옥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고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며 남을 바라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의 존재방식 자체가 이미 지옥입니다. 그래서 “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느님의 주권’을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자체가 지옥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지옥을 만드셨겠습니까? 지옥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을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하느님과의 단절을 고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의탁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의 삶이 빛나게 됩니다.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거룩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저 멀리서 불쑥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의 행태를 훌훌 털어버리고 돌연 진입하는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닙니다. 이 세상과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모습 속에 미구에 내가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잘 살아야 합니다(차동엽).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을 해야 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이웃으로서 지금 맡은 일에 충실하며 거룩한 생활에 마음 써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 때에 관련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통하여 미래가 옵니다. 이 순간에 충실하길 기도드리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생각하라.
네 지닌 영혼은 하나밖에 없는 것임을.
네 지닌 목숨이 짤다랗고
이것만이 네게 달린 것임을.
하나밖에 없는 영광, 그것이 영원한 것임을.
그제야 너는 많은 것을 버리리라.
그 무엇에도 너 마음 설레지 말라.
그 무엇에도 너 무서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님만이 가시지 않나니.
인내함이 모두를 얻으리라.
님을 모시는 이
님 하나시면
흐믓할 따름이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
@@ 한 목사님이 술, 담배를 좋아하시는 신부님께 “아니, 하느님 일을 하시면서 술, 담배를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시자 신부님이 되물었습니다. “그러는 목사님은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개인적인 행복을 누리면서 어떻게 양들을 위해 일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가정을 가져 보지 않고 어떻게 신자들의 가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지 모르시는군요. 가정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자 신부님이 하시는 말씀, “그렇다면 그 큰 선물을 포기했는데 하느님께서 그깟 술, 담배도 못하게 하겠습니까?” @@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합리화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습니다.

<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
-송영진신부-
“그 무렵 환난에 뒤이어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4-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환난’은 이 말씀 앞에 있는 ‘종말 전의 재난들’을 가리킵니다(마르 13,14-23).
“해는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은 지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1) 해와 달과 별들이 빛을 잃는다는 말을,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에 비하면
그것들의 빛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이 우주 전체를 압도한다는 것입니다.)
2)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거나 흔들린다는 말을,
종말의 날이 되면,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주 질서가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세력들’은 ‘별들’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라는 말과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
라는 말은 같은 말이 반복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우주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은, 그 우주 질서에 기반을 둔 인간의 과학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물리학 법칙 같은 것들이 전부 다 소용없게 될 것입니다.)
3) 이 말을, ‘낡은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종말의 날이 되면 우주 전체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묵시 21,23).”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주 전체를 통치하는 하느님으로서,
또 모든 사람을 심판하는 심판관으로서 재림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나자렛 출신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 모습만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하느님이신 분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것이다.”는 “모든 사람이 볼 것이다.”인데,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날이 곧 심판의 날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루카 17,24).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으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이고,
충실하게 준비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고 믿게 될 것입니다.
안 믿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안 믿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3)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순간 심판이 이루어지고, 금방 끝날 것입니다.
피하거나 숨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재림의 일차 목적은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이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충실하게 응답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라는 말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라는 뜻인데,
구원받을 자격을 갖추고도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그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르 13,28-31).”
여기서 여름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추수철이, 즉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종말 전의 재난들을(마르 13,14-23)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라는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재난이 ‘종말 전의 재난’인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종말과 심판에 관한 말씀들을 모두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지금 즉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곧 ‘완성’될 것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을 생각하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서 가는 ‘짧은 여행’이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여행입니다.
죽음 너머의 새 인생을 원한다면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류 전체의 공심판이든지 각 개인의 사심판이든지 간에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종말, 재림, 심판이 조만간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이 말씀은,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 날과 시간을 미리 계산하려고 하는 것은, 회개를 그때까지 미루겠다는
속셈으로 하는 짓인데, 인간은 그 날과 시간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 날을 미리 알려 주시지 않는 것은,
회개하기를 바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또 해야 하는 일은 회개하는 것뿐입니다.

복음: 마르 13,24-3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만물이 어떻게 마지막 날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밝혀줌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영원의 승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역사를 외면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간성을 완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도록 역사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말한다. 다니엘서의 내용은 육신의 부활을 긍정하는 구약의 문헌 중의 하나이다(2마카 7,9 참조). 이제 인간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을 자기 전 존재로서, 즉 육체를 가진 자로써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마르코 13장 전체에 걸쳐서 하신 종말론적 담화이다. 오늘의 이 대목은 예수님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아들”(32절)이신 예수님께도 알려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신앙의 차원으로 확대해 실현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먼저 예루살렘이 당할 재난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마지막 날에 심판자로 다시 오시리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26절)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시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시며(마르 16,19) 마지막 날에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뽑힌 이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돌아오실 분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27절)라는 말은 히브리 사상에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다. 구약에서는 이것을 오직 이스라엘 12지파의 재결합만을 생각했지만(신명 30,4; 에제 34,12~; 이사 27,12-13; 43,5-6; 즈카 2,10; 8,7-8 참조), 여기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이다(참조: 요한 11,52).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시며 알려주시고자 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것은 오셔야 할 그분은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오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잠시도 긴장을 풀지 말고 깨어있어야 하는 ‘기다림’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절).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28절), 주님이 문 앞에 다가온 줄을(29절) 알 수 있는 표징들이 있다. 예루살렘의 종말은 그 동시대인들에게 표징이 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건이 종말의 예표일 수 있었고, 예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그러기에 항상 우리는 깨어있어야 한다(마르 13,35-36 참조).
그러므로 종말론적 삶이란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일상 활동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온갖 사물과 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더 합당한 요소가 되게 하고, 언제나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하며 지금의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언제나 오실 수 있는 그분을 맞이하는데 떳떳하고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해 계속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사제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면서 당신의 사제직을 수행하고 계시다. 즉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는 사제직이다.
둘째는 종말론적 내용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을 바치시고 나서, 영구히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판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히브 10,12-13).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에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지만, 또한 우리에게 대사제이신 분이시다. 그래서 지금도 아버지 오른편에서 수행하고 계신 사제직 때문에 더욱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는 마지막 때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도, 그때가 되어 여러 가지 어려운 때가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잃지 말아야 할 희망을 간직하고 이겨내고, 또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깨어있는 삶은 우리를 더욱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 완성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오상선신부-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의 날"을 이야기하십니다.
제1독서인 다니엘 예언서와 마르코 복음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의 두 국면을 보여 줍니다. 곧 구원의 얼굴과 재앙의 얼굴입니다. 여러분은 미사 독서들에서 어떤 얼굴과 마주하셨는지요?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셨나요, 아니면 심판의 두려움으로 불안하셨나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마르 13,27)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는 그날은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엄청난 물리적 재해를 동반할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자연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미처 겪어 보지 못한 천재지변의 재앙과 변고에 당황하며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지요.
"선택한 이들"
그날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사람의 아들은 당신이 선택한 이들을 잊지 않고 찾으실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땅 끝, 하늘 끝까지 흩어져 있는 선택받았던 이들은 그 부르심이 완성되는 결정적인 일치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지상 순례 기간 동안 간절히 바라 마지 않던 영원한 사랑 안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울려퍼지는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다니 12,1)
이렇듯 주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주님께 선택되어 사랑과 신의를 고백하며 삶과 죽음으로 증거한 이들은 모두 약속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요. 바로 그날 그분 앞에서 그 책이 펼쳐질 것이고, 그들은 평생 그리워하고 기다리던 주님과 복된 해후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제2독서는 여전히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한 번 제물로 바치시고 나서 ... 한 번의 예물로, 거룩해지는 이들을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히브 10,12.14)
우리의 정화와 성화는 우리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희생제사의 열매입니다. 그분은 매번 속죄 제물을 바쳐야 하는 여느 인간 사제들과 달리 단 한 번, 당신 자신의 피로 영원한 계약을 완성하셨지요.
우리는 그분이 그렇게 치르신 피의 대가로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적극적인 자의로 사랑을 거부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한 구원의 가능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희망해도 좋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복음 환호송)
깨어 있음과 기도가 구원을 향한 우리의 바람을 현재화시켜 줍니다. 기도는 그분을 사랑하고 향유하는 구원 상태를 앞당겨 누리는 맛보기이고, 깨어 있음은 그 기도가 삶의 구석구석에 구체적으로 반영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벗님! 특별히 세계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며 기도와 선행으로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 우리를 데리고 오라고 주님께서 보내실 천사들이 바로 그들이 될 것이고, 그들이 주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큰 소리로 증언을 해 줄 것입니다. 그들 마음에 새겨진 우리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손에 죽는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때'를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때입니다.
이 종말의 때와 관련하여 종말의 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핵으로 해 지구가 멸망하게 될 시간이 1953년에는 7분 남았다고 했는데
2020년에는 핵과 기후 변화로 인해 100초가 남았다고 하다가
그저께 영국 글레스코에서 폐막한 Cop26 곧 '26차 유엔 기후 변화 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영국 총리는 이제 1분 남았다고 하며
이 시계를 우리 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되돌려야 한다고 했지요.
그런데 과학자들을 비롯하여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왜 종말의 시계를 만들었겠습니까?
그것은 종말이 가까웠음을 사람들이 인식치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제 루카 복음에서 주님도 노아의 때와 룻의 때 사람들이
멸망의 때가 다가오는데도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들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다가 멸망의 때를 맞이했다고 경고하셨지요.
그렇지만 종말의 때 곧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주님은
또한 말씀하시며 누구도 종말이 언제라고 떠들지 말라는 하십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종말의 때뿐이 아닙니다.
종말이란 어떤 것이고 어떻게 오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구의 종말인지 아니면 지구는 그대로 있으면서 인류만 소멸하는 건지.
그리고 또 지구를 멸망케 하는 것이 하느님이신지 아니면 인간인지도.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인한
지구 위기를 얘기하며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데 반해
오늘 복음과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서 멸망의 때를 정하시고,
그 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선택한 이들을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록 우리 인간이 죄를 짓고 벌을 받아
세상이 멸망하게 될지라도 하느님께서 멸망케 하시는 거라고 믿고,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죽게 된다면 누구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병들어서 죽지도 않으며 주님의 손에 죽고
주님 품 안에서 죽고 싶은데,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죽고 싶을 뿐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그래서 위기를 느끼고,
이보다도 더 큰 기후 위기와 지구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데
우리를 멸망케 하는 것은 전염병도 기후도 아니고 하느님이고,
그 멸망의 때를 정하는 분도 시간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년에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세 가지 벌 곧 흉년과 패전과 흑사병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다윗은 이렇게 얘기하지요.
"괴롭기 그지없구려. 그러나 주님의 자비는 크시니,
사람 손에 당하는 것보다 주님 손에 당하는 것이 낫겠소."
오늘 첫째 독서 다니엘서도 보호자 미카엘에 의한 재앙의 날을 얘기하며
"그때에 네 백성은, 책에 쓰인 이들은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또 땅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멸망의 때에 우리는 결코 병이나 사람에 의해 죽지 말고
하느님의 손에 그리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1월 16일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0) | 2021.11.16 |
---|---|
2021년 11월 15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0) | 2021.11.15 |
2021년 11월 13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0) | 2021.11.13 |
2021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0) | 2021.11.12 |
2021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0) | 2021.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