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11. 12. 07:29

2021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요사팟 주교는 1580년 무렵 우크라이나의 동방 교회 가문에서 태어났다. 장사보다는 영혼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뛰어난 상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갔다. 이후 사제품을 받은 그는 수도원장까지 맡아 수도회 개혁을 주도하였다. 주교가 된 뒤에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가 1623년 이교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1867년 비오 9세 교황이 요사팟 주교를 시성하였다.

☆☆☆

들어 두어라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누워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
루가 17,26-37)

 

I tell you, 
on that night there will be two people in one bed;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And there will be two women grinding meal together;
one will be taken, the other lef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주를 알 수 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얼마 전, 오랜만에 서랍 정리를 했습니다. 미루고 미뤘던 정리였습니다. 하나씩 꺼내 보며 필요한 것도 또 반대로 필요 없는 것도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서랍 깊숙한 곳에서 너무 좋은 펜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마음에 무척 들어서 아껴 쓰려고 서랍 속에 잘 두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끼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 보니 아예 사용도 못 한 것입니다.


작년에 모친상을 치르고 형제들과 유품을 정리하다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본인은 아주 낡은 이불을 덮으시면서, 이 새 이불을 아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낀 새 이불은 제 용도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아끼다가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용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그 아낀다고 해도 이 세상의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중요한 것처럼 아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이기에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다시 일어나고, 롯 시대에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또한 하나는 데려가고, 또 다른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고도 말씀하시지요.

이 사실을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을까요? 당연히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라고 하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꾀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이치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연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처럼, 주님을 굳건히 믿고,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에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겸손하게 이웃에 봉사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주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하는 항구한 삶을 살아갈 때, 세상 끝날이 와도 두렵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언제일까 하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에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추스르고,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발걸음이 휘청거리게 내버려 두신다고 하더라도, 이는 오직 그분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그대가 완전히 쓰러지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손을 꼭 붙잡으십시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초성 게임.

우연히 예능 프로그램을 봤는데 초성 게임이 있었습니다. 단어의 초성 자음 2개를 말하면, 순발력과 어휘력을 발휘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ㄱ, ㅅ’이면 ‘감사’라는 식으로 대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게임이 유행인가 봅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데도 종종 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에 간 꼬마 아이가 돌아다니다가 아빠에게 쪼르르 달려와 묻습니다.

“아빠! ‘시옷’하고 ‘미음’으로 시작하는 글씨가 뭐야? 어느 문에 초성으로만 쓰여 있어.”

이상한 마음이 들어 아이의 손에 이끌려 그 문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런 글씨를 보게 되었습니다. ‘入口(입구)’였습니다.

맞습니다. 한자였습니다. 입구라는 한자어였지만, 한자를 모르는 아이는 한글의 초성 정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익숙한 것을 모든 상황에 맞추다 보면 진리에 더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을 찬미할 때 평화가 오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하느님 나라가 이룩된 사람의 특징을 말해줍니다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주인이 되셔서 다스리시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오늘은 그렇게 주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지배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면 그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저는 행복합니다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셨습니다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면 나는 주님의 집에 살고 있고 주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은 누군가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고 그 뜻을 따름은 그 사람에게 속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늑대에게 자라 늑대의 뜻을 따라 늑대처럼 산다고 가정해봅시다그 사람은 본능적으로 늑대에 속해있고 늑대 가족 무리에서 편안함을 느낄 것입니다그런데 사람에게 자라 부모가 원하는 뜻대로 자라는 아이라면 당연히 그 부모에게 속한다 생각하고 그 부모가 자신의 안전을 책임져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아의 홍수 비슷한 것을 거쳐야 했습니다제가 태어나던 해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는데 저희 집이 그나마 가장 높이 지어져서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엔 저희 집으로 다 모입니다저는 기억을 하지 못하지만미군 부대에서 헬기가 와서 지붕을 뚫고 저희를 구출했다고 합니다저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가 조금 자라서도 큰 홍수가 또 났습니다물이 점점 불어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으로 다 모였습니다길과 논의 구분이 사라졌고 어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상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우리는 어땠을까요팬티만 입고 나가서 물놀이하고 놀았습니다어른들은 논으로 빠지면 위험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동네는 미군 부대 바로 옆이기에 미군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이번엔 미군들이 철책을 끊고 보트를 끌고 우리를 구조하러 왔습니다팬티만 입고 여군들도 있는데 보트에 타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두려움은 없었습니다며칠 동안 여관에서 머문 뒤 돌아왔을 때는 동네에 물이 다 빠진 상태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죽는 것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다면 우리를 지켜주시는 부모님을 믿지 못하는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희 동네는 홍수가 잦아서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이 지켜주고 계심을 잘 믿을 수 있었습니다어떤 때는 아버지께서 일 나가셨다 돌아오실 때 마을에 홍수가 나서 들어오실 수 없으셨는데 수영을 하셔서 저희를 구하러 오신 적도 있습니다그래서 저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내가 뜻을 따라주는 대상에 속함을 알고 그 대상이 나를 지켜줄 것을 믿습니다당연히 내가 주님의 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나는 죽음도 두렵지 않아야 합니다내가 뜻을 따라주는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내가 그분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그분께 속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뜻이 양식과 가르침을 통해 옴을 알아야 합니다부모의 뜻은 자녀들을 향한 희생을 통해 들어옵니다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의 뜻은 내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나를 사랑해주는 분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내가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누구도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그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부모의 뜻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모의 뜻은 자녀 안에서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사라집니다따라서 내가 죽음의 두려움도 없이 살려면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께 속해야 하는데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렇게 하다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그런 말아요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여보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주 너를 지키리주 날개 밑에 거하라주 너를 지키리주 너를 지키리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사하고 찬미하는 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고 그 뜻을 따르면 나도 모르게 그분의 품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평안을 찾습니다평화로워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입니다평화롭지 않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주님을 찬미하는 이는 죽음도 이기시는 주님 품에 안겨 있음을 느끼고 평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예를 드십니다바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입니다이때 방주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두려워 떨었을까요방주는 바로 그리스도의 품입니다그분께 감사하면 그 뜻이 내 주위에 방주를 만듭니다그리고 홍수와 같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습니다 

 

    또 천사들과 탈출하고 있던 롯이 두려움에 떨었을까요오히려 감사했을 것입니다천사에게 감사하고 그 품에 있으면 유황이 자신들 위로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다만 세상에 집착이 남아있던 롯의 아내만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롯의 아내는 천사를 찬미하는 이가 아니라 세상 것들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그러면 교회 안에 있어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자아를 따르고 찬미하기에 세상에 속하여 세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을 지었을 때 하늘에서 빛나는 구름이 지성소 계약의 궤 안으로 내려앉았습니다그 궤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었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의 뜻만 지키면 하늘로 연결된 통로요 사다리가 내려오는 것입니다야곱의 사다리와 같습니다이 지상에 살지만 실제로 언제든 하느님의 나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생깁니다이는 직감적으로 느끼는 평화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그러면 쇼생크 탈출에서 주인공이 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음악을 틀어주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지금 당장은 간수들에게 조금 맞고 독방에 갇힐지라도 나는 언제든 밖으로 나갈 탈출구를 파 놓았습니다그러니 감옥이 더는 두려움을 주는 공간이 아닙니다세상이 즐기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https://youtu.be/45o3LOiTnUs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한국과 미국의 장례문화가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유족을 위로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점도 있습니다한국은 조문 온 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조문 온 분들은 고인과 유족을 위해서 조의금을 마련하기도 합니다종교에 따라 다르지만 천주교는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바칩니다미국은 ‘Viewing'이라는 예식이 있습니다특별히 식사를 대접하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습니다조의금을 내는 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관을 반을 열어서 고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고고인에게 애도의 인사를 한 후에 유족들을 위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종교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주교는 ‘Viewing' 전에 고인을 위한 연도를 바칩니다죽은 이를 묻어준 최초의 무덤은 대략 10만 년 전 쯤이라고 합니다인류의 문화와 문명이 시작되면서 죽은 이를 위한 무덤은 형태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무덤을 만들어 주는 것은 사람만이 행하는 풍습입니다무덤을 만든 다는 것은 우리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또 다른 시작임을 희망하는 것입니다이런 희망이 신앙이 되고종교가 되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우리는 가보지 않았지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곳을 희망하며 고인을 위한 무덤을 만들었듯이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통해서 그런 세상을 만드신 분을 찬미합니다비록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헬렌 켈러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태양을 바라보고 살아라그대의 그림자를 못 보리라고개 숙이지 마라머리를 언제나 높이 두라세상을 똑바로 정면으로 바라보라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고통의 뒷맛이 없으면 진정한 쾌락은 거의 없다불구자라 할지라도 노력하면 된다아름다움은 내부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그대가 정말 불행할 때 세상에서 그대가 해야 할일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그대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으리라.”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언제나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절망을 볼 수도 있습니다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볼 수도 있습니다절망을 보는 사람은 버려지는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희망을 보는 사람은 데려가는 사람을 생각할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노아의 시대에 방주를 만들도록 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구원의 방주를 마련하셨습니다노아의 방주는 열려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모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주도 열려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렇습니다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모두 구원의 방주에 머물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하루가 모이면 감사의 일주일이 되고감사의 한 달이 되고감사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사랑하는 하루가 모이면 사랑의 일주일이 되고 사랑의 한 달이 되고사랑의 일 년이 될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고심판하시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여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면 될 것입니다. 

 하느님과 고통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명령합니다. 억압을 멈추시오!

 -양승국신부-

 

불의가 정의를 능가할 수 없음을 온 몸으로 선포하다가 순교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헤로데 왕권의 타락 앞에서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세례자 요한이 그랬습니다. 결국 그는 승승장구의 길을 걷다가 순식간에 깊은 지하 감방에 갇히게 되고, 헤로디아의 간계에 의해 참수 당하게 됩니다.

  

2018년 시성(諡聖)되신 전 산살바도르 대교구의 로메로 대주교님(1917~1980) 역시 같은 노선을 걸으셨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했던 독재자에게 홀로 맞서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1980년 3월 23일 주교좌성당 강론대에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느님과 고통 받는 민중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간청하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들에게 명령합니다. 억압을 멈추시오.”

  

바로 그 다음 날, 한 괴한이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를 거행하던 병원의 경당에 숨어들어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사팟 대주교님(1580~1620)의 최후도 정말이지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1609년 비잔틴 예식에 따른 동방 교회 사제로 서품됩니다. 1617년 러시아 비텝스크 교구 주교로 임명된 그는 죽기 일보 직전까지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위해 헌신합니다.

  

요사팟 주교님과 뜻을 달리하던 러시아 주교들은 로마 가톨릭이 러시아 민중에게 맞지 않는다며 대립주교를 임명하는 등 그를 축출하기 위해 다양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620년 교구 내 한 본당을 사목방문 하던 중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흉기를 소지한 적대자들은 요사팟 주교님이 사제관에 있으려니 하고 사제관을 습격했습니다. 요사팟을 호위하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일부는 살해되고 일부는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던 때, 요사팟 주교님은 마침 성당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끔찍한 비명 소리에 요사팟 주교님은 기도를 중단하고 사제관으로 달려왔는데,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지요. 저 같았으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아났을 텐데...놀랍게도 그는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적대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어찌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를 상대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저는 결코 숨거나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요사팟 주교님의 그 당당함 앞에 악한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주교님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한 녀석은 몽둥이로 때리고, 한 녀석을 큰 도끼로 찍고, 또 다른 녀석은 창으로 찌르고, 마침내 그 중에 하나가 총으로 주교님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요사팟 주교님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어렵사리 오른 손을 쳐들고 적대자들을 향해 십자가를 그으며 강복하셨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사죄하는 기도를 바치셨습니다.

  

교회 일치 운동의 선구자였던 요사팟 주교님은 1867년 비오 9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되셨는데, 동방 교회 출신 첫 번째 성인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반드시

 -반영억신부-


이른 아침 까치를 보면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를 보면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까마귀 색깔이 검은 탓도 있지만 그놈이 심하게 울어버리면 영락없이 동네의 앓던 어르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까마귀가 흉한 일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떠날 것을 사람보다 미리 안 것일 뿐인데 까마귀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까마귀가 길조로 환영 받습니다. 어린 까마귀는 어미의 극진한 도움을 받고, 커서는 제 어미를 철저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샌디에고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까마귀를 보았습니다. 까치는 보지 못했습니다. 까마귀를 흉조로 생각했으면 아마도 매일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루카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한국 정서로 말하면 ‘주검이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여든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썩은 고기는 독수리를 끌어들이듯이 죄인들은 자신의 삶에 심판을 불러들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판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회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심판이 온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 에 초점을 맞추었고, 제자들은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어디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들 듯이” 반드시 그날이 온다는 것을 전합니다. 언제 어디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곳에서’ 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금 여기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을 들여다보듯 비춰보아야 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이미 내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믿는 이들은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2,12)는 것을 알기에 결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용서 받지 못한다는 그런 절망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가 아무리 막중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것이며, 이미 용서하셨습니다”(성 예로니모).

우리는 까마귀를 보고 기분 나빠할 것이 아니라 까마귀가 왜 몰려왔는가를 생각해야 할 시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분에게는 늘 더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영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미련을 갖지 않고 앞을 보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자비를 잊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당신의 자비에 맡기게 하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잘못을 기억하지 마시고, 우리의 죄악대로 우리를 벌하지 마소서!” (최양업토마스). 주님,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당신의 크신 자비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멘.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재림, 종말, 회개 >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종말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그날은 곧 ‘종말의 날’이고, ‘최후의 심판 날’입니다.

‘노아 때와 같은 일’과 ‘롯 때와 같은 일’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멸망을 당하는 일”을 뜻합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과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이미’ 시작 된 때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는

‘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회개할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고 평소에 살던 대로 사는 모습을,

즉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죄인들’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 내립니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살 수 있습니다.

노아 때 사람들과 롯 때의 소돔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노아와 롯을 통해서 주어진 하느님의 경고를 귀담아 듣고

회개했다면, 멸망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종말과 심판의 날에 ‘노아 때의 일’과 ‘롯 때의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보이지만, 진짜 뜻은 “노아 때의 사람들이나

롯 때의 사람들처럼 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죄인의 멸망이 아니라

죄인들이 회개해서 사는 것입니다(에제 33,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겠지만, 그래도 재림의 첫 번째 목적은

‘구원’입니다(1테살 4,15-17).

심판과 멸망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생활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은 멸망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라는 말에서

‘일상의 회복’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상의 회복’은 온 세상 사람들이 간절하게 바라는

‘중요한 일’이 되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일이고, 신앙인들은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삶’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재난을 겪지 않더라도 ‘회개’는 늘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경고로 생각되는 재난을 겪었다면

더욱더 ‘회개’를 첫 번째로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새롭게 변화되지도 않고,

“회개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던 때의 삶”으로 되돌아가기만을 바란다면,

하느님의 경고는 경고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될 것입니다.

또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는

옛날 철학자의 말도 연상됩니다.

이 말이, 충실하게 회개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 담담하게 종말을 맞이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좋은 말’이지만, 심판과 회개 같은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이 말 자체가 죄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이 말씀은, ‘세속 일’과 ‘세속의 재물’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심판 때에 살아남는 것, 그것 하나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는, 그날이 되면 세속의 재물 같은 것을 챙길

잠깐의 시간도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회개할 시간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있더라도 그때서야 하는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 거짓 회개입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이 말씀은, 세속 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어리석고 쓸데없는 집착을 모두 버리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17,34-35).”

 

이 말씀은, 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본인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씀의 뜻은 그렇지만, 만일에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이산가족이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비극’이 될 것입니다.

(그날 식구 중에 누군가는 구원받고 누군가는 멸망을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구원받는 일이 과연 행복한 일이 될까?)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가족이 모두 서로 권고하고 타이르고 기도하면서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지금’.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는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루카 17,26-37: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여드는 법이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옛날 노아와 롯의 때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끝 날도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으며,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27-28절), 노아 때에는 홍수가 닥쳐 한 가족 말고는 모두를 멸망시켰고, 롯 때에는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두 멸망하였다. 이는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런 설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방주를 짓는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을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방주를 짓는 일 자체가 설교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비웃었다. 오늘날도 그들을 본받는 자들은 믿지 않는다.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세워지고 있지만, 그들은 역시 비웃고 있다. 홍수와 같은 심판이 그들을 위협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27절) 이 홍수는 믿는 이들에게는 세례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 돌로 비유하고 있다. 그 돌은 믿는 이들에게는 주춧돌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라고 하였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31절) 우리는 어떤 시련을 겪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여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 사람은 지난날을 뒤돌아보거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돌아서지 마라.”(31절) 하느님의 말씀이 씨 뿌려져 영적인 열매를 갈망하고 덕성스러운 수고의 열매를 거두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변치 말고 부지런히 열매를 거두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쟁기를 손에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하셨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롯의 아내는 뒤를 보는 바람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남편이 도와주었지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결국 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삶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 두 사람이 전 생애를 함께 지내왔다 하더라도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선한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해도 그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면 버림을 받는다는 경고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7절) 믿음이 있는 곳에는 성체성사가 있고 거룩함이 머문다. 언제나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며, 성체로 양육된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 32)

-한상우신부-


무엇을 정말
사랑하는 지를
다시금
묻게된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 욕심이다.

멈추어야 할
우리 삶의
욕심이다.

보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지금
이순간이다.

과거로 가는
죽음의
길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께로
가는 생명의
길이다.

결단의 순간이
왔다.

과거를 떠나야
현재의 하느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다.

무거우면
떠날 수 없고
빠지면
나올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으시고

우리는 욕심을
하느님께
내놓는다.

희망을 걸어야
할 분은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욕심이
아니다.

욕심은
소금 기둥을
이루고

주님의 뜻은
우리를 살린다.

살아있는
이 순간을
소금 기둥이
되게하는 것은
우리자신이다.

삶의 마지막은
소금 기둥이
아니라
부활의 삶이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는
회개가 이어진다.

하느님께로
고개를 돌려야 할
우리들
생명이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소금 기둥이 아닌
삶의 새로운 모습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욕심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다.

생명을
살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생명이 있는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시체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가 사랑이며
기도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위해
기도드리는
위령성월이다.

생명이 욕심을
치유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꺼내려 내려가지 말고, ...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17,31)
모든 이가 궁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날은 노아 때와 같이, 그리고 롯 때와 같이 느닷없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귀하게 여기는 세간이라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또 들에 있다면 뒤돌아서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면 사람은 저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떠올리게 마련이겠지요. 하지만 지난 과거의 영화는 물론 상처까지도 집착하지 말고 이제부터 펼쳐질 구원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삶에서 귀하게 여겼던 것은 실상 이제부터 마주할 구원을 위한 준비와 같습니다. 그걸 버리고 넘어서야만 구원으로 들어갑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
예수님은 자기 목숨에 대한 집착까지도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유한하고 아둔하며 근시안적이라 그것이 없으면 세상 끝날 것처럼 뭔가라도 붙들고 늘어지기 마련이지만, 결국 바로 그 직찹하는 것을 잃게 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은 생명의 차원이 바뀌는 날입니다. 그간 매달렸던 육적인 생명이 스러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날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에 맞갖는 시선과 심성과 행동을 점검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살아 생전에 무엇을 중요시하고 무엇을 지향하며 살았는지가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 만나는 길을 알려 줍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사람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 만물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주어진 물질 세계를 통해 하느님을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는 사람을 아둔하게 만들어 세상 만물을 소유하고 모으고 쌓는 일에 집착하게 합니다. 피조물에 집착하는 딱 그 수준으로 멈추지요. 피조물 너머에 계시면서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창조주께 눈을 돌리기에는 너무 게으르고 무심하며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 어찌하여 ...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지혜 13,9)
지혜서 저자는 탄식하듯 묻습니다. 하느님을 알 기회, 그분을 사랑할 기회를 하나도 붙잡지 못하고 하릴없이 세월만 보낸 이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무관심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주님을 찾고, 그렇지 못하고에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아주 딴판이 되겠지요. 그간 찾아오던 것이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이는 기뻐하며 즐거이 달려갈 것이고, 세상에 고이 모셔둔 이는 뒤돌아서게 될 테니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복음 환호송)
그때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저 가까이 왔다고, 그러니 깨어 준비하라고만 반복해서 이릅니다. 확실한 것은 영적인 보화를 추구하며 산 이는 찾던 것을 영원한 생명 안에서 받아 누리게 될 것이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산 이는 아주 생소하고 낯선 현실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실 그날, 우리 모두가 기쁘게 그분을 맞이하는 행복한 신부이길 기원합니다. 미련과 집착으로 소중한 때를 놓치지 않도록,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그분의 눈길을 피하거나 뒤돌아서지 않게 이제부터라도 거룩한 해후를 준비해 나가면 좋겠지요. 노아 때처럼, 롯 때처럼 구원 안으로 성큼 들어서게 될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고양이보다는 개가 낫지 않을까?

-김찬선신부-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롯의 아내는 왜 뒤를 돌아봤을까 생각게 됩니다.
무엇이 부족하여 돌아보지 말라고 했음에도 돌아봤을까?

왜냐면 롯의 아내는 자기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었는데
무슨 미련이 있거나 애착하는 무엇이 있었다는 것인가요?

고양이와 개가 있습니다.
고양이는 장소를 떠나지 않고 개는 주인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개는 주인을 따릅니다.

롯의 아내는 고양이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요?
가족을 따라가기보다 자기가 있던 곳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랑을 찾아가기보다 자기가 놀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시골이 좋다고 하면서도 막상 서울을 떠나려고 하면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문화생활을 포기할 수 없어 떠나지 못한다지요.
우리가 주님의 날이 올 때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함도
그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날>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그날이란 <사람의 아들의 날>이고,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그날은 우리의 날, 나의 날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이고, 주님께서 주인공이 되시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세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하던 일, 하던 짓을 멈춰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노아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또한 롯 때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이런 것들을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멈추지 않자 멸망케 되었다고 하십니다.

우리도 하고 있는 것 중에 주님과 무관하게 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무관한 나의 성취, 나의 만족의 행위는 주님의 날에 끝내야 합니다.

둘째로 그날에 우리는 우리가 머물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머물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단지 장소만이 아니라 그 장소의 모든 것까지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고 놀던 곳과 내가 소유한 것에
주님보다 더 애착이 간다면 나는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로 그날에 우리는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던 짓을 멈추고, 가진 것을 다 버리며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이고,
주님을 따라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떠남은 매우 인격적인 것이고,
그날에 우리는 인격적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이 인격적 관계성을 잃고 허방지방 살아왔습니다.
먹고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도 그랬고,
이 세상살이가 너무 재미있어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이런 날들이 끝나는 <그날>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시작하는 <주님의 날>이 와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5일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