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에우티케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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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가 17,11-19)
"Stand up and go;
your faith has save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임금들의 권력과 통치권은 주님께서 주셨다며,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다가 어느 의사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암이 자라고 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늦게 발견해서 치료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은 오히려 감사의 마음으로 가질 수 있었다며 이렇게 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어떻게 자신이 죽을지 모르는데, 저는 죽음의 원인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런 행운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사 선생님은 죽음을 삶의 단절로 보지 않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삶에 대해 아쉬움도 물론 있지만, 미래를 확신하고 있기에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삶이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고 이를 위해 회개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희망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보는 사람은 좋은 일, 긍정적인 일들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삶에 감사해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라 나병 환자들은 성으로 둘러싸인 큰 도시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특히 예루살렘 성전에는 얼씬도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던 나병 환자였기에,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나병은 실질적 치유가 필요하였지만,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인 치유 인정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올립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고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9명은 유다인이었습니다.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경배를 뜻합니다. 이방인은 하느님을 경배하는데, 하느님 경배를 민족성으로 자부하는 유다인들은 치유된 것을 알자 다른 데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과연 어디로 갔을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어느 어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했는지 몰라요. 성당도 열심히 다니면서 복사도 섰었는데…. 지금 방에서 나오지를 않아요. 매일 게임만 하고…. 한심해 죽겠어요.”
모범생이었던 아이가 대학 졸업하고 나서 직장을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모범생이었다는 말을 들으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어느 패션 디자이너의 책에서 “우리 아이를 패션 디자이너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혹시 모범생이에요?”라고 다시 묻는다고 합니다. 만약 모범생이라고 하면 다른 길로 인도하라고 권한답니다. 정해진 규칙만을 따르고, 부모님 말씀만 잘 듣는 모범생에게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틀을 깨지 못해 내적 갈등을 엄청나게 겪을 수 없다는 말을 해준다고 합니다.
앞선 그 아이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은 모범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틀을 깨는 독창성을 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갈등이 생기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잃기도 합니다.
모범생은 누구의 모범생일까요? 부모의 모범생을 세상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할까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감사’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사람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완전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일까요? 그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청할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는데도 예수님은 오직 감사하는 사마리아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고 구원에 다다랐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믿음도 단계가 있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열역학 법칙에 따라 우리 믿음도 측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 법칙은 0부터 3 법칙까지 4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열역학 제0 법칙은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이동한다는 법칙입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있을 때 뜨거운 물은 저절로 차가운 물에 열을 빼앗깁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주실 수 있기에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적을 본인 의지가 아니라 빼앗기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일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만드신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는데 피가 멈추었습니다. 에너지를 회복했던 것입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의 믿음은 여기까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열역학 제1 법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를 누군가 얻었다면 누군가는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고생하듯, 하느님도 고생하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에너지는 곧 당신의 살과 피입니다. 만약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이 자신들을 치유해 준 은총이 곧 예수님께서 나병에 걸리시는 것임을 알았다면 그분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나병을 치유해주시기 위해 주시는 성체가 곧 그분의 죽음임을 안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열역학 제1 법칙,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 위해 지셔야 했던 십자가의 무게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오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예수님께 감사드릴 줄 알았기에 그분의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위 단계도 있습니다. 바로 열역학 제2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아무리 은총과 에너지를 받았어도 시간이 지나면 계속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처럼 이런 사람은 규칙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을 받기 위해 다가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규칙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그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열역학 제3 법칙인데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소멸하기까지 가만히 있으면 내 존재까지 사라진다는 법칙입니다.
결국, 지금 나에게 존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시는 분이 나의 창조자이시어서 그분이 아니면 나는 먼지보다 못한 존재, 아니 존재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일까요? 바로 찬미입니다. 나를 낮추고 그분의 전능함을 찬미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입니다.
‘열역학 법칙’에 대치되는 종교가 ‘저절로교’입니다. 모든 것이 저절로 생겨났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창조자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법칙이 있음을 믿었고 남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차이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행성들은 원이 아니라 타원으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천문학을 연구하는 한 친구는 창조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열역학 법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태양계란 저절로 생성된 것이며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니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케플러는 그 친구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실제 크기의 축소비율에 맞게 만들어 아름다운 색을 칠하고 별들이 빛을 발하며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하여 그 친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친구는 매우 감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누가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무도 만들지 않았네. 자기 힘으로 생겨나서 자기 힘으로 도는 것일세.”
“뭐야? 어서 말해봐. 어떻게 만든 사람이 없이 절로 만들어지고 돈단 말인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나?”
“이 친구야! 이렇게 작은 장난감도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어떻게 이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큰 태양계가 저절로 생겨나서 저절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무신론자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저절로교에서 벗어나 열역학 법칙을 믿는 것으로 증가합니다. 열역학 법칙은 한 마디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없다.’입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에너지와 존재를 내어줄 존재를 찾습니다. 아기들은 열역학 법칙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찾아서 에너지와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감사했다면 열역학 법칙을 이해했다는 뜻입니다.
열역학 법칙을 이해하면 기도의 법칙도 이해합니다. 기도하면 에너지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기도하지 않는 자는 소멸한다는 것이며 기도로 주시는 그분의 에너지는 곧 그분의 십자가를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열역학 법칙을 먼저 믿게 되면 믿음은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감사와 찬미도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이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미칼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찬미하는 다윗을 비웃었기에 더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아니면 먼지보다도 못한 나를 존재하게 해 주시고 자아에 지배받지 않도록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기에 지금, 이 순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얻어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조재형신부-
친구가 와서 모처럼 자전거타고 뉴욕 나들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헬멧을 친구에게 주려고 했는데 뉴욕은 헬멧 착용은 의무가 아니라고 하고, 친구도 그냥 타겠다고 해서 헬멧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가는 길에 사고가 났고, 헬멧을 착용하지 않은 친구의 이마가 조금 다쳤습니다. 헬멧 착용이 의무는 아닐지라도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는 착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다행히 친구는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보험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가입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친구는 학교의 보험에 가입했고, 이번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한국처럼 전 국민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나라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전 국민의료보험이 시행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아픈 것도 고통이지만, 의료비 부담도 걱정입니다.
이제 곧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작년에는 팬데믹 때문에 대림특강, 성탄판공이 취소되었습니다. 올해는 본당에서 대림특강, 성탄판공이 재개 될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선물을 준비했던 동방박사처럼, 주님의 성탄을 축하했던 목동들처럼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교회에서 정한 의무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성숙을 위해서 슬기로운 처녀가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던 것처럼 우리들의 기도와 선행을 우리 마음의 등잔에 가득 채우면 좋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난주까지 30회의 교리여행이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설명을 잘 읽으면 교리여행에서 만나는 문제를 맞힐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의무는 아니지만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교리여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 10명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루가복음 10장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 물을 드렸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시면 곧 다시 목마를 우물의 물을 드렸던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을 예수님께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선택받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의무는 아니었지만 자비를 베풀었던 사람이라면, 의무는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 사람이라면, 의무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잔 바니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평생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던 잔 바니에입니다. 잔 바니에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주었던 분은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안정된 일자리와 성공이 보이는 길이 있지만 장 바니에는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견을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난 너를 신뢰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잔 바니에는 구원의 방주를 뜻하는 라르쉬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라르쉬 공동체는 35개국 134곳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구원의 방주가 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영성가인 헨리 나웬 신부님은 잔 바니에를 만났고, 라르쉬 공동체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잔 바니에의 영성과 사상은 헨리 나웬 신부님의 삶을 바꾸었고, 헨리 나웬 신부님은 라르쉬 공동체에서의 체험을 책으로 출판하였고, 책은 많은 이들의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재능을 보시고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 오늘 나병이 치유된 이방인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 치유는 구원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기 저기 숨겨져 있는 수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냅시다!
-양승국신부-
나병으로부터 치유 받은 열 명 가운데 유일하게 감사 인사를 하러 온 이방인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감사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세탁물이 산더미인데 세탁기가 자주 고장이 나서 한동안 무척 성가셨습니다. 출장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기사님 왈, 15년 됐으니 수명이 다됐답니다. 마침 창고를 정리하다가 큼지막한 구식 통돌이 세탁기를 발굴해서 설치했더니...세상에 시원시원 너무나 잘 돌아가는 것입니다.
화창한 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담요들을 널고 있자니, 제 입에서는 감사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우리 삶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 얼마나 많은 감사기도꺼리가 숨겨져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감사기도를 바치신 흔적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복음 12장 25절)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요한 복음 6장 11절)
갈 곳 없는 소녀들을 수녀님들께서 친딸처럼 양육하는 청소년보호시설 개원 기념 미사 때의 일입니다. 영성체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가 '우리 집에 살면서 감사할 꺼리 37가지'라는 묵상글을 낭독했는데, 듣고 있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감사기도보다는 청원기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불만이 앞서던 제가 비참해보였습니다.
우리들의 기도생활 안에서 감사기도가 더 확장되면 좋겠습니다. 눈을 크게 뜨면 더 많은 감사꺼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육의 눈도 크게 뜨지만 영안(靈眼), 심안(心眼)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에 다다른 루르드의 벨라뎃다 수녀님께서 한번은 자신의 일생을 총정리하며 감사기도를 바치셨는데, 진정한 의미가 감사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발현하심에도 감사드리지만, 발현하지 않으심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기억력이 나빠 아무리 노력해도 암기할 수 없었던 제 무지와 어리석음에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원장수녀님이 저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 갖은 폭언과 차별, 굴욕의 방 처벌에 대해서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를 보고 '이 여자가 정녕 그 벨라뎃다인가?' 라고 말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저라는 것과, 마치 희귀한 동물 대하듯, 바라본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제 눈앞에 나타나실 때도 감사드리지만, 나타나지 않으실 때도 감사드립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께서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이나 축복에 감사합니다. 건강과 성공에 감사합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기도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이 다가올 때는, 주님의 수난에 깊이 참여하게 되었음에 감사해야겠습니다. 깊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을 때는,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온 것에 대해, 이제 남은 것은 바닥을 딛고 올라가는 것뿐임에 감사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라
-반영억신부-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진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고 성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은총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시는 분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일에 급급하게 행동한 모습입니다. 당시상황은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사제가 확인해 주어야 외부와 차단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에 머물렀습니다. 몸의 치유를 통하여 은혜주시는 분을 만났어야 하는데 은총의 열매에 매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몸은 아무리 깨끗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는 것이 몸입니다. 사람의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데 있습니다”(이현주). 받은 은혜를 돌판에 새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사랑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다.>
-조욱현신부-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여기서는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야기에 나오는 환자 열 사람 모두,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사제에게 가서 나병이 나았음을 확인받고
율법 규정대로 정결례를 행하라는 지시입니다(레위 14장).
따라서 이야기 속에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줄 테니...”
라고 약속하는 말씀을 하셨거나
아니면 병을 고치는 ‘치유의 말씀’을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어떻든 아직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환자들이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에게 간 것은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나타냅니다.
‘몸이 깨끗해졌다.’ 라는 말은, ‘병이 나았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단순한 ‘치유 이야기’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되돌아와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다른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가 더 있어서
좀 더 주의 깊게 해석해야 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1) 돌아왔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말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같으신 분으로
믿고 하느님께 경배를 드리는 행동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그의 믿음은,
7장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믿음과 같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반면에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는 예언자’나 ‘의사’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되돌아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마치 치료가 끝난 뒤에 미련 없이 병원을 떠나버리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으니까 간청했고, 청한 것을 얻었지만,
예수님의 치유 능력만 믿는 것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으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는 상관없이 살게 되고,
그러면 몸의 병이 나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2) 이 이야기를 ‘감사’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감사’는 신앙생활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자신들이 ‘치유의 은총’을 받은 일을 ‘당연한 일’로,
즉 ‘받아야 할 것을 받은 일’로 생각한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은총’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
즉 은총을 은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감사드린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예수님께 감사드린 일은,
되돌아온 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 경우에, 받은 은총에 감사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은, 자기들이 병에 걸린 것은 하느님 탓이라고
생각하고, 억울해 하고, 하느님을 원망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또는 그들은 아쉬울 때에는 하느님을 찾다가
그 일이 지나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이 하느님께는 감사드렸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었거나 생략한 것은 아닐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18절의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그들은 하느님께도 감사드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혜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하여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불에도 없어지지 않던 그것이 잠깐 비치는 햇살에
따뜻해지자 그냥 녹아 버린 것은 당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동틀 녘에 당신께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자의 희망은 겨울 서리처럼 녹아 버리고
쓸데없는 물처럼 흘러가 버립니다(지혜 16,26-29).”
(여기서 ‘그것’은 ‘만나’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큰 은총을 향해서 나아가지만,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냥 그 자리에서 정체되어 버립니다.
3) 이 이야기를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가버린 사람들은 ‘몸’의 치유에만 만족하고서 멈춘 사람들이고,
되돌아온 사람은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계속 나아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신 것은,
그들이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고
‘몸의 치유’에서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와 건강도 중요한 일입니다.
건강하면 신앙생활을 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몸이 건강해서 오히려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건강하면 세속 일에 더 쉽게 몰두하게 되고, 그래서 그렇게 되는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의 ‘몸의 건강’은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 루카 17,11-19: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사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한상우신부-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듯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는다.
하느님을 잊고사는
씁쓸한 우리들
모습이다.
감사와 믿음이
빠져버린 관계는
이미 죽어있는
아픈 관계이다.
가장 깨끗한
치유는
하느님께 먼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영광은 치유와
믿음으로
하느님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만든다.
치유와 믿음은
그래서
둘이 아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치유와
믿음이 나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
당연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장 아름다운
실천은 우리의
감사이다.
삶의 중심축에
있어야 할
감사의
실천이 감사의
삶이다.
가혹한 삶의
현실이 간절한
우리의
기도가 된다.
우리 삶에
있어야 할 것은
바로 믿음이다.
믿음의 여정은
치유의 여정을
걸어가고
감사와 함께하며
드디어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한다.
우리 삶안에
감사가 있는 지를
묻게된다
믿음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깨끗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돌아가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린다.
이미
무한히 열려진
믿음의 길이다.
그 믿음의
길 위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되는
우리들이다.
아무도에서
드디어
마침내로
돌아오는 깨끗한
믿음의 자녀들이
우리들이다.
믿음을 청하는
오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들려 주십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루카 17,12)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실 때 한센병을 앓는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자비를 청합니다. "멀찍이"라는 표현에 당시 사회가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그들 스스로 느꼈던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져 참 마음이 아픕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루카 17,14)
예수님은 치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는 그들을 존중해서 무작정 다가가지도 않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쩌면 결과론적인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악성 피부병을 앓는 이들의 발병 여부나 회복에 대해 확인을 해 주는 이가 사제였으니까요.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
치유의 기적은 그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 걸어가는 동안에 일어납니다. 그저 믿고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은 겁니다. 어떤 결정적 순간이 아니라 믿고 가는 동안...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기적들도 이렇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몸에 정화의 치유가 일어난 걸 알고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를 드린 단 한 사람,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사제에게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이 이 모든 놀라운 기적의 열쇠라는 걸 직감했지요.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사제의 완치 판정이나 가족과의 재회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는 이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고,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적 치유에 영혼의 구원까지 얻습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감사"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권력자와 통치자에게 지혜를 배우라고 촉구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지혜 6,7)
통치자, 힘 없는 이들 할 것 없이 누구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권력을 가진 이들을 콕 짚어 더 엄중하게 지혜를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겠지요. 사실 모든 이가 하느님 앞에 한낱 작고 보잘것없는 피조물이지만, 하느님은 일부에게 더 많은 재능과 재물과 권력을 허락하시고 그에 맞갖는 자질과 덕행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을수록 주제 파악이 필요합니다. 본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단지 하느님께서 뭔가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라고 잠시 힘을 맡기셨다는 것을 자각할 때 감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감사는 자신을 알고 타인을 알며 하느님을 아는 이의 덕행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아는 권력자는 세상을, 타인을,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지혜 6,11)
권력자나 통치자가 끝내 얻어야 할 것은 힘이나 명성, 재물, 이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분이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는 인간 실존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가 기껏해야 짧게 지나가 버릴 이 풍진 지상 삶에서 도토리 키재기가 목표여서는 안 되니까요.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는 이는 지혜를 찾아 얻고 지상의 삶과 영원한 생명을 관통하는 가르침을 받아 얻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여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너희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다."(복음 환호송)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구합니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희로애락의 파도에 출렁이고 생로병사의 풍랑에 뒤집어지면서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계심을 믿고 감사드리고 있다면 지혜의 길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몸과 마음이 힘들고 처한 상황이 어렵다 해도, 눈을 더욱 크게 뜨고 감사할 일들을 꼽아내어 주님 앞에 엎드리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비를 청하고 감사를 되돌려 드리는 이들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으시니, 벗님에게도 치유와 구원이 반드시 함께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은총과 자비의 주님께서 벗님과 함께 하시길 두손모아 기도합니다.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김찬선신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사랑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치유.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으며 제가 느낀 것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은 받아도 구원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병을 고쳐줬는데 병만 치유 받지 사랑은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유가 사랑이고, 사랑이 구원인데 사랑도 구원도 발생하지 않고,
하느님도 발생치 않은 것이 오늘 아홉 나환자의 불행이고,
우리도 이 아홉과 같다면 같은 뜻에서 불행합니다.
우선 치유만 받고 사랑은 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치유만 받고 사랑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치유를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치유가 사랑이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의 병을 치유해주는 것은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의무이지 사랑이 아니지요.
같은 식으로 어머니의 밥이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으로, 지극 정성으로 밥을 지어 자식에게 먹이는데
자식은 그것을 부엌데기 엄마의 당연한 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랑이 발생치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받아도 구원이 발생치 않고
하느님이 발생치 않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는 믿음이 없고, 믿음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모든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만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
엄마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이고,
친구의 사랑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을 자주 실패합니다.
우리는 친구의 사랑에서 친구와 친구의 사랑만 봅니다.
연인끼리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풋사랑일 경우,
다시 말해서 사랑이 초보일 경우 다 그렇습니다.
서로를 볼뿐 같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볼뿐 하느님 안에서 상대를 보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 형제를 영적동반하면서 이성문제를 안고 있는 형제를 만납니다.
그때 저는 그 자매와의 사랑을 그만 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보다는 그 자매가 바로 하느님의 자녀이니
그 자매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라고 충고하고,
그럴 때 자매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고 현재가 될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가 저의 충고대로 할 경우
자매와의 사랑은 하느님과의 사랑에 오히려 도움이 되고
심지어 이웃과의 사랑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때까지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메마른 사랑이었음을 이 사랑이 깨닫게 하고,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촉촉한 사랑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 사랑들을 보고,
하느님의 사랑들인 이웃 사랑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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