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마르코 12,38-44)
"Amen, I say to you,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 contributors to the treasur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다(복음).

믿음의 크기
-키엣대주교-
매일 국수만 먹다 맛있는 야채와 밥을 보고 기뻐하던 부인이 며칠 지나자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먹을 것도 없는 밥을 매일 똑 같이 먹어야한다니 뭘 먹으면 맛있는지 모르겠어요.” 남편이 말하길 “아마 세상에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은 뇌물일거야”
오늘 복음에서는 지위 성분이 다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높은 직위에 존경받는 사람들이지만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 조차 자신의 부귀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만과 이익에 눈 먼 그들에게 이웃의 아픔을 공감할 눈과 귀가 없습니다.
비록 힘도 돈도 없는 가난한 과부지만 그녀는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넓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겸손한 자테로 성전에 들어가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부유한 율법학자들은 많은 것 중에 몇 닢을 넣었지만,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넣었습니다. 관대한 사랑이란 동정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내가 많아서가 아니라 나도 부족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내어 주는 사랑을 알 때 가치있는 삶이 됩니다. 돈의 크기보다 마음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계산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나눌 줄 아는 마음이 정말 소중합니다.
돈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위험 부담보다 투자 효과가 큰 것이 가치있는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가장 현명한 투자는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사는 데는 돈의 크기와 상관없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쉽습니다.
사람들은 헌금함에 돈을 넣기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이미 얼마를 꺼낼까 결정을 합니다. 이 정도면 될까? 다른 사람이 보면 창피하지 않을까? 등등 그러나 그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내는 돈은 없어지지 않고 하늘나라에 투자한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시간과 돈과 열정을 투자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며 행복과 절망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 투자는 성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헌금함에 돈을 넣을때도 주저합니다.
하늘 나라는 돈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크기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인간에 대한 가치를 그들이 가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내어 주는 것, 나눔의 크기에 의해 판단합니다. 나눔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다시 이웃과 나누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 저희가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늘 나라에서의 부의 가치를 진실로 이해하는 지혜와 믿음의 성장으로 인도하여주소서. 아멘.

1. 봉헌금을 낼 때 마음은 어떴습니까?
2. 봉헌금과 제물을 바칠 때 갖추어야 하는 마음과 태도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듀크 대학교 교수 새러 가이더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폭넓게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재밌는 친구, 공을 잘 던지는 사람, 케첩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다양한 존재인지 생각하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 창의성이 향상되었음을 이 작업을 통해 분명히 보여줍니다.
창의성 향상은 아이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즘 치매에 관한 관심들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치매로 가족들의 어려움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늘 사고하며 뇌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창의적인 활동을 통해 뇌 세포를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서 새러 가이더 교수의 ‘자신이 누군지 폭넓게 생각’하게 하는 방법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뇌 건강을 위해, 함께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특히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합니까?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다양한 모습 모두를 사랑해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 사랑의 이유를 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랑받을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지금을 힘들게 사는 것이 아닐까요?
예루살렘 성전에는 성전 세와 십일조 세를 받아들이기 위한 성전금고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헌금이 오늘 복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부자는 많이 넣고 가난한 이는 조금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부자는 드러내는 봉헌을 위해 많이 넣었던 것이고, 가난한 이는 상황이 어려워서 조금만 넣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드러내기 위한 봉헌이기에 하느님께 바치기보다는 자기에게 바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이는 노동자 하루 품값의 64분의 1에 해당하는 보잘것없는 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헌금을 받을 때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고 그 바치는 마음을 헤아리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적은 액수라 할지라도 봉헌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받을 이유였습니다. 세상의 눈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모습이지만,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이 됩니다.
남에게 드러내기 위하여 헌금하는 부자가 많은 돈을 내는 마음 그리고 가진 것을 몽땅 털어서 하느님께 바치는 가난한 이의 마음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헌금을 기쁘게 받으실까요?


큰형님이 결혼한 뒤, 다른 가족들과 형네 집에 놀러 갔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함께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배가 아파져 오는 것입니다. 화장실을 얼른 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러웠습니다. 형 집에는 마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과 마당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요? 지금의 이야기는 1980년 초반의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저는 아파트에 처음 가본 것이었고, 실내에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화장실은 야외의 마당 구석에 있어야만 했습니다.
형님께 물어서 들어간 화장실이었지만, 이곳 역시 낯설었습니다. 우물 같은 것이 화장실 변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화장실에 욕조와 세면대도 함께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2021년에 실내에 화장실이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이 되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어!”라며 화를 내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일까요? 이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빠른 판단보다는 주님의 판단을 곰곰이 새기면서 기다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봉헌 없는 기도: 뱀의 소굴로의 초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사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기도’입니다. 율법 학자들의 기도와 과부의 기도를 대조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넣었습니다. 이 말은 기도하며 자기 자신을 많이 내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은 자신을 내어놓지 못하고 타인의 가산마저 등쳐 먹는 자기를 키우기 위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도를 ‘가스라이팅 기도’라 하고 싶습니다. 가스라이팅은 본래 연극에서 유래한 말인데, 상대를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관계의 기본은 상대의 자유를 인정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한다면 이는 나와 펫(애완동물), 혹은 나와 물건의 관계가 됩니다. 상대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상대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나와 하느님 사이,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렇게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됨과 동시에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딸이 취직하여 자취할 때도 찾아와 온종일 눈물을 흘리며 신세타령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딸이 엄마가 이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엄마의 폭언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나한테 이따위로 대해? 딸년이 돼서 엄마를 생각할 줄도 모르냐, 미친년아. 네가 그러고도 잘 될 것 같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를 하며 풀었습니다. 엄마를 피해 자취방을 몇 번이나 옮겼지만, 엄마는 며칠도 안 돼서 딸을 찾아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찾아내는 방법을 알아낸 후에야 더는 엄마가 못 찾게 방을 옮겼고 이젠 평화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이렇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 청년은 부모에게 못 받은 사랑을 남자친구를 통해 받으려 했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존감이 너무 낮다 보니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다 정말 자라며 사랑을 많이 받은 한 남자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톡에 바로 답장을 안 하면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는 직장까지 자신이 알아봐 준 곳으로 옮기라고 말하며 아예 집을 나와 자신과 동거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으면 마치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를 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남자도 자취방을 여러 번 옮겨보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했던 방식으로 며칠 만에 금방 남자친구를 찾아냈습니다.
남자친구의 권유로 최고야 원장을 찾아왔고 최 원장은 여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게 하였습니다. 남자친구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1%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일하게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친구도 마지막 화해를 위해 여자 친구의 자취방에 들어가기로 하였는데 단, 조건이 두 개 있었습니다. 원래 다니던 직장에 다시 다니게 해 주는 것과 여자의 집에 있을 때는 자신이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가면 건들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유의 공간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잘 안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친구가 자기의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들어가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또 참지 못하고 싸우다 텐트를 부숴버렸습니다. 그토록 미운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것을 자신도 남자친구에게 그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고 여자는 조금씩 남자친구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습니다. 카톡을 1시간 동안 보지 않아도 참아내고 남자친구를 자기 집에 살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잘 되었을까요? 그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필요하여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면 그 사람이 자유롭게 머물 공간을 내가 제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공간을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나의 욕구입니다. 교만이고 성욕이고 소유욕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욕구가 있다면 소유욕입니다.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기 위해 아주 작은 자유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공간 안에서 자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분명 자신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텐트를 부숴버리면 그 사람은 내 안에 있어도 하나의 물건으로 전락하거나 그걸 견디지 못하면 도망갑니다. 이렇게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절대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자유이고 그 자유를 내어주는 것을 자기 봉헌이라 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는 이들이었습니다. 소유욕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욕구로 타인들을 자기 소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느님에게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명예를 높여달라거나 자녀가 잘되는 것만을 청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머물 공간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주님에게 내 안에서 공간을 허락하는 첫 번째 시도가 소유욕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공간에서만큼은 주님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께서 그 공간을 얻으시기 위해 원하셨던 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악과를 봉헌하는 곳에 주님께서 내려오시는데, 그 자리를 뱀의 것으로 내어준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구약과 신약 내내 그것이 십일조로 굳어졌고 이젠 미사 안에서 빵과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봉헌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보시는 것은 봉헌이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어느 정도 만들어주는 것인가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모든 가산을 봉헌하였기에 자기 뜻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욕구가 사라진 과부 안에 하느님은 한가득 당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십니다.
미사 때 우리는 어떠한 정신으로 봉헌을 해야 할까요? 바로 과부와 같이 “내 뜻을 봉헌하니 당신 뜻이 온통 나를 차지하소서.”라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례 때 모실 성체가 머물 자리가 나에게 마련됩니다. 율법학자의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 하는 기도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자유를 드리기 위해 내 욕구를 내어드리는 봉헌을 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신자를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평신도들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발전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면서 학문으로서 교리와 교회를 공부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한 학자들은 1784년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서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평신도들로 시작된 한국교회의 역사입니다. 학자들은 가성직 제도를 만들어서 교회를 운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성직자의 파견을 북경의 주교에게 요청하였습니다. 북경의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파견하였고, 한국교회는 비로서 사제가 성사를 집전하는 제도적인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의 첫 순교와 더불어 100년간의 긴 박해가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탄생한 자랑스러운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평신도 주일을 지내면서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와 스힐러 벡스의 ‘교회 직무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로핑크는 ‘대조사회’를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계명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드러나는 세상을 꿈꾸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난한 이, 굶주린 이, 병든 이들이 교회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한 공동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스힐러 벡스는 교회의 직무는 신분과 계급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성사이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핑크와 스힐러 벡스의 책은 신학생이었던 저의 가슴을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 마치 소피아 성당의 벽을 채웠던 이슬람의 문양을 벗겨내면 그 안에 교회의 성화가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의 열정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도를 바꾸고, 거시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정성과 사랑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과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과부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미망인입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합니다. 특별한 직업이 없다면 과부들의 생활은 궁핍하고 힘들기 마련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과부들의 삶이었습니다. 성서는 오늘 두 명의 과부가 모두 힘들고 어렵게 생활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두 과부 모두 마지막 남은 것들을 이웃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서 봉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습니다.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는 마지막 남은 동전을 봉헌하였습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과부는 예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보여준 과부의 용기와 사랑의 실천은 그 뒤에 과부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첫째는 올바른 가치기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따를 것인가 또는 나의 욕망을 희생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요구를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 안에 어떤 가치 기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하기 쉬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수양이 필요합니다. 비록 올바른 가치 기준을 내 안에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충동적인 자신을 발견하게 되며 평소 나의 기준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이 충동에 의해 하게 되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만지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도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이기려고 노력하고 남을 위해서 우리의 재능을 제공하려는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많은 내면적인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결국 실패하고 말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치기준을 확립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꾸준히 기도 한다면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쉽게 실천할 수 있고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쩌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부분은 전부보다 클 수 없다
-반영억신부-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당신부를 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기억되는 선물이 있습니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네 잎 클로버입니다.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질적인 선물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 잎 클로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영진신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에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또는 “너희는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마라.”,
또는 “너희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모든’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들이었던 것은 아니고, ‘나타나엘’처럼
예수님께서 ‘진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신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요한 1,47).
그러나 진실한 율법학자들의 수는 적었고,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라는 말씀은,
옷차림만으로 거룩한 척 하는 위선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해집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교만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장터 같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율법학자들과 마주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그렇게 인사 받는 것을 즐기면서 자기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인물이라는 착각에 빠져서 우쭐거렸습니다.
(율법학자들에게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겉으로만 공손하게
인사하고, 속으로는 위선자들이라고 욕하거나 비웃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우에 인사 받는 것을 즐기는 율법학자들도 위선자들이고,
겉으로만 공손하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위선자들입니다.)
‘높은 자리’와 ‘윗자리’를 즐긴다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교만을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탐욕을 비판하는 말씀인데,
위선과 교만을 비판하신 말씀보다 훨씬 더 강도가 센 말씀입니다.
당시에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상대로 율법 문제 등을 상담해 주고
아주 비싼 수수료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등쳐먹는 일’로, 즉 강도짓으로 보셨습니다.
(율법 문제 상담은 사실상 신앙상담과 같습니다.
신앙상담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에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척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위선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이기 때문에
더 엄중한 심판과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1-44)”
이 이야기를 앞의 율법학자들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헌금함에 큰돈을 넣은 부자들을 율법학자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선자인 율법학자들이 부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헌금함에 넣은 ‘큰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서 마련한 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돈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 자체가 위선입니다.
(남의 돈을 빼앗아서 헌금한다면 그것을 헌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헌금도 아니고, 또 하느님을 강도짓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짓이기 때문에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하느냐?’도 중요하고,
‘돈을 어떻게 마련했느냐?’도 중요합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을 해서 마련한 돈을 헌금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런 돈은 피해자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선 자체이신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려면
바치는 그것도 ‘선한 것’이어야 하고, 선한 마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를, 율법학자들 같은 기득권층 사람들에게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과부의 마음속에는 기득권층 사람들에 대한
원망, 분노, 미움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그리고 기득권층 사람들은 부유하게 살고 힘없는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는
불공평한 현실에 대해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하고 순수하고 선한 마음으로, 또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어떤 특별한 지향 없이 ‘감사헌금’을 바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만 가득한 상태로 헌금을 했다면, 또 이기심과 욕심으로
헌금을 했다면,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에서는 ‘생활비를 모두 다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모두 다 바친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과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가진 것을 모두 다 바치지 못하더라도
온 마음을 다 바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칭찬하실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음은 있어도 현실이 그렇지 못해서, 가진 것을 다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내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많이 낸다고 과시하고 생색내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ㄱ).”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마태 6,3-4ㄱ).”

연중 제32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인공들은 가난한 두 과부이다. 이 두 과부는 하느님 앞에 믿는 이들의 상징적 표상이 된다.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부(富)는 많든지 적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보(富)이다. 즉 자비로움이 부이며, 어떤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항상 불행이요 가난이다.
우리는 사렙타 과부에게서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는 보다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고자 하는 자비로운 마음, 즉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물을 끊어버리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우리에게 남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까지도 요구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사자로서 그 예언자를 믿는 마음이다. 이것으로 그녀는 애덕을 실천하였으며 그것으로 몇 배의 보상을 받는다.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받는다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말했다.
“나는 이 집 저 집 문전걸식을 하며 어떤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나는 왕 중의 왕이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가득 찼다. 나는 희망에 벅차 있었고 ‘불행한 날들은 다 지나갔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분의 자선을 기대하면서 먼지 속 어디에 떨어질지 모르는 동전을 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차가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멈춰 섰다. 그분의 시선이 나에게 와 멈추면서 미소를 지으면서 그분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 왔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분은 즉시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을 줄 수 있겠느냐?’ 거지에게 왕이 동냥하다니 될 말인가? 나는 어리둥절하여 얼떨결에 내 식량 자루에서 조그만 곡식 한 톨을 꺼내 그분에게 드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나는 내 자루에 든 얼마 안 되는 곡식 중에서 금으로 된 작은 곡식 한 톨을 발견하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었을까?’”(R. 타골).
복음: 마르 12,38-44: 과부의 헌금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 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다.
두 번째로 과부의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의 행위였기에 아무런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사심 없는 봉헌이었다는 것이다. 가난하였지만 가진 것 모두를 하느님께 바쳤다. 헌금 궤 앞에 계신 예수께서는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거기에 나오는 부자들의 행위는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한다기보다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자세였다. 반면에 과부는 겨우 동전 한 닢 값어치인 렙톤 두 개를 바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를 칭찬하신다. 생계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다 바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44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과 진실성을 요구하신다. 과부는 자기의 삶과 마음을 봉헌했고, 부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서 모아들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의 부스러기를 바쳤을 따름이다.
히브리서에서 역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새로움에 대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매년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지만(히브 9,25), 예수께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어 죄를 이기신 후 천상의 성소로 들어가셨다(히브 9,26).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의 두 과부와 같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당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어 죄에 대한 승리를 드러내시는 분이 될 것이다. 두 과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신, 그리고 말없이 완전히 봉헌하신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E. Schweizer, Il Vangelo secondo Marco, Brescia 1971, p.274).
오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십니다. 당시에는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헌금의 액수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에게 주목하십니다. 부유한 이들이 당당히 큰돈을 넣는 와중에 차례가 된 그녀가 보잘것없는 가치의 렙톤 두 닢을 조심히 넣었습니다. 초라한 과부 차림새의 행색으로 단박에 그녀의 처지를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시선으로 봉헌을 바라보시는지 알려 주시려는 겁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하느님의 셈법은 세상의 그것과 아예 다른 방식입니다. 세상은 산술적으로 큰 금액에 열광하지만, 하느님은 그 정도의 돈이 있거나 없거나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부자들의 상태를 모르시지 않으니까요. 하느님은 액수나 수량이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 그 가난한 과부는 무모하리만치 어리석을 겁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액수지만 그녀에게는 없으면 굶을지도 모르는 전 재산이니까요. 그런데 하느님의 눈에는 그녀가 매우 지혜롭습니다. 현재와 앞날을 동시에 주님 발 앞에 펼쳐놓았으니 하느님께서 움직이시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셈이니까요.
제1독서는 엘리야과 사렙타 마을 과부의 일화를 전합니다.
"먼저 당신을 위해 ...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1열왕 17,13)
기근이 들어 모두가 굶는 때였지요. 이스라엘을 떠난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에서 마주친 과부에게 물과 음식을 청하자, 여인은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으려는 참이라고 솔직히 답합니다.
그런 절박한 처지의 여인에게 엘리야의 요구는 좀 무리하게 들릴 수도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밀가루와 약간의 기름은 모자가 먹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양이니까요.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1열왕 17,15)
하지만 여인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이 비지 않을 거라는 엘리야의 말을 믿어서일 수도 있고, 피차 서로 굶는 처지에 조금이라도 내놓아 생명을 나누려는 연민 때문일 수도 있지요. 엘리야의 말을 들음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앞으로 식량 걱정을 덜게 될 요긴한 선물을 받습니다. 소박하지만 생명을 나누었기에 생명을 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제2독서는 예수님의 봉헌을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히브 9,26)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여느 사제들과 달리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영원한 제물로 바치셔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생명을 온전히 아버지 손에 넘겨드리심으로써 완전한 봉헌을 이루신 것이지요.
이처럼 완전한 봉헌의 수혜자는 우리 인류입니다. 아버지는 이 남김없는 봉헌의 대가로 세상과 화해를 이루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다시 열어 주셨지요.
봉헌은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닙니다. 서원이나 서품, 입단 등의 특정한 기회뿐만 아니라 매일 매순간 봉헌을 갱신하도록 우리는 초대를 받고 있지요. 나는 어떤 마음으로 생명을 내주며 봉헌의 기쁨을 살아가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봉헌하는 벗님들과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여러분의 진실된 제물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32주일-하느님께서 채워주실 단지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0) | 2021.11.09 |
---|---|
2021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0) | 2021.11.08 |
2021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0) | 2021.11.06 |
2021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0) | 2021.11.05 |
2021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0) | 2021.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