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
(루가 16 1-8)
The master commended that
dishonest steward for acting prudently.
For the children of this world
are more prudent in dealing with their own generation
than the children of ligh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드시며,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배우 매튜 맥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2013)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습니다. 이 시상식에서 그는 누가 자신의 영웅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사람이 ‘너의 영웅이 누구니?’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뒤의 나”라고 했죠. 그리고 스물다섯 살이 되었을 때 10년 전에 질문했던 그녀가 다시 물었죠. “이제 넌 네 영웅이니?” 저는 대답했죠. “아직 멀었어! 아니, 아니야!” 그녀가 왜냐고 묻더군요. 저는 “내 영웅은 서른다섯 살의 나야.”라고 말했죠. 그러니까 제 인생의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저의 영웅은 항상 10년 후의 저입니다. 저는 결코 제 영웅이 되지 못할 겁니다. 그걸 알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계속 10년 뒤의 저를 쫓아갈 테니까요.
현재 생각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쫓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점점 성장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훌륭한 건축가는 설계를 아주 꼼꼼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웅인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미래의 나를 지금 잘 설계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되고, 지금의 어렵고 힘든 상황에 주저앉아 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많은 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조금 이상한 내용입니다.
어떤 부자가 자기 관리인의 부정을 알아챕니다. 그래서 해고를 통보하지요. 이때 집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지 주인의 해고를 받아들이지요. 그런데 그 뒤의 일이 걱정입니다. 그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주인의 재산으로 사리사욕을 채운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사가 행한 재산의 낭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의 무능력으로 일을 잘못 처리했을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앞날을 위해 잔꾀를 씁니다. 빚문서를 고칩니다.
주인으로서는 분명히 간교하고 부정한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책망하지 않고 칭찬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앞날을 도모하기 위해 약삭빠른 꾀를 쓰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앞날을 위해 빠르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의 힘든 상황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 어머니가 울고 있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딸 때문입니다. 헌신적으로 간호했지만, 가망이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 슬퍼 울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자매님도 울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새로 구입한 차가 배달되었는데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왜 이렇게 운이 없냐면서 울고 있습니다.
누구의 아픔이 더 클까요? 당연히 첫 번째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아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픔의 크기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번째 경우 역시, 차 문제만으로 슬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사이에 계속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겹친 상태에서, 차까지 속 썩이니 더 아팠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아픔과 슬픔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인정해 주어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늘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인정해 주고 또 우리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힘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의 이웃에게 말하기보다 듣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역시 ‘회개’에 관한 내용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이것을 알고 집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안 집사는 주인의 재산으로 자신이 쫓겨났을 때 맞아들일 친구들을 사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집사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사용한 재물은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재물이 아니라 주인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의한 재물로만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하와도 자신이 가진 선악과로 아담을 사귀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내어줌은 죄를 퍼뜨리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나의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나의 것을 내어줄 때가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내어줄 때 만들어집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면 언제나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고 그러면 친구가 아닌 거래처가 생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나를 받아 줄 사람은 거래처 사람들이 아닌 부정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초대 교회는 가진 재산을 공동소유하였습니다. 재물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주장할 수 없었고 그들은 서로 친구요 가족이었습니다.
이 공동체에 들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의롭지 못한 재산으로 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이렇게 행복한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고 수많은 이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려고 하여 그 수가 날로 증가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약삭빠른 청지기를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입니다.
영화 ‘테이킹 우드스탁’(2009)은 한 청년이 돈의 노예였다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사람으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실화입니다.
1969년 뉴욕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부모님이 파산 직전에 놓여 전 재산인 모텔을 넘겨야 하는 처지가 된 엘리엇은 고민에 사로잡힙니다. 누나는 돈만 밝히고 괴팍한 성격의 어머니를 떠나 독립하였고 동생 엘리엇에게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꿈을 좇으라고 하지만 엘리엇은 부모님의 희망이 자신뿐이라 떠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마을 상인 협회 회장을 맡아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던 중 이웃 동네에서 열리기로 한 ‘록 페스티벌’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그것을 자신의 마을에 유치해 부모님의 힘겨운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러 나선 엘리엇은 우여곡절 끝에 페스티벌을 유치하는 데 성공합니다.
수천 평의 농장을 축제 장소로 제공하고, 부모님의 낡아빠진 모텔은 페스티벌의 공식 숙소가 되며 난생처음으로 마을에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게 됩니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 주차비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긁어모읍니다.
점점 많이 몰려드는 히피족들과 친분이 생기던 차에 엘리엇은 그들이 준 대마초를 피우고 광고 방송에서 헛소리를 해버립니다. 페스티벌도 공짜고 음악도 공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고요하기만 하던 마을에 무려 50만 명에 육박하는 인원이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됩니다.
히피족은 본래 베트남전 패전을 본 2030 세대들이 기존 어른들의 경쟁과 성공 문화에 저항하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자고 생겨난 하나의 불같은 문화였습니다.
엘리엇은 그들의 공동체를 보며 무언가 각성하게 됩니다. 그는 어머니가 호텔을 넘기지도 않아도 되는 만큼의 돈이 있으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돈의 노예가 되는 길을 겪고 있었고 50만 명이나 되는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비로소 이 길이 이상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돈에 얽매이는 삶이 아닌 히피들처럼 자신의 꿈을 찾고 친구를 사귀는 삶으로 나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엇은 자신이 만난 친구들, 같은 자유를 갈망하는 그 수많은 자신과 같은 젊은이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나누고 자유롭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였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 그러면 큰 변화를 겪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과 대조되는 50만 명의 공동체는 이제 돈이 그의 것이 아닌 친구를 사귀는 도구로 볼 수 있는 눈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교회도 이와 같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헬은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우상을 낙타 위에서 깔고 앉았습니다. 라반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가 섬기는 우상은 돈입니다. 야곱과 결혼한 라헬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돈을 엉덩이로 깔고 앉았을 때 교회는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본래 주님 것이기에 의롭지 못하게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으로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른 이들도 자기 것을 주장하며 노예 생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가 정당하게 일하여 번 돈은 자기 것이라고 가르치면 더는 세상에서 매력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완전히 돈에 대해 자유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강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나머지 십의 구도 주님의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의롭지 못한 재물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졌다고 믿는 모든 것이 어차피 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 정신이 죽으면 내가 가진 것이 나의 것이라 믿게 되고 그러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 것이라 믿으면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바칠 수 있었을 때 그들이 나누는 재물은 진정 그들을 친구로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수도자들은 서원을 하면서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청빈, 정결, 순명’입니다. 본당에서 수도자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면 작은 가방이 전부였습니다. 청빈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표징입니다. 정결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순명은 자신의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청빈, 정결, 순명은 수도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상의 삶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성직자들도 서품을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신앙고백, 독신, 순명’입니다. 신앙고백은 말씀을 선포할 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독신은 오직 하느님의 일만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독신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순명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약속입니다. 프랑스의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순명으로 조선으로 왔고,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지금은 자리를 옮기면 가방 2개면 만족하지만 예전에는 자리를 옮길 때면 작은 트럭이 필요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이 많았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을 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를 가면 땅을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하면서 3가지를 신경 쓰게 됩니다. 하나는 매주 신문을 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 본사에서 오는 기사와 미주 지역의 기사를 편집해서 신문을 제작합니다. 필진을 섭외하고, 미주 지역의 행사들을 취재합니다. 보람 있고, 즐거운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직원들과의 관계입니다. 편집, 취재, 회계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기쁘게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매주 월요일은 직원과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매주 수요일은 편집회의 합니다. 이것도 제게는 큰 어려움이 없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신문사의 유지와 운영입니다. 지난 2년 코로나 팬데믹으로 신문홍보를 거의 갈 수 없었습니다. 신문사의 재정은 구독료와 후원금으로 이루어집니다. 홍보를 가야 독자를 늘릴 수 있고, 사람을 만나야 후원을 받을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교무금과 헌금으로 운영되는 본당과는 다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신문사는 복음 전하려는 사명과 운영하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멸망의 유황불을 피해 안전하게 구원의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롯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자비의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은 꽤나 의외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아무리 외쳐도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로 여겨집니다. 표현 하나 하나가 세상 섬뜩하고 무시무시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루카 복음17장 34~36절)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은신처를 떠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출발점입니다. 그날은 약속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하느님께서 주재하시는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정은 어떤 사람에게는 포상과 기쁨의 법정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징벌과 두려움의 법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속하게도 그 법정이 언제 벌어질지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인간들은 크게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선인들입니다. 구세주의 재림을, 다시 말해서 인류의 마지막 날을 미리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을 생각하며 지상에서 열심히 봉사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 때 부류의 사람들, 참으로 불행합니다. 그들은 그날이 결코 오지 않으려니 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저 흥청망청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날이 번갯불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전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한방 얻어맞을 것입니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루카 복음 17장 31절)
옥상에서 내려오지 마라는 말씀은 영적인 삶에서 육적인 삶에로 내려오지 말라는 당부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나선 신앙 여정 안에서 롯의 아내처럼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지 말고, 롯처럼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멸망의 유황불을 피해 안전하게 구원의 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롯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만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며, 서둘러 그분께로 달려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날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질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명예와 재산, 한평생 추구했던 자리와 학벌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우리 앞에 남게 될 것은 그간 우리가 쌓아왔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작은 선행, 따뜻한 마음뿐입니다.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노예이기는 하였지만, 주인의 큰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아 일했던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청지기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 역시 교활한 모습을 보인다. 당시 지주들에게 지불되는 빚이란 흔히 임대료를 말하는데 그것은 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나는 소출로 지불되었다.
이때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그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얼마나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는 것이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즉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들이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즉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은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그래서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지향을 다루시는 하느님의 콜라보를 보여 주십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루카 16,1)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이 비유는 사실 우리를 좀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올바르고 정당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등장 인물인 집사의 불의하고 얄팍한 꼼수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주인에게 칭찬까지 듣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등장하는 비유 속의 아버지나 주인은 대개 하느님을 상징하기 마련인데, 그렇다면 결과만 좋으면 하느님께도 다 좋은 것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집사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루카 16,1)
주인과 집사의 관계를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관상해 봅니다. 사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그분의 재산(모든 피조물과 재화, 탈렌트와 권력, 명예와 관계 등)을 관리하는 집사일 뿐이지요. 이 재산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횡령, 남용은 주인 입장에서는 낭비이고, 주인과 주인의 뜻을 위해 쓰는 것이 선용이지요. 우리는 그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만, 주인의 태도로 보아 그분의 뜻대로 쓰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당장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집사는 꼼수를 씁니다. 주인의 재산으로 사람들의 환심이라도 사서 앞날을 보전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이들, 즉 가난한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 수량을 제멋대로 줄여 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향의 순수성을 보신다고 배웠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그럴듯해도 동기와 과정이 모두 선해야 진정한 선이라고요. 그러니 그릇된 동기에서 시작된 집사의 선행(처럼 보이는 행위)에 후한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고 여깁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그런데 동기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선해야 한다는 논리에 붙잡혀 있다면 이 구절에서 좌절 비슷한 심정이 됩니다. 주인은 바보인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한 사람을 칭찬하다니? 게다가 오히려 그의 처신이 영리하다고?
다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 봅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의 지향이 천사처럼 그저 마냥 순수하기만 했던가 되짚어 보면 답이 보일 겁니다. 저마다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지만, 신앙의 태동, 봉사의 시작, 성소의 출발, 직분의 수락은 때때로 아주 허술하고 인간적인 지점에서 시작되기도 하니까요. 하느님은 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 맞춤형 그물을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나약하고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를 당신 사업에 합류시키시면서 지향을 따져 묻거나 내치지 않으십니다. 그릇된 지향이라도 당신의 섭리 안을 걷다 보면 정화되고 성화될 수 있고, 그렇게 이끄실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꼼수를 모르지 않으면서 인내하고 견디며 기다려 주는 주인의 마음이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집사는 자기가 살려고 거짓을 꾸몄지만 결과적으로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평소 정의와 자선에 대한 지향이 있어서가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집사와 결탁해 짐을 덜어낸 채무자들의 부정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느라 주인의 큰 마음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은 누가 그릇된 지향에서 출발했더라고 그 굽은 자를 가지고 직선을 그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집사의 죄조차도 선익으로 돌려놓는 분이시지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맞습니다. 세상 물정에 영악한 이들은 서로 결탁해 정보를 독점하고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끼리끼리 주고받습니다. 거짓도 죄악도 불사하면서요. 하지만 길게 보면 결국 그 열매를 쓰시는 분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당하시는 손해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면서 끝내 선으로 흘러가게 하십니다. 그릇된 지향조차도 언젠가 좋은 열매로 바꾸시는 분이시니까요.
다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주인의 칭찬"은 구원의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의한 집사처럼 살아온 이들은 자신의 악도 선으로 쓰시는 하느님께 승복해 지향과 방향을 바꾸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주인의 그림입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받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15,17)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께 뽑혀 그분과 삶을 나누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분을 따르는 새로운 길을 박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유다인 중 누구도, 바오로 자신조자도 자기 입에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올 줄 꿈에도 몰랐겠지요. 너무 다른 출발점이었지만, 결국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위해, 유다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바오로를 쓰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주인이신 분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집사로 불러 당신의 사람과 재산과 세상을 맡기십니다. 이기심과 탐욕, 자기 영광에 한눈 팔면 주인의 재산은 쉬이 낭비되고 말지요. 부족하나마 주인의 뜻을 헤아려 허락하신 영적 물적 재산을 지혜롭고 선하게 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서 잘 써 주시도록 스스로를 기꺼이 내어놓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1주 금요일-은총 도둑질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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