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1. 4. 06:36

2021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1538년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세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년 바오로 5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루가 15,1-10)

 

 “What man among you having a hundred sheep

and losing one of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장을 보러 가면 여러 종류의 고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크게는 빨간 고추와 파란 고추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솔직히 이 고추가 각기 다른 나무에서 달리는 줄 알았습니다. 도시에만 살았던 저였기에, 또 한 번도 고추를 키워보지 않았기에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중에야 밭에 심은 고추 모종이 자라 파란 고추가 열리고 점점 빨간색으로 익어가면, 그것을 따 말려서 고춧가루를 만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파란 고추와 빨간 고추가 다른 나무에서 자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 모두도 다른 나무에서 창조된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좋은 나무에서, 악인은 나쁜 나무에서 창조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종, 나이, 직업, 지역 등으로 계속 구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라는 나무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좋은 나무에서 창조되었기에,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구분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 데 방해를 놔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비록 나쁜 나무에서 나온 것처럼 옳지 않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원래가 좋은 나무였기에 회개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던 죄인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이 와 닿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모두가 좋은 나무에서 창조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누구는 하늘 나라의 계산법은 1이 99보다 더 크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마음 씀씀이의 문제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당황스러움을 걱정해서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잃었던 은전의 비유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길잃은 죄인을 포기하실까요? 그 역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을 되돌리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 회개가 주님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이 됩니다.
두려움은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U.G.크리슈나무르티).

신중해야 합니다.

언젠가 조그마한 동네에 일주일 동안 휴가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시내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산과 강가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 사람처럼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환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휴가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걷고 있는데, 제 옆으로 자전거 한 대가 서더니 길을 묻습니다.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저씨! 기차역이 어디예요?”자신 있게 “자전거 타고 이쪽으로 20분 정도만 가면 나올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큰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제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잘못 가르쳐 드렸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린 방향은 버스 터미널이었고, 기차역은 반대 방향으로 가야 했습니다.

너무 빨리 가버려서 알려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회개한 자가 바라는 단 한 가지: 임마누엘!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사가의 회개의 이해를 엿보게 해줍니다
본래 회개란 행복의 방향이 변하는 것입니다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행복인 줄 알았다가 이 욕구들과 반대되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회개입니다사랑의 실천은 내가 하느님을 나의 부모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형제와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자녀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오늘 복음도 기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의 행복이 하늘의 행복이 되게 하는 것이 루카 복음의 회개입니다나의 행위를 통해 하늘이 기뻐하는 것 때문에 나도 기쁘면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도 회개하였다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잃어버린 양 한 마리잃어버린 동전 하나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다시 자신을 당신 것으로 삼아주는 것입니다당신만 옆에 있어 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그러기 위해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을 생각합니다이러한 삶으로의 회귀가 바로 회개입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다 성장한 의붓딸 미스티가 한 깜짝 선물에 아빠 라이언이 눈물을 쏟는 동영상이 있습니다아버지에게 선물 봉투를 줍니다겉에는 편지가 쓰여 있습니다가족들은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합니다아버지는 울 것 같다면서도 읽습니다.

    “아빠는 제가 만난 사람 중에 누구보다도 가장 멋진 남자란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저를 키워주셨죠그리고 5학년 때는 사인을 위조하다 걸린 사고뭉치였죠처음으로 함께 록 콘서트에도 가고요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을 함께 해왔고 그게 바로 아빠인 셈이죠아빠 없는 제 삶은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이 편지가 뭘 말하려는지 궁금하실 거예요그러니까 얼른 이 못생긴 상자를 열어보세요.”

  

    이미 이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의붓아빠에게 딸이 여러 선물과 함께 넣어서 내민 것은 하나의 쪽지였습니다아빠는 그 쪽지를 보고 흐느낍니다그 쪽지는 딸 미스티가 수십 년간 자신을 길러준 라이언이 법적으로도 아빠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입양신청서였습니다아빠는 말은 안 했지만 흐느끼며 난 이날만 기다렸다!”라고 말했습니다얼마 후미스티는 그토록 바라던 아빠의 성을 자신의 이름에 갖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진정 회개한 사람입니다그렇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청한다면 아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그분께서 진정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이 임마누엘이 되어달라는 우리의 청원일 것입니다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고 그분은 우리가 그것만 바랄 때 모든 것을 내어주실 준비가 되어계십니다.

  

    회개하면 누구처럼 될까요당연히 하느님을 부모로 여기니 어린이처럼 될 것입니다어린이는 본능적으로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며 그것을 청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임도 압니다. 

 

    유튜브 터치터치란 채널에 마지막 순간에 네 살 딸이 부모님께 전해준 말이란 제목의 동영상이 있습니다생후 육 개월부터 급성 폐렴을 앓다가 네 살에 죽음의 위기를 겪는 여자아이와 부모의 절박한 대화 내용입니다아이는 말합니다.

    “나 살아있어요.”

    “물론이지.”

이 말을 부모님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저 괜찮은 거 맞죠?”

    “당연하지!” 

 

    저의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아이는 분명 건강해져서 집에 가고 싶기도 한데 죽음이 걱정되기도 합니다하지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자신이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할 것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아이는 죽기 직전임에도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하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합니다부모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아직 자신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밖에 없습니다그리고 그것이 부모에겐 유일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잠시 기도를 합니다무언가 새로운 말을 찾아낸 것 같습니다.

    “아빠 사랑해요엄마 사랑해요.”

    “엄마는 더 사랑해.”

    “아빠는 네 곁에 있을게.”

드디어 아이는 부모에게 자신이 가장 원하고 부모도 기뻐할 것을 청합니다.

    “엄마 제 옆에 계속 있어 줄 수 있어요?”

  

아이가 원하는 것 하나는 그저 부모가 자신의 옆에 있어 달라는 것뿐입니다이것이 내가 가장 원하고 부모가 가장 원하는 한 마디입니다.

아이는 다시 부모님을 걱정합니다.

    “아빠엄마울고 있어요?”

    “아니야이젠 안 울어.”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말합니다.

    “제가 괜찮아질 거라 믿어요.”

  

아이는 자신이 괜찮아지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습니다그리고 다시 숨을 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그리고 자신이 괜찮아지고 있음을 확신하며 숨이 찬데도 큰 소리로 말합니다.

    “저 괜찮아지고 있어요!”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아이는 죽기 직전임에도 하는 모든 말이 부모의 뜻에 맞는 말만 합니다부모에게 기쁨을 줍니다아이는 부모의 기쁨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말을 찾아내지 못합니다그래서 부모가 원하는 것이 자신 안에서 다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믿어야 이루어집니다그리고 아이는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건강을 회복하여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한 신앙인의 삶입니다내가 잃은 양 한 마리이며잃어버린 동전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그래서 무엇이 주님과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음을 아는 것하느님께서 함께 계셔달라고 청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가장 기쁘게 해 드리고 나를 위해서도 가장 좋은 것임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이것만 청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다 잘 될 것이란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것이 회개한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지금은 음원(音源)’으로 음악을 듣지만 예전에는 레코드판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표지에는 가수들의 얼굴이 있고판에 수록된 노래가 차례대로 적혀있었습니다가수들은 수록된 모든 노래를 애착을 가지고 부르지만 팬으로부터 사랑받는 노래는 그 중에 일부입니다많은 노래가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가수들은 자신이 불렀던 노래들을 사랑할 것입니다도공은 열과 성을 다해서 도자기를 만들지만 손님들이 사가는 것은 그 중에 일부입니다팔린 도자기도 사랑하지만팔리지 않고 가게에 남아 있는 도자기도 마찬가지로 사랑할 것입니다도자기에 도공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매일 강론을 쓰면서 생각합니다어떤 것은 아주 쉽게 쓰지만어떤 것은 무척 힘들게 쓰게 됩니다강론을 듣는 분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강론도 의미 있지만그렇게 울림이 없었던 강론도 제 삶의 한 부분이기에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가수가 자신이 부른 노래를 사랑하듯이도공이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아끼듯이제가 강론을 소중하게 생각하듯이 부모님은 자식들을 모두 사랑합니다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자기의 앞가림을 잘 하는 자식은 자랑스러워서 사랑합니다그림을 잘 그리고감수성이 뛰어난 자식은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그 마음을 사랑합니다마음이 여려서 늘 상처를 받는 자식은 안쓰러워서 사랑합니다열심히 하지만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식은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가려는 용기를 사랑합니다잘못된 선택으로 방황하는 자식은 예전에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사랑합니다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수도자와 성직자가 된 자식은 주어진 소임을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결혼한 자식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았다.’라고 하신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사랑하셨습니다차별과 편견이 없으셨습니다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듯이하느님 사랑의 숨결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차별과 편견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농사를 지으면서 도시를 만들면서 생겨났습니다사회를 조직하면서 계급이 생기면서 생겼습니다노예천민양민귀족왕이라는 신분이 생기면서 차별과 편견이 들어왔습니다자본주의가 우리 삶에 깊이 들어오면서 능력과 재산에 따른 차별과 편견이 생겼습니다피부성별민족국가를 기준으로 우리는 차별과 편견을 키워왔습니다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인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가난과 굶주림전쟁과 폭력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난민으로 떠돌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이야기를 하십니다예수님께서 꿈 꾸셨던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밤을 새워 찾는 목자처럼 차별과 편견이 없는 세상이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회당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렸습니다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묶인 이를 풀어주고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아픈 이는 치유해 줄 것입니다이것이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나의 멍에는 가볍고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를 보십시오들에 핀 꽃을 보십시오하느님께서는 새와 꽃을 사랑하셔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하느님을 닮은 여러분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라고, 나는 구제불능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회개는 가깝습니다!

 -양승국신부-

 

판공성사 예약이 슬슬 들어오는 것을 보니 벌써 성탄 판공성사 시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고백소 안에서 교우들 한명 한명씩 만나다보면 고백성사가 얼마나 은혜로운 성사인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됩니다. 켜켜이 쌓여있던 먼지를 훌훌 털고 나서는 기쁘고 환한 얼굴로 고백소를 나서는 교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특별한 분들을 만납니다. 고백성사 보신지 삼년, 오년이 지났는데도 특별한 죄가 없답니다. 놀랍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해서 조근 조근 캐 물으면 그제야 이실직고 떠듬떠듬 고백을 시작하십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스스로 홀로 설수 있다고,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한 회개는 요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나는 죄인이라고, 나는 구제불능이라고, 나는 하느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사람이라고 뉘우치는 사람들에게 회개는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든 세리와 죄인들이 그렇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오늘 자신들이 서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아온 지나온 세월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요 도움은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만이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이자 의로운 사람이며 구원이 보장된 사람이라고 여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든 것, 하느님께서도 자신들이 편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조차 필요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복음 15장 1절)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 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복음 15장 7절)

 


오늘은 다른 누구를 위한 날이 아니라 바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한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죄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감사하며 기뻐하며 다시 한 번 주님께로 돌아서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의 자비를 믿으십시오

 -반영억신부-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23,42). 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 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2). 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용서하시는 일에 소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도 용서를 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하면 안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해서 참 기쁨을 누려라.>

 -송영진신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5,1-3).”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구원받을 의인’이라고 자처하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무시하면서

예수님의 ‘구원 활동’을 비판했던 자들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구원받을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이웃 사랑을 거스르는 죄, 교만죄.)

앞의 5장을 보면, 그들의 비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이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함께 회개해야 할 동반자입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4-7).”

 

예수님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따라서 ‘잃은 양 한 마리’는 ‘모든 사람’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아흔아홉 마리’는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하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간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끝까지 애를 쓰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잃은 양’은 누구에게나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강론이나 설교를 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잃은 양’에 대해서 말할 때에

‘그’나 ‘그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자기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잃은 양’은 ‘그’나 ‘그들’이 아니라, ‘나’이고, ‘우리’입니다.>

 

<7절의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는 말도

‘하느님의 큰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처음부터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노력해서 의인이 되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예외적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는데, 성모 마리아께서는

자신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자처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또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회개의 삶’을 사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어떻든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큰 기쁨이신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입니다.

사실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은

‘잃은 양’이었다가 ‘되찾은 양’이 된 사람 자신입니다.

(그 기쁨은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난 기쁨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너희는 모두 회개해서 참 기쁨을 얻어라.” 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하느님의 기쁨이고, 동시에 나의 회개와

구원 때문에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기쁨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신다는 말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하느님께서 크게 슬퍼하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나는 지금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존재인가,

슬픔을 드리는 존재인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 전에 먼저 “나의 삶에 참 기쁨이 있는가, 없는가?”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세속 사람들은 일시적이고 속된 재미와 쾌락을 기쁨으로 착각할 때가 많은데,

신앙인의 참 기쁨은 그런 일시적이고 속된 재미와 쾌락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하고 영원한 평화와 안식과 행복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비유에서 큰아들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고,

작은아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이라고 무시했던 사람들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도 ‘함께 기뻐하자.’ 라는 초대이고,

또 ‘회개해서 참 기쁨을 누려라.’ 라는 권고입니다.

그런데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가 기다리기만 한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비유를 합해서 생각하면,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작은아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아들을 타이르고

설득하면서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무척 애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밖에 있는 큰아들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큰아들에게 갔고, 그를 타일렀습니다(루카 15,28).

작은아들에게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당신의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려고

직접 우리에게 오신 것과 같습니다.>

복음: 루카 15,1-10: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조욱현신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들이 투덜거린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시어 인간의 남루함을 입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크나큰 인내를 보인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양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얹어 놓았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을 남겨두고, 착한 목자는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돌아오면 그분은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우리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그 은전은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은전은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기에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이 새겨진 존재임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그분의 모습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값진 은전이다. 그러니 그 값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다.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부인은 등불을 밝혔다. 길 잃은 자들이 그 불빛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겠는가? 그때 사람들은 방랑과 타락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재산 중 백 분의 일이다. 그분에게는 산에 남겨둔 양 떼, 곧 대천사들과 권세들, 권력들, 주권들(콜로 1,16)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사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의 회개가 하늘의 천사들을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정직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회개와 돌아옴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 10)

-한상우신부-


양심과
회심 사이에
우리가 있다.

회개는 마음에
눈을 다시
뜨는 기쁨이다.

병든 마음이
다시
건강해지는
변화이다.

참된 기쁨을
알게되는
우리의
회개이다.

마음의 질서를
바로잡는
회개이다.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것이다.

회개가
참된
신앙이다.

하늘 나라는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늘은
선택과
결정으로
더욱 아름답다.

회개하는
죄인이
자유로운
사람이다.

위선과 거짓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연결시켜주는
회개이다.

하느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은
회개이다.

하느님께서는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잃어버린 기쁨
잃어버린
삶의 이유를
되찾아주는
회개의 기쁨이
있다.

회개를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우리의 참된
회개이다.

누구도
가로챌 수 없는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회개가
참기쁨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엿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듭니다. 그들은 유다인들 사이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소외되는 부류에 속했지요. 특히 종교 기득권자들에게는 더욱 상종 못할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예수님께 모여들고 있다니,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과 하늘의 아버지 마음이 어떠셨을지 관상해 봅니다. 얼마나 기쁘고 신명이 나셨을지요! 잃어버렸던 이들, 율법의 문자에 의해 자의로 또 타의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새로이 움트는 희망을 향해 나아오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0)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카 15,8)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접촉하는 예수님을 보고 불평하자, 예수님께서 양 한 마리를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 은전 한 닢을 잃었다가 찾은 부인의 비유를 들어, 잃었던 이들을 다시 찾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도록 이끄십니다.

찾을 때까지 뒤쫓는 이,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는 이가 바로 아버지시지요. 원죄의 결과와 과도한 율법의 무게 때문에 당신 곁을 떠났던 이들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그리워하시면서 절박하게 찾고 계시는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타인의 죄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에 주목하길 바라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는 이들를 상당히 강한 어조로 힐책합니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로마 14,10)
아버지는 율법의 문자를 지키느냐 어기느냐 보다, 당신의 자녀들이 서로 존중하며 어우러져 사느냐에 관심을 두십니다. 설령 누군가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사랑으로 품어 다시 제 방향을 찾도록 돕길 바라시지요. 단죄와 심판으로 서로 무시하고 적대하는 건 아버지의 계획 안에는 끼어들 수 없는 모습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10)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기쁨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십니다. 내내 소외되었었지만 이제 희망을 찾은 세리와 죄인들은 물론, 이를 바라보는 종교 기득권자들에게도 기뻐하라고 손을 내미시는 겁니다.

사실 찾는 이와 발견되는 이가 만나는 이 복되고 흥겨운 환대와 용서의 자리에서 심판의 칼날을 쥐고 완고하게 버티는 심판자들이 오히려 불행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버지도, 죄인들도, 그리고 하늘의 천사들도 기뻐하는 이 자리에서 마음껏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려면 심판의 권한은 아버지께 맡기고 그저 사랑하면 족합니다. 세상 구원은 우리 심판에 달려 있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면 주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귀한 존재일 수도 있고, 또 그런 누군가를 바라보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쩌면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며 다가오는 누군가를 어떻게 대할까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변화무쌍한 인생길에서 우리의 처지는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어느 상황이 되든, 단죄와 심판, 자포자기와 냉소가 아닌 용서와 화해, 환대와 사랑을 선택하시길 기원합니다. 마침 위령성월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으로 전대사의 은총이 곱배기로 마련된 시기지요. 아버지의 자비에 기대어 그 자비를 입고, 또 그 자비를 닮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31주 목요일-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