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1. 11. 07:35

2021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마르티노 주교는 316년 무렵 헝가리 판노니아의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공부한 그는 군인으로 근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는데, 그날 밤 꿈속에 그 외투 차림의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다. 곧바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그는 나중에 사제가 되었으며, 370년 무렵에는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어 착한 목자의 모범을 보이며 복음 전파에 전념하였다. 프랑스 교회의 초석을 놓은 마르티노 주교는 프랑스 교회의 수호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다.

 

☆☆☆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가 17,20-25)

 

The coming of the Kingdom of God 
cannot be observed,
and no one will announce, 

 

 

 

‘Look, here it is,’ or, ‘There it is.’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among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는 세상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행동 과학자 로건 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인연이란 ‘만드는 것’이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좋은 인연이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인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발견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무엇보다 나의 노력으로 좋은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결국 내 안에 좋은 인연이 이미 있습니다.

친한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인데 신부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초등학교 때에도 첫영성체를 같이 했던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같이 놀지도 않았고, 대화도 함께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좋은 인연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친구와는 지금도 자주 만나고, 전화도 자주 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소중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든 것입니다.

종종 좋은 인연이 찾아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남이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모든 결정 사항이 좋은 인연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안에 이미 좋은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에 관한 관심이 최대 관심사였고 거의 민족적인 관심사였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호칭 밑에 다윗의 왕권이 꼭 재건되리라는 예언이 성경에 나와 있고, 또 그 약속을 그들이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왕국인 언제 재건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습니다. 더욱이 외세의 침략을 받는 상태였기에 더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혜성처럼 나타나 외세를 무력으로 물리치고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민족적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주님께서는 세속적으로 우렁찬 팡파르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온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는 동안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다가옵니다.

좋은 인연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우리 안에 이미 있었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들기 위한 나의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우리 각자의 노력도 정말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맞춰서 사는 삶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화를 찾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 배려와 생각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 거야(영화 ‘곰돌이 푸’ 중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의 균형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유다인을 죽음으로 이끌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던 유다인과 전쟁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려운 상황에 대한 절망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더 큰 절망으로 이끌었던 것은 막연한 낙관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수용소에서 곧 풀려날 것이라고 턱없이 낙관한 사람들은 수용소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낙담도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낙담은 사람을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반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차분히 훗날을 대비했던 수용자들은 끝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자신의 균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셔야만 왕이 되시는 이유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찾아다닐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나라입니다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명령이고 그 명령에 따르면 그 나라가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눈에 보이게 명령하고 지시할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그러나 눈에 보이면 그 지배는 불완전합니다.

  

    아이는 보통 부모님의 나라입니다부모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부모가 아이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 때는 아이는 부모를 따르지 않습니다그렇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에 부담스러우면 자기를 지배할 누군가를 만들어냅니다.

  

   『벼랑 끝상담에 이와 같은 예가 나옵니다초등학교 3학년 민서는 이혼한 엄마에게서 키워졌는데 엄마는 술과 담배에 찌든 밤을 지내는 생활을 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결국민서는 아동보호센터에 넘겨졌고 그곳에서는 고등학생 언니들의 괴롭힘을 당했습니다경찰 조사에 의해 다시 엄마에게 키워졌지만엄마는 여전히 민서를 보살펴 줄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민서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아동보호센터에서 혼나지 않기 위해 시작된 거짓말이 엄마에게도 하게 된 것입니다이때 민서를 도와준 것은 한 친구였습니다진짜 사람은 아니고 환시로 자신만 보이는 아이입니다그 아이는 친한 친구인 척하면서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였습니다처음엔 귀로만 들리던 음성이었는데 눈으로도 그 아이를 보게 되었고 이젠 그 아이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최고야 원장은 민서의 역할을 하고 민서는 자기에게 거짓말을 종용하는 환시의 아이 역할을 하며 역할놀이를 하였습니다최 원장은 민서의 말에 따라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는 연극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난 민서는 자신이 보는 환시의 아이가 착한 아이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제삼자 측면에서 보니 그 아이는 자신을 망치는 아이였습니다그래서 그 아이의 말을 무시하게 되었고 점차 환시도 사라지고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외부에서 눈에 보이게 나에게 명령하는 대상은 끊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그 명령이 내 신의 판단을 거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2001)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환시들을 보며 결국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존은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친구를 만들어내고 인정받기 위해 비밀 요원을 만들어내 그들에게 조종당합니다하지만 결국 그들이 자신의 허상임을 알고 무시하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갑니다이처럼 외부 조종자는 내부 조종자보다 힘이 약합니다.

  

    가장 강력하게 나를 지배하는 내부 조종자는 입니다내가 라고 믿는 대상이 실제로는 내가 아닐 수 있습니다그렇더라도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면 그것은 완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었고 나중에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정말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내가 라고 믿는 대상입니다그 대상이 내 안에 들어오는 방법은 감사를 받는 것입니다내가 감사를 하면 그 대상은 점점 가 되어갑니다부모에게 감사할 때 부모가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그런데 감사를 받으려면 필연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탈출기에서 잠깐 살펴보자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산 위에 서 있고 여호수아가 아말렉족속과 전투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그전에 만나와 메추라기그리고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나는 진리로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고 물은 은총으로서 사랑입니다이 사랑과 진리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 안에서 여호수아곧 예수께서 자아를 몰아내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이것이 가나안 정복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미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나의 가 되어있는 자아를 밀어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해 준 나보다 훨씬 고마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은 나에게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는 부모처럼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리아 고레띠 성녀의 예를 다시 보겠습니다. 10살을 갓 넘은 성녀는 20살 난 청년인 알렉산더에게 겁탈당하려는 것에 저항하다가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사망하였습니다마리아는 무려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아름다운 부인이 서 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몇 년이 지난 후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였습니다

    형을 다 마치고 나와서는 먼저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의 정원사로 나머지 생에 대해 속죄하며 살았습니다그는 죽기 얼마 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에게 청합니다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내가 찌른 사람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의 양식이 되어 줄 때 그 사람은 내 안에서 주인이 됩니다그 사람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알렉산더는 마리아 고레띠의 나라입니다그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그렇지 않고서는 가슴까지 지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예수님께서 피를 흘려 나를 당신의 나라로 만드셨듯이우리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려 이웃을 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따라서 그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일 수 없습니다그 주인이 마음 안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마음 안에 사는 방법은 살과 피로 먹히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병원에 입원한 친구의 부탁으로 짐을 가져다주었습니다친구의 짐을 보면서 친구의 성격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짐이 모두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있었고여행에서 꼭 필요한 물건이 필요한 만큼 있었습니다친구의 글과 행동에서 섬세함을 알고는 있었지만여행가방을 보면서도 저와는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부부들의 주말 체험인 엠이주말을 시작하면 부부의 성격유형을 파악합니다그렇게 파악하면 서로 다른 부분을 이해할 수 있고상대방의 장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성격유형은 4가지로 분류합니다조직가형협조자형촉매형사고형이 있습니다저는 협조자형입니다일을 조직하거나이끌어 가는 면은 부족합니다분위기를 바꿔주는 면도 부족합니다일의 원인을 파악하는 면도 부족합니다하지만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잘 하는 편입니다.

 

오늘 독서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지혜와 지식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다른 면이 있습니다지식은 내비게이션과 같습니다원하는 주소를 입력하면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줍니다지식은 검색창과 같습니다질문을 입력하면 가장 최근의 정보를 알려줍니다우리는 학교에서 지식을 배웁니다그래야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지식은 성공명예권력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그러나 지식은 교만과 만나면 남을 업신여기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분노와 만나면 공든 탑을 무너트리기도 합니다욕망과 만나면 이웃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 되기도 합니다예전에 어른들은 난 사람이 되기 전에든 사람이 되기 전에 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많이 알아서성과를 내는 것도 좋지만 많이 아는 것을 이웃들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혜는 무엇과 같을까요지식이 컴퓨터의 모니터와 같다면 지혜는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같습니다모니터는 하드웨어가 없으면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내비게이션의 원리와 같습니다인공위성에서 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면 내비게이션은 우리에게 빠른 길을 알려줄 수 없습니다율법과 계명이 지식과 같다면 사랑과 나눔은 지혜와 같습니다종교는 사람들에게 지식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알려주어야 합니다종교는 채우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비우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불교는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합니다그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합니다고인이 되신 법정 스님도 무소유의 기쁨을 이야기하였습니다옳고 그름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옳고 그름은 비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는지 묻습니다예수님께서는 지식의 눈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알 수 없다고 하십니다욕망의 눈으로는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교만의 눈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외면 한다고 합니다하느님 나라는 채우려는 사람들에게는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나눔의 눈으로 보면 지금 여기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희망의 눈으로 보면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사랑의 눈으로 보면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보기 어렵습니다해야 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더 밝음을 알 수 있다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 내지 못한다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주님이 말씀하신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사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십니다!

 -양승국신부-

 

여러분들 혹시 엄청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곳이며, 언제 올 것인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 살짝 두렵기도 하고, 대체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구심도 들고, 아무튼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올 것인가 물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나 의외였고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학수고대했습니다. 언젠가 강력한 왕권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시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실텐데, 그 나라는 더 이상 유배나 함락이 없는 초강대국이 될 것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이지 놀랍게도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건네신 말씀이기에 명백한 신앙의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리도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꿈꾸어왔던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대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마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신의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둘러서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 군중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삶 속에 실천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마음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해서 지극정성으로 성체를 영한다면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입국한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내가 몸담고 있는 바로 이곳, 나의 삶의 자리여야 마땅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니고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 그분의 사랑과 봉사, 섬김과 희생의 정신이 흘러넘치는 곳은 모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대체 어디일까?’ 하는 마음에 고개를 여기 저기 돌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 수도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가정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머나먼 다른 하늘 아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빛바랜 사진첩 같은 우리들 인생사 안에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네 인생, 결핍과 죄투성이로 실패한 듯 보이는 우리들 삶 안에 굳건히 자리 잡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왔지만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 중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깨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작은 두 손이지만 하느님 나라 건설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 

 -반영억신부-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 는 새 계명 안에 성장 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의 재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0-21)”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오는지를 먼저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언제’ 오는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은,

‘언제’ 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뜻은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마음속에 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때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가는 중이고, 종말이 오면 완성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 라는 말을 ‘종말’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의 뜻은,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서 진행 중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완성되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종말의 심판에 대비하는 일은, 즉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세속의 왕국이 세워지는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나라와 세속의 왕국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앞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라는 말씀의

보충 설명으로, “여기가 하느님 나라다.”, 또는 “저기가 하느님 나라다.” 라고

말할 수 없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다 하느님 나라에 속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켜서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라는 말씀이 모순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속하다.’ 라는 말을

존재 방식, 또는 운영 방식으로 생각하면 모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나라입니다.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하느님 나라는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지배 계급도 없고, 권력층도 없고, 기득권층도 없는 나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와

성인 성녀들이 가 있는 천국은 같은 곳일까? 다른 곳일까?

다르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최후의 심판 때에는 지옥 자체도 심판의 대상이 되고,

심판이 끝난 다음에는 영원히 소멸됩니다(묵시 20,14).

따라서 지옥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만 존재하는 임시 장소입니다.

연옥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영혼들이 보속을 하면서 천국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연옥도 임시 장소입니다.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곧바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천국과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알 수 없어도, 어떻든 천국도 임시 장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도 다른 점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사실상 같은 곳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2-25).”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관한 말씀으로 보이지만,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겪게 될 고난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고난과 박해를 겪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을 갈망할 정도로 심한 고난을 겪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할 것이다.”는 “그 날이 언제인지는 말할 수 없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10,22).

이 약속을 근거로 해서 해석하면,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보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마라.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테니.”로 해석됩니다.>

 

23절의 사람들이 저기에 계신다, 여기에 계신다, 하더라도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말라는 말씀은, ‘가짜 재림 예수’들에게 속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24절의 ‘번개’에 관한 말씀은, 번개가 치면 누구나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누구나 곧바로 그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요즘에도 자주 나타나는 ‘자칭 재림 예수’들은 모두 무조건 ‘가짜’입니다.)

25절의 고난과 배척에 관한 말씀은, 재림 때에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떨치며 오시겠지만 지상에서 먼저 고난과 배척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겠지만

재림 때에는 하느님의 영광을 떨치며 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지상에서는 고난과 배척을 받겠지만,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조욱현신부-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는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임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변화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한상우신부-


흐트러진
일상을 다시
바로잡는
마음의 시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마음이 있다.

우리들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그 가운데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우리들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

진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본질이다.

마음과
마음으로
느끼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이다.

오늘 우리들
마음은 어떠한가.

마음의 회복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관계이다.

인간관계의
문제도 결국
마음의
문제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들 마음을
온통 바꾸어
놓는다.

복음은
마음 중심으로
돌아가는
참된 행복이다.

마음이 깊으면
사랑도 깊어진다.

길을 되찾는 것도
마음 안에서
시작된다.

사랑이 있던
자리에
마음도 자라난다.

사랑과 마음은
하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제1독서의 대목은 지혜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 차례 반복해 읽다 보면 지혜의 매력에 푹 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영혼이 즐겁고 행복해집니다. 거룩, 청절, 자유, 평온, 섬세, 통찰, 광채... 지혜를 가리키려 골라낸 단어들이 얼마나 영롱하고 찬란한지, 가히 '지혜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듯하지요.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지혜 7,26)
우리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지혜이십니다. 구약에서 성경 저자들이 의인화한 지혜가 바로 육신을 취해 세상에 내려 오신 예수님이시지요.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빛이신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광채이시고, 언제나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일하시며, 선하신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지혜 7,27-28)
지혜를 사랑하고 갈망하며, 지혜를 만나 마음에 품은 이는 하느님의 벗이 되어 그분과 마음을 나누며, 그분의 목소리가 됩니다.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의 앞길이 꽃길만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지혜 문학 저자들은 내내 지혜를 얻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무사, 무탈, 쾌락, 풍요의 세상 가치와 지혜는 방향을 달리하니까요.

그래서 지혜서 저자는 지혜를 소유하는 일의 고귀함을 전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신다고 다소 도전적으로 말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신다고 두루뭉실하게 넘어가지 않고, 사랑받는 조건을 아주 명백하고 정확하게 한정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

복음은 바리사이들의 질문에서 촉발된 하느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바리사이들이 "언제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동안 보여 준 그들의 태도로 보아 질문의 의도가 그리 단순하고 순수하게 들리지는 않지요.

하느님 나라를 물리적인 실체로 여긴다면 이미 세상 한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놓치기 쉽습니다. 육화하신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고, 비록 거창하거나 요란하지 않아도 세상을 진리와 선으로 지탱하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루카 17,25)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사람의 아들은 세상에서 고난과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과 교회가 고난받고 배척받는 이, 소외되고 죽어가는 이에게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겸허히 옷깃을 여미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의 질서와 발걸음을 함께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는 힘이 곧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와 함께 사는 이를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지혜와 우리의 관계도 다르지 않지요. 지혜를 찾아 얻고 지혜에 머무르는 이는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와 하나가 된 바로 그 지혜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입니다. 그 열매로 세상이, 교회가 양분을 얻어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전히 미완성의 불완전한 세상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청하며, 그 지혜를 꼭 붙잡고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이렇게 지혜를 찾아 매일매일 말씀의 샘물가로 모여드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어디에 계시지 않고 어디에나 계시는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와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선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을 찾아 헤매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는데 어디를 고집하거나 집착치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가 모셔져있고 더 나아가 현시가 되어 있는 곳에서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되고 성지 같은 곳을 가는 것도 하느님 만남에 도움이 되지요.

그러나 사람마다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곳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만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남에 있어서 그 사람만의 고유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저의 경우 보통은 같은 성당이라도 창을 통해 하늘이나 나무를 볼 수 있는
창가자리가 그냥 어둠침침한 성당 자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아무 것도 안 보이고 감실의 등만 보이는 어두컴컴한
경당의 구석진 자리가 하느님을 더 잘 만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와 관련하여
신적인 보편성과 인간의 독특성을 다 인정해야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진정 보편적이십니다.
천주교에만 계시지 않고 성당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힌두교 신전에도 계시고 법당과 이슬람 성전에도 계십니다.
우리나라 남한에도 계시고 북한에도 계시고 중국에도 계십니다.

성당에도 계시고 시장이나 술집에도 계시고,
조용한 곳에도 계시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며,
심지어 무신론자들의 집회나 살인 현장에도 계십니다.

시장에도 계시지만 돈벌이에 눈이 멀면 하느님을 못보고,
시끄러운 곳에도 계시지만 소음에 신경이 곤두 선 사람은 못보고,
무신론자들의 집회와 살인 현장에도 계시지만 그들이 못 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한 경우 특별한 곳을 찾아갈 필요도 있지만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만 특별한 곳을 찾아야지
일상적으로는 내가 지금 있는 그곳, 곧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만나야 하는데 무엇보다 우리들 가운데서 만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선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는 만나지 못하고 사람을 피해 골방이나 성당에서,
또는 사람들을 피해 자연 가운데서나 하느님을 만나려 해서는 안 되고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나냐 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 같이 있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영적 지도자와의 만남에서만 하느님을 만난다면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사람들 가운데서 만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가운데 계시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신다는 얘기이군요.
그러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람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사람과 사랑 밖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들지도 말고 헤매지도 말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