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11. 20. 09:30

2021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27-40)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임금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닫고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간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흉악 범죄자들이 종종 매스컴의 일면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범죄자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쓴 글이나 그들이 하는 말에는 거의 ‘나’라는 단어가 주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라는 단어를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나’만을 바라보고,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 함께 살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 규칙을 전혀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생각하고 바라볼 때 많은 점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으로 힘들어하는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만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고 함께하면서 더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 점을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되는 길도 열립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자식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곱 형제 모두가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했지만, 자식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럴 때 부활했을 때, 이 일곱 형제 중에서 누가 형수의 남편이 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부부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이런 곤란한 상황을 하느님께서는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습니다. 시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당시 과부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동생이 보살펴야 한다는 규정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사두가이파들은 편협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만 맞다는 생각을 가지면 닫혀 있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또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까지 성장한다(쟈닌 갱동).

나이 듦

나이 듦을 확실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멀리 건널목 신호등이 바뀐 것을 보고서도 힘들어 뛸 수 없을 때, 약병에 적혀 있는 작은 글씨의 처방전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주름이 낯설어 보일 때, 무엇보다 “신부님도 이제 늙었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렇다고 나이 듦이 싫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 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이 든 내가 젊었을 때의 나보다 분명히 성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자그마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화도 잘 내지 않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기다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지난날보다 분명히 성숙해진 ‘나’이기에 지금이 좋습니다. 과격한 운동을 할 수 없어도 걸으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암기력이 예전만큼 좋지는 않아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쳤던 젊은 날이라면, 이제는 사랑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늘 좋은 순간만을 선물해주신 주님의 사랑에 오늘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성장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들의 부활 논쟁입니다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들입니다이들도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그러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다음 세상이 있다면 지금 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들이 부활을 믿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이 집착하는 것을 잃기 싫어서입니다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입니다부활을 믿는 사람의 삶과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은 그래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려는 사두가이들을 피터 팬 증후군을 앓는 사람이라 여기고 싶습니다피터 팬은 어른이 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의 대명사입니다

    피터 팬은 자신이 성장하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부모의 대화를 듣고 집을 도망쳐 어린이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네버랜드에 사는 아이입니다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그곳에 들어오기를 초대합니다왜냐하면혼자는 재미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배리도 160cm에서 성장이 멈추었으며 결혼을 해서도 부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고 옆집의 어린이들을 좋아했습니다. 어린이들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죽거나 물속에서혹은 기차에 뛰어들어 죽는 비극을 맞았습니다그 어린이들이 그렇게 비극을 맞은 것이 배리의 탓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그가 더 집착하고 사랑한 아이들부터 그렇게 죽었습니다자라야 하는데 멈추고 싶은 마음은 현세주의자라기보다는 실제로 현실도피자입니다.

  

    제임스 배리가 그렇게 어린이들에 집착하였던 이유는 그의 삶이 어린 시절에 머물고 싶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의 어머니는 배리의 형을 너무나 사랑하였습니다그런데 스케이트 사고로 형이 사망합니다어쩌면 배리는 형이 죽은 탓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다고 여겼던 것 같고 어머니도 매일 눈물로 큰아들만 찾았습니다.

  

    어느 날 배리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데이비드 너냐?” 하고 물었습니다배리가 배리에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다시 등을 돌리고 울기 시작했습니다순간 배리는 강한 분노와 좌절을 느꼈고 그렇게 그의 성장은 멈추고 말았던 것입니다배리는 나는 형이 죽은 나이 13살이 되면서부터 일부러 성장을 멈추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노와 좌절은 마치 꾸어 준 돈을 받지 못해 그 생각만 하게 된 수전노처럼 어머니의 관심에 대한 집착만 남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또 다른 데이비드가 되기 위해서만 살게 된 것입니다배리는 형의 흉내를 내며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진짜 배리의 모습은 끝내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아이들도 사랑을 갈구해주기를 바랐습니다그렇게 배리의 집착에 시달리며 자란 아이들은 대부분 배리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태아의 부활은 무엇일까요태어남입니다태아는 어머니 태중에서 양식을 먹고 보호를 받습니다내가 양식을 먹는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말이고 성장한다는 말은 언젠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새로 태어날 일이 없으면 내 손으로 양식을 벌어먹어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부활은 무엇일까요어른이 되는 것입니다역시 어린이들도 양식을 먹습니다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부모가 양식을 준다는 말은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그렇게 어른으로 새로 태어나야 현실주의자입니다그렇지 않고 부모의 양식을 먹으면서도 어린이로 남으려고 하는 현세주의자들은 현실도피자입니다.

 

    어른이 되면 양식이 필요 없을까요음식을 먹지 않고 40일을 버텨도 사랑을 먹지 않으면 4일만 지나도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이 말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양식을 먹는 태아와 같은 존재입니다태아는 어머니를 볼 수 없습니다다만 기도를 통해 사랑의 양식을 먹으며 그것이 없으면 살 힘이 없음은 압니다

    부활을 믿고 싶으면 이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그러면 자연적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부활할 것임을 직감합니다여러 번 해왔기 때문입니다사랑은 피조물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창조자가 주는 양식입니다그러니 그런 양식을 먹으며 성장하면서 이 세상에만 머물려고 하는 사두가이들은 현세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현실도피자입니다.

 

    부모가 주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그것은 곧 죽음과 같습니다.

    영화 암살’(2015)에서 이정재는 몸에 총알이 7개씩이나 박히고 손가락이 잘리는 등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하지만 일본 헌병대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일본에 협력하기로 합니다.

  

    그는 김구 선생 밑으로 들어가 정보를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일본에 팔아넘겼습니다김구 선생이 점점 의심하자 그는 자신의 동료들도 죽입니다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런 밀정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렇게 수많은 독립투사가 희생됩니다.

  

    하지만 독립은 오고야 말았습니다그는 반민특위 법정에 세워졌고 증인들은 죽어갔습니다독립은 했지만일본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던 것입니다그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습니다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죽이고자 했고 죽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나타났습니다작은 골목길에서 이런 마지막 대화가 나옵니다.

    “안오균?...!”

    “왜 동지를 팔았나?”

    “몰랐으니까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16년 전인가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지금 수행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고 안 믿고도 마찬가지입니다이것은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 따라 이 세상에서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고 밀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부활이 없다고 믿어야만 이 세상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하지만 부활이 없는 인생은 무의미하다고 믿는 이들은 독립투사처럼 삽니다문제는 부활이 있고 난 뒤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먹어야만 산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 사람들입니다창조자로부터 양식을 먹는다면 성장하여 부활하란 뜻입니다이것을 거부하면 현세주의자로 살다가 태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심판을 받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성장하지도 못합니다부활은 성장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삼성 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천주교 사제에게 24가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그 질문은 재물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질문은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질문은 권력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질문은 죽음종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고 차동엽 신부님은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에서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얻었지만원하는 것을 가졌지만 죽음 앞에서 성공권력명예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이병철 회장의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은 후에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우리는 사필귀정인과응보회자정리라는 말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꽃이 피면 지기 마련입니다모든 일의 결과에는 상응하는 원인이 있습니다만남은 헤어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질문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비슷합니다마치 땅 위를 기어 다니던 애벌레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같은 것이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물론 생명의 연속성에서는 같은 면이 있지만그 기능과 삶의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부활이후의 삶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지금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지금 우리들의 상식과 기준으로 부활이후의 삶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그러나 지금 우리들의 삶이 또한 부활이후의 삶에도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그것은 일어서다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잘못된 생각을 버리고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이어령 교수의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그렇습니다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태양은 혼자의 힘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비나 구름 그리고 어둠과 함께 있을 때 빛은 비로소 빛이 된다.

사막의 모래알을 비출 때 태양은 저주지만

풀잎 이슬 위로 쏟아지면 축복이다

태양이 이슬에 젖는 순간마다 태양빛은 새로워진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밤을 주신 것이 아니라

밤을 통해서 새벽의 빛을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홍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홍수로 인해 아름다운 무지개를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하여 아름다워지는 생명을 주신 것이다.

태양은 흑점의 어둠이 있어 빛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양승국신부-

 

즐겨 찾는 단골 수로 낚시 포인트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유히 수면 위를 날아다니던 백로 한 마리가 수명을 다했는지 물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참 거시기 했습니다.

  

숨결이 끊어진 생명체를 보셨습니까? 목숨을 다한 동물을 보셨습니까? 뻣뻣합니다. 끔찍합니다. 참혹합니다. 악취가 새어 나옵니다. 거기에 더 이상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사랑도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가능성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아침을 맞이했다는 것은 새 출발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20장 38절)

  

산 이들을 위한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이 아침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새 생명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노라. 어제를 잊고 새롭게 살아가거라. 죄로 얼룩진 과거는 내게 모두 맡기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거라.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그 어떤 모습이든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하단다. 살아있는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 기쁨이고 내 희망이며 내 행복이란다.”

  

숨 쉬고 있다고, 목숨 붙어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살아 있기 위해서는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죽어야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죽어야 가능합니다. 알량한 내 자존심에 죽고, 평생 따라다니던 죄책감에 죽고, 어두웠던 지난 방황의 날들에 죽고, 오랜 상처에 죽고...

  

때로 의구심이 들 때도 많습니다. “오늘 내 삶이 이토록 구차스러운데, 오늘 내 인생길이 이토록 가시밭길투성이인데, 이런 내 삶이 대체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노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지속적 반성과 성찰입니다. 오늘 나는 참으로 살아 있는가? 열심히 숨 쉬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으며, 분명히 살아 있지만, 이미 내 안에서 어떤 것들이 죽어버린 것은 아닌지? 육체는 버젓이 살아 있지만, 영혼이나 정신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그래서 더욱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들의 육체는 점점 노쇠해지고 소멸되겠지만, 우리들의 영혼과 정신은 더욱 견고해지고 강건해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들이 아무리 열악하고 비호의적이라 할지라도, 또 일어서고 또 넘어서겠노라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존재는 몸도 살아 있지만 정신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육체도 살아 있지만 영혼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결국 주님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질 하루하루가 시련과 상처투성이뿐일지라도, 기꺼이 견뎌내고 이겨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광스런 부활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또 다시 힘을 내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앞에 진정 살아 있는 자로 굳건히 서 있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조차도 하느님 앞에 있다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오직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이 목적을 위해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와 예수님의 신적 지혜가 대조를 이룹니다.

그것은 영적 무지로 인한 속박을, 신적 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속박과 자유가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복음에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두가이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마태 22,39-40).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물질만을 유일한 실체로 여긴 까닭에, 내세나 부활과 영적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위와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곧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을 예로 들면서,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원래대로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의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보아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영적 존재는 “마치 천사와 같아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고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의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주었다.”

(루카 20,37)

이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비록 죽어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그러니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서 인간을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것을 입어야 합니다.”

(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 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다.”

(루카 20,38)

 

주님!

죽음이 단절과 파괴가 아니라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게 하소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탄생이 되게 하소서.

생명의 끝이 아니라 씨앗이 죽어 열매를 맺듯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단지 되살아 난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루카 20,27-40: 천국에서는 장가드는 일이 없다

 -조욱현신부-

 

“사두가이”란 보상을 바라고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의로운 자”라는 뜻으로 불린 명칭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보상심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사두가이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한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33절).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2,29-30) 하셨다.

 

어째서 그럴까? 그들은 두 번 다시 죽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세상의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는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36절)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게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서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하여 있으므로 장차 부활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카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임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사랑의 일치 속에 사는 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이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항상 살아 있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루카 20, 38)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정체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하느님이
결코 아니시다.

산 이들의
하느님
사랑을
오늘 만나는
것이다.

끝이 없으신
하느님
사랑이시다.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오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늘의 사랑이
있기에 오늘을
살 수 있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사랑해야할
오늘이다.

구원을
이루시는
오늘의
사랑이시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체험은
시작된다.

하느님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이시다.

살아있는
숨결로
하느님을
뜨겁게
찬미한다.

오늘의 언어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린다.

생명의 길 위에
산 이들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산 이들의
하느님을 통해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할
순간은 지금 바로
이순간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관계는 없다.

오늘의 관계를
살리시는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루카 20,33)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두가이 사람들의 얼토당토 않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기에 이스라엘의 결혼 관습이 부활 이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따지듯 묻습니다. 부활 신앙의 모순을 주장하고 싶은 듯 보이지요.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
이 말씀은 우리의 부활 신앙을 선명히 담고 있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은 이 세상의 육적 질서를 뛰어 넘기에 혼인과 자손 번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정욕과 생로병사는 이 지상에서 육체를 껴입고 있을 때의 일이니까요. 믿음으로써 죽음을 지나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간 이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점점 더 닮아가서, 순수하고 담백하며 정결하고 조건 없이 헌신하는 사랑이 되어갑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우리가 하느님을 오해하게 되는 건 많은 경우 그분을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저 멀리 가상 세계에 따로 떼어 놓고 그곳에서 영들이나 죽은 이들만 상대하신다고 여기는 거지요. 하지만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으며 이제와 같이 영원에서도, 땅에서와 같이 하늘에서도 그분 현존 안을 거니는 신앙인에게 생과 사는 연장선 안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이는 살아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비록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라도 그분에게서 존재를 받아 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는 모든 이가 그분 눈 앞에 생생히 살아 있고, 인류 최대의 난제인 죽음도 그분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습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에 치욕을 안겼던 한 악인의 죽음을 보여 줍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1마카 6,12-13)
잔혹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정신, 관습을 파괴하던 안티오코스는 목숨을 걸고 항쟁하는 유다인들에게 연이어 패배합니다. 결국 그 충격으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지요. 그는 죽음 앞에서 자기 만행을 떠올리며 지금 겪는 고난의 이유를 찾아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짓밟음으로써 하느님을 대적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민족들은 자기네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자기네가 쳐 놓은 그물에 제 발이 걸리네. 가난한 이는 영원히 잊히지 않고,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화답송)
세상 권력과 재물, 명성과 자기 영광을 좇던 이에게는 생전 자기가 추구하던 욕망과 정욕, 탐욕이 덫이 되어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듯 달려온 삶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달리게 되겠지요. 살아 계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업신여겨 생명이신 분께 죽음을 선고했으니, 어쩌면 스스로가 택한 결말입니다.

그들에게 억눌린 가난하고 가련한 이들에게는 "영원"이 주어집니다.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께 영원히 소중하니까요. 지상의 가난과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을 바라며 소박하고 조촐히 자신을 내어놓은 그들은 바로 그 희망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더 이상 폭력도 착취도 눈물도 죽음도 없는 곳에서 하느님 앞에 영원히 생생히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상의 삶을 집착도 회피도 아닌 충실한 수용으로 껴안고, 눈을 들어 영원을 희망하며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믿고 희망하며 생명을 충만히 이어나갑시다.

"저는 하느님 곁에 있어 행복하옵니다. 주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으리이다."(영성체송)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 아멘. 

 나도 사두가이는 아닌지!

 -김찬선신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오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고약한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서입니다.

 

이런 사두가이들을 보면서 저도 질문을 던집니다.

이들은 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할까?

부활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며 제게 부활은 희망이며 믿음의 대상임을

다시금 확인을 하게 됩니다.

 

우선 제게는 부활이 없으면 안 되고

부활이 없고 하느님도 없다면 저는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일찍이 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이 세상, 죄와 악이 판치는 이 세상을

제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러니 하느님이 안 계시고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면

고통뿐인 이 세상을 빨리 끝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저이기에 요즘도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동변상련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삶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면 저 세상 삶 곧 부활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이 세상 삶도 행복하고 살만 하며,

저 세상 삶도 살만 하다고 믿고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내 인생을 사랑할 수도 없고,

하느님이 없으면 저 세상을 희망할 수도 없고,

하느님이 없으면 부활 믿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기에

나와 내 인생을 사랑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이 전능하시기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부활케 하실 거라고 믿고 희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믿는 것이고,

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믿고 이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저 세상도 주시는 분이지만

저 세상은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고 새로운 관계의 시작입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도 없고,

이 세상에서의 인연도 끊어지며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태어납니다.

 

이제 더 이상 아내와 남편이 아니게 되고,

아버지와 딸, 엄마와 아들이 아니게 되며,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과 딸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사두가이는 하느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라고,

그래서 부활 믿음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 인연이 전부이며,

이 세상에 인연에 매이는 자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나도 또하나의 사두가이는 아닌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3일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