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예수께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상인들을 쫓아내시며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하고 나무라셨다.
(루가 19,45-48)
Jesus entered the temple area and proceeded to drive out
those who were selling things, saying to them,
“It is written,
My house shall be a house of prayer,
but you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치며, 제단을 다시 봉헌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그들이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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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남남이라며 사랑을 외면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안타까운 사연을 안고 있는 어느 가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절망 속에서도 힘을 내는 그들의 모습에 자매님께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말 한 번 나눈 적 없는 사이였지만, 자신의 생명을 지켜 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당시의 기득권자들이었던 수석 사제, 율법학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향해 ‘강도’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좋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당장 예수님께 굴레를 씌워서 제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 아닌, 가난하고 병으로 지쳐있는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이 주님과 함께하자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을 끊지 않고 함께 할 때, 세상의 악은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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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휴가 때에 충청북도 단양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단양에 ‘이끼 터널’이란 곳이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어떤 곳인가 싶어서 가보니, 터널 양쪽 벽이 이끼투성이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는지, 이끼 위에 남긴 낙서 등의 많은 흔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이 이끼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 ‘이끼 터널’에서는 아주 중요한 보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이끼들을 보다가 그 틈으로 자란 잡초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끼들도 이 벽면을 채우느라 고생했겠지만, 이 잡초 또한 그사이를 비집고 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흙도 없는 터널의 벽면을 뚫고 나온 이 잡초가 아주 특별해 보였고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람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는데,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우리의 정성을 보면서 정말로 대견하고 아름답게 보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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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집: 로고스가 레마가 되는 집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후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이 곧 ‘기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때 부모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L.A. 올림픽 때 다이빙 금메달을 딴 한 중국 선수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것이 어머니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선수는 본래 다이빙 선수가 아니었고 100m 육상선수였습니다. 이 선수는 시합 때마다 자주 넘어졌고 성적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풀이 죽은 딸에게 언제나 이렇게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네가 1등을 해서 좋은 게 아니야. 엄마는 네가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 좋아. 넘어졌을 때 계속 넘어져 있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만 보아도 엄마는 너무 기쁘단다.”
나중에 다이빙을 할 때도 엄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네가 다이빙대 위에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너무 기뻐.”
이 선수는 다이빙대에 설 때 항상 엄마의 이 말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긴장이 풀리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의 말이 이 다이빙 선수에게 등불이자 빛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런 말을 해 준다고 그 말이 한 사람의 삶에 그런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은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강도가 살 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기 전에 장사꾼을 채찍으로 쓸어내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랑의 말은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잔소리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의 말이 영향을 미치게 하려면 그 듣는 사람이 나를 먼저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자아와 삼구를 없애야 합니다. 그 자아와 삼구는 나의 피로서만 죽습니다. 주님께서 장사꾼들을 내쫓기 위해 사용하신 채찍은 곧 그리스도의 피, 성령을 의미합니다.
먼저 사랑으로 자아가 죽지 않으면 예수님은 분명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분을 벙어리 취급하는 꼴이 됩니다. 마치 ‘소리 없는 사랑’이란 태국 광고와 같습니다.
한 여학생은 자신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를 싫어합니다. 듣지 못하여 말도 못 하는 장애인이고 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이 학생의 등에 “아버지가 바보 같은 장애인”이라는 글을 써서 붙이며 놀립니다. 학생은 자기가 그렇게 취급당하는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 여깁니다. 자기가 왜 힘들어하는지 들어주지도 못하는 아버지는 이제 싫습니다. 그래서 비뚜로 나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이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미안하고 다만 딸이 착하게 커달라고 수화로 말해줄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딸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자살 시도를 합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다 줄 테니 딸만 살려달라고 합니다. 딸은 아빠의 피를 받고 살아납니다. 딸은 자신을 위해 피를 내어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손을 잡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소리 없는 말이 딸의 마음에 들어가 딸을 착하게 만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다고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까요? 아닙니다. 내 안에 삼구가 살아있으면 여전히 삼구는 하느님을 원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뱀은 태초부터 하느님께 대한 불만을 심었고 아담과 하와는 삼구를 다스릴 줄 몰랐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여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하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묵상을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내 안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는 은총으로 변합니다. 이것을 말씀이 로고스에서 레마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신 마비로 인해 누워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미즈노 겐조의 시를 살펴봅시다.
<하느님,
오늘도 말씀해주세요.
단 한 마디뿐이어도 좋습니다.
내 마음은 작아서
많이 주셔도 넘쳐버려
아까우니까요.>
성경의 모든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데 왜 굳이 따로 또 말씀해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이는 미즈노 겐조가 이미 로고스와 레마의 차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미즈노 겐조는 불우한 상황에서도 감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서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가 되게 했습니다.
내 안에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 뿌려져도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늘에 뜬 별과 같습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로고스이지만 그 별을 따라 결국에 만나게 되어 내 삶을 완전히 변하게 하는 그리스도는 레마입니다.
내가 진정한 성전이 되어 하느님의 말씀이 로고스에 머물지 않고 레마로 변하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피로 내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죽은 결과는 ‘감사’로 나타납니다. 감사가 아니면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집은 감사하는 집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레마로 변해 나를 감동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집입니다. 그런 집만이 성전으로 인정받고 구원됩니다.
https://youtu.be/0i4JyKalvxM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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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백신이 원활하게 공급되면서 ‘with corona’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백신이 공급되면서 확진자의 발생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고, 확진자라 할지라도 중증으로 변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입니다. 이제 코로나는 감기나 독감처럼 우리 곁으로 오는 손님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마스크 착용은 필요하지만 각종 모임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대림시기를 앞두고서 특강과 피정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탄생을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마음에 담으면 좋겠습니다. 치료약이 보급되면 마스크도 벗고 서로의 얼굴을 환한 모습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with corona’와 함께 모두가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감기, 독감, 코로나는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지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이 그러한 질병을 이겨낼 저항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아프게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 욕망, 분노, 교만, 나태, 인색’과 같은 것들입니다. 코로나는 증상이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기에 백신도 개발하고, 치료약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우리를 영적으로 병들게 하는 것들은 증상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에 만족하면서 거짓된 자아에 물들어 살게 됩니다. 우리가 거짓된 자아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영적인 백신이 필요합니다.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한 영적인 치료제가 있어야 합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도 욕망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몸이 질병에 대해서 저항력을 키워가듯이, 우리의 마음도 거짓된 자아에 대해서 저항력을 키워가야 합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영적인 저항력을 키워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 이렇게 하여 이민족들이 남긴 치욕의 흔적이 사라졌다.”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고 봉헌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거짓된 자아에서 참된 자아로 회복하는 가장 강력한 백신은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교만에서 겸손으로, 시기에서 관대함으로, 분노에서 인내로, 욕망에서 나눔으로 삶이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드시고 거짓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오염된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성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성전의 고유한 모습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더불어서 성전은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들이 친교를 나누는 곳입니다. 성전은 이제 예수님께서 당부하셨던 것처럼 나눔이 이루어지는 곳이어야 합니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이 머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희망의 빛이 퍼져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바로 우리들의 몸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나의 몸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진정한 성전이고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분열과 갈등이 있는 곳, 욕심과 분노가 있는 곳은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도 주님께서 원하는 성전이 아닙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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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건립 이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철저하게도 타락하고 속화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에 실망한 한 신심 깊은 율법학자는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놓았습니다.
“성전 마당의 상거래를 총괄하는 책임자는 사제의 아들이었습니다. 성전 마당에서 판매되는 물품들의 품질을 검사하는 검사관은 사제의 사위였습니다. 성전 마당의 질서를 잡는 사람들은 사제의 하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은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을 잠식해버렸습니다. 마음, 영혼, 진심이 담긴 제물 봉헌이나 진지한 예배는 사라지고, 형식과 율법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행하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떼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 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성전을 건립할 때,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랑의 영적 공동체를 먼저 건설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 중심에 두는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뜻을 공동체 안에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친교와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건물은 그 후의 일입니다. 진정한 성전 건립은 영적 성전 건립, 그 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이 건립된다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의 사랑과 희생, 헌신과 나눔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진정한 의미의 성전이 아닙니다. 작고 허름해도, 주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구성원들이 그분 말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크게 칭찬받을 아름다운 성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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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의 소굴
-반영억신부-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 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전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느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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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정화하시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5-48).”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은, 사실상 ‘종교 개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요한 2,19).
‘성전 정화’는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을 못하게 막으신 일이 아니라,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거짓 신앙생활’을 ‘참된 신앙생활’로 개혁하신 일이었고,
타락한 종교를 ‘참 종교’로 개혁하신 일이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거짓된 예배를 중단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거짓된 종교를 폐지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전 정화’는 성전이라는 특정 장소에 관한 가르침만은 아니고,
종교 전반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바탕으로 한 ‘참 종교’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예레미야서에서 온 말입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7,9-11).”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과 장사꾼들이 결탁해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명목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한 일은 하느님(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강도짓’이었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강도들이고,
그 강도짓의 피해자는 하느님과 백성들입니다.
하느님은 피해자이시면서 동시에 심판관이십니다.
그런데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죄의식도 없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이 하는 일이 죄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고 양심이 마비되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반성하고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라는 말은,
죽이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죽이는 방법을 찾았다는 뜻입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온 백성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라는 말씀은, 스스로 회개하고 개혁하라는 말씀인데,
만일에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성전을(또는 종교를) 없애실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전 정화 이야기 뒤에 나오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같은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루카 20,16).”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특권이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갈 것이라는 예고 말씀인데,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예언이 아니라,
끝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나 부서지고, 그 돌에 맞는 자는
누구나 으스러질 것이다(루카 20,17-1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는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경고 말씀을
유대교에 관한 말씀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로마 11,19-21).”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에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막 살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오만과 자만심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없애실 수도 있습니다.>
‘성전 정화’를 각 개인의 신앙생활로 좁혀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1코린 3,16-17).”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0-22).”
신앙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성전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거룩한 성전으로서 살지 않고,
탐욕, 이기심, 기복신앙에 빠져서, 이웃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 물질적인 복을 누리기만을 바란다면,
또 하느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자신의 명예만 높인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이고,
자기 스스로 강도로 전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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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19,45-48: 너희는 하느님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조욱현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아니라, 거룩한 집이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사제의 직무가 부정직한 종교적 의무 수행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명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교환행위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즉 돈 바꾸는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까지 하셨다. 주님의 돈으로 이익을 챙기려 하는 자는 바로 환전상이다. 그 주님의 돈은 성경이다.
성당에서 세속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행위는 모두 다 환전상의 행위이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고 한다면, 그는 성경을 파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어 재물을 챙기는 많은 사이비 종교를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환전상들이지 참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경을 가지고 현세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성전에는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돈을 사랑하는 죄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환전상들, 환전 책상을 지키는 자들, 소나 양을 파는 자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희생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이제 없어지고, 우리 신앙인들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행실, 흠 없는 삶의 영광, 영광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빛을 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전 정화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행사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임무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성전의 주인이신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들은 어리석게도, 자신들의 의무를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증오하여 그분을 없애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많은 군중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곁을 떠나지 않아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롯하여 유대인 지도자들 모두의 죄가 더욱 크다. 배우지 못한 백성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고, 그 구원의 말씀을 단비처럼 받아 마셨다. 그들의 마음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는 자들은 주님을 거역하고 살인을 계획하고 있다. 그들은 모퉁이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이다.
주님의 집은 하느님과 우리의 형제들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 만남은 사랑의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하느님의 집이 어느 개인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몸도 성령의 궁전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이 궁전을 인간적인 욕심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그래서 세상을 비출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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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성전 정화
-김찬선신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성전의 정화라는 면에서 겹칩니다.
마카베오와 아들들은 이민족에게 뺐겨 더렵혀졌던 성전을 되찾아 정화하고,
복음의 주님께서도 장사꾼들이 더럽힌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앞뒤를 연결시켜 생각해보니
이스라엘 족속은 그렇게 애써 되찾아 정화한 성전을 자신이 더럽힌 겁니다.
이에 어제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오늘은 격하게 진노하시고 과격하게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자기들에 의해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고 이민족에 의해서만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럴 것 같습니다.
설마 내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이겠냐고 생각했는데
잘 성찰해 보니 실은 내가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이지요.
물론 모독의 의도로 우리가 성전을 더럽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의도 없이 또는 의식 없이 그러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까 성전 의식과 기도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요즘 성전에 들어와 밖에서 해도 될 담소를 성전에서
나누는 사람이 많고 차를 가지고 들어와 마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전에 들어와 '하느님, 저 왔습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말입니다.
이는 마치 앞에 어른이 계신데 인사도 하지 않고
투명 인간 취급하며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과 같은 거지요.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인데 성전에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고
인간끼리 대화하고 있으니 이것이
의도하지 않은 성전 모독이요 하느님 무시지요.
우리 일상적인 의식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 아니 내 의식과 무의식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면
내가 아무리 성전에 들어가도 그 안에 하느님이 안 계시는 거지요.
나라는 성전과 내 밖의 성전 모두에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성전 정화는 어떤 것입니까?
거창한 욕심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는 하찮은 것이라도 몰아내는 것인데
그것이 어떤 때 악감정이나 큰 욕심을 몰아내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유리창에 흙탕물이 묻어 있으면 잘 보이니 닦아내지만
작은 먼지들은 보이지 않으니 닦아야겠다는 생각조차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소소한 성전 정화에 대해서 나눠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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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전인 우리의 본성을 알려 주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루카 19,46)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쫓아내십니다. 하느님의 현존 장소인 성전이 그 본연의 거룩함을 잃고 돈과 권력으로 오염된 것이 노여우셨기 때문입니다.
"강도들의 소굴"(루카 19,46)
예수님께서 강하게 일갈하십니다. 거룩함을 미끼로 백성을 착취하면서 성전에서 오가는 이권으로 재산을 불리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백성의 지도자들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양심이 찔리면 사람들은 대개, 뉘우치거나 역공격을 하거나 두 가지 양상의 반을을 보이기 마련인데, 성전 관리자들은 후자의 태도를 취합니다. 자기들의 불의한 치부를 들추신 예수님을 없애버리기로 모의한 겁니다.
"온 백성이 그분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루카 19,48)
하지만 그들은 고약한 음모를 당장 실행에 옮기기 어렵습니다. 백성들이 그분을 예언자로 여기고 그분 곁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찾은 이들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이끌려 말씀에 머무르는 모습이 성전 관리들에게는 어색할지 모르지만, 이제야 성전이 제 본성을 찾은 셈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 현존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전이 본래의 거룩함을 되찾고, 사람들은 말씀으로 깨끗해지고 또 거룩해집니다. 성전이 비로소 "기도의 집"이 된 것이지요.
제1독서는 유다와 그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정화한 사건을 다룹니다.
"이제 적을 무찔렀으니 올라가서 성소를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민족들은 유다의 신앙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조롱하면서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욕을 안겼지요.
이방인 권력에 항쟁을 시작한 마타티아스의 뒤를 이어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적은 수의 병사로 리시아스 군대를 무찔러 격퇴시킵니다. 그리고 당장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정화하지요. 그렇게 다시 성전을 주님께 봉헌하는 감격스런 장면이 펼쳐집니다.
"온 백성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자기들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주신 하늘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제단 봉헌을 경축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번제물을 바치고 친교 제물과 감사 제물을 드렸다."(1마카 55)
예루살렘의 치욕을 씻고 다시 하느님께 봉헌한 그날, 이스라엘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지 눈에 선합니다. 그들은 다시 하느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며 기꺼이 예물과 제물을 바치지요.
사실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은 이렇듯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제도를 유지하고 그 관계자들의 안위를 위해 고되고 비참한 현실을 사는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울 때, 예수님 말씀대로 "강도들의 소굴"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성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절대 바라실 리 없으신 행태입니다.
"백성은 크게 기뻐하였다."(1마카 4,58)
성전이 성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때 백성이 모두 함께 기뻐합니다. 이민족으로 상징되는 돈과 권력, 허영심과 과시, 문자와 관습으로 오염된 성전이 기도와 사랑, 헌신의 모습으로 정화되고 성화되면 기쁨은 억지로 찾을 것도 없이 자동적으로 차오릅니다. 제 모습을 찾으면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외형의 성전은 물론 성령의 성전인 우리 모두가 "기도의 집"이라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거룩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때 우리를 움직이는 건 무겁고 복잡한 규정들이 아니라 마음의 근원에서부터 차오르는 기쁨과 감사, 평화와 찬양이 될 것입니다. 성전의 성전다움을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말씀 안에 머무는 성전이신 벗님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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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루카 19, 46)
-한상우신부-
성장해야 할 것은
우리네 마음이다.
간절한
마음과 마음이
서로 진실되이
만나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삶의
의미이며
기도하는 곳은
진실한 우리들
마음이다.
삶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면
삶의 모습도
바뀐다.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신앙의 본질인
마음을
우리가
더럽히게 된다.
희망의 마음을
잃어버린 성전은
혼탁하다.
더이상 삶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전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려 하기에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였다.
교인의 숫자를
더 늘리는
교세 확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진리를 향한
기도의 삶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패는
한순간이고
기도의 여정은
영원하다.
새로운 생명력은
간절한 우리의
기도에서
비롯된다.
기도의 짠맛을
잃어버린 성전은
매순간 힘이 없고
나날이 더욱
지쳐간다.
무엇을 위한
신앙인의
삶인지를
다시 묻게된다.
신앙인의 삶이
바로 기도하는
삶이며
더럽혀지지 않는
소금과 빛의
횃불이 기도이다.
힘찬 새출발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간절한 기도에
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새로워질 수 없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우리 삶이
아름다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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