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2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넣었다.
저 사람들은 모두 넉넉한데서
얼마씩을 예물로 바쳤지만
이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가진 것을 전부 바친 것이다.
(루가 21,1-4)
I tell you truly,
this poor widow put in more than all the rest;
for those others have all made offerings
from their surplus wealth,
but she, from her poverty,
has offered her whole livelih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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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길 젊은이들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가 뽑힌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궁핍하지만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헌금함에 다 넣은 과부를 보시고 칭찬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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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설악산을 갔는데 그날 비가 주룩주룩 계속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랜만의 등산인데 비 때문에 오르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때 한 친구가 너무 힘들었는지 제게 부탁을 합니다.
“내 배낭에는 부식이 가득 들어있어서 너무 무거워. 배낭을 바꿔서 매면 안 될까?”
친구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흔쾌히 바꿔서 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 배낭은 가벼워졌습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의 산행으로 힘이 빠진 친구들이 제 배낭 안의 부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했을 때, 배낭은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친구를 도우려는 마음이 오히려 저를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실천은 원래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남을 위한 행동인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줍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사랑의 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의 실천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이득이 어디에 있을까요?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헌금합니다. 이는 아주 적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는 놀림감이 될 수도 있는 봉헌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그렇게 적은 액수는 티도 나지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에게는 하루치의 식량 값이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티도 나지 않는 적은 액수이지만, 가난한 과부에게는 너무나도 큰 전부였습니다. 이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놀림감이 될 수 있는 봉헌이지만, 가난한 과부는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활비 전부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부자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눈치가 아닌 사람의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너무 적지 않나? 아니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등의 생각을 가지고 사람의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 봉헌에 하느님께서 굳이 바라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봉헌이 결국 그녀를 구원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봉헌을 하고 있습니까? 정성 가득한 봉헌은 우리에게 더 큰 선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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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생활을 할 때의 선임병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선임병은 그 당시 부대에서 ‘최고 병사’였습니다. 총도 잘 쏘고, 훈련 중의 작전 수행 능력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더군다나 운동도 너무 잘하고, 도대체 못 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임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현재 취업이 되지 않아 하는 일 없이 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제가 그래도 군대에서는 날아다녔었는데, 지금 왜 그럴까요?”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일상에서의 힘이 진짜 힘입니다. 전쟁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상 삶 안에서 전쟁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즉, 일상에서 필요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해봤자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일상 안에서의 힘을 키우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의 일은 그냥 그리움으로 기억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목표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일상에서 힘을 내는 진짜 힘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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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질투하신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과부의 헌금’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면 하느님의 이런 속성이 떠오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5)
왜냐하면, 예수님은 헌금통을 보시며 당신 아버지께 얼마나 정성을 바치는지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말이 하느님께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질투 없는 무한한 사랑을 부어주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하느님이 질투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물건 취급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애완견이 있다고 합시다. 산책하다 그 애완견이 나를 따라오지 않고 다른 애완견을 따라갑니다. 그럼 질투가 납니까? 애초에 애완견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거나 혼인할 사이는 아니기에 크게 질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애완견이 아니라 아내나 자녀라면 어떨까요? 자녀가 옆집 아빠를 더 좋아하면 어떨까요? 아내가 집에 들어와서 계속 직장 상사만 칭찬하면 어떨까요? 질투가 납니다. 왜냐하면, 아내와 자녀는 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질투’를 느끼신다는 말은 인간을 당신과 같은 수준으로 드높게 여기신다는 방증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투’와 ‘시기’를 구분할 필요도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가 야곱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언니를 시샘하며 야곱에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갖게 해 주셔요. 그러지 않으시면 죽어버리겠어요.’”(창세 30,1)
여기서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질투하는 것일까요, 시기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시기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묶인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자아는 소유하려는 욕망입니다. 자신이 소유했다고 믿은 것을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 시기입니다. 모차르트를 시기하였던 살리에르는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투는 무엇일까요? 질투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주려는데 상대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내 사랑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줍니다. 분명히 내 사랑은 금잔에 받아야 하는데 소주잔을 들고 따르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내 사랑은 나의 피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그에 합당한 잔을 준비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 때 쫓겨나는 종이 그런 사람입니다. 당시에 혼인 잔치에 초대하면 의복까지도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팔아먹고 온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혼인 예복까지 팔아먹도록 정신이 팔리게 한 것에 대한 분노가 질투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아내를 찾으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온갖 장신구와 옷과 낙타도 보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받은 레베카는 하나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그것으로 자신을 장식하고 이사악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사악은 그녀를 자신의 어머니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어머니 천막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만든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신과 한 몸이 되는 아내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레베카가 받은 것들을 아버지에게도 주고 오빠에게도 주고 형제들에게도 주고 해서 천한 옷을 입고 왔다면 이사악은 그 모든 것들에 질투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바로 레베카가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이사악을 위해 다시 봉헌하기 위해 가져온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사악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뒤이어 나오는 성전파괴와 연관됩니다.
“몇몇 사람이 성전을 두고, 그것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꾸며졌다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5-6)
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자원 예물’로 지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봉헌한 것은 쓰고 남은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모실 집을 쓸 거 다 쓰고 눈치 보며 낸 것으로 지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주시는 사랑만큼 우리도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모 마리아만큼 응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영원히 허물어지지 않는 성전이 되셨지만 그들의 성전은 로마 군인들에게 짓밟혔습니다. 더는 예수님께서 살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면 나도 그에 합당한 응답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질투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개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동등한 인격적 존재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니 그 사랑에 응답하려면 우리도 그분이 내어주시는 것처럼 내어드릴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 쓰고 남는 시간에 기도드리는 것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신 분께 질투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그 질투가 쌓이다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 질투를 일으키지 맙시다. 결국엔 자기 손해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닮아야 합니다.
조앤 롤링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자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뛸 듯이 기뻐하였습니다. 그녀는 포르투갈의 포르토란 도시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동시에 해리포터 글도 쓰고 있었습니다. 이때 카페에서 만난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 조지 아란테스와 결혼합니다. 딸까지 낳았지만 아란테스는 폭력을 행사하고 놀면서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활하는 한량이었습니다.
롤링은 둘째 아이를 밴 상태여서 더는 그런 남자와 살 수 없어 다시 영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이미 해리포터 2권까지 집필이 끝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내용이 너무 어둡다는 이유로 12군데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0년 동안 7권의 시리즈를 내면서 현재 1조 원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고 수백억 원씩 기부하며 출판계와 영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아란테스는 굴러온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아란테스와 헤어져서 해리포터를 쓴 것이 아니라 이미 그때 해리포터가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란테스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꿈도 받아줄 그릇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일하던 방송국을 살 수도 있는 재능이 있는 아내를 자신의 그릇, 혹은 자신의 집을 너무 허술하게 지어서 다 쫓아내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조앤 롤링을 보며 얼마나 땅을 치며 후회하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도 자리가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합니다. 그 집을 지으려면 자원 예물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나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는데 우리는 남는 것만 주어서야 어떻게 그분의 자리가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그분께서 질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아닌 사랑하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분 아닌 모든 것들 중 어떤 것에도 애정을 쏟는다면 그분은 질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처럼 주님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질투하는 신을 신랑으로 맞아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면 그분께서 들어오시기에 합당한 성전을 지읍시다.
https://youtu.be/Wbvc_ik9NcY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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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동북부 성령대회엘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무산되었지만 올해는 방역에 만전을 기하면서 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강의를 해 주신 신부님들은 오늘 독서에 나온 지혜로운 젊은이들처럼 교우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와 성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힘들 때면 성모님의 삶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면서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예수님께 의탁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처럼 예수님 수난의 길에 함께 가라고 하였습니다. 강의를 하신 신부님은 기타도 치시고, 하모니카도 연주해 주었습니다.
성공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성공을 기대하면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성공을 원하면 양심을 속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성공을 추구하면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는 신앙인은 늘 만족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공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장하는 신앙인은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성장의 신앙이 아닌, 성공의 삶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진솔한 신부님의 강의는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멀리서도 성령대회를 찾아왔습니다. 버지니아, 보스턴, 코네티컷에서도 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제자들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대회에 온 교우들은 엠마오를 체험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웃에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찬양 봉사자들은 찬양으로 성령대회를 뜨겁게 해 주었습니다. 음식 봉사자들은 참가자들이 넉넉히 먹고도 12광주리는 남을 정도로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매서운 바람도, 겨울을 재촉하는 비도 성령대회의 열기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이 아닙니다. 능력, 재물, 학식, 직업은 우리의 인격을 감싸주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한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흠 없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을 이웃과 세상을 향해 나누는 우리들의 정성을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성령대회에 참석한 교우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 준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찬양으로 성령대회를 뜨겁게 해 준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령대회를 영상으로 제작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봉사자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교우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사제들을 칭찬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일주일은 168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6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십일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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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의 내적 자세를 헤아리게 해 주십니다.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루카 21,2)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난해 보이는 어떤 과부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보통 관심 있는 부분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요. 봉헌은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일이니 액수가 많건 적건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헌금의 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헌금함까지 나아가 손을 뻗기까지 어쩌면 용기도 필요했을 것 같지요. 하지만 예수님께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간절함과 용기가 곧 의탁의 크기입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예수님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세상이 정한 수량의 기준으로는 분명 미소하지만, 가진 것을 다 넣는 그녀의 용기는 어느 누구보다고 큽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조리 바치고 싶은 마음은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납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를 간 이스라엘 귀족 청년들 이야기입니다.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다니 1,8)
그들은 이방인에게 끌려가서 낯선 문화와 풍습을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어쩌면 목숨을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일지 모르는데, 패망한 민족 고유의 신앙과 율법, 관습을 지키는 일이 호락호락할 리 없지요. 그래도 그들은 용기를 냅니다.
"하느님께서는 ...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다니 1,9)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를 능통하게 해 주셨다. ...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다니 1,17)
하느님께서 이르신 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낸 이는 이스라엘의 네 젊은이들이고, 그들을 보호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가상히 여기신 하느님께서 관리하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또 그 젊은이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채워 주셨지요.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입당송)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체칠리아 성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입니다. 박해의 칼날 앞에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내려놓고 아무 계산 없이 자신을 하느님 앞에 예물로 내놓는 사랑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분께서 그 온전한 봉헌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셨지요.
우리는 저마다 가진 것도 다르고 그 종류와 수량은 더더욱 천차만별일 겁니다. 가난하고 미소해도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건, 주님이 당신께 무어라도 드리고 싶어하는 바로 그 사랑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족하나마 마음을 다해 사랑을 바치고 용기를 내어 의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막막한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 사랑을 그분께서 알아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어서 참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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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과부의 헌금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여기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다.” 라는 말씀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넣었다.” 라는 뜻입니다.
(‘생활비’ 라고만 생각하면, 부자들도 ‘생활비’를 다 넣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경우에는 생활비 외에는 다른 돈이 없는 상황이고,
부자들의 경우에는 생활비 외에도 다른 돈이 많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봉헌한
‘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루카 10,27),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한,
그 ‘사랑’과 ‘정성’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랑’과 ‘정성’에서 ‘행위’가 나온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행위’만 보고 ‘사랑’과 ‘정성’을 못 보면,
그래서 ‘사랑’과 ‘정성’ 없이 그 ‘행위’만 흉내 내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여기서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이라는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정성이 부족한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부자들을 모두 싸잡아서 꾸짖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부자들 가운데에는 나름대로 정성껏 봉헌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보다는 사랑과 정성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바친다.” 라고 잘난 체 한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 ‘잘난 체’는 교만과 위선이고, 그것은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과부가 바친 돈의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그 과부의 ‘마음’을
칭찬하셨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 ‘마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다 바쳤다고 생색내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돈을 바친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마음입니다.
생색내고 자랑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봉헌과 자신의 봉헌을 비교하면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올바른 모습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과 자신의 사랑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바친다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적게 바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많이 바치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나 부러워하는 것이나 모두
돈의 액수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옳은 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헌금에 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2코린 8,12).”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것은
‘형편에 맞게’ 바친 일이었을까?
예수님께서 그 과부를 칭찬하신 것은,
‘형편에 맞게’ 바쳤기 때문에, 그러나 최대한의 정성으로 바쳤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 과부가, 자기는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바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형편에 맞지 않은’ 봉헌을 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부자들의 경우에는, ‘형편’이 충분히 넉넉한데도
‘형편에 맞지 않게’ 최소한으로 적게 바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전부 다 바친 일을 ‘형편에 맞는 일’이라고
어찌 말할 수 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 생활비는 아마도 교회에서 준 지원금이었을 것이고,
가난한 과부는 교회에서 준 돈을 다 쓰지 않고 남겨서 봉헌했을 것입니다.
‘형편’은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과부는 자기의 형편대로, 또 ‘기쁘게’ 봉헌한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봉헌’의 첫 번째 모범이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요한 10,17).”
예수님은 아버지를 위해서, 또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모든 것을) 내놓으신(바치신) 분입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목숨을(모든 것을) 봉헌한 분들입니다.
‘봉헌’의 두 번째 모범은 성모님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봉헌의 ‘나쁜 예’는 구약성경 판관기에 나오는 ‘판관 입타’입니다.
“당신께서 암몬 자손들을 제 손에 넘겨만 주신다면,
제가 암몬 자손들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갈 때,
저를 맞으러 제 집 문을 처음 나오는 사람은 주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제가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판관 11,30-31).”
하느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게 해 줄 테니 사람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라.”
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판관 입타는 자기 집안사람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서원을 했을 텐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 않고 남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 ‘죄’입니다.
(사실 판관 입타가 치른 전쟁은 주님께서 함께하신 전쟁이고,
주님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애당초 그런 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도 봉헌의 ‘나쁜 예’입니다.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사피라와 함께 재산을 팔았는데,
아내의 동의 아래, 판 값의 일부를 떼어 놓고
나머지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사도 5,1-2).”
그 부부는 땅을 판 값의 일부를 따로 떼어 놓고서는,
전부를 바치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사도 5,8).
명예욕과 재물욕 때문에 그런 거짓 봉헌을 한 것인데,
베드로 사도는 그 일에 대해서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겨 성령을 속인 죄” 라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사도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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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
-조욱현신부-
예루살렘 성전에는 나팔 모양의 헌금 궤가 13개가 있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나팔 궤 가까이 앉으시어 많은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다. 그때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돈이라고는 엽전 두 닢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다 넣는 것을 보시고, “저 가난한 과부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돈은 그 과부가 가진 것 전부였기 때문이다(3-4절 참조).
부자들은 교회에서 선행하지 못한다.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두워진 눈에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돈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주님께 바치는 제물에 그리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주님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지 않았고, 그 마음 안에는 하느님 대신 재물이 맨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심한 궁핍으로 시달리는 가운데서도 주님께 예물을 바친 과부가 나온다. 그 과부는 헌금함에 자신의 전 재산인 렙톤 두 닢을 넣었다. 이 과부는 심판 날이 되기도 전에 심판관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복되고 영광스러운 여인이다.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과부가 내놓았으니, 그런 칭찬을 들었다. 가난한 이들도 마땅히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이를 어여삐 여기신다. 이러한 예물이 ‘하느님의 예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하느님의 예물 함에 렙톤 두 닢을 넣었음을 지적하셨고, 가난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이는 하느님을 돕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과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부의 렙톤 두 닢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그래서 빈손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빈손은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바친 손이었다. 그 과부야말로 거룩하신 심판관께 최고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람이다.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참된 제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부자의 많은 예물보다 가난한 자가 사랑과 열성으로 바친 예물을 더 즐기신다. 과부의 가난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는 풍요로운 부였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여관 주인에게 그 사람을 돌봐 주라며 내놓은 두 데나리온(루카 10,35)도 그런 돈이다. 가난한 과부는 병자들이 치료받고 주린 이들이 배를 채울 예물을 헌금 궤에 넣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렇게 하여 교회를 나타내는 신비스러운 표상이 되었다. 친절을 베풀어도 온유해지지 않는 심술궂은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자선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선행 역시 헛수고로 끝나는 법이 없다. 선행에 낯선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자선이 값지다. 모든 동정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그분은 각기 다른 재산을 주시지만, 똑같은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 사랑을 드려야 한다.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 4)
-한상우신부-
마지막
한 잎 마저
떨어뜨리는
나무들의
온마음이다.
자아에서
벗어나야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
생활의
최종목적지는
하느님이시다.
생활비를
다 바친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모두 다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떠나서는 봉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상으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
봉헌이다.
모든 생활이
정성어린
봉헌의 연속이다.
봉헌은
주님을 드러내는
삶의 중요한
핵심이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바꾸는 봉헌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이어지는 봉헌이다.
생활의 방향은
봉헌의 방향과
일치한다.
하느님을 향하는
봉헌이 필요할
뿐이다.
빈곤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은
생활의 집착이
아닌 생활의
봉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다.
삶의 근본이
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들이다.
생활이 되시고
생활을 주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성녀 체칠리아
축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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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봉헌의 내적 자세를 헤아리게 해 주십니다.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루카 21,2)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난해 보이는 어떤 과부에게 눈길을 주십니다. 보통 관심 있는 부분으로 시선이 가기 마련이지요. 봉헌은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일이니 액수가 많건 적건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헌금의 양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녀가 헌금함까지 나아가 손을 뻗기까지 어쩌면 용기도 필요했을 것 같지요. 하지만 예수님께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간절함과 용기가 곧 의탁의 크기입니다.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4)
예수님은 액수가 아니라 마음을 보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세상이 정한 수량의 기준으로는 분명 미소하지만, 가진 것을 다 넣는 그녀의 용기는 어느 누구보다고 큽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 그리고 미래까지도 모조리 바치고 싶은 마음은 믿음과 사랑에서 우러납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를 간 이스라엘 귀족 청년들 이야기입니다.
"궁중 음식과 술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다니 1,8)
그들은 이방인에게 끌려가서 낯선 문화와 풍습을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어쩌면 목숨을 보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일지 모르는데, 패망한 민족 고유의 신앙과 율법, 관습을 지키는 일이 호락호락할 리 없지요. 그래도 그들은 용기를 냅니다.
"하느님께서는 ...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 주셨다."(다니 1,9)
"하느님께서는 이해력을 주시고 모든 문학과 지혜를 능통하게 해 주셨다. ... 모든 환시와 꿈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다니 1,17)
하느님께서 이르신 것을 지키려는 마음을 먹고 용기를 낸 이는 이스라엘의 네 젊은이들이고, 그들을 보호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들을 가상히 여기신 하느님께서 관리하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또 그 젊은이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채워 주셨지요.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입당송)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체칠리아 성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지키려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입니다. 박해의 칼날 앞에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인간적인 두려움을 내려놓고 아무 계산 없이 자신을 하느님 앞에 예물로 내놓는 사랑이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분께서 그 온전한 봉헌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셨지요.
우리는 저마다 가진 것도 다르고 그 종류와 수량은 더더욱 천차만별일 겁니다. 가난하고 미소해도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건, 주님이 당신께 무어라도 드리고 싶어하는 바로 그 사랑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족하나마 마음을 다해 사랑을 바치고 용기를 내어 의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막막한 처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향하는 발길을 멈추지 않는 사랑을 그분께서 알아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보시는 분이어서 참 다행이고 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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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월요일-아끼다 똥이 되지 않도록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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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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