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마태오7,21,24-27)
Everyone who listens to these words of mine
and acts on them
will be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rock.
The rain fell, the floods came,
and the winds blew and buffeted the house.
But it did not collap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길이길이 신뢰하라는 노래가 유다 땅에서 불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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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인생은 선택으로 인해 만들어집니다. 학창 시절에 당연히 공부를 선택해야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친구들과 노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냐 노느냐에서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닐까요?
이해하기 쉽게 학창 시절을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 연령대별 ‘내 인생에서 후회는 일’을 알아보면 10대에서 70대까지 연령대별로 상위에 올라 있는 후회되는 일은 ‘공부 좀 할걸, 배우고 싶은데….’ 등 공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공부를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좋은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자기 삶에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저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이 아닌 돈을 선택했다면 어떨까요? “돈! 돈! 돈!”하면서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 더 많은 소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했기에 높은 가치를 향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은 바뀝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어느 책에서 본 선택을 잘하는 방법을 소개해봅니다.
1) ‘지금 당장’이 아닌 ‘다음’의 상황을 내다봐야 한다.
2) 실패하더라도 다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3) 선택을 잘하려면 실력을 쌓아야 한다.
사도시대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 주님의 제자임을 사칭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별나게 ‘주님’이라는 소리를 입에 많이 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고,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하시지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선택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드러내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모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모습에 열정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예언자와 가짜 예언자의 차이는 누구를 드러내느냐에 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은 분명 가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사람은 진짜 예언자입니다.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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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던 윌리엄 리바인은 한 달 동안 4번이나 강도를 만나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더는 정육점을 운영하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이는 리바인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상점들도 강도의 피해로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리바인은 자신이 직접 방탄조끼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방탄조끼를 입고 장사를 하고 있어서인지 리바인의 정육점은 그 뒤 강도의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근처 상점의 상인들이 그에게 방탄조끼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문이 폭주하자 그는 정육점을 처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본격적으로 방탄조끼 회사를 만들어 크게 성공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들에게 회장님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이 있습니다. 이때 절망하고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순간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으면 앞으로 크게 도약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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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가장 큰 적: 자기 수준을 모르는 것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마치신 다음 결론적으로 ‘실천’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라고 하십니다.
배움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알게 된 게 아닙니다. 나의 앎은 곧 나의 삶입니다. 실천 없는 배움은 곧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아는 수준은 정확히 내가 실천하는 것만큼만입니다.
우리는 실천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천 없이 자꾸 더 배우려 합니다. 이것이 진전을 방해합니다. 기둥만 세우다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가난’이란 주제에 대해 학술발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발표자들은 신학교의 교수 신부님들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가난에 대한 성서 신학적 연구, 교의 신학적 연구, 영성 신학적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질의응답 시간에 어떤 신자분이 이렇게 질문해버린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연구들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들은 가난하십니까?”
그때 잠깐의 정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한 신부님이 유학할 때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해당하는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가난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누가 “신부님은 가난하십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가난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가난에 대해 나는 모릅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께 물어보면 어떨까요? 가난을 즐겁게 사셨던 분이기에 당신은 가난을 조금은 안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몸이 따라가지 않는데 감히 안다고 하지 맙시다. 이런 착각이 발전을 저해하고 현학적 허세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튜브에서 저는 깜짝 놀랄 섬네일을 보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뒷모습이 보이고 가톨릭 신자도 아닌 사람이 수녀님들에게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묵상기도와 관상기도를 주제로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이 강사는 약간 종교 다원주의나 뉴에이지 성향이 강한 가르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심만을 따르면 된다고 하고 양심의 작용이 성령의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완전히 옳지도 않습니다. 이를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사실 혼합주의는 95%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문제는 5%의 독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95%이고 그 안에 5%의 독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마실 물일까요, 아니면 빨리 버려야 할까요? 이런 가르침을 수녀원에서 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게다가 강사는 관상은 “몰라!”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분은 『무지의 구름』을 읽고 자신이 주장하는 방법과 일치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누구나 관상의 상태에 들 수 있다며 “여러분도 ‘몰라!’ 해보세요. 여러분 이름도 모르죠? 나이도 모르죠?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죠? 이것이 관상의 상태입니다. 가톨릭도 이렇게 누구나 깨달음이나 관상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불교에서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득도하는 것처럼 그런 가르침을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 영성엔 정화-조명-일치,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와 같은 순서와 수준이 존재합니다.
만약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면 어떨까요? 자전거도 못 타는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타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오토바이를 5초 동안 균형을 잡고 타다가 넘어지고 한다면 이 사람은 오토바이를 탈 줄 아는 것일까요? 어디가 부러지고 나서는 다시는 자전거도 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수준을 무시한 공부와 기도가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수준에 맞는 것을 배울 때 기쁘고 더 배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나아가야 실력이 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수준은 내가 지금 ‘기쁘게 매일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이 기쁘고 삶에 도움이 되면 그것을 하십시오. 책을 읽는 것이 기쁘거나 동영상 보는 것이 즐거우면 그것을 하십시오. 그게 내 수준입니다. 소리기도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묵상기도를 강요하면 나중엔 소리 기도까지 포기하게 됩니다. 가난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난에 대한 논문을 쓰라고 하면 나중엔 신학 공부 자체에 대한 맛을 잃습니다.
내가 배움의 진전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 수준을 내가 잘 모르고 무언가를 배울 때입니다. 많은 경우에 소리기도 단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람이 그것에만 머무르거나 혹은 묵상기도를 해야 하는 사람이 관상에 도전할 때 생깁니다. 실천은 하나도 없는데 신학원에 입학하여 머리만 키울 때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실천이 없는 배움은 아무 쓸모가 없고 오히려 몸에 해롭습니다.
사회에서 나의 수준을 아는 것을 ‘메타인지’라고 합니다. 일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0.1%의 상위 학생들의 특징은 사교육 의존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학원에 가는 이유는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나머지는 혼자 합니다.
그러면 왜 일반 학생들은 학원에 갈까요?
“불안해서!”
이것이 이유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릅니다. 그냥 불안하니까 남이 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력 차이를 만듭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무작정 문제집만 풀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를 보지 않게 되었고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수학과목에서 가장 저조한 점수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많이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수준에 맞는 것을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내가 노력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공부나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나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더 절제하게 하고 더 겸손하게 만드는 공부를 하십시오. 나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부는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리미틀리스’(2011)는 책을 쓰는 남자 주인공이 책도 쓰지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여자친구와도 헤어지지만 결국엔 한 알만 먹으면 엄청난 재능이 솟아나는 약을 먹게 되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기억력 상실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데 살인 용의자가 됩니다. 무엇이든 급작스럽게 뛰어넘으려 하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 약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정신병자가 되거나 범죄자, 혹은 자살 등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물론 ‘굿 윌 헌팅’(1997)의 ‘윌’과 같이 자신이 천재임에도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청소부로 일하며 교수를 비웃는 삶을 사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야 내가 지금 해야 할 공부와 기도 수준을 알고 그래야 삶을 변화시키는 진전 있는 노력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나 공부가 끝나면 그것이 나의 삶을 변화시켰느냐, 아니냐를 봐야 합니다. 나의 삶이 변화될 때 그것이 진짜 나의 지식이 된 것입니다. 행동이 변화되는 것을 보며 기뻐해야 지금 나의 올바른 수준을 알고 정진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공부와 기도를 합시다. 그래야 진전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맛이나 기도의 맛이 아니라 내 삶이 변화되는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아는만큼 살지 못하는 것은 결국 모르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며 기도의 수준만 높이려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성과 지식은 죄로부터의 벗어남과 함께 가야 재미도 있고 무너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https://youtu.be/CcbLkjh7g6g
유튜브 묵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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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기쁨’의 어원은 ‘기를 뿜어낸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 하느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의 기운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언제나 기도 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기를 뿜어낸다는 면에서 기쁨은 주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항상 선한 기운을 나누라는 뜻입니다. 기쁨은 영적인 위로를 주고, 기쁨은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을 기꺼이 도와 준 것은 기쁨입니다. 방황하던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간 것도 기쁨입니다. 자캐오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 또한 기쁨입니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의 어원은 ‘맛이 늘어난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연극을 보고 삶의 맛이 늘어나면 재미있었다고 말합니다. 운동을 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맛이 늘어나면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맛이 늘어난다는 면에서 재미는 객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기쁨이 영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있다면 재미에는 윤리적인 기준이나, 영적인 식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재미는 우리의 감성을 풍요롭게 하고, 재미는 상업적으로 성공하면 좋습니다. 게임, 운동, 영화, 뮤지컬은 재미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재미를 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감성은 더 큰 재미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재미에 빠지면 ‘중독’이라는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이 감성에 빠진 마음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력의 맛에 빠진 사람들, 권위의 맛에 빠진 사람들, 교만과 허영의 맛에 빠진 사람들을 야단치셨습니다. 그들의 재미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각별하게 당부하셨습니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교회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은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잊어버리고 나의 영혼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생각도 예수님께서 원하신 방법이 아닙니다.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출발한 사람은 3명이 아니라 원래는 4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4번째 왕은 가는 길에 가난한 이, 장애인,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선물로 준비한 보물을 길에서 만난 사람을 위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결국 넷째왕은 선물이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길에서 도와준 그 사람들이 바로 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겨레가 들어가게 너희는 성문들을 열어라. 그분께서는 높은 곳의 주민들을 낮추시고, 높은 도시를 헐어 버리셨으며, 그것을 땅바닥에다 헐어 버리시어 먼지 위로 내던지셨다. 발이 그것을 짓밟는다. 빈곤한 이들의 발이, 힘없는 이들의 발길이 그것을 짓밟는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하고, 세상의 어두운 곳, 소외된 곳, 가난한 이, 병든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영성체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며,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고, 위대하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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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자애로워지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지난 세월 돌아보니, 저도 잔뜩 엄청난 계획이나 대단한 결심만 자주 세웠지, 실행에 있어서 상당히 약한 존재였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야행성 삶의 스타일을 바꿔, 내일부터는 무조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성경도 읽고, 운동도 하고, 여유롭게 새벽 전례에 참석하자는 계획을 얼마나 자주 세웠는지 모릅니다. 사흘을 넘긴 적이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정기적인 고백성사를 보고난 후에는 어김없이 기도 빼먹지 않기, 뒷담화하지 않기, 불평불만 금지라는 결심만 계속한 것이 벌써 수십 년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 복음 말씀이 유난히 제 가슴을 찌르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거룩하고 선한 의지가 머리와 가슴에만 머무르지 않고, 발까지 내려오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조금이라도 실행하는 사람이 되자며 나름 발버둥 치고 있습니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갈 작은 노트 하나와 볼펜을 늘 지니고 다니다가, 그때그때 떠오르는 꼭 처리해야 할 일들, 미리미리 대처해야 할 일들, 읍내 나가면 잊지 말고 사와야 할 물품들을 열심히 적습니다. 실행한 사항은 하나하나 지워 나갑니다. 오늘도 제 노트에 적힌 내용입니다.
변기 청소 솔 구입, 매실나무와 배롱나무에 거름주기, 야외식당 확장 준비작업, 손님방 창틀 먼지 제거, 십자가의 길 주변 정리정돈...
그러나 좀 더 노력할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결심이나 과제들이 꼭 외적인 것들, 일과 관련된 것들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측면으로 넘어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눈여겨볼 인물이 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3대 총장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1856~1931)입니다.
그는 연초가 된다든지 연례 피정 끝에는 반드시 몇가지 구체적인 실천 사항을 수립하고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서원이나 서품, 피정 등 영적으로 중요한 순간마다,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결심에 또 결심을 계속했습니다.
1889년 필립보 리날디 신부가 스페인 원장으로 발령나자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청소년들에게 더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 더 자주 그들과 대화하겠습니다. 가능하면 더 자주 그들 가운데 머물겠습니다.
관구장으로 임명되었을 때는 필립보 리날디 신부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친절해지고, 더 신중해지고, 더 자애로워지겠습니다. 더 이상 거친 태도를 보이지 않겠습니다. 지치거나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이런 계속된 결심들이 그를 더 따뜻한 사람, 더 성숙한 사람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 영적, 육적으로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몇가지 작은 계획들을 세워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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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외형의 집을 육신이 거처하는 보금자리로 하여 살아갑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음의 집을 보금자리로 하여 살아갑니다.
당연히 우리는 가정 혹은 수도원을 육신이 거처하는 집으로, 그리고 하느님을 마음이 거처하는 집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육신이 거주하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이고, 복음은 마음의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과 집이 세워진 기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반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합니다.
“우리에게는 견고한 성읍이 있네.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반석이시다.”
(이사 26,1-4)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마태 7,21)
그런데 독서에서는 “하느님이 영원한 반석”이라 하고, 복음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으라.’ 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위에 집을 지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이란 영원한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하늘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분을 직접 보고 들은 분, ‘그분의 뜻’을 받들어 그분으로부터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 아니고서야 누구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을 배우고 그 실행 방법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 6,10)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요한 4,38)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온몸을 바쳐 “아버지의 뜻”을 실현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사랑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음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것이 ‘아버지의 뜻’인지 잘 모를 때는 자신을 내어놓는 쪽, 곧 자신이 손해 보는 쪽을 택하면 될 일입니다.
곧 ‘십자가’가 있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처럼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택하는 일, 곧 이해되지 않아도 먼저 용서하고, 오해 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부당함을 당하고도 그를 감싸는 쪽을 택하는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하루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양식으로 삼고 당신의 일을 완수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
(마태 7,21)
주님!
제 머리 위에 ‘아버지의 뜻’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두지 말게 하소서!
아무리 진실하게 여겨져도, 아무리 옳게 여겨져도, ‘아버지의 뜻’보다 앞세우지는 말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이해되지 않아도 인정하고, 어긋나도 침묵으로 감싸고, 먼저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알면서도 손해 볼 줄을, 옳으면서도 질 줄을, 오해받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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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뜻
-반영억신부-
작심삼일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돌아보면 결심과 행동은 언제나 다릅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깊은 맛을 내야 하는데 세월이 가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법을 지키는 것보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주님의 계명을 합리화시키는 데 약삭빠르게 움직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도 진리는 변함이 없건만 진리를 대하는 마음은 물러지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로마2,13).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고 그 실천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신앙고백이나 찬미의 말도 그 진실성은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한편 실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내 뜻을 이루려고 애달아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닐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지순례나 기도회, 피정을 다녀와서는 너무 좋았다고 떠벌립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좋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새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좋았다는 것은,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실천의 어려움을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고 적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기반을 잘 다지고 그 위에 지어야지, 그렇지 않고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하면 큰바람과 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비바람을 걱정할 틈도 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 큰 믿음의 사람이 되지만, 듣기만 하는 사람은 환난이 오면 곧 흔들려 방황하게 됩니다. 사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2,26). 성 마더 데레사는 말합니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까요” 그러므로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십시오”(알베리오네신부). 우리 모두가 실천하면 할수록 더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으니 실천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날이 되기를 소망하되 한 번에 많은 것을 행하려고 욕심부리지 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하늘을 그리워하면서도 내 뜻을 관철하려 한다면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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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
-송영진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음’은 곧 ‘삶’입니다.
(이 말을, ‘신앙’은 곧 ‘생활’이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또는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일부 종파의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라는 말씀은,
믿는 대로 사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사랑 실천’은 신앙생활에서, 또는 구원받기 위한 실천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계명)들 가운데에서
‘사랑’에 관한 가르침(계명)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믿음’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있는 생활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말은,
“나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서 사라질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예언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예언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달을 수 있을까?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그냥 약간의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일 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기적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사람들을 속이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4-27).”
이 말씀에서 ‘집’은 ‘인생’을 뜻합니다.
1)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 또는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집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안전한 피난처도 없고, 보호자도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은, 비가 내리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면,
그 비와 강물과 바람을 온 몸으로 직접 맞으면서 휩쓸려가는 사람입니다.
‘비, 강물, 바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인생살이의 고난이나 박해나 시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종교박해를 받지는 않겠지만,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신앙이 없어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저쪽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 주시는 보호자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
인생살이의 고난과 시련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종교박해로 육신의 목숨을 잃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영혼의 생명은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 바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
또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버리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14), “지혜의 화관은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18), “지혜의 뿌리는 주님을 경외함”입니다(집회 1,20).>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는 비결을 잘 알아서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세속적으로 머리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3)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믿는다고 말만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고난과 시련과 박해가 없다면,
믿는 대로 실천하지 않는 삶이 잘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 때에는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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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마태 7,21.24-27: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 언행이 일치하지 않음을 탓하시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바로 아들의 뜻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과 반대되는 가르치실 수가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죽은 다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말씀은 현재의 삶에서부터 맺는 열매와 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씀의 열매와 덕은 삶의 어려움에 의해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안정을 누리게 된다.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때문이다. 폭풍이 불고 극심한 풍랑이 닥치고 유혹이 계속되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25절) 비와 강물과 바람이라는 말로 인생의 온갖 상황, 모략, 중상, 상실, 죽음, 가족을 잃는 일 등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끔찍한 일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뿌리박은 사람은 이런 재앙 어느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는다. 바위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고 하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 자신이시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대고 굳건히 서 있는데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겠는가! 그분과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을 인생의 모든 파도 저 너머에 올려놓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
그러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런 사람은 집 짓는 수고를 다 하고서도 수고의 열매와 안식을 얻지 못하고 은총 대신 벌을 받기 때문이다. 강도, 간음, 위증하는 사람들도 자기 일을 하려면 수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고했어도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큰 손해까지 본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은 불륜이나 방탕, 만취 분노에 빠져 사는 이들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고 있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에게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필리 4,13)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어리석은 자가 된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항상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주님을 탄생시키는 삶, 그래서 주님을 모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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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한상우신부-
반석과
모래 사이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실행도 있다.
저마다
가야할 길이
있다.
아버지의 뜻을
다시 묻는
새아침이다.
아버지의 뜻은
사랑의 실행이다.
시련 없는
사랑은 없다.
시련을 극복하는
것은 사랑의 힘
사랑의 실행이다.
사랑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사이에서
세워지고
무너진다.
슬기로운 사랑은
서로를 살린다.
아버지의 뜻을
밀어내는
실행이란 없다.
아버지
하느님과의
만남이 실행이며
실행이 믿음이다.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하느님 없이
사랑을
이어나갈 수
없다.
사랑이라는
뜻의 완성은
우리의 진실한
사랑에 있다.
이와같이
사랑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무너지게 하는
장본인은 언제나
우리자신이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실행의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이다.
이와같이
실행하는 사랑을
가르쳐주신다.
사랑이 실행이며
나눔이 사랑이다.
길을 잃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뜻의
실행인 사랑을
되찾아주신다.
가장 좋은
뜻과
실행 사이에
우물쭈물
우유부단한
우리가 있다.
우리의 삶이란
새로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랑의 실행이다.
작은 사랑의 실행이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있다.
사랑은
두려움이 아닌
실제로 행하는
실행(實行)이다.
대림의 실행이
성탄의 완성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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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
-김찬선신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오늘은 누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인지에 대한 얘기입니다.
이에 대해 저는 정말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감히 말합니다.
그만큼 정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말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지 진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 얘기가 아니라 제 얘기라는 뜻입니다.
지옥과 천국 중에 어디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물론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하겠지만 이와는 다른,
그러니까 내 나라를 포기하고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장 하느님 나라에 가고 싶다고 선뜻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게는 아직도 제 나라가 있습니다.
지도상에 있는 나라가 아님은 말할 것 없고,
다른 사람이 네 나라 어디 있냐고 물으면 답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제 나라는 있습니다.
제 나라는 제가 주인인 나라 또는 제가 왕인 나라이며
제 마음대로 그러니까 제 뜻대로 하고 좋을 대로 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제 나라가 망하지 않고 한동안 이어지길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멈추고 당장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마음 준비는 아직 안 되어 있는 것이 저의 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결단을 선뜻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이 나의 주님이 아닌 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도 있고,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느님 때문에 못하는 것은 싫으니
망설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시라고 인정해드리고 존중하면서
당분간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마음인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천국의 주님이신 것은 물론이고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아버지인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아들과 같고,
그렇지만 아버지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 싶어하는 것과 같지요.
그래도 저는 뻔뻔스럽지는 않고 이런 제가 죄스럽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내 제 뜻을 포기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 뜻대로 하려 애쓴다는 것만은 어여삐 봐달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 맘대로 하고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 안에서 그 짓들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고 또 믿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는 하느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전혀 주저함 없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기를 청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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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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