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4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마태 9: 35―10,1.6-8)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for his harve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곤경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예언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권한을 주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두 대의 비행기가 뉴욕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에 돌진해서 거의 3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폭력은 종교에서 나온다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역사상 암으로 죽은 이들보다 종교 때문에 죽은 이들이 더 많다.”
그러나 어떤 종교도 살인, 폭력이 정당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실 자신의 원천과 교리를 거스르는 짓이었습니다. 즉, 인간적인 판단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를 신의 뜻인 것처럼 꾸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는 언제나 사랑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많은 폭력적인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신약성경과 분리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 역사의 틀 안에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때문에 폭력이 난무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세속적인 생각이 폭력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참 종교인은 사랑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의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하신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과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파견하는 제자들에게 기적의 권능을 주십니다. 즉,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수확은 하느님 일의 완성을 상징하는 구약 사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데 협조할 일꾼이 없는 것입니다.
그만큼 참 종교인이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살인과 폭력으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거짓 종교인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참 종교인이 많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참 종교인을 통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완성할 일꾼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오늘 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실현될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이사 30,19)


지금 스스로 최악의 어려움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점을 보게 됩니다.
1) 객관적으로 보면 본인들이 인지하는 만큼 최악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2)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상황을 악화하는 일만 반복하여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보다 최악의 상황이라고 단정하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기가 더 힘듭니다. 모든 방법을 다 해봐도 안 되는데 어떻게 최악의 상황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모든 방법을 동원했을까요? 우선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마음부터 없애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안 될 텐데….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결과는 뻔해집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나만 힘든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1cm 더 나아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별을 보고 있습니까? 시궁창을 보고 있습니까?

목자의 역할은 양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왜 뽑으셨고 어떤 역할을 하도록 파견하셨는지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수 온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군중에게 당신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가 꺾여 있었다.”라는 동사는 “흐립토”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지쳐 넘어짐을 의미합니다. 삶에 지쳐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워 다시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 많은 목자가 존재합니다. 부모님도 자녀에게 목자고 학교 선생님도 목자이며 물론 사제들도 목자입니다. 이들의 역할이 기를 세워주는 것인데, 가끔은 이들이 양들의 기를 꺾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체가 기운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기운은 바로 ‘성령’을 의미하는데 그들도 그것을 받지 못하니 남에게도 줄 수 없습니다.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3천 원짜리 김치찌개 파는 이문수 신부’의 에세이 『누구도 벼랑 끝에 서지 않도록』의 내용입니다. 이문수 신부는 낙담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청년들이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청년 밥상 ‘문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식주의’라는 곳에서 인용합니다.
“김치찌개 3천 원, 무한리필 공깃밥은 공짜. 개업 이후 거의 매달 적자를 내는 이 식당의 주인은 바로 저입니다. 저의 원래 직업은 ‘가톨릭 신부’인데요, 어쩌다 보니 4년째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김치찌갯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식당 사장이 되기로 한 건 고시원에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난 청년의 안타까운 사연을 접하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저 역시 한때 ‘배고픈 청년’이었습니다. 한 달간 세 끼를 모두 라면만 먹거나 빵 한 봉지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습니다. 입시도 취직도 더 힘들어진 지금의 청년들은 그때의 저보다 두세 배는 더 고단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 테지요.
저는 누구나 언제든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이 흐르길 1년여. 후원금 3천만 원으로 밥집을 열 공간을 찾다가 지금의 이 건물을 발견했습니다. 북한산 전경이 보이는 옥상을 보자마자 청년들이 이곳에서 잠시나마 숨을 쉬고, 위로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메뉴는 김치찌개 하나로 정하고, 가격은 대학교 학식의 평균 가격인 3천 원으로 정했습니다. 학당을 하다 보니 신부로서 일만 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오픈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당을 찾았습니다. 얼른 팔팔 끓는 찌개를 대접해 몸을 녹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저를 수줍게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더군요.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제가 식당에 관해 설명했더니 아이가 1년 넘게 모은 저금통을 기부하고 싶다고 해서요.’
엉겁결에 받아 들었는데 세상에, 나중에 세어보니 10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습니다. 열 살짜리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돈이었을까요. 누군가를 위한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놓은 그 정성과 선량함이 저를 더 열심히 일하고 싶게 만들었습니다.
50대 여성이 어둑해진 저녁에 식당에 들어와서 김치찌개에 밥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그러고는 계산을 하겠다면 카운터 앞에 섰습니다.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손님이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여기 계신 손님들 것까지 다 계산해 주세요, 신부님.’
손님은 그렇게 모두의 밥값을 계산하고 가셨습니다. 각자 계산할 때가 되어서야 청년들은 비로소 누군가 밥값을 대신 내주고 갔다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다니 너무나 놀랍다고들 했습니다. 그러고는 덧붙였죠.
‘저도 기회가 되면 다른 사람을 꼭 도울게요.’
아마 그 손님께서 가장 듣고 싶으셨던 말이 아닐까요.
최근에는 김치찌개 식당을 운영하는 식당 지기로 사는 삶을 크게 변화시킨 계기도 있었습니다. 식당을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버겁더라도 점포를 늘릴 것인가 고민하던 시점에 ‘유퀴즈’ 섭외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방송에는 게스트 몇 명 중 하나로 짧게 나갈 테지만, 식당이 분점을 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렵게 녹화를 마치고 4월 21일에 본방송이 나갔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 날부터 일어났습니다. 후원 문의로 전화가 불이 났고, 가게에는 손님들이 줄을 섰지요. 모두 파김치가 되어 뻗어 있는데 한 직원이 저를 다급히 부르더군요.
‘신부님…. 이것 좀 보셔야겠는데요.’
제 눈앞에 놓인 것은 유재석 씨가 아무 말도 없이 5천만 원의 후원금을 입금하신 통장 내역이었습니다.
‘아무리 유재석 씨라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주시죠?’
유재석 씨의 기부가 기뻤던 이유는 액수 때문이 아닙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부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치지 않을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신 것이죠. 저는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 식당이 유지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돈보다는 마음들이 모여서 말이지요.”
유재석 씨나 이문수 신부님이나 모두 같이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기를 살려줄 수 있을까?’입니다. 이런 분들이 오히려 기를 받는 것 같습니다. 참 목자들입니다.
저에게 참 목자는 유학할 때의 논문지도 교수님이었습니다. 제가 로마라는 곳에 다시 공부하러 가게 되었을 때 저는 한 목자만을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죠르지오 마짠티’라는 교수입니다.
제가 석사 때 성경을 공부할 때는 기가 많이 꺾여 있었습니다. 그때 지도교수님은 기를 많이 꺾으시는 무서운 분이었습니다. 논문을 열심히 써가면 그냥 쓰레기라고 하시며 몇 장을 다 읽어보지도 않고 커다랗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를 그리고 툭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다시 돌아가기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의 신학 교수였던 마짠티 교수님은 기가 넘쳤습니다. 찢어진 옷을 입고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석사 때 성서 교수와 다른 사람 논문 심사 때 논쟁이 벌어졌는데, 마짠티 교수는 신약에 “새로운 계약”이란 말이 희랍어로 그대로 나온다고 했고 성서 교수는 그런 말은 안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면 옆집 할아버지 같은 저희 교수님이 희랍어 성경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말을 찾아내 증명해 보이니 성서 교수는 오히려 창피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제관에 가난한 사람들을 들여 함께 살고 학교에 와서는 주류 세력들에 주눅 들지 않고 그렇게 싸우시고 학생들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며 당신이 밤을 새우시며 우리 논문을 고쳐주셨습니다. 학생들은 그분의 편이었고 학교의 높으신 분들은 이분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그 신부님을 매우 좋아했는데 언어가 딸리는 우리 마음을 아시고 손수 다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엑스를 하고 화를 내던 성서 교수님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러니 저도 사제가 되어 다시 유학을 나갈 때는 성서신학을 포기하고 교의 신학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학교로도 갈 수 있었지만 저는 그 교수님께 배우고 싶었습니다. 로마라는 두려운 곳에서 저에게 기운을 불어넣을 참 목자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덕분에 저는 기죽지 않고 5년 동안 그분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처럼 못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어떤 목자는 기가 살았고, 어떤 목자는 기가 꺾여 있을까요? 삼구 때문입니다. 죄는 성령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습니다. 따라서 육체와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기가 꺾여 있어서 남에게 기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꾸 양들의 기를 살리려고 하면 나에게 나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양들에 대한 사랑이 목자의 기까지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나 오히려 거저 주기 때문에 거저 받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도 흩어진 양들의 기를 살리는 참 목자로 파견받습니다.
https://youtu.be/5_5Miv8xOlc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함께 로드아일랜드로 낚시를 다녀왔습니다. 새벽 2시에 출발해서 6시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몸은 많이 피곤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선장님은 참 엄격해서 잡은 물고기가 허용 크기보다 작으면 모두 놓아 주었습니다. 잡은 사람의 눈에는 커 보이는데 선장님은 굳이 길이를 재지 않아도 물고기의 모습만 보고 놓아 주었습니다. 다행히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배 위에서 싱싱한 회를 맛보았습니다. 낚시가 생각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바위틈에 바늘이 걸리면 조심해서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줄이 끊어지고 맙니다.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미끼를 자주 갈아 주어야 합니다. 잡았어도 조심하지 않으면 배위로 올리는 동안 잡은 물고기가 바다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손으로 입질하는 물고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장님의 도움으로 초보자인 저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처럼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도 낭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려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현재에 안주하려는 나태함,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 기존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이기심이 장애물처럼 앞에 놓여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시면서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은 더러운 영들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입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저는 주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한 자매님은 ‘풍성한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쉬는 교우 댁을 방문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형제님은 ‘나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앞으로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어떤 시어머니는 ‘내가 개신교회에 나가니 우리 아들과 며느리는 앞으로 성당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방문하기 전에 주님께 기도를 드리고 주보를 전해 드릴 때 주보에 전화번호와 좋은 글을 써서 함께 넣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던 형제님도 많이 누그러지셨고, 개신교회에 다니던 할머니도 웃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이 세상 한번 뿐이고, 죽으면 어찌 될지 모르니 신앙을 가져 볼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웃들도 그럼 성당에 한번 나가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와 전교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그 자매님의 말씀이 제게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크고 화려한 성당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제와 주교, 수도자들만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따뜻한 미소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웃에게 작지만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쌀쌀맞게 대하는 쉬는 교우들에게 주보를 전해주고, 다시 한 번 찾아가는 신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원망할 일이 있어도,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감싸주는 신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오늘도 주님을 따라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에게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이사 30,19)고 하고,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도 “주님은 마음이 부서지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주시네.” (시 147,3)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선한 목자’가 지닌 자비의 마음, 곧 “가엾은 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 9,36)
사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이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온갖 고통과 질병과 가난과 근심에 시달리는 이들에 우리는 둘러싸여 있습니다.
또한 일자리를 못 얻어 거리에서 기가 꺾여 방황하는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가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있는 이들에 둘러싸여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곁에 있는 형제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또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타인의 처지에 마음 아파하지 않음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처지를 보고 슬퍼지는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을 같이 지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느님의 연민 혹은 자비심’, 곧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제1독서와 화답송에서 보여주듯이,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는 마음’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어의 뜻은 태중의 아기와 분리되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을 말합니다.
엄마의 숨으로 두 몸이 함께 숨 쉬는 것을 말합니다.
곧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일부로 여기십니다.
그러니 지체가 아프면 온몸이 함께 아프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이 마음을 놓쳐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의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필립 2,5)
사실 우리는 그분의 이 마음을 ‘이미’ 우리 가슴에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1코린 2,16)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수확할 것은 많은데
-반영억신부-
일을 줄이면 줄어들고 일을 늘리면 늘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줄이고 또 어떤 일을 늘려야 하는가는 너무도 자명합니다. 주님의 일을 늘리고 내 일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주님의 일은 줄이고 내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내 일에도 충실하게 되지만 내 일에 매이면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마태9,37). 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돌봐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입니다. 더더욱 잘 돌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없으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바로 우리 자신이고, 일꾼의 역할을 잘하려면 그만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꼭 내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 그 역할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일꾼을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를 권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탈랜트는 다양하고 소중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마음껏 써야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관리자라는 자각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잠시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떠나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요! 관리를 잘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일깨울 협력자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른 이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일꾼이 되어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하시며 걱정하시는 주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매 순간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마태 9,35-10,1.6-8: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그분은 하느님의 복음과 병의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두고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그들에게 가셨으며 아무리 작은 마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루 다니셨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우리는 선행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욕을 먹고 선행을 그만둔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36절)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이 여기신 것이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데려갈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다. 성령의 선물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내 주십사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사람이 많다는 것이고 일꾼이 적다는 것은 교사들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바로 일꾼들, 제자들을 뽑으시고 그들을 파견하신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네 명은 어부고, 두 명은 세리이며, 한 명은 배반자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주신 권한으로 자신의 약함과 주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열두 번째 사도에게까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복음이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전해지기를 원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다음에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하자 사도들은 다른 민족들을 부르러 돌아섰다. 유대인들에게 본보기로 일어난 일이 다른 민족들에게 더 큰 은총이 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은 모두 거부하였고, 다른 민족들은 모두 돌아왔는가? 아니다. 유대인 중에도 회개한 이가 있었고, 다른 민족도 부름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한다.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지니고 계신 모든 권능이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아담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가졌던 이들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습과 닮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세속중심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의 삶이 되었다. 하늘 중심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능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저’ 사용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마태 10, 6)
-한상우신부-
사랑을 잃은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다시 묻는
대림시기이다.
우리의
사랑을 다시
성찰한다.
서로를
마비시키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연민은
핑계가
아니다.
연민마저
자신의
상황을 핑계대며
빠져나가는
왜곡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우리들
이기심이다.
이기적인
사랑을
극복하게하는
연민의 참된
힘이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사랑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참된 사랑을
가르쳐주신다.
참된 사랑은
병든 마음을
먼저 고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손수 우리들
병든 마음을
고쳐주신다.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되찾아주신다.
사람을
배반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길을 잃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복음이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자신이
누군지를
알게하신다.
병들고
허약하여
쓰러지고
아파하는
우리들이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연민과 생존의
갈등 사이에서
찾아야 할
사랑이 있다.
사랑은
자기 것만을
지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한다.
절실하고
절박한
이들을
향하여 있는
맑은 사랑
맑은 대림이다.
마음이 혼탁하면
뒤따라 오는
모든 것들은
더욱 혼탁할
뿐이다.
가장 맑고
아름다운
성탄의 사랑이
우리들 삶에
이루어지길
기도드린다.
길 잃은
양들은
자기합리화를
멈춘다.
사랑으로
오시는 주님께
첫걸음을
내딛는
실천의 시작이다.

받는 것부터
-김찬선신부-
눈여겨 보신 분들은 즉시 눈치채셨겠지만
오늘 복음은 9장의 끝부분과 10장의 시작 부분이 이어진 것이고,
수확할 것에 비해 일꾼이 적으니 주인께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에 이어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라고 하셨다가
그러지 말고 너희들이 직접 가라고 파견하신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눈여겨 볼 것은 당신이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제자들에게 소명으로 주신 점인데 그것은 병자들의 치유와 복음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구조는 이사야서가 예언한 대로
예수는 메시아로서 병자와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구해주러 오신 분인데
제자들이라면 그분과 똑같은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오늘 그 사명을 어떻게 완수해야 한다고 하십니까?
그것은 우선 가는 것이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칸적으로 말하면 "가서, 무너져가는 주님의 집을 고치는 것"인데
왜 그래야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거나 못하는 사람이고
오늘 주님 표현대로 하면 길을 잃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길을 알면 돌아올 텐데 길을 모르기 때문에 가서 데려와야 한다는 겁니다.
어디로?
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로.
그런데 전에는 길을 잃으면 찾지도 않고 내버려두었는데
이렇게 길 잃은 양을 잃은 양이라고 하며 찾는 것이
세상과 다른 하느님 나라이고 그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길 잃은 양을 집을 나갔다고, 무리에서 이탈했다고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가여워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양이라고 그 책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런데 길 잃은 양을 내가 잃은 양이라고 가엾이 여기는 것은
가출한 자식을 괘씸하다고 하지 않고 가엾이 여기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부모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도 지니는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지닐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받아서 지니라는 말씀이고,
받아야 줄 수 있으니 먼저 받으라는 말씀이며,
받은 다음에는 우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겁니다.
그런데 받은 적이 없다구요?
그것이 문제겠습니다.
그러니 받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없는 하느님 사랑을 주제 넘게 주려고 들지 말고 받는 것부터.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12월 6일 대림 제2주간 월요일 (0) | 2021.12.06 |
---|---|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 (0) | 2021.12.05 |
2021년 12월 3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0) | 2021.12.03 |
2021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목요일 (0) | 2021.12.02 |
2021년 12월 1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0) | 2021.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