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5일 대림 제2주일

Margaret K 2021. 12. 5. 07:01

2021 12 5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인간 존중과 인권의 신장은 복음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 오고 있다. 현 시대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깨우치려는 것이다.


☆☆☆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3,1-6)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his paths.
Every valley shall be filled
and every mountain and hill shall be made low.
The winding roads shall be made straight,
and the rough ways made smooth,
and all flesh shall see the salvation of God.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빈다고 한다(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복음).

마음의 길

-키엣대주교-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와 황제의 대리인 유다 총독 빌라도, 헤로데와 그의 동생 필리포스, 사제인 한나스와 그의 사위 카야파,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입니다. 그들과 대조되는 억압받는 노예신분의 유다인들, 그들은 권력자들보다 더 권위 있는 모습으로 구세주께서 왕림하시어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조용히 우리 마음 속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열어놓아야합니다. 주님이 인도하는 그 길을 가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길’은 “고독한 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권력자가 아니라 왜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을까요? 거대한 구원의 사업을 왜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주님께서는 그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업을 말씀하셨지만 권력과 욕망에 미혹된 그들에게는 주님의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적하고 조용한 광야에서 오직 기도만 하던 세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열망하였기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겸손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권력자들은 화려한 궁전에서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향락에 빠져 오만하였지만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했습니다. 황폐한 광야에서 마음의 덕을 쌓고 기도만 하는 겸손함을 지녔고 메뚜기와 꿀과 자연이 주는 음식과 검소한 옷만 입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황량한 광야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찾는 겸손한 사람이었기에 주님께 선택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선택해주시기 전에 내가 먼저 그 길을 가야만이 주님의 선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심의 길은 “자신과의 투쟁의 길”입니다

다른 누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듣고 그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헛된 권세와 오만한 삶을 버리고 자신과의 격렬한 투쟁을 하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길은 마음입니다. 물질적인 길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그래도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길을 바꾸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자만과 오만의 산 위에 올려놓았던 마음을 보잘것없는 가치로 여겼던 산 아래로 내려놓으려면 처절한 고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만과 오만을 잘라낸다면 그 고통도 견딜 수 있습니다.

삶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폭주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멀리가면 갈수록 마음은 점점 비어만 가고 돌아오는 길은 그만큼 멀어집니다. 대림주간을 맞이하여 세례 요한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회개와 참회의 마음으로 주님 곁에 다가가야합니다. 영혼의 죄를 씻고 참회하고 마음의 길로 들어가야만이 새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속삭임을 듣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주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미 그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과 멀어지고 굽은 길에 있기에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굽은 길이 곧아지고, 거친 길이 평탄하게 되는 그 날이 오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길, 마음의 길로 가기위해 어떤 투쟁이 필요합니까?

2. 나의 마음의 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꽉 막힌 도로위에 경적소리가 가득한 도로 위에 갇혀 있습니까? 아니면 작은 바람소리조차 들을 수 있는 한적한 시골길에 있습니까?

3. 나의 마음의 길은 어디를 고쳐야 주님이 계신 그 곳을 볼 수 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기에 결혼한 조카도 많고 또 자녀를 낳아 저로서는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조카들이 모두 열심히 살고 있기에 다들 자기 자리에서 나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카 중 한 명이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법정 분쟁까지 가게 되어 큰 손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척 속상했습니다. 조카에게 큰 손해를 안겨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괜히 미워졌습니다. 무엇보다 사제인 제가 조카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려졌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을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조카의 일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도이기에 열심히 기도로만 함께하는 것입니다. 걱정은 되지만, 굳이 걱정에 휘말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세속적으로는 솔로몬 왕 이후로 한 번도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의 황제 티베리우스가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고, 유다 땅은 로마인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본시오 빌라도 밑에서 로마에 아부하는 헤로데 일가의 3형제가 유다 땅을 나누어 영주로 있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지도자 구실을 하던 이스라엘의 대제관직도 카야파의 손에 들어가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으라는 구원의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요르단강 주위의 지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는 것,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도록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정치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더 큰 가치 안에서 참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또 반드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일이다(자크 데리다).

갈등의 해소를 위해….

어떤 부부가 커다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남편이 아내 몰래 투자했는데 큰 손실을 본 것입니다. 물론 미리 아내와 상의할 수도 있었지만, 평상시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 주제에 무슨 투자야?”라는 식의 무시하는 말을 할 것이 뻔해서 한번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대와 달리 역시 큰 손해를 본 것이었지요.

아내에게 투자 실패를 말했습니다. 아내는 더 남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가장으로 여겼고, 아이들에게도 남편의 무능을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런 아내에 대한 미움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합니다.

“좋아요. 주님 때문에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이 말에 남편이 기뻐했을까요? 아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은 자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모든 문제의 책임이 남편에게만 있다는 행동에 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의에 둘 때 진정한 용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위치에서부터 용서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려면 먼저 자기 잘못부터 찾아서 고백해야 합니다. 서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용서도 가능하고 갈등도 해결됩니다.

 길들여지는 사람은 길을 내지 못한다. 지금의 행복에 길들지 않기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직무가 소개됩니다. 요한의 직무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그분의 길을 미리 닦아놓는 역할입니다이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라고 합니다.

    ‘회개란 무엇이 행복인지 아는 것입니다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는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면 이제 술을 덜 마시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집을 나온 아이가 회개했다고 하면 그래도 집에서 부모님과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안 것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안성에서 있을 때 길거리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습니다그런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아이들은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고 합니다그러면 목사님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살 때 입었던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다시 줍니다그리고 입어보라고 합니다그러면 아이들은 코를 막고 억지로 입고는 자기들 손으로 내다 버리고 샤워를 두 시간씩 합니다그리고 다시는 길거리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만약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지 않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회개하지 않으면 간신히 주일미사에 나오기는 하겠지만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동행하심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그들도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기보다는 뱀의 뜻에 따라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채우는 것을 더 행복으로 여겼습니다회개는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돈도 없고 먹고 마실 것도 없고 명예도 없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임을 전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그렇게 삼구를 포기할 때 하느님의 어린양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광야로 나오지 않으면곧 삼구를 포기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그분은 사랑이신데 삼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이는 불과 물처럼 한 공간에 공존할 수 없는 욕구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것이 세상의 즐거움을 다 포기하는 것보다 행복함을 믿지 못한다면 누가 광야로 나오겠습니까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필요한데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일단 믿고 광야로 나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사람이 됩니다왜냐하면그 사람의 삶 자체가 무엇이 행복인지 증명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마더 데레사의 삶이 그랬고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그랬습니다이분들의 삶을 보며 많은 사람은 저런 삶이 진짜 행복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하고 그 광야의 삶으로 나아올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분들이 먼저 세상의 행복에 길들지 않은 누군가를 만났다는 데 있습니다이렇게 회개의 세례는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이 가지 못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는 것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히말라야’(2015)는 엄홍길 대장과 박무택과의 우정을 그립니다엄홍길 대장으로부터 산을 배우고 싶었던 박무택은 지옥훈련을 거쳐 엄홍길 대장과 극한의 어려움을 견뎌내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됩니다.

    그런데 엄홍길 대장은 세계 최초 16좌 등정을 코앞에 두고 더는 산을 타서는 안 된다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이에 박무택이 대장이 되어 에베레스트를 등정합니다이 과정에서 박무택 대장은 동료들을 구하려다 조난합니다폭풍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베이스캠프에 있었던 어떤 누구도 그들을 구하러 오르지 않았습니다.

  

    책도 쓰며 가족과 삶을 즐기고 있었던 엄홍길 대장은 소식을 듣고 이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산을 오르기로 합니다그러나 많은 사람이 쓸데없는 도전이라며 말립니다명예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시체를 찾는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를 추운 그곳에 홀로 둘 수 없었던 엄홍길 대장은 아픈 다리에도 그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옵니다어떤 명예도 없는 도전다만 우정을 지키기 위한 두 달이 넘는 도전이었습니다이것을 계기로 엄홍길 대장은 박무택 대장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16좌 등반을 완주합니다.

  

    살다 보면 현실에 안주할 것인가아니면 새로운 길을 낼 것인가의 선택이 참으로 많이 찾아옵니다이때 현실에 안주하는 삶은 아무런 길도 내지 못하지만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사람은 새길을 냅니다그런데 그 길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시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내려오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길을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그리고 그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더 높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그들은 항상 이렇게 묻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행복인가?”

이 질문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길을 개척합니다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 메이즈 러너’(2018)는 실험용으로 기억이 삭제되어 한 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여기에서 토마스만이 길을 알 수 없는 미로와 무서운 괴물을 무릅쓰고 그곳을 탈출하려 합니다. 그런 그를 보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지금 자신들의 세상에서 계급을 정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이 둘의 투쟁은 끝이 없습니다다만 희생이 따르더라도 나가는 길을 찾게 된 토마스는 다른 이들도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세상의 틀에 갇혀 사는 학생들에게 책상 위로 올라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왜 이 위에 섰을까이 위에선 세상이 무척 다르기 보이지잘 알고 있는 거라도 다른 시각에서 봐라틀리거나 바보 같아도 반드시 시도해라.”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쫓겨나자 학생들은 교장 선생님의 위협에도 책상 위로 올라섭니다

 

    누군가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습니다지금 세상이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쫓고 있는 돈이 행복의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고 여기십시오그래서 행복에 대해 다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은 결국엔 주님의 길을 고르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다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세례자 요한은 다른 사람이 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벗어나 그것과 반대되는 광야의 삶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지금의 행복이 최선인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을 위해 찾아간 그 길로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십니다그리고 그 길은 다른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행복을 만나게 하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https://youtu.be/5LP7BmruKDw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며칠 전입니다너무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교육이 있어서 연수원으로 갔습니다연수원에서는 숙소를 배정하게 됩니다저의 방은 317호 였습니다지나가며 보니 다른 방들은 독방이거나두 명이 지내는 방이었습니다제방은 317호인데 2층에 있었고어렵게 찾아가보니 그곳은 20명이 한 방에 있었습니다그나마 저의 침대는 아직 자리에 없었습니다잘 모르는 사람들과 20명이 함께 지내는 것도 자신이 없었고아직 침대도 없었기에 자리를 배정한 담당자를 찾아갔습니다담당자는 제가 잘 아는 선배였습니다선배는 곧 침대를 갖다 놓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불편하지만 며칠만 참으라고 하였습니다아마 다같이 20명이 사용하는 방이었다면 저는 그렇게 불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유독 저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불만이 컸던 것 같습니다돌아보니 사제라는 이유로 특별한 대접을 받은 경우가 많았습니다성지순례 중 버스에 탑승할 때면 내리기 쉬운 맨 앞자리에 앉았습니다다른 사람들은 불편을 감수하고 두 명 씩 침실을 배정받지만 저는 독방을 사용했습니다식사를 할 때도 맨 먼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봉성체를 갈 때도환자 방문을 할 때도 봉사자들이 차량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은 그동안 제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살았음을 돌아보게 한 것 같았습니다.

 

며칠 전 카톡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를 받았습니다어머니가 큰 아들의 집으로 갔는데 아들의 집 비밀번호가 어머니의 집 비밀번호와 같았습니다큰 아들은 어머니가 비밀번호를 쉽게 기억하도록 어머니의 집과 같은 비밀번호를 만들었습니다둘째 아들의 집도 같은 비밀번호였습니다어머니는 아들의 집으로 갈 때는 적어도 비밀번호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었습니다물론 아들의 결단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준 며느리들의 배려도 있었습니다어머니라면 언제든 오실 수 있도록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현실입니다아파트의 이름이 대부분 어려운 외국 말인 것은 시골에서 어머니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미국도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려고 하였습니다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긴 장벽을 설치하였습니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친지들이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교황이 된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람페두사였습니다아프리카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이 도착하는 항구였습니다교황님의 방문 후에 유럽은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국경을 열어 주었습니다교황님은 북한이 초청을 하기만 하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하셨습니다교황님의 방북으로 북한의 신앙의 문도 활짝 열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이는 인종혈통세대이념사상신념신분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우리는 지난 2년간 코로나19의 팬데믹을 겪으면서 장벽과 차별로는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연대와 협력 그리고 나눔과 사랑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백신과 치료제는 공유제로 국가와 빈부의 차별 없이 나누어야 합니다인류가 함께 노력하여 코로나19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나가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스크를 벗고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결코 아닙니다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우리는 줌으로써 받고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양승국신부-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신 하느님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초 두개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 만큼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주님의 빛이 환히 비춰지길 희망하며 기쁨의 성탄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빕니다.

 

피아노 조율은 언제 해야 합니까? 피아노 조율은 ‘연주가 끝난 다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연주 앞에서 조율’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산 다음에 후회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전에 우리의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데 함부로 헛되이 삽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여정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나를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신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상적인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들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보리라” 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곧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삶의 양식을 바꾸고 하느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분명 광야에 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 보따리를 바꾼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남의 잘못은 잘 보지만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는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결국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것입니다. 사실 고해성사를 자주 보지 않는 사람은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출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보며 외모를 단장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춰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혼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한번 살펴보십시오. 우리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골이 패인 것은 없는지? 혹 골이 있다면 그 골을 메워야 합니다. 서로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그를 ‘나와 틀리다’ 고 단죄하며 거리를 둡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분명, 골짜기는 메워져야 합니다. 산과 언덕들도 낮아져야 합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었다면 겸손함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그 마음에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던 그 모습으로, 간음한 여인의 처지에로 내려가서 허리를 굽혀 땅 바닥에 무엇인가 쓰시던 그 예수님의 마음에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굽은 데는 곧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굽으면 모든 사람과 사물이 다 굽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이 굽으면 그 그림자도 굽어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마음을 곧게 하십시오. 시기와 질투로 보면 증오와 저주를 낳게 되고 영혼이 망가집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고, 인정해 주는 올곧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거친 길은 평탄케 해야 합니다. 거친 마음은 상처만 남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화는 불입니다.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할 수도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이규경). 잘못된 열심은 영혼에 상처만 남긴다고 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기대로 화를 키워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리아의 성 이사악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회심하는 이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한두 번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매일이 마음을 돌이키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기 드러날 때 고백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자백입니다. 회개는 자발적인 것입니다. 아무도 내 죄를 알지 못하고 추궁하지 않는데도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 고백하는 것입니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리피1,10-11). 하고 권고합니다. 따라서 하루하루가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나무랄 데 없는 축복의 날 되길 희망하며 ‘내가 바라는 하느님’을 기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로 거듭날 수 있는 한 주간되길 바랍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 부인에게 성경을 한 권 주면서 하느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부인은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위로를 받고 그것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신앙을 비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남편이 집에 들어와 아내의 손에 있는 성경을 빼앗아 난로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어디 네 성경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난로 속의 재를 치우다가 타다 남은 성경 몇 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딱 들어오는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4장 3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심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있는 말씀에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오늘 복음의 끝부분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3,6)는 말씀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준비를 갖추고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일까?’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를 생각하며 아기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회개의 핵심은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고 용서해 주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의 추구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지나치게 세상과 땅만 바라보지 않고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교부 떼르뚤리아노는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죽는 날까지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도입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께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다시 발견하는 데서 얻어지는 결실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너그러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끊임없는 회개의 원천”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

 -송영진신부-


“......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2-6)”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또 요한복음에는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라는

세례자 요한 자신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31).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맡기신 임무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일, 또 사람들을 메시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

메시아 예수님을 잘 맞아들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에서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라.”이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과 위선을 버려라.”이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죄 때문에 비뚤어지고

거칠어진 생활을 바로잡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여라.”입니다.

 

1)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꼭 필요했을까?

그냥 예수님께서 곧바로 활동을 시작하셨어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먼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 쪽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배려’ 라고 생각됩니다.

만일에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등장하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당신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하셨다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먼저 와서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준비시키는 것이 사람들을 위해서 훨씬 더 유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다는 점이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요한 1,35-39).

(그렇다고 해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과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모두 거부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자 요한을 먼저 보내셨지만,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였습니다.)

 

2) “그 당시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예언자가 미리 와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신 뒤에는 세례자 요한 없이도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그의 회개 선포를 듣고 있는가?”

예수님 승천 후에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널리 퍼졌습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처음부터 인류 구원을 계획하셨던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는 점에서도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오늘날에도 중요하고,

또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려면 회개부터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회개 선포를 듣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회개는 아직도 미완성인 상태라는 점에서,

그의 회개 선포는 더욱더 필요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는 그 자신의 선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포입니다.

 

3)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회개 선포가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지만,

신앙인들이(신앙인들부터) 더 많이, 더 모범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죄를 뉘우치는 일만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의 삶을 일치시키는 일이 회개입니다.

따라서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고, 세례를 받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더욱더 ‘끊임없이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는 종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4) “구체적으로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 보는 것으로 회개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삶 전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한다고 생각만 하는 것과 말만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고,

실제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말했는데(루카 3,8),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0-14).>

삶 전체가 변화되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에,

회개는 한 번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회개이고,

벗어난 다음에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회개이고,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5) 회개는 대림 시기나 사순 시기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인생 여정 자체가 회개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회개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때가

회개가 완성되는 때입니다.

 대림 제2주일: 다해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오시는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회개’이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주시는 구원은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마음 자세를 온전히 새롭게 바꾸어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신의 순수성을 되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두 필요로 하는 구원이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추는 바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변화하는 것으로 하느님 앞에 회개라고 할 수 있다.

 

바룩 예언자는 참된 회개는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바룩 5,7) 되게 하는 데 있다. 즉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주님을 맞아들이고 모시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들을 없애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5,7) 나아갈 수 있다. 하느님 안에 우리가 머무르는 삶이 될 때, 참된 해방을 알게 되고 또한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3,1-6: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루카 복음은 좀 지나칠 정도로 개개 인물들을 역사를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의 신학적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께서 이러한 보편적인 역사 안에 들어오셨고, 이제 그분이 역사의 중심이며, 역사에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보편적인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6절)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서 주님의 오심에 대비하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내적 쇄신을 의미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내적 쇄신을 실현하는 성사적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3절). 이 세례는 근본적으로 마음의 ‘회개’를 불러일으켰고, 그 마음의 회개는 ‘물’이라는 상징을 통해 표현되었다. 여기서 물은 인간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해주며 하느님으로부터의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주의 길을 마련하여라.”(4절)는 것은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윤리적 차원에서의 큰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하다. 낮아져야 할 산들은 바로 복음 첫머리에 말한 티베리우스, 헤로데 그리고 다른 정치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이기주의, 특권의식, 권력의 남용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메워져야 할 ‘골짜기’들과 ‘언덕’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불신과 실망과 낙담과 운명론과 체념에 빠져있는 태도를 말한다. 즉 우리의 마음 안에 주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데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비우고 내적으로 모든 면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윤리적인 면에서 항상 새롭고도 신선함을 갖추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영원한 과제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장애를 가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이 시작하신 ‘훌륭한 일’을 완성하실 수 있다. 이러한 완성은 이렇게 순화된 영적 감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신앙인은 이 순화된 영적 감각을 통하여 ‘선’을 알고 행할 뿐 아니라, ‘가장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어, 사랑과 정의 안에 계속해서 성장해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필립 1,10-11)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날’을 두 번(필립 1,6.10)이나 반복하고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날에 우리는 우리의 성덕과 정의의 결실을 내어놓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대림은 항상 우리를 깨어있게 하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구원에 다가서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있는 높은 언덕들인 이기주의나 특권의식 또한 권력의 남용 등, 골짜기들인 실망과 좌절 그리고 우리 사이의 불신 같은 것을 없애는 우리 자신의 내적인 준비와 사랑의 실천이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더욱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안에 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시간 속에서 가장 옳은 일을 가려서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 6)

-한상우신부-


먼저 사람이
있고 구원이
있다.

모든 출발은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출발도
도착도
사람일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사람 앞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

너무 중요한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다.

마땅히
당연히
누려야 할
사람의 존엄함을
다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손수 빚어
만드신
사람들이다.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신다.

사람과 함께
살려고 사람이
되셨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이시다.

서로에게
머리를
숙여야 할
하느님의
사람들이다.

사람이
구원이다.

사람으로 사는
기쁨을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다.

소중함을
다시
배운다.

존중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인권과 구원은
사람과 사랑처럼
연결되어 있다.

구원은
맞바꿀 수 없는
우리 인격을 향한
가장 좋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보신다.

하느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현실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들이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소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전해야 할 것은
사랑과 존중이다.

무시할 수 없는
그래서
사랑해야 할
사람의 삶이다.

사람의 길에
대림이 있고
사람의
성탄이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

 -김찬선신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길을 곧게 마련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퍼뜩 드는 느낌은 당황과 난감입니다.

우선, 주님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말부터

이미 와 계신데 무슨 오실 것을 기다리라는 것인지,

다음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말도

주님께서 길이시고 주님의 길은 주님이 내시는 것이지

왜 우리가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어떻게 낼 수 있다는 것인지.

 

그러나 차분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 노래 하나가 떠오르고

다음으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노래는 우리 성가 173번, "Veni Jesu, Amor Mi"인데

직역을 하면 '나의 사랑이신 예수님, 오소서'라는 뜻이지만

우리말로는 '사랑이신 예수님, 내 마음에 오소서'라고 의역하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 동네까지,

아니, 우리 집 문앞까지 그리고 우리 마음의 문 앞까지 오셨습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집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은 우리가 열어드리지 않으면

특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입니다.

 

곧 주님은 우리 마음의 문을 우리가 스스로 열도록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자유를 존중하신다면

우리도 주님의 그 숭고한 사랑을 존중해야 하는데

우리는 종종 그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니 문제인 거지요.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개떡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 숭고한 사랑을 감히 개떡같이 여기게 합니까?

 

그제 얘기했듯이 눈에 뵈는 것이 없게 만드는 교만이고,

교만에서 비롯된 지독한 자기애自己愛입니다.

교만은 자기밖에는 아무도 사랑하지도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을 포함한 다른 누구의 사랑도 우습게 여깁니다.

 

또 제 잘난 맛에 살기에 주님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을 뿐 아니라

주인 노릇하러 오시는 주님은 거북하고 그래서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높은 산이 낮아지라는 것은

교만의 높은 콧대를 꺾으라는 말씀과 다름 없습니다.

 

그러면 골짜기는 메우고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교만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두려움이나 죄책감이나 비하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하느님 사랑에 자신을 노출시키기보다 자기 안으로 숨어들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느님 사랑을 왜곡하는 것도 문젭니다.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벌 주시는 주님이라면 오시는 것이 두렵겠지요.

주님이 오신다면 아담과 하와처럼 서둘러 숨어버리겠지요.

 

그러니 이쪽과 저쪽으로 위로 아래로 굽어진 마음을 펴는 것이

이 대림절에 우리가 해야 할 준비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말씀 나누기 - 2021년 12월 5일 대림 2주일-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ofmkorea.org)

-고도미니코 OFM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2월 9일 대림 제2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