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Margaret K 2021. 12. 8. 07:36

2021년 12월 8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생겨났다. 이러한 믿음은 여러 차례의 성모님 발현으로 더욱 깊어졌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성모 마리아의 무죄한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1838년 교황청에 서한을 보내 조선교구의 수호자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로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허락하면서 요셉 성인을 공동 수호자로 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요셉 성인과 함께 공동 수호자로 모시고 있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이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암벽을 오를 때 온 힘과 정신을 다 기울이지 않고 절반 정도만 쓴다면 어떻게 될까요? 큰 위험을 겪을 수 있고, 암벽을 제대로 오를 수 없을 것입니다. 환자를 수술하고 있는 의사 선생님이 온 힘과 정신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환자가 큰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부차적인 것에 오히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로 외면해서는 안 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을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께서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다면, 우리 모두의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은 구약성경에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보잘것없는 촌락이었고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도외시된 촌락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예언자도 배출시키지 못한 곳, 이곳에서는 하느님 운운할 필요도 없는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무슨 좋은 소식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배출될 것이라는 엄청난 소식을 가지고 하느님의 심부름꾼 대천사 가브리엘이 연약한 10대 소녀 마리아를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에게는 그들의 인생 자체가 치욕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결혼해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녀 잉태의 소식을 듣습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불미스럽고 치욕스러운 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들 사이에서 치욕스러운 것을 하느님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일을 완수하는 데 사용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약속을 보증하는 표로 하느님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은 하지만 부도덕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때 당사자의 온전한 자기 포기와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과 완전한 겸손이 요구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준을 따랐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을 따르면서 주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하고 있나요?
교묘하게 속이는 것보다는 서투르더라도 성실한 것이 좋다(한비자).

나의 성실함은 어떠합니까?

학창 시절에는 공부 잘하는 똑똑한 친구가 부러웠습니다. 똑같이 놀았는데 이 친구는 늘 좋은 성적을 받는 것입니다. IQ도 150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우는 것도 잘하고, 뭐든 응용력이 뛰어났습니다.

이 친구가 지금도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동창 모임에 참석하지도 않고, 소문에 의하면 아주 힘들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당시에는 그 친구를 부러워했지만, 지금은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똑똑함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끈기가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실함을 가지고 노력하면 어떻게든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자기의 머리와 잔재주를 믿는 사람은 그러한 변화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성실함은 어떠합니까? 

 내가 하느님을 생각 않으면 세상도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은총이 가득한 이여기뻐하여라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한 말이 이를 증명해줍니다은총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씻겨지지 않으면 가득할 수 없습니다성모님은 예수님이 피를 흘리기 이전부터 이미 은총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성모 마리아를 깨끗이 하실 수 있으셨다면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피 없이 유일하게 깨끗하시어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고 죄짓기 이전의 하와의 상태처럼 주님과 함께 거니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이 원죄가 없으셔야 하는 이유는 만약 그 인성을 예수님이 물려받으시면 예수님도 원죄에 물들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 죄를 위한 흠 없는 제물이 되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그리스도께 당신 몸을 주실 새 하와인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하셨어야 합니다그러려면 이 계획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인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돼야 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되어 죄에 물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 원죄가 없으신 특징은 어디서 드러날까요바로 보십시오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순종에서 드러납니다하와는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했고 그 후손들도 원죄를 입어 하느님의 뜻에 불순종하지만 성모 마리아만큼은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종의 중간에 성모님께서 하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일이었습니다이를 기도의 단계에서는 묵상이라고 합니다지금 성모 마리아께서는 천사가 일러준 하느님의 말을 깊이 묵상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묵상하셨습니다. “이 인사말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이 묵상이 없으면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순종이 나오지 않으면 주님 종의 자격을 잃고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묵상의 소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나오는 감정이 감사입니다저희 어머니에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께서 저 나병 환자들도 사는데넌 왜 못 사니?”라고 하신 것처럼주님의 말씀은 불만에서 감사로 나를 이끕니다감사하는 마음이 나와야 보답하고 싶어 주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자동으로 자아에 순종하게 되어 망하기 때문입니다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상태처럼 되는 것입니다이것이 우리에게 원죄로 주어져 있습니다.

     

    ‘박화영’(2017)이란 영화가 있습니다박화영의 집에 모인 가출 소년 소녀들은 모두는 매일 라면을 먹고매번 담배를 피우고 동갑인 화영을 엄마라고 부릅니다

화영에게는 단짝인 무명 연예인 친구 은미정이 있습니다미정은 화영을 엄마라 부르며 갖은 일을 다 시켜 먹습니다화영도 미정이 만큼은 아껴주고 싶습니다그녀는 모든 아이에게 이용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엄마라고 불리고픈 화영은 미정의 남자친구인 영재에게 심한 구타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미정의 엄마로 살아가려 합니다그런데 나중에 미정과 영재가 저지른 살인사건까지 자신이 다 도맡아주지만결론은 미정이 끝까지 화영이를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박화영이런 인물은 왜 탄생한 걸까요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화영은 어른들만 보면 대듭니다엄마가 돈을 안 부쳐줄 때는 새 남자와 사는 엄마에게 욕을 퍼부으며 돈을 달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 모든 친구에게 이용만 당하고 교도소까지 갔다 온 화영은 또 가출한 소녀들을 자신의 집에 재워주고 라면을 끓여주며 계속 엄마 역할을 하려 합니다그러며 말합니다.

    “니들은 나 없으면 어쩔 번 봤냐!”

  

    부모와 관계가 안 좋은데 다른 이들과 관계가 좋을 수 없는 이유가 이것입니다사랑은 받아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먼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사랑을 줄 수 있는 분은 사랑으로 나를 낳고 창조하신 분입니다문제는 그분이 나와 함께 있다고 믿고 그분의 사랑을 묵상할 때 사랑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와 함께 산다고 부모의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부모의 사랑을 묵상해야 합니다부모의 굳은살을 보아야 하고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보아야 합니다묵상하지 않고 함께 살기만 하면 사춘기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한다여기고 친구들을 사귀어도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기만 할 뿐진정한 관계는 맺어질 수 없습니다나이가 들어 자신도 부모가 되고 부모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이웃들과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애완견과 반려견의 차이를 아십니까애완견은 주인이 장난감처럼 여기는 개라는 뜻이고반려견은 주인이 사랑하는 개라는 뜻입니다박화영은 친구들에게 애완견이었습니다애완견이 된 이유는 부모가 없기 때문입니다친구들은 화영이가 자신들이 아니면 갈 곳이 없음을 압니다그래서 그녀를 묵상하지는 않았습니다그 이유는 박화영이 어머니를 이용할 뿐 묵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묵상하지 못하면 이웃도 나를 생각해주지 않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을 묵상하는 이는 언제라도 떠날 사람이 되기에 사람들이 붙잡으려고 묵상하는 사람이 됩니다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나무 뒤에 숨는 것과 같습니다성경에서 나무는 인간을 상징합니다그러나 그 나무들이 내 죄를 피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이용만 할 뿐입니다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주님의 뜻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묵상하면 감사하고 감사하면 그분께 순종하게 됩니다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신 것과 같습니다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러 가시는 길은 묵상한 자의 발걸음입니다이용당하지 않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아 그 사람에게 당당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으로 말씀을 잉태한 이의 모습이고이 모습이 성모님처럼 원죄 없는 이의 모습입니다내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세상도 나를 생각하지 않습니다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묵상하면 세상도 나를 묵상합니다.


 https://youtu.be/5Khnmykp4z8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2007년 본당신부를 할 때입니다제가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외부 일정이 많아지면서 주교님께 보좌신부님을 청했습니다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들어주셨고본당은 처음으로 보좌신부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1달 전부터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습니다방을 청소하고침구류를 마련하고가전제품도 갖추었습니다성당입구에는 환영의 현수막도 걸어놓았습니다저 역시도 기쁜 마음으로 보좌신부님을 기다렸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성모님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가졌습니다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신 성모님은 특별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 특별함은 성모님의 깨끗하심과 순결하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첫 번째 여성인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 죄를 지었다면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에 죄가 없이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이러한 신심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되었습니다.

 

1854년 교황 비오 9세는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그녀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단일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미리 입어(intuitu meritorum) 원죄의 물듦(labis originalis)에서 깨끗이 보호되셨다는 교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되었으므로 모든 신자들로부터 굳건하고 영구히 신봉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선포하며 정의하는 바이다.”라고 선포하였습니다교황님의 선포 4년 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성모님이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였습니다성모님은 18번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셨고마지막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이(Immaculata conceptio)”라고 소개하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성당을 짓도록 명했습니다또 땅을 파서 샘물을 마시도록 했습니다루르드는 세계 어느 순례지 보다 어머니 품에서처럼 포근하게 기도에 잠길 수 있는 곳입니다성모님의 발현 이래 이 곳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신학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신앙입니다성모님은 하느님과 관계를 회복한 점에서 참된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하겠습니다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고성모님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응답은 배우자인 요셉과의 관계 회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했지만 약혼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나자렛의 성가정에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였습니다예수님의 탄생은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며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되었습니다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멀리해 주십시오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을 체험하였고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잘되면 내 탓이고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시대를 탓하고가정을 탓하고이웃을 탓하고친구를 탓하면 진정한 자신을 보기 어렵습니다삶의 기준이 성공과 권력 그리고 재물이라면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마련입니다작은 꽃은 절벽에 피어도길가에 피어도비와 바람을 맞아도 무엇을 탓하지 않습니다존재하는 것만으로 하느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나의 존재를 위해서 우주는 150억년을 준비했습니다얼마나 큰 기쁨이고영광이겠습니까우리는 성모님에 대해서 많은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하느님의 어머니교회의 어머니라고 이야기 합니다평생 동정이셨고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 합니다하지만 그런 모든 영광과 칭송은 결과입니다성모님의 영광은 하느님께 대한 순명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습니다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의탁하였습니다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들 또한 빛의 자녀입니다하느님께서는 온 우주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님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교리는 오랜 연구와 반박, 옹호가 거듭되어 왔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한 대한 초기 교부들의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요아킴과 안나의 거룩한 딸인 마리아는 성령의 신방에서 티 없이 살았기에 하느님의 신부가 되고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강생을 위해 마리아의 영혼을 준비시키셨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몸이 거처하실 수 있도록 가꾸어진 순결한 나무입니다. 순결하며 거룩한 영혼과 육신의 소유자 마리아는 가시덤불 속에 핀 한 송이 백합화 같습니다.”

  

성모님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성모님에 대한 탁월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8세기 수도자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어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서 흘러나오는 큰 선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선물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육체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욕정과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마리아만이 은총이 가득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자유롭습니다. 마리아는 단 한 번도 당신의 시선을 창조주로부터 뗀 적이 없습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장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보존되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무염시태 교리는 너무나 큰 신비와 베일 속에 가려진 알쏭달쏭한 교리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교리라고 합니다.

  

무염시태 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원죄없이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훨씬 이해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무염시태 교리는 좀더 현실감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1854년 12월 8일,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교의’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해, 성 안셀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이는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가득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이렇게 찬양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그렇습니다.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이처럼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저희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써 저희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또한 당신을 건네줄 수 있는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입당송에서 부른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정녕 마리아는 구원받은 인간의 전형이십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는 우리 안에도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마음이 있음을 보게 합니다.

아니 그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마음의 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큰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깊은 내면의 영역에는 죄로 물들지 않는 거룩하고 흠 없고 순수한 하느님의 모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그곳에는 죄가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요,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우리 안에 거처하는 거룩한 영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안에는 ‘빈자리’가 있고, 그 자리는 하느님만이 차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에스트로 엑카르트가 말한 ‘영혼의 정수’인 ‘심연’이요, 요한 카시아누스가 말한 ‘마음의 순수(puritas cordis)’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죄에 물들 수 없는 그분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자리로 돌아가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세계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에페 1,4)

 

<오늘의 말·샘 기도>

 

“은총이 가득한 이” (루카 1,28)

 

주님!

당신 말씀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당신 사랑을 품고, 은총이 가득합니다.

그 말씀에서 제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사랑에서 제 생명이 솟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언제나 함께 계시는 당신이 진정 저에게는 은총입니다.

아멘.

안 되는 것이 없다

 -반영억신부-


세상은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또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돈을 가지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돈으로 하느님을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많은 돈이 하느님을 멀리하게 만듭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돈이 하느님을 만나는데 결정적으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 재물을 따르기보다 “불가능한 일이 없는” 하느님께 마음을 두어야겠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답은 감당하는 책임과 희생이 들어있습니다. 그 바탕에 다시 ‘아기를 잉태’ 하게 되리라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천사는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하며 명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늙은 나이에 임신한 엘리사벳의 잉태 소식을 전하며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말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유의지로 응답하였습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처녀가 임신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결국, 구세주의 잉태는 하느님의 은총과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잉태되고 또 태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응답을 통하여 세상에 구세주를 낳아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통해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훌륭한 연장입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려 계산하고 앞으로 닥칠 일을 고민했더라면 아마도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배가 불러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믿어주기나 할까요?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쫓겨나든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에게 이루어 주소서’ 한 것은 곧 자신의 모두를 바친 것을 의미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의 뜻을 겸손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봉헌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을 차지’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그래도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순명의 모범을 보이시고 실제로 구원을 이루셨으니 우리도 일상 안에서 성모님을 생각하며 단호한 결단과 더불어 온전한 봉헌의 삶으로 한 발 나아가야겠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겸손과 순명으로 하느님을 잉태 하셨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니 역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다시 오실 것이므로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의 구원이 성취될 것입니다”(성 루도비꼬).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먼저 겸손과 순명의 어머니 마리아께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예수님께로, 예수님을 위하여 어머니께로!

 

어떤 사업가가 신부님께 와서 물었답니다. “신부님, 제가 1억 원을 봉헌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신부님께서 대답하셨답니다. “그거 한번 시험해 봅시다!”

 

봉헌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나의 이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봉헌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재물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예물이 아니라 뇌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결코, 뇌물을 즐기지 않으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위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희망하였고 우리 모두를 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 참된 봉헌을 통해 우리에게 구세주를 낳아주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봉헌의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송영진신부-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 즉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죄,

그리고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한 교만죄입니다(창세 3,1-6).

우리가 원죄가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우리도

지은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영향력 안에서,

또는 죄에 물든 상태에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시편 51,7).”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원죄는 세례성사로 씻어집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 5,18-19).”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례성사를 통하여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

즉 원죄 없는 상태가 되지만, 성모님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잉태 첫 순간부터 ‘거룩하고 흠 없는’ 분이셨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 1,28).” 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말은, 성모님이 잉태 첫 순간부터

‘은총이 가득한 상태’였음을 나타내고,

다시 이 말은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이라는 교리에 대해서, “성모님이니까...” 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는 우리 교회의

교리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리들은 전부 다 우리 구원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예수님을 위한 일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우리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하느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는 말은,

인간들을 ‘원죄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거룩하고 흠 없는’ 상태를

미리 보여주는 일이고, 우리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이 우리도 그렇게 승천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일인 것처럼,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도 우리도 그렇게

‘원죄 이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서 잃은 것은

에덴동산에서 살 자격과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3-24).”

이 이야기는, 만일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에덴동산에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리면서

영원히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잃어버린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일,

또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을 되찾는 일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첫 부분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것들을 되찾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이야기는 성경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고,

서론과 결론처럼 이어져 있는 사실상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따로 기록되었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책입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2ㄴ-4ㄱ).”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인간의 인생 자체가 저주받은 것이 되었는데,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인생은 하느님의 축복만 가득히 받는 인생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고

사람들은 그 나무에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언제든지 생명나무로 가서 열매를 마음껏 따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서 살게 되었는데,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로 되돌아가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자기 자신이 용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셔서 우리에게 용서의 은총을 주시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희생으로,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가는 길과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우리를 위해서 활짝 열어 놓으셨고,

그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따라서 그 나라로 되돌아가는 여행입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묵시록에서 묘사하는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삶에 대한 보증수표 같은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심’은 원죄 이전의 완전한 상태를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고,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평생 충실하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서 원죄 없는 상태를 유지했고,

마침내 승천으로써 그 상태를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기만 한다면.....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우리는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신비를 입으셨듯이 나약한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하여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마리아의 자세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이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체적인 실현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야고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게 되며,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즉시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된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어머니 되는 특혜가 부러우면 우리도 어머니가

-김찬선신부-

 

이 축일의 깊은 뜻은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선재先在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시는 계획도 미리 정해졌고

따라서 어머니 되실 분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 괜찮은 인간 예수를 그리스도 삼으신 것이 아닌 것처럼

여인 중에 참한 여인을 뽑아 예수님의 어머니 삼은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느님 구원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육화하시고

마리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나신 것인데

이 그리스도의 어머니께서 원죄 없으셔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이 축일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상이 제가 예전 강론 때 정리한 바 있는

성모무염시태 축일의 교리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측면에서 의미를 보겠습니다.

곧 성모님만이 태어나시기 전부터 원죄 없으셨다는데

이것은 성모님만의 특혜가 아닌가 하는 관점입니다.

 

누구만의 특혜라고 하면 우리는 예민해지고 특히

요즘 정의와 사랑보다 공정을 더 중시하는 젊은이들은 더 그러겠지요.

 

그러니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미안하게도 '아니'가 아니고 특혜입니다.

성모 마리아께만 주어진 특혜 맞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만 주어졌지만 마리아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에게만 주어진 특혜가 있는데

그것은 대통령이 모두를 위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고,

그러므로 그 특혜는 개인적으로 쓰여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마리아에게 주어진 특혜는 모든 이를 위한 특혜,

오늘 서간의 바오로 사도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고 하듯

모든 영적인 복의 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주어진 특혜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이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낳아야 할 사람이고

그래서 낳은 당신의 아들을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여드레만에 성전에서 봉헌할 때 예수를 당신 아들이 아닌

공적인 아들로 봉헌하셨으며 그래서 시므온은 이 아들이

많은 사람들을 일으키기도 하고 쓰러트리기도 할 것이며

그래서 마리아는 꿰찔리는 고통을 겪을 거라고 예언하였지요.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할 때 거기서 아들을 잃었을 때,

왜 부모의 속을 썩이냐고 나무라자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오히려 나무람을 들었을 때,

이때 다시 마리아는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내어드려야 했지요.

 

그리고 공생활 중 한번 아들을 찾아가 어머니가 왔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당신을 둘러싼 제자들과 모두를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라고 할 때 또 다시 독점적인 어머니 특권을 모두에게 내어줬지요.

 

이처럼 마리아는 아들을 하느님과 모든 사람에게 내어드렸으며

그럼으로써 아들이 모든 이를 위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게 했지요.

 

언젠가 한 여인이 당신을 배었고 당신에게 젖을 물린 어머니를

복되다고 하며 부러워하자 예수께서는 그 여인도 마리아처럼

당신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특혜가 부러우면

우리도 그분의 어머니가 되면 되고 또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마리아처럼 해야 한다는 것, 곧

내 아들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내줘야 하고,

내 아들의 어머니만 되겠다는 것도 포기해야 하며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함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8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