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 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12. 10. 07:48

2021 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오 11,16-19)

 

 “To what shall I compare this generation? 
It is like children who sit in marketplaces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mour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야곱 집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신 주님의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평화가 강물처럼 넘실거렸으리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당신께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 다닐 때는 참 많은 놀이가 있었습니다. 몇 달 전에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에 등장했던 놀이는 모두 제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뽑기 게임,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 게임 등등…. 그 밖에도 많은 게임으로 심심한 줄 몰랐습니다. 워낙 게임을 같이 할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참고로 한 반에 70명 이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할지 고민하며 심심해할 때가 있기는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모이지 못했을 때, 서로 의견의 일치가 되지 않았을 때는 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 할까?”라고 제안을 했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다른 친구가 “그러면 이거 할까?”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합니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는 그냥 헤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냥 집에 가자.”라는 말에 하나둘씩 집으로 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장터에서 혼례잔치 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반응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장례 놀이를 제안했습니다. 역시 반응이 없습니다. 어떤 놀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흥미를 잃은 세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도, 예수님의 기쁜 소식에 대해서도 그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떤 말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그 안에서 함께 하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온갖 불평불만으로 힘들다고만 말합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들은 어디에 흥미를 느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이사 48,18.19)

주님의 계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계명은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평화와 의로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이 모든 은총이 우리의 후손들에게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흥미를 느끼고 있나요? 세속적인 것에 대한 흥미가 너무 많아서 주님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교회와 주님 말씀을 외면하는 지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타인과 함께 타인을 통해서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위대한 것이 탄생한다(생텍쥐페리).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우리를 커다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즉, 기술에 기반을 둔 현대문명은 모든 것과 모든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 거짓임을 깨닫게 해 준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알려졌을 때, 일반적으로 앓는 독감보다도 훨씬 약한 바이러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그래서 곧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2년이 거의 지나간 지금도 불안함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전능하다고 생각했던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생각도 스스로 전능하다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더 많은 것을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도 함께 이겨낼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지혜로운 자를 사랑하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통로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도 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데, 삼구(세속-육신-마귀)를 벗어던지는 것이 행복임을 아는 ‘지혜’가 아니면 사랑의 실천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이 지혜를 전하는 역할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삶은 실로 거칠고 힘들어 보이기만 합니다. 그래서 돈을 좋아하는 마음,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교만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기 싫어하는 이들은 여러 핑계로 세례자 요한의 지혜를 따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기합리화를 이렇게 합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마태 11,18)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지혜, 곧 회개의 세례를 받아들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세대의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삼구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세례자 요한을 거쳐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 때문에 변하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과 머물러야 합니다. 사람의 변화는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변화된 사람과 머무를 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물 위를 걷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라면 어떨까요? ‘하느님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신 분이 물 위를 걸으면 시도할 용기가 납니다. 그 시도 안에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됩니다. 말로만 들어도 안 되고 인간이 아니어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행복을 사는 사람과 머물 때만 증가합니다.

 

    지혜는 지혜로운 자와 머물 때 성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디에 머무십니까?”라고 물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와서 보아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배운 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하는 사람과 함께 머무는 것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는 우리가 잘 알듯이 이탈리아 표준어의 시발점이 된 『신곡』(Divina commedia)을 쓴 사람입니다. 『신곡』은 단테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까지 올랐으나 정치적 격변으로 추방당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유랑하다 라벤나에서 사망하기까지 자신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랑생활을 하며 지은 이 책은 ‘지옥-연옥-천국’의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히 지옥은 35살(당시 평균 연령이 70세) 피렌체의 최고 공직인 프리오리가 된 시점에서 ‘삼구’(三仇)로 길을 잃고 있었던 자신을 나타냅니다. 

    지옥의 입구에서 그는 세 무서운 동물을 만납니다. 표범(육욕)과, 사자(권력욕)와, 암늑대(재물욕)가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만든다는 교리를 표현한 것이고, 자신이 그런 처지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옥을 거쳐 연옥에서 천국으로 갈 때, 그를 천국까지 인도하는 이는 ‘베아트리체’(Beatrice)라는 여인입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9살 때, 그리고 18살 때 딱 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그는 평생 그녀를 자신의 연인으로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9살 때 그녀를 본 순간을 그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의 딸이 아닌 신의 딸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감히 그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18살 때 다시 한번 천사와도 같은 그녀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부유한 집안으로 시집을 갔고 불행히도 1290년 향년 24세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만남에서는 잠깐 대화를 나눕니다. 단테는 이미 1283년 다른 여인과 결혼한 상태였고 3남 1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단테는 단 두 번의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음을 말하기 위해 『새로운 인생』(La vita nuova; 1295)이란 책을 씁니다. 그 이후에 10년 동안 세속-육신-마귀에 빠져 지옥의 삶을 살기는 했지만, 자신을 천국으로 이끌어준 사람은 그 여인이라는 확신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그녀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완전히 황홀경에 빠져서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외로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이 고상한 여인에 관한 생각에 빠져들었고, 그녀를 생각하면서 달콤한 잠에 떨어졌다.”

 

    자신의 아내인 ‘젬마 도나티’에 대해서는 어느 책에서도 일절 언급이 없던 그가 단 두 번 만난 여인에게 어떻게 그런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날 그녀의 의상은 매우 고귀한 색상인 예쁜 주홍빛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울리게 허리띠가 달리고 장식이 되어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 심장의 은밀한 방 안에 기거하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너무나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해서 가장 미세한 혈관마저도 더불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때부터 줄곧, 내 영혼과 결혼한 사랑의 신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과 결혼한 신이라 표현한 것이고 그녀를 심장에 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만큼 어떤 누군가를 심장에 받아들이면 그 누군가가 평생 그 자신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는 증거가 있을까요?

    그는 순수했던 시절, 자신의 심장 안에 들어온 그녀를 통해 다시 정화되어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입니다. 단테는 고귀한 사랑만이 그 사람과 함께 머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천국으로 안내할 수 있다는 지혜를 평생을 거쳐 베아트리체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을 사랑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세례자 요한이고 베아트리체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면 그분이 심장 안에 머물며 우리를 가난으로 이끌고 이어 사랑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나 천국을 체험합니다. 먼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그래야 행복하다고 삶으로 말하는 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신 그리스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라고 하십니다. 왜 우리는 요한과 예수님의 말씀에 무심할까요? 사랑하지 않아서입니다.

 

    내가 더 고마워하고 사랑하는 것과 머물게 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돈이나 쾌락, 명예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과 반대의 길로 이끄는 세상의 세례자 요한들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인 그리스도께로 여러분을 안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사라집니다.

 -조재형신부-


손님이 와서 모처럼 맨하턴엘 다녀왔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부르클린 브리지를 걸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맨하턴의 야경을 보았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잊은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Freedom means the opportunity to be what never thought we would be.” 자유란 전에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회를 의미한다는 뜻 같았습니다. 자유의 여신상을 관람하기 전에 박물관을 들렸습니다. 박물관에서는 대형 스크린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세워진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결코 해방 될 것 같지 않았던 노예들이 해방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의 힘입니다. 꿈을 찾아 이민 왔던 사람들이 신대륙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자유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교만과 만나면 방종이 됩니다. 자유가 욕심과 만나면 탐욕이 됩니다. 자유가 권력과 만나면 위선이 됩니다. 자유가 폭력과 만나면 전쟁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앙의 역사에서 보았습니다. 아담의 자유는 교만을 만나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습니다. 아합의 자유는 욕심을 만나서 나아만의 포도밭을 빼앗는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의 자유는 충실한 부하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인류는 여러 이유로 전쟁을 벌였고, 수많은 죽음을 양산하였습니다. 

유다는 그 자유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그 자유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바오로는 그 자유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자유는 사랑과 만나야 합니다. 자유는 정의와 만나야 합니다. 자유는 희망과 만나야 합니다. 그때 자유는 진리가 되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미쳤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한 번도 목숨 걸고 도전한 적이 없는 것이다.” 요한이 단식을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니까 마귀가 들렸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함께 먹고 마시니까 먹보요 술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습관과 타성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회개의 기회도 얻지 못하였고, 주님께서 전하는 복음의 기쁨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서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간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고,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두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 같아. 제 때에 열매 맺고, 잎이 시들지 않고,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보여 주는데,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와 같은 태도를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단식을 한 것은 ‘속죄와 회개’의 표시이고,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단식하는 그 자체만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시고, 술과 음식을 나누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보여 주는 것인데, 율법 학자들은 또한 그 뜻은 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는 것만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드러나는 현상을 보기보다는 그 현상에 담긴 깊은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십니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내가 주님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사람을 대할 때 욕심, 편견, 시기라는 안경을 쓰고 보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양승국신부-


복음서 전반에 걸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언행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의 얼굴은 절대로 경건하거나 엄숙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목이 뻣뻣하다거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로 붐볐습니다. 그분의 성품이 얼마나 소탈했으면 가시는 곳마다 아이들이 졸졸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대 지도자들처럼 어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재미있고 감동적이던지 강의를 시작하면 수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내면에 형성된 하느님 상을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혹시라도 그 하느님 상이 왜곡된 것은 아닙니까? 두려운 하느님, 처벌자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은 이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와 연민, 용서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등지고 떠나간 둘째 아들, 순식간에 유산을 다 까먹고 맨발의 거지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말없이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된 우리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걱정, 우리 죄에 대한 걱정, 종말에 대한 걱정은 이제 한쪽으로 밀쳐두길 바랍니다. 대신 인간미가 철철 흘러넘치는 따뜻하고 자상한 하느님, 그분이 차려놓으신 이 세상이란 잔칫상 앞에 기쁜 얼굴로 앉길 바랍니다.

 

그분께서 건네시는 감미로운 포도주를 우리 각자 인생의 잔에 담아 감사하며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단 한 번뿐인 ‘이승의 삶’에 최대한 감사하며 온몸과 마음으로 만끽하길 바랍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적응이 안 되었으면 유다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오랜 세월 메시아를 목 빠지게 기다려왔던 유다인들이 그린 메시아상은 한 마디로 대단한 메시아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꼬질꼬질한 이 세상의 현실을 한 단계 뛰어넘는 메시아,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초인(超人) 메시아, 이 부조리한 세상을 한방에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의 메시아, 오랜 인간의 소원을 넘치도록 충족시켜줄 기적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드러난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초라했습니다. 범인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밥 같은 것 안 먹어도 되는 메시아, 화장실도 안가는 고상한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다인들은 동네잔치 상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예수님, 세상 사람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엄청 실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메시아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인간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 하실까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이영근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 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 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를 넘어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 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이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부서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이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져 있습니다.

아니,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복음적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며 상대에게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소위 정치지도자들이 하는 일은 하느님 마음에 드실까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하느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내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때입니다.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는 이들이 참으로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리고 버림받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을 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 줄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참 신앙인은 세상이 아무리 흔들어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삶이 복음적인 삶이 될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1장18절에서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말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볼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3,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송영진신부-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 11,16-19).”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했을 때

아주 많은 사람이 그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5-6).”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 1,5).”

표현만 보면, 당시 거의 모든 사람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회개’는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만(또는 겉으로만)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또는 “삶을 완전히 바꿔라.” 라는 뜻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만으로는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삶이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는 하지 않으면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일은, 고해성사를 보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핑계를 대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의 엄격한 극기고행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라는 말은, ‘저자는 미쳤다.’ 라는 뜻입니다.

회개하지 않는(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세례자 요한이 미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탓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세례를 받았을까?

아마도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종말 선포’로 생각하고서

심판을 피하려고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것 같은데(마태 3,7),

처음의 그런 분위기는 별로 오래 가지 않고 금방 가라앉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 탓을 한 것은,

세례자 요한을 보내신 하느님 탓을 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저런 이상한 사람을 예언자로 보내셨을까?” 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자기 죄에 대해서 아담이 ‘하느님 탓’을 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12).”

이 말은, 아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열매를 따서 준 여자와

그 여자를 아담에게 주신 하느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회개의 출발점은 “내 탓이오!”입니다.

남 탓을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느님 탓을 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저자는 미쳤다.” 라고 말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미친 사람의 말이니 그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회개하기가 싫어서, 또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싫어서

핑계를 댄 것뿐입니다.

(오늘날에도 고해성사를 보면서 ‘남 탓’만 하고

‘내 탓이오!’ 라는 말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의 생활을 보면 그는 예언자가 아니다.”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처럼 생활하셨다면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도 미쳤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해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를 “일상생활 속의 즐거움을

함께 누리자고 해도 세례자 요한은 듣지 않고 극기고행만 한다.”로,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를 “우리는 엄숙하고 근엄한

종교생활을 하기를 원하는데 예수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는 생활만 한다.”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탓을 하면서

회개하지도 않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회개 선포’와 ‘복음 선포’를 믿고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와 나의 복음 선포는 모두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하는 증거다.”

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세례자 요한의 생활 방식과 예수님의 활동 방식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었지만, 그 방식은 하느님의 방식이었습니다.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고 있었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사 8,18)이라고 한 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장터, 곧 광장에 앉아 있었다. 그 장터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으며 시끄러운 곳이다. 또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즉 우리는 너희가 선행하도록 노래를 불러 주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싫어했다.

 

너희가 회개하라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회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너희는 두 가지 선포, 즉 지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과 선행에 힘쓰라는 권고를 다 거부했다. 이는 바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요한을 마귀 들렸다 하고 예수께는 먹보요 술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둘 가운데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비유는 바로 세례자 요한의 엄격함도, 그리스도의 자유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할 때, 자신을 회개해야 할 사람의 본보기로 제시했고,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마태 4,23; 9,35)하실 때, 당신 안의 빛나는 자유를 보여주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그려 보여주셨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19절) 하늘나라에 저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을 찢으려 한다. 그러나 지혜는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서 자신이 전에 주었던 선물을 빼앗아, 순종하며 믿음 깊은 백성에게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지혜의 선물은 사용하지 않으면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잘못으로 잃어버리고도 알지를 못한다.

 

요한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삶이 달라졌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단식과 금욕적인 삶을 보고서도, 주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삶의 모습과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혜롭게 완성하신 분을 단죄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을 살아계신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분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는 고약한 대접을 받으셨지만, 그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라고 부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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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숭배로부터 하느님 신앙으로 나아가기

 -이기우신부-


최고선의 가치로부터 공동선의 가치로 우리의 성찰이 옮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이 오래되고 끈질긴 풍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상숭배는 에덴 동산 시절부터 활약해 온 마귀의 세력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수하로 삼고 죄를 저지르게 하고 있어서 생겨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될 수 없었고, 오히려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된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거짓 목자들의 우상 숭배를 따라하다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감수성을 아예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느님의 최고선 가치들에 무심하고 우상 숭배에 기울어졌던 백성들에게 한탄하였고(이사 48,18-19), 유감스럽게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여전히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있던 세태에 대해 한탄조로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16.18-19).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최고선의 가치들에 대한 영적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가치들도 우상숭배자들이 꾸며 놓은 거짓 가치들에 현혹되면 하늘 나라 대신에 지옥 나라가 펼쳐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를 선사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비록 당신이 오해를 받아 십자가형을 받아 죽임을 당하시면서도 그 전에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함께 하실 것임을 누누이 약속하시면서 당신 현존의 징표와 조건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이 징표를 따라서 그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예수님 당시의 어리석은 유다인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지는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며, 오히려 풍성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노선을 계승하는 역대 교황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양식은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는 말씀으로서 그분은 선포되는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신앙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루카 24,13-35). 둘째는 성찬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그분은 성체성사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시어 우리에게 오십니다(루카 24,13-35; 22,19-20). 셋째는 사랑의 섬김으로서,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서로에게 발을 씻어주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요한 13,5.14-15.34). 넷째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에게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고 이를 알아볼 능력인 신앙 감각이 있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요한 6,56; 14,20).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로가 서로 안에 존재하시듯이, 믿는 이들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 안에 믿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다섯째는 둘이나 셋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이 각자의 신앙 감각에 입각하여 평등하게 논의에 참여하여 공동으로 합의하는 교회 구조를 이룩하는 것입니다(마태 18,19-20). 그리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생하게 증거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화의 빛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다섯 가지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온 세상에 증거할 수 있게 되고, 사회의 구성원들도 우상숭배의 풍조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 가치를 체화하신 존재로서 그분의 현존 자체가 이 가치들을 자동으로 보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이 최고선의 가치와 배치될 뿐만 아니라 이 가치들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들과 맞서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든 우상들은 거짓 자유로 포장하여 자유를 억누르고, 돈을 섬기게 만들어 평등을 해치며, 기득권 카르텔로 정의를 짓밟는 사회적 불의를 용납하고, 전쟁을 선호하고 생명을 경시하는 반평화적이고 반생명적인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게 되면 이 최고선의 가치들을 수호하고 증진시키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것이며, 이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삶을 역사 안에서 계승하게 됨으로써 교회가 세상에 대해 최고의 봉사를 하는 것이며, 또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도직 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건, 또 얼마마한 성과를 내건 상관없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책임이 바로 우상숭배 풍조에 맞서고 하느님 신앙의 감수성을 살아있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선 가치의 수호로 인해 이룩되는 사회적 변화를 인간화와 민주화라고 부르는데, 이것이야말로 사회에 대해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요 사회가 교회로부터 입을 수 있는 최대의 혜택입니다. 인간화와 민주화의 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면 적어도 우상숭배의 풍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으로 최고선의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 우상숭배 풍조를 배격하고 하늘 나라를 이룩하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마태 11,19).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마태 11, 19)

-한상우신부-


사랑이 없는
말들은 언제나
소란스럽고
요란하다.

하루를
사는 일이
감정을 살피는
일이 되었다.

공감도
이해도 없는
우리들
마음이다.

정말 놓치고
사는 것은
소중한
사람이다.

누가
알겠는가!

먹보요
술꾼이라
손가락질한
그가 우리를
가장 사랑한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르게 살 수
있는 기쁨이
우리들 삶의
다채로운
빛깔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은
서로를 이해하는
기도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기도가 없는
마음은 참으로
생동감이 없는
마음의 비극이다.

무심코 던진
우리의 말에

마음의
발길질을
당하는
인격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듯
말씀이 곧
인격이다.

사람은 그래서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존재
말씀의 존재이다.

수 많은 별칭과
호칭 가운데서도
먹보요 술꾼으로
불린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당신의 길을 가신다.

말에 갇히지
않으시는
말씀이시다.

말씀이란
서로를
존중하는
아름다움에서
탄생한다.

먹보요 술꾼을
고치면
사람과 사람
가슴과 가슴이
된다.

그 어떤
마음도
밀어내지
않으시는
마음이시다.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
사이에
있어야 할
성탄이다.

사람이란
먹보와 술꾼을
뛰어넘는
공감과 이해
존중과 사랑
기도와 말씀의
존재이다.

그 사람을
오늘 다시
보게되는
기쁨이다.

죄인들의
친구이며
따뜻한 말씀의
나눔이다.

우리의 말씀은
정녕 어떠한가.

나는 어떤 사람?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안타까움의 토로입니다.

주님의 안타까움의 대표적인 토로가 예루살렘을 보고 우시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입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안타까움은 '알면 좋을 텐데’

'아는 대로 하면 좋을 텐데'하는 느낌입니다.

 

알면 좋은데 모르는 것이 안타깝고,

모르면 배우면 좋을 텐데 배우려고 들지 않음이 안타깝고,

잘 되기를 바라는 그가 잘못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움을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렇지요.

미워하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안타까워하지 않고 오히려 고소하다고 할 것이고

그렇게 하면 잘못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뭇소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과

사랑의 사람만이 안타까워 하고 충고도 하는 건데

미성숙한 사람이라고 할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은 

충고해주는 그의 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껏 얘기해줬는데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사랑 없는 사람은 분노하고 그를 포기해버리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안타깝고 그런 그가 불쌍합니다.

 

그렇지만 불쌍해도 어쩔 수 없는데

이 '어쩔 수 없음'이 또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하느님의 안타까움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 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 말도 듣지 않고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을 어린애에 비유합니다.

 

여기서 어린애는 물론 말 잘 듣는 어린이가 아니지요.

아주 미성숙하기만 한 아이를 말하는 것이고,

그래서 말은 죽어라고 듣지 않고 떼만 쓰는 아이이며

지혜로운 말을 알아듣고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로 오늘 당신 말씀의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그러니 성숙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식하는 세례자 요한에게서도 배우고

같이 먹고 마시는 주님에게서도 배우겠지요?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구에게나 배우는 사람입니까?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 년 12월 11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