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하여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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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루카 3,10-18)
The crowds asked John the Baptist,
“What should we do?”
He said to them in reply,
“Whoever has two cloaks
should share with the person who has none.
And whoever has food should do likewi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사랑으로 예루살렘을 새롭게 해 주시고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라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한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며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복음).
새로운 사람을 위하여
-키엣대주교-
대림절에는 무엇보다 사랑의 자비와 정의를 되새기고 생각과 정신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기쁨의 나눔
슬픔은 보통 조용히 혼자 새기고 싶어하지만 기쁨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합니다. 나눔으로서 기쁨도 늘어납니다. 사랑의 자비도 이처럼 나누는 것입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쉽지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자선은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선은 내가 쓰고 남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입는 것, 먹는 것을 서로 나누는 것’, ‘쌀 한 톨 조차도 두 개로 나눠 먹는 것’입니다. 자선은 나눔으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타인이지만 그들도 나의 형제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 것처럼, 나 자신인 것처럼 내게도 꼭 필요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먹고 입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기에 특별한 사람이 아닌 누구라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필요한 것은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스바니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이신 그분께서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하느님도 우리와 슬픔을 나누기 위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최고의 기쁨, 최고의 행복입니다. 바로오 성인의 말처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내 마음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살아가는 법의 공유
“당신들에게 정해진 것을 지나치게 요구하지 말라, 누구도 괴롭히지 말고, 사람을 갈취하지도 말고, 자신의 봉급에 안주하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그저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법과 규율을 지키는 것이 정의의 시작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서로 더불어 잘 사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정의로운 삶이 정의로운 사회를 이룹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 타인을 억압하지 않고 봉사의 정신으로 살고, 법에 따라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 그것이 정의의 사회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바로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실천은 나와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처럼 잘못된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는다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자신의 그릇된 생활습관을 버리면 그곳이 바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세상이 유지되려면 사회 구성원 모두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과 정신, 생각과 말, 그리고 실천하는 행동입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일 뿐입니다. 어디에 있더라도 생각과 마음을 새로이 바꾼다면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갈망하였기에 어떻게 하면 주님을 뵐 수 있는 지 구체적인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답을 들은 후 즉시 행동으로 실천하였기에 주님 만남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정 주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유다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삶을 자비와 정의로운 삶으로 바꾸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나누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불안해하면서도 세상이 바뀌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변화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세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변화의 주체는 자신이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새롭게 바뀐다면 다른 사람이 변화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바뀐다면 세상도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로 정의롭고 바른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내가 바르게 생활한다면 내 이웃과 세상도 바른 세상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은 세계를 바꾸는 시작입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주님의 큰 은혜에 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기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더 없이 행복합니다. 우리와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고, 우리를 인도해 주실 주님, “진정 새로워진 삶”을 살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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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례자 요한의 나눔의 의미를 되새겨보십시오
2. 더 좋은 세상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내가 해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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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늘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곁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자기 잘난 척만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남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으면서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잘난 체만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들 역시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은인이 다가가려고 하고, 또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찾아갈 확률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운이 없어요.”
긍정적인 사람, 겸손한 사람, 경청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 곁에 많은 사람이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기회도 많이 찾아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운도 실력이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빨리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겸허한 마음가짐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이었고,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군인들은 자기들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수도 생활이나 영웅적인 생활을 강요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옳은 생활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나누라고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세리 역시 정당한 세금만 받는 생활개선을 하라고 합니다. 군사도 왔습니다. 유다인들은 외국의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한에게 온 군사는 이방인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방인 역시 회개해서 생활개선만 하면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모든 회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느님 사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잘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의 노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받을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교만과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걱정하지 말고 기뻐해야 합니다. 당장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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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족이 낚시를 갔습니다. 각 가정의 아버지 모두 낚시를 좋아하지만, 자녀들은 모두 처음 낚시를 하는 것이었지요. 첫째 가족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앉혀 놓고 기초를 제대로 알아야 낚시를 잘 할 수 있다면서 낚시 수업을 합니다. 낚시대 잡는 법, 미끼 끼는 법, 잡은 물고기를 건지는 법 등을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가족의 아버지는 이론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낚시의 설렘, 짜릿한 손맛, 물고기를 건지는 순간의 희열 그리고 직접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먹는 맛까지 실감 나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족의 자녀가 더 낚시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론보다 실전의 감정을 느꼈던 두 번째 가족이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이론이 물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처음부터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맛을 들였을 때가 먼저 아닐까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의 기쁨과 행복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먼저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못 해서 이론적으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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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청하세요>
-전삼용신부-
오늘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한 벌을 나누어주고, 음식도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사랑실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와서 묻습니다.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은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요한을 메시아로 아는 이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소위 ‘사랑실천’을 말씀하시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실천법은 세례자 요한도 알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새로 태어나게’, 그래서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분입니다.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요한은 예수님과 감히 비교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 말하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CCC, 460)라는 말씀을 인용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하면 많은 반대에 부딪힙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실천법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실천법을 알려주는 수준은 세례자 요한이지 그리스도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사랑실천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났음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능력을 갖추고 오십니다. 그 능력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라고 믿느냐에 따라 나에게서 하느님 사랑의 본성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허준과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에게 감기를 빨리 낫는 비법을 묻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허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에게 물어도 될 것을 예수님께 물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것을 주러 오셨습니다.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013) 의 내용입니다. 최보나는 광고회사에서 5년째 조감독 일을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그녀를 여자로 봐주기는커녕 무시하고 구박하고 이용합니다. 그녀 자신도 그런 대우가 어쩌면 당연하다 여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 촬영지에서 이승재를 만납니다. 이승재는 신인 시절 최보나가 감독인 줄 알고 깍듯하게 인사를 한적이 있는데, 잘나가는 지금은 온갖 허세와 잘난 척을 하는 모습에 보나는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자신만 정체되어 있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보나는 해변에 외로이 혼자 남아있다 모래사장 위에서 깜박 잠이 듭니다. 회사 동료들이 그녀를 신경 쓰지 않고 다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한밤중에 추워서 일어난 보나는 주변을 돌아보던 중 잡화 물건이 가득 실린 트럭을 발견합니다. 무엇에 이끌린 듯 그 트럭으로 향했는데 그 트럭에서는 누구든 따라 하기만 하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수많은 비디오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자사용설명서 비디오’ 꾸러미를 삽니다.
비디오를 보다 잠든 내용을 다음 날 아침부터 우연히 써먹으니 이상하게 정말 먹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너무 까칠하게만 살아왔는데, 필요에 따라 사과하고 웃어주고 거리를 좁히는 등의 절차를 따라 하면서 여러 위기를 모면합니다. 점점회사와 남자와 세상의 인정을 받아갑니다. 이렇게 남자사용설명서를 완벽하게 익혀가면서 그는 승재의 사랑도 얻습니다.
그러다 이승재는 보나의 집에서 그녀가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자신에게 그대로 따라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용당한 느낌에 그녀를 떠납니다. 그녀는 승재에게 진심을 말해보려 했지만 실제로 비디오의 가르침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기에 승재는 그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디오의 마지막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앞으로 나아가라.”
자신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행동을 고쳐주고 사람들을 이용하는 실천방법을 알려주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다 보면 자신에게 합당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의 소중함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 전에 오랜 시간을 걸쳐 행동 실천법이 나왔던 것일까요? 이는 자신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 가르침을 본 보나는 마음을 다잡고 하기만 하면 된다는 자존감으로 일에 충실합니다. 그러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일도 승승장구합니다. 이렇게 되자 승재는 그녀의 당찬 모습에 다시 끌립니다. 보나가 승재를 향해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승재는 보나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까 봐 인기배우라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만인 앞에서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하는 행동이 아닌 사랑을 받을 만하다는 자존감입니다.
요한과 그리스도를 비디오에 비유하기는 차마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세례자 요한이 행동을 지정해주고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자존감을 주는 방법 면에서는 보나가 배운 비디오와 같은 역할과 방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붓감을 고를 때 자신과 낙타에게 물을 길어주는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사랑의 실천에 익숙한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사랑의 실천이 비록 인간적이기는 하나 그것 자체로 그 여인이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존감도 지니고 있음을 안 것입니다.
종은 여인을 이사악에게 보내고 이사악은 그녀와 하나가 됩니다. 이사악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교회를 상징하는 레베카와 한 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의 실천이 행복임을 알아 그 실천에 노력하는 이미 세례자 요한을 만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이 지정해주는 사랑의 실천만을 가지고서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 있는 그대로 행동해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랑 자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성인데,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는 이에게서만 나옵니다. 아무리 인간이라도 늑대에게 키워지면 늑대라고 믿고 그러면 인간의 본성이 아닌 늑대의 본성이 나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사랑이 나오게 하려면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 믿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과 한 몸이 될 수 있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시려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분에게 사랑의 실천만 묻는 것은 오히려 무례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에도 여전히 요한을 메시아로 여긴 사람들처럼 메시아를 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일이 많습니다. 기껏 예수님께 와서 새로 태어날 생각은 안 하고 사랑의 실천방법만을 묻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당신 신발 끈을 묶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수준의 사람으로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할 수 있어야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십시오. 그것이 그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 스승님 능력의 두 배를 청합니다. 제자가 어떻게 스승의 두 배를 청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엘리야는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믿어주는 엘리사가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두 배의 영을 주님께 청하여 제자에게 줍니다.
우리도 주님께 청할 때 그분의 능력에 합당한 것을 청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바로 당신과 하나가 되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할 뿐 아니라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청해야 그분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당신께서 하신 일의 두 배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시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청해도 다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 길은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게 해 달라는 그 믿음입니다. 나의 자존감을 주는 정체성을 확고히 믿게 할 믿음을 청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합당하고 기쁘게 받아주실 청원입니다.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이기우신부-
⒈ 전례의 뜻: 믿음으로 행하는 나눔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고 자선 주일입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신 성체성사를 체험할 수 있는 신앙 행위입니다. 믿는 이들의 자선은 성체성사의 정신에 따라서 물질적인 나눔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깨달음의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즉, 가난한 이들의 불쌍한 그 처지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가난해지게 된 것이 세상의 죄악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필요하며, 그 죄악에 일조했던 우리 자신의 죄를 기워 갚는 보속의 마음으로 나눔을 행해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합치는 것이 되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자선을 위한 나눔에는 믿음이 담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는 나눔만이 아니라 선교처럼 더 종교적인 활동에 있어서도 믿음과 유리됨으로써 불행을 초래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⒉ 과달루페 성모 발현
1531년 12월 12일,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490년 전 오늘, 인류 역사상 처음이요 교회 역사상으로도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셨습니다. 멕시코 시티 인근의 테페약(Tepeyac) 언덕에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를 잉태한 원주민 임산부의 모습으로 후안 디에고(Juan Diego, Cuauhtlatoatzin)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멕시코 원주민들은 성모가 발현하기 10년 전 멕시코를 점령한 스페인 군인들의 야만적 행동에 충격을 받고 그들과 함께 온 선교사들이 전하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했었지만, 후안 디에고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 신부들에게서 감화를 받아 세례를 한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 성모 발현 장소인 테페약 언덕이 공교롭게도 아즈텍 토난친(Aztec Tonantzin) 여신의 신전이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성모발현 이후 전 멕시코의 원주민들이 토속신앙을 버리고 세례를 청했고, 여신전에서 인신을 공양하는 우상숭배 풍습에 젖어 있던 죄인들은 회개하여 줄을 지어 고해성사를 청했습니다.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께서 허리에 맨 검은 띠는 임신한 여성을 나타내는 원주민들의 전통이었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을 ‘과달루페(Guadalupe)의 영원하신 동정 마리아’로 불러주길 원하셨습니다. ‘과달루페’는 ‘뱀을 물리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3,15의 말씀을 연상시키지요? 과달루페의 성모님께서는 발현 직후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다가 1910년에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셨고, 1999년에는 남북 아메리카 대륙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되셨습니다. 2002년에는 발현 목격자인 후안 디에고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⒊ 과달루페 발현의 논리적 귀결인 루르드 발현
지난 12월 8일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만, 이 대축일은 이와 관련된 성모 발현 사건, 즉 1854년에 프랑스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르 소녀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직접 당신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알려주셔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원죄 없는 잉태, 즉 무염시태는 창세기 3,15을 확인해 주신 과달루페 성모의 논리적 귀결입니다. 뱀의 머리를 바술 정도로 악에 맞서는 여인이라면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밖에 없고, 또 그런 어머니이시라면 잉태될 순간부터 마귀가 부추기는 원죄에 물들지 않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근세 유럽에서는 성경의 말씀을 믿지 않는 세속적 풍조가 프랑스 혁명 이후 만연해 있었습니다. 물론 일부 소수의 신자들은 공식 교리로 반포되기 전인데도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열심히 믿고 있었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이 신비는 물론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 사조가 팽배해 있기 때문에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야 했던 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최초의 성모 발현인 이 과테말라 발현 역시, 사람들의 죄악 특히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원주민들을 우상숭배자로 몰아 패악을 저질렀던 악행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성모 마리아께서는 후안 디에고에게 “너희가 나의 사랑과 자비, 보호를 증거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에 세우길 바란다.”고 메시지를 남기셨으며, 이 자리에 성모 마리아 발현 기념 성당이 세워짐으로써 1492년 콜럼버스가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이래 원주민 8백만 여명을 죽이는 등 스페인 가톨릭 정복자들에 의해 자행되어 온 학살이 당장 멈추었고, 뱀의 여신을 숭배해 오던 멕시코 아즈텍 문명의 원주민 8백만 여명이, 그러니까 당시 멕시코의 전 인구가 그 후 7년 만에 집단으로 개종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믿음과 상관없이 행해지던 종교적 행위가, 아무리 선교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성모 마리아께 발현하시어 반대 메시지를 주셔야 했을 만큼 비복음적일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⒋ 가톨릭 교회의 나눔
나눔에 믿음을 더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온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방식은 네 가지인데, 긴급구호, 사회복지, 사회개발 그리고 사회운동입니다.
긴급구호는 일시적으로 화재나 수재, 철거나 지진 등 재해를 당하여 어려워진 이웃들에게 긴급하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번만 도움을 주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나, 부양해 줄 가족이 없는 독거노인, 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장애를 입은 경우에는 한 번만 도와주어서는 안 되고 지속적이고도 전문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나 민간 그리고 교회의 사회복지 활동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이들은 가정도 있고 노동력도 있는데 자기 집이 없고 일자리가 불안정해서 어렵습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일방적으로 도와주어서는 효과도 없고 반감을 사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기 문제를 주장하게 함으로써 공론화의 장으로 끌어내어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회개발 방식이 필요합니다. 이를 공동체 운동이라고도 합니다.
가난이 사회병리 현상이라고 볼 때, 위의 세 가지 방식은 사후 치료에 해당됩니다. 질병도 사후 치료보다는 사전 예방이 중요하듯이, 가난에 대해서도 미리 예방하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은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계몽 활동이나, 정책을 개선하기 위한 청원 활동 또는 필요할 경우 법률을 만드는 입법활동이 있습니다. 이를 사회운동이라 합니다.
⒌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
이상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온 방식은 예수님께 기원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성령께서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자의식을 매우 강하게 지니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 시작 무렵부터 이렇게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고 나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그러자 소문이 금새 퍼져서 병든 이들, 마귀 들린 이들이 많이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종종 기적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의 긴급구호와 사회복지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만나시어 도움을 주신 가난한 이들을 부르는 호칭이 매우 다양합니다: “눈먼 사람,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억눌린 사람, 묶인 사람,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 군중, 보잘것없는 사람, 가장 작은 이들, 맨 끝자리의 사람, 어린아이, 철부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 등입니다. 그런데 부유한 바리사이들은 이들에 대해서 율법도 몰라서 죄를 짓는 저주받을 족속이라고 낮추어 불렀습니다. 그러면서도 헌금을 많이 낸다고 자랑할 뿐, 그 가난한 이들이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선자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들과 대조적으로 믿음으로 나눔을 행한 모범적 사례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이들에게 직접 도움을 주신 일도 많았지만,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면서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게 마실 것을 주며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산상설교에서처럼 간접적으로 하지만 지속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날의 사회개발이나 사회운동에 해당되는 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는 운동을 벌이면서, 군중에게 정의롭게 나눔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일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믿는 이들이 행하는 나눔이 큰 힘이 됩니다. 이 믿음의 나눔은 우리가 이 대림 시기에 성탄을 준비하면서 행할 수 있는 회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믿는 이들보다 예수님의 성탄을 더 간절하게 기다립니다.
⒍ 가난한 이들의 권리
바오로 6세 교황은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가난한 라자로와 인색한 부자의 비유를 들어주신 예수님의 가르침(루카 16,19-31)을 인용하면서, 이제는 부자와 라자로가 같은 식탁에 앉아 먹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굶주린 라자로에게 부자가 빵부스러기조차 나누어주지 않았지만, 그러나 바람직한 사회는 부자가 라자로에게 개별적으로 자선을 베푸는 사회가 아니라 라자로의 권리로 구조적이고도 제도적으로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6세의 호소는 가난이라는 사회 현상의 정곡을 꿰뚫어본 성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가난한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빈곤으로 인한 불편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수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자선에 의지함이 없이 떳떳하게 정책과 법률 등 제도적으로 지원을 받게 해 주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게 부여된 권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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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한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저는 손님에게 집을 내어 주고, 옆에 있는 성당의 사제관에서 며칠 지냈습니다. 지난여름에도 한국에서 신부님이 오셨고, 그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손님은 뉴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선물로 책 한권을 주고 갔습니다. 책의 제목은 ‘세분의 어머니’입니다. 저는 방을 내 주었지만, 손님은 제게 마음의 양식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책에서 읽은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술품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예술품의 가치를 이야기해 주었고, 아들은 예술품을 통해서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아들은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군에서 아들의 사망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군에서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아드님은 다른 이를 구하기 위해서 전사하였습니다.’ 아들 덕분에 목숨을 건진 병사는 아들의 얼굴을 그려서 아버지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예술 적인 가치는 없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그림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술품을 경매에 내 놓았습니다. 상당한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매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아들을 그린 초상화를 가장 먼저 경매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추어가 그린 것이고, 예술적인 가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초상화를 사겠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9달러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사지 않았기 때문에 초상화는 9달러에 팔렸습니다. 이제 남은 예술품을 경매에 올릴 줄 알았는데 그날 경매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유언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경매의 물건들은 아들의 초상화를 산 사람에게 모두 주시오.’ 가난했지만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은 단돈 9달러로 많은 예술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술품을 경제적인 가치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은 경매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우리는 천국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더 두는 것은 아닌지 생각합니다.
맹자는 우리 사람들에게는 4가지의 품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고유한 품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역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선행을 행하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양에서는 우리가 자선을 베푸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품성이며, 그런 자선은 결국 우리를 이롭게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이나, 직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을 못 본척하고 스쳐지나간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빈자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 일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그러한 증여에 쏟아 넣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해를 정리하는 12월 달을 지내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과연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나의 사랑과 나의 마음을 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또한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보다는 소유하려고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가 그 말을 할 때,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감옥이 호텔도 아니고 어디 휴양지도 아닌데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은 점점 커져야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세례자 요한과 같은 겸손함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철저한 겸손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많이 나누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은 작다고 하여 미루지 말고, 악한 일이 비록 작다고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선현의 말씀이 귀를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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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회의차 지방에 내려갔다가 밤늦은 시각에 집 가까이 있는 국철 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광장으로 내려오니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역 주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근 한 교회 신자들의 무료급식 봉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당시 저희 수도회에서도 노숙 청소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되지 않겠냐는 논의가 있어 저는 한참 동안 바짝 다가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봉사자들의 일사불란함이었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배식봉사를 하시는 분들,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 질서를 잡는 분들…. 아마도 많은 연구와 시행착오, 기도 끝에 얻어진 결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봉사자들이 환한 얼굴과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습니다.
줄은 모두 세 줄이었습니다. 첫번째 줄에서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쇠고기국밥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그릇 받아먹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냄새가 그럴 듯했습니다. 국밥을 받아든 분들 얼굴이 일순간 환해졌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순간은 아마도 천국을 맛보는 순간이겠지요.
그리고 두번째 줄에서는 긴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노숙인 형제들의 새벽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먹음직스럽고 커다란 빵을 하나씩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번째 줄에서는 후식으로 커피를 원하는 분들에게 일일이 커피를 타드리고 있었습니다. 노상이었지만, 소박하고 정성이 담긴 풀코스 서비스를 받은 분들 모습이 행복해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20분 이상 배식하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저를 흘끔흘끔 바라보시던 봉사자 아주머니께서 참다 못해 제게 한 소리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백날 거기 서 있어 봐야 소용없어요. 아저씨도 저 뒤로 가서 줄 서세요.”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제가 받은 충격이 컸지만, 당시 역 앞에서 저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잠깐이었지만 역전에서 있었던 그 소박한 행사(무료급식)는 진정 감동깊은 축제 한마당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준비한 따
뜻한 음식들이 세파에 지친 이웃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사랑과 나눔의 축제, 다름 아닌 미사였습니다.
오늘은 자선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던 백성들을 향해 지속적으로 지니셨던 측은지심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지녀야 할 주일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 한끼 제공하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바로 복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행위이자 구원을 직접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무료급식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단기처방에 불과하다, 노숙인들을 더 양산시키는 일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들 나름대로 가난의 악순환을 벗어나 보려고 얼마나 발버둥쳐온 분들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공정한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냉혹한 우리 사회의 피해자이자 희생자들일지 모릅니다. 점점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노숙인들을 위한 더욱 근본적 해결책이 강구되길 기원합니다. 수많은 노숙인들, 또 후보 노숙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 우리 손을 통해서 작동되길 바랍니다.
자선행위, 몸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시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한번 시작하면 그 '맛'이 대단합니다. 내 호주머니에서 뭔가 빠져나간다는 느낌은 잠시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느새 빠져나간 그 이상의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에게 갚아주십니다. 자선은 우리에게 뿌듯한 마음, 넉넉한 가슴을 축복의 선물로 베풀어주십니다.
자선은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고귀한 하느님 손길입니다. 자선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도구입니다. 자선을 통해서 우리는 무거운 등짐 하나를 내려놓은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자선과 더불어 우리는 오랜 상처와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치유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누려고 해도 나눌 거리가 있어야 나누지?’ 라는 분들, 조금만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건네는 작은 미소 한번 역시 큰 자선입니다. 실의에 빠져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힘내라'는 표시로 어깨 한번 두드려줄 때, 우리는 큰 자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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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영근신부-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 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 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
(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좇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좇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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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영억신부-
대림 3주일, 오늘을 우리는 ‘기쁨 주일’이라 부릅니다.
대림초에는 핑크색 초에 불이 밝혀지고, 사제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장미 빛 분홍색 제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전례도 온통 ‘기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입당송, 본기도, 화답송, 복음 환호송, 독서 등 전례 전체가 곧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라’는 말로 메아리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스바니아 예언서 3장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 부분은 바빌론 유배의 아픈 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예언자는 유배 생활의 고통 중에서도 기쁨을 이야기하고 축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 계시니,
~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리라.”
(스바 3,15.17)
이처럼 그가 유배의 고통 중에서도 축제의 기쁨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 안에, 그들의 삶 안에, 그들의 현장 안에 함께 계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제2독서는 필립비 서간으로, 사도 바오로는 감옥의 고통 가운데서도 신자들에게 기쁨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필리 4,4)
사도 바오로의 기쁨 역시 스바니아처럼 오로지 함께 계시는 구세주 주님께만 희망을 두신 까닭이었습니다.
곧 그 기쁨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데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의 원천이 그리스도께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유배 중에 있으면서도,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이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도 주님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자신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현존과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쁨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향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자가 곧 기쁨의 전달자가 되고, 바로 그가 곧 복음 선포자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도 세리도 군사들도 세례자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12.14)
이는 실천적인 삶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 실천적인 삶이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 곧 구체적인 ‘자선’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면서, 그분이 오시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반면 불은 성령의 활동을 통해 변화되는 힘을 상징합니다.
마치 불이 자기에게 닿는 모든 것을 태우고 변화시키듯이, 성령께서는 당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용서와 더불어 말입니다.
사실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 그릇에 용서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용서받고 새 생명을 입은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꽉 차 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몸으로 행실로 드러났으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확신’을 나누는 것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요, 자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수도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 생활과 하느님 말씀 묵상과 성사 거행과 공동체 생활에서 자라나는 선물입니다.
~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인 여러분에게 그러한 기쁨은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라는 신비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무엇에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자비 안에서 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지금 우리 한가운데 그렇게 함께 계시며 자비를 베풀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사실 하느님 자비는 늘 저희와 함께 있지만, 저희는 자신의 어둠 속에 갇혀 그 자비를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건네주려고 저희를 찾아 헤매건만 우리는 다른 곳을 찾아 헤매기 일쑤입니다.
딴 곳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 꼴입니다.
주님이 한 발짝 다가오면 오히려 두 발짝 멀리 도망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자비를 목말라하면서도 실상은 자비에게 달려가지는 않는 꼴입니다.
하느님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하느님 자비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안식과 위로를 찾는다면, 그것은 허상을 좇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자비는 저희의 거부로 상처 입습니다.
주님!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오늘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당신 자비의 기쁨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루카 3,10)
주님!
당신은 늘 저와 함께 있었지만, 저는 제 안의 어둠 속에 숨어 당신을 외면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목말라했건만, 저는 당신에게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비 안에 안식과 위로가 있건만, 다른 인간적인 방도로 허상을 좇았습니다.
당신이 한 발 다가오면 저는 두 발 멀리 도망쳤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자비를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제 삶이 자비의 실행이 되게 하소서.
그 실행으로 상처 입으신 당신을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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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송영진신부-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루카 3,10-14).”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구체적으로 회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답변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여라.”,
또는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라.” 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일차적으로 잘못된 것을 고쳐서 바로잡는 일입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고 살던 대로 사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은, “회개한다면 사랑을 실천하여라.”,
또는 “사랑 실천으로 회개를 완성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사랑 실천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권고인데,
사실상 ‘모든 사람’에게 하는 훈계입니다.
회개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라는 말은,
“세금을 거둘 때 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만 하여라.” 라는 뜻인데,
“권력으로 도둑질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도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을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권력으로 강도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도 역시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이 말은, 그가 참으로 진실하게 회개했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회개는 변화입니다.
‘새로운 삶’은 회개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회개는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회개해서 깨끗해졌다면 그 ‘깨끗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노력도 회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써 새롭게 되었으면서도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이 세상의 더러움에서
벗어난 그 사람들이 그것에 다시 말려들어 굴복을 당하게 되면, 그들의 끝은
처음보다 더 나빠집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 자기들이 받은 거룩한 계명을
저버린다면,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하였던 편이 나을 것입니다. ‘개는 자기가
게운 데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는
속담이 그들에게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2베드 2,20-22).”
이미 은총을 받은 상태에서 원래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자기가 받은 은총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큰 죄가 됩니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면서 지은 죄가 더 큰 죄입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요한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백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루카 3,15-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라는 말은,
“내가 주는 세례는 회개의 표시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의 세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세례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는 차원이 다릅니다.)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라는 말은, 알곡 입장에서는 ‘기쁜 소식’이 되고,
쭉정이 입장에서는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삶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참된 회개를 하는 사람은 알곡이고,
아무 변화 없이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쭉정이입니다.)
‘기쁜 소식’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얻기를 원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또 그 기쁨을 얻어 누릴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목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었지만(루카 2,8-20),
당시에 왕이었던 헤로데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마태 2,1-18).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뵈려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자기가 직접 가려고 하지 않고,
처음에는 동방박사들만 보냈고, 그 다음에는 군인들만 보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직접 갈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은 그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왕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무서운 소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리고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기쁨이 커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수록’ 우리의 기쁨이 커진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쭉정이 같은 사람들은, 즉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들은,
주님께서 가까이 오실수록 두려움만 커집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인데,
사람들 쪽에서 그 기쁨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두려움만 키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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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다해
-조욱현신부-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엄격한 권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시키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즉 오시는 분은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16절)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16절)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을 맞이하는 것이 기쁨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손에 키를 드시고’(17절) 심판하시는 ‘심판관’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심판이란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야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는 의미이다(참조: 요한 3,17).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엄한 윤리적인 경고를 포함하고 있지만, 사실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하고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 그리고 많든 적든 우리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다고 한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군인이든 세리이든 어떤 사람이건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느냐, 특히 사랑으로 행동하느냐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매일 행동하고 말하는 가운데 항상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마음을 밝혀주고 있다.
“회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 순간의 생활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순수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무슨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살며 활동하는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의 대림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4-7: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필립비서는 처음부터 함께 사는 기쁨, 복음을 전하는데 협력하는 기쁨, 그리고 믿음에 관한 기쁨 등에 대한 주제가 계속 이어진다(필립 1,4.18.25; 2,2.17.18.28.29; 3,1; 4,1.4,10 참조). 그것은 주님께서 ‘오심’이 내가 당하는 고통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고통’안에 이미 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겪는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고통 중에 있는 바로 그 때가 내 옆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고통과 궁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6절)아뢸 때,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7절)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스며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쉽게 얻어지는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극적인 사건이나 고통을 통해 그리고 형제들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능력에서 생겨난다. 특히 고통 속에서 우리는 그 때를 바로 은총의 때로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가 은총의 때이기 때문에 고통의 신비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례를 받고 성당에는 다닌다고 하여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는 말만 한다. 성당에서 또 피정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강론을 많이 듣는다고 하여도 그래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을 온통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고 해도 구체적인 나의 삶 속에서 그것이 의미를 갖고 실천되지 못하면 우리의 귀는 한없이 수준이 높아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기쁨을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쁨이나 행복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항상 기쁨을 만들려 노력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눌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쁨은 기도이고 굳셈이고 사랑이며 사랑에 대한 갈증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의 표시의 방법은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은 마음이 사랑으로 타오를 때 자연히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을 망각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슬픔도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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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가 어떻게해야 합니까?"(루카 3, 10)
-한상우신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길을 낸다.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께서는
점점 커지시는
길을 낸다.
광야의 외침은
죄를 씻어주는
세례의
길이 된다.
길을 가르쳐 준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길은 소식인데
소식을 끝내
듣지 않는
완고한
우리들이다.
듣지 않으면
영혼 없는
시간만이
밀려오고
밀려갈 뿐이다.
이 대림시기는
길을 보수하듯
경청을 보수하는
시간이다.
하느님께로
가는 방향을
보수(補修)하는
것이 기다림의
핵심이다.
들으려는
사랑이 끝내
길을 낸다.
복음은
경청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또한
보수 공사가
필요한 사랑의
관계이다.
사랑의 모든
기쁜 소식은
끝까지 듣는
경청을 통하여
전달된다.
경청(傾聽)이
대림이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
성탄은
제대로 듣는
들음에서
시작한다.
자선(慈善)또한
소식을 듣는
들음에서
시작되는
진정한
도움이다.
도움도 듣지
않으면
독(毒)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경청이며
자선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다림의 실천은
다름아닌
경청이다.
듣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고
다시 경청하는
사랑의 길이다.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묻는
경청의 주일이다.
고집 센
자아가
작아져야
들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
듣는 때가
사랑할 때이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기다리고
들을 수 있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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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여라. 주님 안에서
-김찬선신부-
대림 제3주일은 일명 '기뻐하라' 주일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아주 가까웠기 때문인데
그래서 독서들에 기쁨과 관련한 표현들이 많이 나오고
자연스레 기쁨에 대한 성찰을 우리도 하게 됩니다.
우선 우리는 진정 기쁨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성찰합니다.
이것은 우리 중에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사람이 있고,
요즘 그리고 갈수록 기쁨보다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추세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의미보다 재미를 더 추구하고
그래서 재미없으면 아무리 의미 있는 영화도 보지 않지요.
그런데 사실 '요즘 타령' 할 것 없이 인간이란 존재가
본래 기쁨보다 즐거움을을 더 좋아하는 동물이고
그래서 인간을 애기할 때 Homo Ludens/놀이의 인간이라고도 하지요.
당연한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둘 다 만족감이고 그래서
우리가 흔히 기쁨과 즐거움을 같이 붙여서 쓰곤 하는데,
그런데 만족감이란 면에서 같지만 시차적 만족감인 기쁨에 비해
즐거움은 행위 동시적인 만족감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동시에 만족감이 오고 그래서 즐겁지만
대학 합격과 취업과 같은 기쁨과 바라고 바라던 집을 살 때의 기쁨은
최소 3년의 공부와 10년, 20년 주택 청약 적금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기쁨은 시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까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것이 보통 고통이지요.
놀고 싶은데 놀지 못하고 공부하는 것이 고통이고,
즐기고 싶은데 즐기지 못하고 일해야 하는 것이 고통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즐거움, 곧 우리가 흔히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당장은 즐겁지만 즐거움 뒤에 허무가 온다던지 실패나 좌절이 오지요.
신나게 놀고 즐기다 대학에 떨어지고 심지어 인생이 실패하기도 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움보다 기쁨을 추구하는 편이 낫는데
기쁨 중에서도 성취적인 기쁨보다는 인격적인 기쁨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취적 기쁨이란 일이 내 뜻대로 잘 되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 곧 보람이고
인격적 기쁨이란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인데
오늘 독서들이 하나같이 얘기하는 기쁨 곧 신앙인의 기쁨은
이 기쁨 중에서도 오실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의 기쁨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기쁨, 특히 대림절의 기쁨은
임박臨迫한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며
그리고 마침내 오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며
오신 주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동시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과 즐거움을 사는 우리는 이제 두 가지 실천을 하는데 곧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자선의 실천입니다.
복음 선포와 자선의 실천이 우리의 영적 기쁨과 즐거움의 결과라는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기쁨이 넘친다면 그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너그러워져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자선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오늘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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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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