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가 1,39-45)
Blessed are you who believed
that what was spoken to you by the Lord
would be fulfil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가서의 저자는, 연인이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온다고 노래한다(제1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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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실 저는 줄 서는 것이 싫어서 줄이 거의 없는 앞집에서 주문해 먹었습니다. 닭강정 맛을 전에 비교했던 적이 있는데, 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줄이 없는 가게가 더 친절하고 양과 맛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아마도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는 ‘더 맛있으니까 이렇게 기다려서 닭강정을 사 먹겠지’라는 마음에 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자신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선택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그냥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불의한 상황에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필요합니다. 사랑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선택을 할 때, 세상은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좋지 않아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기에 사랑으로 선택하신 분이 계십니다. 이 사랑의 선택이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만약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죄로 공개 처형되는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서 천사의 메시지를 거부하셨다면 어떠했을까요?
편한 삶은 남들처럼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우리 각자의 삶을 살 것을 명하십니다. 그 모든 삶 안에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겸손하십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시지만, 엘리사벳을 직접 찾아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십니다. 겸손을 간직하고 육화하신 예수님의 마음처럼 성모님도 마음으로 하나를 이룹니다. 성모님도 겸손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만 진정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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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를 묵상하다가, 신랑이 왜 그토록 늦었을까 싶었습니다. 늦게 와서 기름이 부족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혼인 풍습은, 신랑이 신부 부모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자기 부모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신부의 집에서 혼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신랑의 행렬은 신부의 집에 당도하기까지 일반적으로 지체되었습니다. 신부의 집안사람이 막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부가 아름답고 귀할수록 신랑은 신부 집안사람에게 더 많은 선물을 줘야 빨리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랑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신랑이 늦게 오는 것은 신부 집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부는 이를 염두하고 기다렸어야 합니다. 신랑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지체하게 만든 신부 집안 탓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름을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기름이 없어서 잔치에 들어가지 못함을 신랑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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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의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인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자려고 침대에 누워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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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은 그 본성상 자신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른다>
-이기우신부-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시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은총을 받는 첫 번째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에 대해 생각해볼까 합니다.일단 작은 은총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큰 은총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모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당신이 받은 은총을 당신만 지니지 않고 나누려고 하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도 자녀가 있으면 형제와 나눌 줄 아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습니다. 단순하지만 이 두 가지만 알면 우리는 은총의 충만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나중에 돌 맞아 죽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을 당신만 가지고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의 작은 농촌 시골마을 웨스트 브로우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형제가 교회에 가던 중에 주먹질하며 싸우는 소년 네 명을 보았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후에 음식을 먹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습지진아, 문제아, 저능아, 무의미한 인간 등의 별명을 갖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버림받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목사님께 부탁해 주일학교에 이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주면 자신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주일마다 그 선생님은 네 소년에게 하느님 말씀을 가르쳤고 소년들은 자라서 도시로 나갔습니다.
1932년 이 나이 든 주일학교 교사의 은퇴 겸 생일 축하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네 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편지 네 통이 낭독되었습니다. 하나는 중국 선교사로부터, 두 번째 편지는 연방 은행 총재로부터, 그리고 세 번째 편지는 후버 대통령의 비서실장에게서 온 것이고, 네 번째는 후버 대통령의 편지였습니다. 후버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가장 어려웠던 대공황 시기(1929-1933)에 미국을 이끌었고 “하느님의 말씀은 역경을 이기는 힘“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어제 은총을 담을 그릇이 감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그 은총을 빨아들이는 힘은 나누려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는 성모님께서 은총이 가득하시기 위해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사셨음을 말했다면, 오늘은 성모님께서 당신이 받은 은총을 엘리사벳에게 흘려주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감사와 사랑이 은총을 충만히 받는 길입니다.
미국의 경영대학원 와튼 스쿨의 애덤 그랜트 교수는 사람을 3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남에게 주려고만 하는 이타적인 사람인 ‘기버’(Giver),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이기적인 사람인 ‘테이커’(Taker), 그리고 남이 나에게 무언가 해주면 그제야 나도 주는 ‘매처’(Matcher)입니다.
이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안타깝게도 무조건 주는 기버들입니다. 이들은 경쟁에서 뒤처집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가장 큰 성공을 하는 사람들도 기버들입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기술자 16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남을 도와주느라 정작 자신은 가장 낮은 생산성을 보이는 기버 부류를 조사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기버들은 경쟁에서 뒤처졌습니다. 하지만 기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공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속한 시간 속에서 쌓이는 사회의 ‘인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호합니다. 자신보다는 타인과 조직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버들이 그래서 장기적으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이기적인 테이커와 매처보다는 믿음과 신뢰, 그리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기버들이 세상에서 성공합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야 했던 배정철 대표가 있습니다. 그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을 많이 벌어 자기처럼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견뎠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사회에 내놓은 돈은 무려 50억 원입니다. 한국 초밥왕으로 군림한 그는 자기의 성공의 원인을 자신의 끝없는 나눔 덕분이라고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아주 크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작은 일에서부터 나누다 보면 나중에 자신도 많은 것을 얻게 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나눔이라는 것을 시작할 때 작은 것부터 시작하였습니다. 학생들 장학금을 댄다든지 병원에 기부금을 내면서 나눔에 관련된 소문이 나다 보니까 이왕이면 우리 가게에서 먹자 하는 분들이 많으시고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것을 제가 얻게 되고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우선 가진 것에 감사합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저는 자려고 침대에 누워 주모송을 바치고 오늘 감사한 일 다섯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다음 날 일어나서 할 일들을 자세하게 생각합니다.
이는 마치 계약의 궤 위로 내린 하느님의 현존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구름을 따라 움직이겠다는 준비된 자세를 말합니다. 계약의 궤는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본성은 흐름입니다.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흘려보낼 사람에게만 흐르십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으면서도 유학 가라는 주교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것은 그만큼 큰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항상 전날 밤에 다음 날 일어나서 뭐 해야 할지 주님의 뜻을 물어보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당황하지 않고 하루를 알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는 일들이란 사제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해주는 일입니다. 아주 충실히 살지는 못해도 하루하루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만큼 많이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또 내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을 가집시다. ‘감사합니다’와 ‘사랑합니다’. 이것이 은총을 받는 유일하고 완벽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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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낯선 곳에 갔을 때입니다. 모든 것이 두렵고, 걱정이 앞설 때입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위로가 되고, 힘이 납니다. 1986년 군대에 갔을 때입니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받아서 내무반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기 때문에 대학 4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한 저보다는 한참 고참이었습니다. 저는 친구의 도움으로 비행기가 하늘을 향해 이륙하듯이, 군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20년 후인 2005년 겨울입니다. 처음으로 해외연수를 시작했습니다. 늦은 저녁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입국장에는 선배와 후배 사제들이 마중 나왔습니다. 한 달에 한번 모여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부님들은 낯선 도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토론토 교구에서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서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신부님들이 함께 했기에 3년을 무난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 사목국 기획연구팀에서 대림시기를 보내는 교우들을 위해서 영상물을 제작하였습니다. 짧은 영상이지만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묵상하기에는 충분한 영상입니다. “"나는 나자렛의 작은 여인, 마리아입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 요셉입니다, 나는 양들을 돌보는 목동입니다, 나는 메시아를 기다려온 베들레헴입니다."라는 영상입니다. 유튜브에서 제목을 검색하면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성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해당 영상을 보시면 어떨까요?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주시면 영상을 만든 기획연구팀에도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제1편에는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가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아인카렘으로 떠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은 축하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은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일입니다. 엘리사벳은 그런 마리아를 만나면서 이렇게 축복해 주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십시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는 이제 기뻐하며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나이다.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영혼 기뻐 뛰나이다.”
사제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일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몇몇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만나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친구들은 언제나 따뜻하게 저를 대해주고, 제가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런 친구가 있기에 저는 힘을 내서 사제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가까운 이웃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대하면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나의 모습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의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나의 길을 따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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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오시는 분에 대한 고대와 기다림, 간절함으로 마음 설레어 있고, 오신 분에 대한 기쁨과 반가움으로 벅차 올라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가는 노래합니다.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아가 2,8)
또 복음 환호송에서는 “어서 오소서. 주 하느님”하고 환호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루카 1,44) 하고, ‘이미 오신 그분’을 맞이하여 뱃속에서 즐거워 뛰는 아기와 함께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마리아의 “행복”을 선언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이는 ‘말씀’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안에 행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안에 행복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말씀’이 왜 행복이 되는 것일까?
대체 무엇을 이루기에 행복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구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벳은 또 하나의 복을 노래합니다.
“당신의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루카 1,42)
그러니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녀의 태중의 아기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 아기가 구세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두를 믿으셨으니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믿음 안에서 이미 ‘행복’이 충만했습니다.
이를 두고 성 암브오시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에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말씀을 믿고 품으면 진정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요!
얼마나 벅찬 일인지요!
그렇습니다.
말씀이 잉태되면 뱃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오히려 품고 있는 우리를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킬 것입니다.
산골을 찾아가는 노고가 되고, 섬김이 되고, 사랑이 되어 피어오를 것입니다.
우리의 노래가 되고, 기도가 되고, 삶이 되어 탄생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 요한이 동생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닦겠지만, 분명 예수님이 먼저 요한을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나무 뒤에 숨은 아담을 하느님이 먼저 찾아와 부르시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는 모세를 먼저 찾아와 부르시듯이,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방문하시어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1)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십니다. ~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주님!
제가 행복한 것은 믿고 사랑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 때문입니다.
늘 저보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사라질 수도, 빼앗겨질 수도, 멈춤도 없는 당신의 희망이 바로 오늘 제가 진정 행복한 이유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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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마리아가 행복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브12,2).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11,27-28)고 하셨습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뜻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그래서 성 요한 비안네는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고, 제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른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을 믿고, 믿는 만큼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할 때가 행복의 순간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나는 어디서 행복을 찾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이 유혹하며 손짓하지만 그것을 거절하며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며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시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시기바랍니다. 주님만이 내 행복의 전부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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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송영진신부-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세례자 요한의 말이 연상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8-30).”
이 말에서, ‘신랑’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고,
‘신부’는 그 구원을 받는 신앙인들, 즉 우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 친구’ 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자신의 임무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고,
자기 자신을 ‘신부’에서, 즉 ‘구원의 대상자’에서 제외시킨 것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도 ‘구원의 대상자’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이 아기 때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기뻐 뛰놀았다는 것은,
자기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의 강생과 방문을 기뻐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 기쁨에는 인류 전체의 구원에 대한 기쁨과
자기가 구원받게 된 것에 대한 기쁨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벳의 기쁨도 바로 그런 기쁨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엘리사벳의 기쁨은 다음 말씀에 나오는 ‘종들의 행복’과 같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 ‘주님의 오심’을 기뻐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면서 기다리는 사람이 준비를 잘하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갈망한 것도 아니고 구세주를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지금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기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구원에 관심도 없을 것이고, 구세주 강생에도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은 지금의 부귀영화를 좀 더 연장하려는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왕궁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 메시아 강생을 크게 기뻐할 사람들 가운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고
묻고 다닌 일은(마태 2,2),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선포한 일과 같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기록했습니다(마태 2,3).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놀라기만 하고 기뻐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헤로데 왕은 왕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했고,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기뻐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사람들은, 겉으로는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갈망한다고 말했지만,
속마음으로는 안 오시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잃게 될까봐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빈손으로 갔을까?
무슨 선물 같은 것을 가지고 갔을까?
아마도 출산에 필요한 물품이나 산모와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가서
선물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반대로 엘리사벳이 성모님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했다면,
그 선물 가운데에서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모님의 믿음과 응답이 옳았음을 확인해 준 ‘증언’입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님이 만난 일은,
그리고 천사가 전해 준 말씀들과 성모님에게 일어난 ‘성령 잉태’는
성모님 혼자서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는, 성모님 혼자만의 개인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행한 증언들 덕분에,
성모님만 알고 있는 그 일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공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두 어머니의 만남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성모님이 엘리사벳에게 간 일 자체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성모님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돌아갔습니다(루카 1,56-57).
성모님은 엘리사벳의 출산을 도와주었을 것이고, 출산 후에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때 그렇게 도움을 받은 엘리사벳은 나중에 성모님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요셉과 성모님이 베들레헴으로 갈 때,
곧 해산을 하게 될 성모님을 돕기 위해서 엘리사벳이 함께 가지 않았을까?
함께 가는 것이 어려웠다면, 필요한 물품들을 충분히 챙겨 주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필요할 때마다 천사를 보내셔서 요셉과 성모님을 도와주셨는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그대로 내버려두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천사를 통해서든 사람을 통해서든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성모님의 출산을 직접 도와주었다면,
그 사람은 성모님의 어머니였거나 엘리사벳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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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조욱현신부-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러나 그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거나 의심을 하였거나, 천사가 알려준 증거를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보고 있다. 성경에 이르기를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예레 1,5) 이 일은 큰 표징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요한이 아직 목소리로 기쁨을 드러내고 주님을 증거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가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에는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했는데, 아들 덕분에 성령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된 다음에,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진 것이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자기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가련한 이와 넋이 꺾인 이, 내 말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다.”(이사 66,2) 이는 엘리사벳에게 옳은 말씀이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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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다."(루카 1, 45)
-한상우신부-
마침내
행복이다.
절망이
행복으로
뒤바뀐다.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의
행복이다.
말씀을
떠난 적이 없는
행복이다.
말씀으로
우리의
행복을
깨우시는
말씀의
하느님이시다.
함께
나누어야 할
말씀의 행복이다.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된다.
말씀을
믿는 것이
말씀의 참된
행복이다.
하느님을
잉태한
말씀의
행복이
시작되었다.
행복이
믿음이
될 수 있음을
다시 배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알게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은 우리의
행복을
되찾아준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이다.
모든 행복의
시작은
하느님으로 부터
시작되는 행복이다.
하느님께서
행복이시다.
사람의 행복은
하느님의 간절한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또한
말씀이 되는
행복이다.
무엇을 나누며
살고 있는 지를
보게되는
대림이다.
말씀과 사람
믿음과 행복이
마침내 길을
찾게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말씀이 오시고
말씀이 즐거워
뛰노는 놀라운
순간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마침내
불행이 아닌
행복한
사람이 된다.
행복은
길을 떠나듯
머물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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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태
-김찬선신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복음의 이 말씀을 제가 감히 바꾼다면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가 아니라
'태중의 아기 때문에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십니다.'라고
바꿔야 할 것입니다.
'태중의 아기도 복되시다'는 말은 성모 마리아만 복된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의 그 아기도 복되시다는 뜻처럼 들려
어머니가 기준이고 중심이며
그래서 마치 어머니 덕에 아들이 복되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행복의 기준이 주님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비티나의 순교자들이 순교를 앞두고 한 말을
가지고 묵상을 더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Sine Dominico non possumus'
이것은 주님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뜻인데
주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주님이 없으면 행복할 수도 없다는 뜻도 되겠지요.
그러니 모두를 복되게 하시는 분인 주님께
주님도 복되다는 말은 언어도단이지요.
그러나 더 심각한 언어도단은 주님 없이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행복하려면 주님이 함께 계셔야 하는데
주님이 계실 곳이 내 안에 없이 행복하려는 것도 언어도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모두 하느님의 태를 지닌 여인들이고 그래서 서로 복되다고 하는데
이들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태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
행복하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말도 되겠습니다.
그러니 어제 마리아가 하느님 말씀을 수락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취지로 얘기를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락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태를 마련하는 것이겠습니다.
방문하겠다는 귀한 분의 말씀에 너무 기뻐 수락하기는 했는데
정작 모실 집이나 방이 없다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나는 하느님의 태를 준비해놓고 있습니까?
안 되어 있다면 지금이라도 또는 남은 삼일 안에 준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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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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