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12. 23. 07:22

2021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루가 1,57-66)

 

When they came on the eighth day to circumcise the child,
they were going to call him Zechariah after his father,
but his mother said in reply,
“No. He will be called Joh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말라키 예언자는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주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시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요한이라고 이름 짓자,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다. 이웃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외도로 아내에게 큰 상처를 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를 깊이 깨달았고, 평소 죗값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아내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에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 때문에 이혼은 하지 못한다면서도 미움을 겉으로 표시했습니다. 부부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보면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꼬투리 잡아 평생 종으로 부리려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아내는 남편을, 또 반대로 남편도 아내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정도 했으면 용서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랑했던 만큼 배신을 느끼면 그만큼의 미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합니다. 그만큼 사랑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용서받을 수 있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계속된 노력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나 싶습니다. 즉, 자신의 신앙생활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주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만을 바라보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이를 만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할례를 받습니다. 이 할례식 때 일반적으로 이름을 짓는 명명식을 동반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름은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내는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단지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용이 아니라, 일생 동안 그들이 할 사명을 가리키는 일종의 예언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그래서 명명식이 중요했습니다. 그 권리는 부모에게 때로는 친척들에게도 개입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지 않는 한 보통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통례를 따르지 않고 ‘요한’으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인 즈카르야에게 묻자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적습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일러준 말을 듣지 않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1년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간 동안 하느님의 뜻을 새기는 데 노력했고, 더 굳게 믿고 따르는 데 집중했기에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뜻을 얼마나 굳게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받아주실 때까지 믿고 따라야 합니다.
어둡다고 투덜대지만 말고, 어서 작은 촛불 하나부터 밝혀라(공자).

유혹에 이기는 법

어느 자매님이 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다가와서 기도를 하지 못하게 유혹하는 것입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면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줄게.”

이 유혹을 이겨내자, 이렇게 유혺합니다 .

“지금 기도를 멈추면, 아들이 서울대에 갈 수 있도록 해줄게.”

이 유혹도 이겨냅니다. 그러자 이렇게 유혹합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지 않으면, 아들이 크게 아플거야.”
힘들었지만 생명의 부분은 하느님 영역에 있다는 말을 기억하며 이겨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귀는 이렇게 유혹합니다.

“지금 기도를 멈추지 않으면, 옆집 사람이 로또에 당첨되고 그 집 아들이 서울대에 갈 것이다.”

이 말에 결국 기도를 멈추었다고 합니다. 남과의 비교, 이 비교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비결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미움받을 용기를 주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은 까닭에 혀가 묶여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로 지으려고 합니다. 당시 보통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즈카르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바로 그때 지금까지 묶여있던 혀가 풀립니다.

 

    즈카르야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혀가 묶이는 고통을 통해 세상에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이 나를 판단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아니면 나는 세상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을 어쩌면 알프레드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도대체 미움받을 용기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요?

 

    우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쥔 냄비가 계속 뜨거워지고 있다면 그 냄비를 놓으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그렇게 쉽게 끊기지 않습니다. 흰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하지 말아보십시오. 그러나 지금 3초간 느닷없이 나온 북극곰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뇌는 무언가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더 그 생각에 집중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 북극곰을 3초간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먼저 지금 시각이 몇 초 몇 분인지 정확하게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다른 것에 신경쓰면 됩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이 평생 내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꾸르실료 한 봉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대낮에 건널목을 건너는데 음주 운전자에게 치인 것입니다. 워낙 심하게 다리를 들이받아서 걷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면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부정적인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꾸 생각을 부정적으로 끌어내리는 자아가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낮에 나에게 교통사고를 낸 그 사람의 잘못은 분명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 없습니다.

 

    병실에 누워있던 꾸르실료 봉사자는 절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낸 사람이 자주 찾아와 용서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꼴도 보기 싫었지만, 그 사람도 옆 본당에서 핵심 봉사자까지 하다가 어떤 연유로 몇 년 동안 냉담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성당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자존심이 무너진 것입니다.

 

    회복이 되어 꾸르실료 봉사자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자 사고를 낸 사람과 함께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분을 위해서, 모두를 위해서 그 사건이 ‘좋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즈카르야는 자신의 혀가 묶인 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반성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즈카르야로 짓겠다고 고집부렸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뜻’을 나의 것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적인 축복’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줍니다. 판단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안톤 룰릭 신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1996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사제서품 50주년을 맞는 자리에 초빙되어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저는 알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공산독재치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은 제가 정부에 반대선동을 한다는 구실로 체포한 후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저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9개월간, 저는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그 비좁고 더러운 곳에서, 그것도 강제로 인분 위에 앉아있어야만 했습니다.

    

    서품을 받은 바로 그 해, 성탄절 밤에 그들은 저를 감옥의 1층에 있는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천장에다 발가락이 겨우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하게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그것이 제 가슴까지 차 올라왔을 때,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나 엄청난 절망감으로 저는 크게 소리를 내고 울었습니다. 그러자 저를 심문하던 사람이 달려와 밧줄을 잘라 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마구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곳에서 저는 참으로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고통 안에서 바로 저와 함께 제 안에서 힘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너무도 강하게 저를 지탱해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느꼈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사제로서의 제 삶의 거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린 그 고문자들에게 저는 어떤 미움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제가 79세 되던 해, 처음으로 감옥에서 석방되었는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저를 고문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곧장 그에게로 다가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이것이 사제로서의 제 삶이었습니다.”

 

    안톤 룰릭 신부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극심한 고통 중에 십자가의 장막을 넘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심장이 찢어졌을 때 장막도 찢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 때 장막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 장막을 통과했을 때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과거에 있었던 나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고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평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그 모든 일이 ‘좋은 것’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좋은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의 힘입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들은 그래서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기우신부-


대림절은 형식상 메시아를 기다리는 때이지만 내용상으로는 메시아 백성이 되고자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세례자 요한은 기준이자 길잡이가 되어준 인물입니다. 

 

독실한 유다인으로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모두 메시아를 오랫 동안 기다려온 아나빔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늙도록 아이가 없어 그저 기도만 열심히 했던 부부인데,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들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를 준비하는 위대한 역할을 수행할 큰 예언자로 점지해 주셨습니다. 그에 대한 작은 징표가 있었으니, 너무도 큰 이 은총에 대해 놀라운 나머지 믿기 어려워 했던 즈카르야를 출산이 임박할 때까지 벙어리가 되게 했다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자마자 입이 풀려서 말을 하기 시작한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그 탓에 부부 지간에 아기 이름을 놓고 그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었던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는 일에는 신기하게도 의견이 일치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말라키는 일찍이 이 사건을 내다본 바 있었습니다. 그 예언의 골자는 장차 나타날 예언자가 우상을 숭배하던 고약한 풍조를 심판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를 심판의 도구로 삼으시고 행하실 바는 자못 엄중해서 우상 숭배에 물들다 못해 절어버린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과 문화를 심판하여 파멸에서 구해낼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견디고 버티어 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가혹한 심판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 살던 사람들이 각성해 가던 17세기 무렵에 우상 숭배에 대한 사색을 깊이 해 낸 또 다른 말라키가 있었으니, 그가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입니다. 십자군 전쟁의 부산물로 이슬람 문명권에서 보존해 오던 그리스 문화가 들어오고, 또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선교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제사 문제로 추방당하여 귀환하자 역으로 그들이 중국 고전 저술들을 유럽 언어로 번역하여 소개해 준 덕분에 동아시아 문화까지 들어와서 그야말로 17세기 유럽에는 지식의 홍수가 들이닥치던 판이었습니다. 원래 직업이 판사였던 베이컨은 법률가답게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상숭배적인 지식을 냉철하게 판별하는 요령을 알려주었습니다. 

 

첫째로 종족의 우상은 자기가 속한 종족이 다른 종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편견에서 나옵니다. 백인우월주의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같은 편견도 여기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을 닮도록 모두 다 귀하게 만드셨지만, 이 종족의 우상은 이러한 하느님의 창조 의지를 근본적으로 배척합니다. 인간의 생래적 평등을 부인하는 편견은 오류입니다. 

 

둘째로 동굴의 우상은 종족의 우상에서 파생된 우상으로서, 인간은 자신에게 익숙한 혈통뿐만 아니라 고향, 학교, 신분, 성 등 온갖 연고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자신과 다른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을 배타시하거나 아래로 멸시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부장적 문화나 사회적 신분제도도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것이 마치 동굴 속에 갇혀 사는 존재가 동굴 바깥의 세상을 모르는 것처럼, 보편적이지 못하고 편협하고 폐쇄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고수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자유라는 가치가 이 동굴의 우상 때문에 짓밟힙니다. 

 

셋째로 시장의 우상은 시장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흥정에서 언어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일어나는 여러 가지 오류들, 즉 눈속임으로 거래하거나 그럴듯한 말재간으로 사기를 치고, 또 큰 목소리로 상대방의 논리나 진실을 압도하려는 경향 등 언어가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는 일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넷째로 극장의 우상은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극들, 즉 영화든 드라마든 연극이든 모두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들인데도 이를 현실로 착각하는 오류입니다. 역사, 전통, 권위, 사상 등도 반성이나 비판 없이 바라보면 죄다 극장의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전의 사두가이든 율법의 바리사이든 자칭 전문가가 말했다는 이유나, 신문이나 방송에 나왔다는 이유로 믿게 하는 오류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비판해 보고 사실과 진실을 확인해야 비로소 믿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자기가 경험한 바의 원칙과 상식에 부합될 때라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대체 어떤 인물이 될 것인가?”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던 유다 산악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처럼, 오늘 말씀은 대림 시기도 막바지로 들어선 이 때에 우리가 과연 어떤 성탄절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소박한 설레임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대림 시기에 메시아 백성으로 변화되고 성숙하는 길은 인간을 귀하게 대할 줄 아는 하느님의 진리에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상으로 군림하는 종족과 동굴과 시장과 극장에서 빚어지는 온갖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리는 단순하고 소박하며, 오류는 어렵고 복잡합니다.

 -조재형신부-


로드아일랜드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보았습니다. 바다와 구름을 뚫고서 붉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새를 보았습니다. 새끼를 돌보는 사슴도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의 부모님들이 해 뜨기 전에 부지런히 밭으로 나가서 일을 시작하듯이, 그렇게 새벽을 여는 동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숙소에서도 해 뜨기 전에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리를 청소하시는 환경미화원, 농산물 시장의 중개인, 동대문 시장의 상인, 첫차를 운전하는 기사님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침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새벽을 힘차게 여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25년 전입니다. 음주를 좋아하는 저는 늦은 시간에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주교님의 권유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8시면 술자리를 마치고, 10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도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여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곳 뉴욕에서 신문사의 일과 더불어 부르클린 성당의 일, 퀸즈 성당의 일까지 도울 수 있는 것은 새벽 시간에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새벽을 여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사람은 모두 새벽을 여는 것입니다. 선한 목적과 선한 의지로 이웃을 돕는 사람은 모두 새벽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새벽길을 떠났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습니다. 밤 새워 양들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때를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던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던 사제 즈카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평생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벽을 여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합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열었던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 보다 큽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의 이름은 요한”(루카 1,63)

 

주님!

제 마음의 불신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소서.

닫힌 태를 풀고 제 몸에 당신 소유의 이름을 새기소서.

당신이 주신 이름을 제 삶의 서판 위에 새기게 하소서.

당싱이 주신 소명을 살게 하시고, 당신이 뜻하신 바가 제게서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아기의 이름은 요한

 -반영억신부-


요한의 탄생은 그 기쁨이 남달랐습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 이미 나이가 많은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웃과 친척들은 하느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이름은 즈카르야가 성전에서 천사로부터 전해 받은 이름입니다. 친지들은 아기의 이름을 조상의 이름을 물려주려고 했지만,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여주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묵은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으로 태어난 요한은 그 이름값을 하게 될 것입니다. 혈육을 떠나 더 넓은 의미의 형제자매를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요(루가3,4; 요한1,27),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잡이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고 하며 구세주의 오심을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자기의 이름을 남기려 하는 법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다릅니다.

 

즈카르야는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함으로서 천사의 말대로 입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즈가르야가 한 첫 말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노래였습니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게 되고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도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1,66).하고 말했습니다. 그 아기는 결국 주님을 드러내는 주님의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통하여 주님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이 코앞에 왔네요! 주님을 낳아드릴 마음의 방은 활짝 열렸나요? 아직도 잠겨있어요? 저런…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예수님을 낳아드릴 방이 되어 기뻐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를>

 -송영진신부-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가브리엘 천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 1,14-17).”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사실상 ‘메시아 강생 예고’입니다.

그리고 메시아 강생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 라는 말은,

이웃과 친척들의 생각을 나타낸 말일 뿐입니다.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는 “축하했다.”인데,

만일에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출생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큰 자비’를 받았음을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59-64).”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지으시고 천사가 전해 준 이름입니다(루카 1,13).

그래서 즈카르야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야 한다고

의사 표현을 한 것은, 천사가 한 말을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것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니까(루카 1,20),

믿게 되면서 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요한의 출생을 예고할 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을 했습니다(루카 1,18).

이 말은, “제가 그것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징이라도 보여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즈카르야가 말을 못하게 된 일과

아기가 태어난 뒤에 말을 다시 하게 된 일을,

그가 얻은 ‘표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 ‘말’일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 ‘선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했는데,

바로 뒤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노래’(루카 1,68-79)가 그 찬미일 것입니다.

그 노래를 보면, 세례자 요한이 하게 될 일을 말한 것은 두 절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하느님과 메시아의 인류 구원 사업을 찬미하는 말입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못하던 시간 동안,

침묵 속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즈카르야의 노래’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5-66).”

 

여기서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라는 말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적은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은, “주님의 손길이

우리 모두를(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만 보살피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보살피셨습니다.)

아무리 놀랍고 신기한 일이라도,

그 일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하느님(메시아)께서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축하하려고 모인 이웃과 친척들은

요한의 출생을 ‘남의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라는 질문도

‘남의 집 아기’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그들이 ‘즈카르야의 노래’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이 아기가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성탄은

메시아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그 일’은 ‘나의 일’이고, 성탄절은 ‘나의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일’이고, ‘우리 모두의 날’입니다.)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 가운데에는

성탄절을 ‘예수쟁이들만의 잔칫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고, ‘남의 날’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

라고 열심히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은 너희의 말일 뿐이다.” 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성탄절이 ‘우리의 날’이 되지 못하고,

‘나의 날’과 ‘남의 날’로 갈라져 있는 것은 신앙인들 쪽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신앙인들끼리만 모여서, 신앙인들만의 축일로 지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외양간에서 태어나신 이유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인정 없음’ 때문이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관심과 인정 없음’이 어떤 ‘작은 이들’을

그런 처지로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더욱 특별히 명심해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복음: 루카 1,57-66: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

 -조욱현신부-


교회는 성탄 바로 전에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배치하여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제시하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고리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는 정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할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사 40,3)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권능의 하느님을 낳았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요한 1,29)을 낳았다. 엘리사벳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을 화해시키는 사람을 낳았고, 마리아는 더러운 땅을 정화하는 분을 낳았다. 늙은 여인은 선조 야곱의 집안에 등불을 밝혔고, 요한이 바로 그 등불이다(요한 5,35). 젊은 여인 동정녀 마리아는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을 낳았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 대축일이다.

 

세례자 요한은 “여드레째 되는 날”(59절) 할례를 받는다. 여드레째 되는 날에 받은 할례는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 모든 피조물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시한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 또는 “은총을 지닌 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요한이 장차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 은총을 세상에 내리실 주님을 가리킨다.

 

또한, 즈카르야가 요한의 이름을 확인해 주고 입이 열려 말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은 그 아기의 이름이 지닌 힘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아버지에게 목소리를 되찾아 주었고, 사제에게 말하는 능력을 회복시켜 주었다. 가브리엘이 잠근 것을 갓난아기가 열었다. 요한이 태어나 할례를 받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예언자요 사제가 되었고, 말이 쓸모 있게 되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잉태된 기적 같은 출생은, 죽은 세상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깨우는, 회개를 외치는 요한의 설교를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요한이 할례를 받고 이름을 받았을 때,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65절)고 한다. 그것은 가문에서는 사용하지도 않던 요한이라는 이름을 부부가 고집하는 것과, 성전에 들어갔다가 나온 즈카르야가 벙어리가 되었다가 요한이 할례를 받던 날, 입이 열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80절)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정신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더구나 하느님의 운동선수인 우리는 정신이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육체의 지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지혜를 이길 수 있다. 정신이 육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이 “오시는 분”(묵시 1,4)을 위해 그 길을 닦고, 준비하는 것임을 공공연히 말하면서 사신 분이시다. 그분은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탄생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또한, 그분의 탄생 앞에 우리가 내어놓아야 할 예물은 어떤 것으로 준비해야 하겠는가? 그분의 탄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구원 시작이며, 그분의 탄생은 이미 십자가를 품고 있는 탄생일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먼저 와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듯이, 우리 자신 역시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길을 만드는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올바로 사는 것이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 66)

-한상우신부-

오늘도 빼놓지
않고 사랑을
실천하시는
성실하신
주님의 손길이다.

모든 탄생은
어김없이
성실하다.

성실함의
탄생이다.

보살피시는
주님의 손길로
하느님 나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신다.

이와같이
삶이란
정답이
없는 사랑만
있을 뿐이다.

사랑말고
다른 소명은
없다.

탄생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은
탄생을 향해 있다.

탄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서 정말
멀리있지 않음을
보게된다.

탄생은 이제
시작이듯
우리는 우리를
다듬어가는
아름다운 손길을
필요로한다.

먼저 손길을
내미시는
하느님이시다.

잊지 못할
세례자 요한의
탄생이다.

때를 놓치지
않으시는
사랑이다.

사랑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

구약(舊約)의
마지막 예언자의
세례자 요한은
신약(新約)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다.

탄생의
공명(共鳴)은
구원의 공명으로
우리모두를
울리고 있다.

사랑의
울림 안에
우리가 있다.

드디어
한송이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듯
사랑의 신비가
시작되었다.

조금 있으면
하느님의 탄생
성탄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 되었다.

 말씀 나누기 - 12월 23일-사랑의 정련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12월 23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