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간 금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가 1,67-79)
In the tender compassion of our God
the dawn from on high shall break upon us,
to shine on those who dwell in darkness
and the shadow of death,
and to guide our feet into the way of pe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신다(제1독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주님께서 아들 요한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계획을 노래하며 주님을 찬미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매사에 긍정적이고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밝게 웃으며 일하는 형제님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즐거워했지요. 그래서 한 후배가 선배인 이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배님은 늘 행복하시죠? 걱정이 하나도 없으실 것 같아요.”
이 말에 형제님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셨는데, 말기 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수치상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는 커다란 불행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면서 힘차게 살아가고, 누구는 자그마한 불행에도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외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불행을 불행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변화된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이를 즈카르야가 불렀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잘못을 벌하시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내려 주십니다. 즈카르야는 믿지 않은 탓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자 혀가 풀렸고 성령까지 받아 예언의 노래를 오늘 복음과 같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노래의 시작을 우리는 유의 깊게 바라봐야 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성경을 보면 많은 찬미의 노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래가 즈카르야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작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찬미와 감사가 우리 모든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찬미와 감사보다 불평과 불만의 기도로 더 많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밤,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찬미와 감사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게 됩니다.


자수성가로 엄청난 성공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시애틀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큼 큰돈을 벌었지만, 그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I blew it! (내가 다 망쳤어)"
그가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당시의 유산이 약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서 생각해 보니 회사 일에만 빠져 정작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손자들의 이름도 잘 외우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병석에 누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이 성공이 아닌 실패라는 의미로 "I blew it! (내가 다 망쳤어)"라고 외쳤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를 얻고서도 스스로 실패했다는 슬픈 유언과 함께 세상을 떠난 남자, 그는 바로 미국 최대의 마트인 '월마트'의 창업자인 '샘 월튼'입니다.
지금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몇 명이나 되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즈카르야의 노래’ 부를 자격; 내 자녀가 세례자 요한이 된다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요한을 낳고 입이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즈카르야의 찬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
그리고 자기 아들이 메시아의 예언자가 될 것을 기뻐합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운명은 실로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받고 고통과 십자가의 삶인데 아버지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자녀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살겠다고 할 때 기뻐 주님을 찬미할 수 없다면 아직은 즈카르야처럼 혀가 묶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예언자입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예언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누군가의 말을 전해서 그 사람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아 예언하는 대상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바알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살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손에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허상이 되고 다시 욕망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이 남아있기에 한 인간은 또 살아간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게서 나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사는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는 ‘타자(他者: 나 외의 다른 이)의 욕망을 충족시켜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이해 해야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어떤 다른 욕구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 욕구도 창조자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절대 두 발로 서서 걷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게 된 것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타자, 곧 부모에게서 그 욕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의 ‘뜻’을 따라주면서 우리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라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주는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을 올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러니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동물은 인간으로 말하면 자아와 자기 자신이 곧 하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아와 자기 자신이 다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아가 타자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타자인 자아의 뜻을 따라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절대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났었더라도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영광을 돌리려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뜻을 따라 그 영광을 위해 살아 그 사람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람의 세상에 속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예언자에 의해 어떤 세상에 속하게 되어있는데, 빛과 어둠 두 세상밖에 없습니다. 영화 ‘저스티스리그: 스나이더컷’(2021)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히어로들이 우주의 악당 다크사이드와의 싸움에 관한 내용입니다. 허황한 내용 같지만 사실 이런 영웅 장르들 안에도 우리 삶이 반영이 안 된다면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크사이드가 지구를 침공하자 영웅들이 뭉칩니다. 여기에서 대장은 배트맨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감당하기에 지구의 영웅들은 턱없이 힘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죽은 슈퍼맨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지구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슈퍼맨은 살아나고 싸움에서 이겨 일단은 다크사이드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데 지구는 다크사이드에 의해 황폐해졌고 슈퍼맨이 배트맨과 자신의 옛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왜 슈퍼맨은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슈퍼맨의 아기를 가진 아내 루이스 레인이 배트맨의 방치로 고통스럽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에게 지구를 지켜야 하는 어쩌면 가장 큰 원인은 루이스 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이 자신의 아내와 아기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이 다크사이드였습니다.
슈퍼맨은 다크사이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더는 ‘누군가를 위해’, 곧 누군가에게 영광을 주려는 대상이 사라졌고 다만 원한만 쌓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복수심으로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또 하나의 반전은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영원한 원수, 곧 조커가 배트맨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은 슈퍼맨도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조커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지구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 때문에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갈라지게 되는 이유는 슈퍼맨이 더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데 있고, 배트맨과 조커가 친구가 되는 데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 누군가가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복수심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어둠의 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조커도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뜻에 합류한다면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빛으로 나아오는 예언자였고, 슈퍼맨에게 다크사이드는 어둠으로 가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곧 그 세계의 문입니다.
빛이건, 어둠이건 우리를 그 빛과 어둠의 세상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에서 오는 ‘뜻’에 의해서입니다. 어둠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은 피조물을 희생시키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건, 부모건, 선생이건, 다크사이드건 상관없습니다.
피조물에서 오는 모든 뜻은 피조물을 파괴합니다. 세상을 보존하려는 뜻은 세상을 만든 창조자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이 빛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그 율법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도 인간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온 율법을 지킴은 곧 모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결국엔 피조물에 영광을 돌리고 피조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서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자체이신 분이 당신을 위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리며 살라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름은 모세의 십계명을 따름과 다릅니다. 조커가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이유는 배트맨의 뜻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창조자의 뜻입니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해도 그 인간을 위해서 살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것에 머뭅니다. 히틀러도 아리아인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쳤고 사람들은 히틀러에게 영광을 돌리며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부모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고 합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좋은 가르침을 준 부모를 살해했다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잃게 만든 그 사람은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뜻을 준 이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준 사람이고 그 사람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게 인간입니다. 따라서 부모가 가르쳐주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부모의 세상 안에서만 통용됩니다. 집단 이기주의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자는 오로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태어나셔야만 우리가 그분을 삶의 이유로 삼으면서 작은 벌레 하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뜻을 따라주는 존재가 곧 나의 삶의 의미이고 한 몸이 되며 그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참 삶의 의미요 하느님 나라인 그리스도의 예언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빛의 세상에 있는 것이고 빛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다른 사람도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예언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녀가 그리스도의 예언자가 되어야만 주님을 찬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어떤 피조물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오직 빛의 예언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다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혀가 풀려 즈카르야의 노래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려면 주님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이기우신부-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독서와 그 약속이 실현된 데 대한 감사로 거룩함과 의로움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의 복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서는 시나이 계약을 보충하는 시온 계약이고, 복음은 즈카르야가 노래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두 꼭지의 말씀 사이에는 매우 깊은 통한의 골짜기가 파여 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파라오 밑에서 우상을 섬기던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보호해 줄테니 히브리인들은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호와 섬김의 조건으로 이루어진 이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중재인으로 해서 시나이 산에서 맺으셨다 하여 ‘시나이 계약’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250년을 지낼 무렵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주신 목자이시오 다스리시던 왕은 오직 하느님뿐이셨습니다(시편 23편). 하느님만을 목자요 왕으로 모실 수 있으려면 그 신앙이 매우 충실하고 성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판관이던 사무엘 시절에 신앙이 극도로 쇠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도 다른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졸랐고 결국 하느님께서 양보하셔서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왕을 세우되 당신의 뜻을 대리하여 다스리도록 다짐을 받는 의식으로 축성된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이 첫 왕위에 올랐고, 우여곡절 끝에 그 다음에 즉위한 다윗이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에 성전을 세우려고 하자 하느님께서 또 다시 사양하시면서 맺어주신 계약이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다윗의 궁전이 세워진 시온 언덕에서 이 약속의 말씀이 내려졌기에 ‘시온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그 당시까지처럼 다윗과 그리고 그 후계자들이 시나이 계약 정신을 충실히 지킨다는 묵시적인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전보다 신앙이 더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세웠지만 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계약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나라가 갈라졌고 백성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거나 흩어졌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동안 다윗과 같이 하느님을 섬기고 시나이 계약에도 충실한 지도자는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통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던 즈카르야 사제는 아나빔으로서 줄곧 열심히 기도해 왔으나 막상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약속을 실현해 주신 데 대해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의 찬송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 그러니까 이 찬송은 자신에게 태어난 아들 요한이 아니라 메시아 탄생을 앞두고 바친 찬송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도 애초에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해 드린 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살겠다는 다짐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루카 1,73-74). 실로, 성덕과 의덕의 삶이야말로 약속을 실현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바쳐야 할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에게 오실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을 예언자로 늘그막에 얻게 된 자신의 아들이 선택된 데 대하여(루카 1,76), 즈카르야는 그저 감사드리는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아들에게 진작부터 그의 소명을 일러주고 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했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소명입니다(루카 1,77).
우리도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찬미가로 바치는 이 기도는 그 옛날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만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 앞에서 의롭고 거룩할 수 있는 덕행을 궁리하자는 다짐이기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어제 미사에서 들었던 성모 찬송을 매일 저녁 성무일도의 찬미가로 바치면서 공동선에 헌신함으로써 하느님의 최고선이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성서가 상기시키는 과거 역사는 오늘날 여전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발자취를 알아보라는 촉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이미 하느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 드려야 할 성덕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 드리워진 하느님의 손길, 즉 신성을 알아보는 데에 발휘되어야 하며, 우리가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증거해야 할 의덕은 그 신성에 따라 우리도 메시아적 백성으로서의 의로움을 실천하되 그저 자기 몫을 차지하려는 세상의 정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몫을 이웃에게 되돌려주려는 하느님의 정의 수준으로 행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서 새로운 교구장을 위한 ‘착좌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에서도 새로운 교구장을 위한 ‘착좌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착좌식은 함께하면서 축하드렸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착좌식은 방송을 통해서 함께하면서 축하드렸습니다. 두 교구의 착좌식을 보면서 약간 다른 점을 보았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착좌식은 전례의 엄숙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착좌식은 전례의 친숙함이 드러났습니다. 전임 교구장을 위해서 모든 사제와 교우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쳤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교구장을 위해서도 모든 사제와 교우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쳤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사 행렬에서 서울대교구는 서품 기수별로 입장하였습니다. 젊은 사제들이 먼저 입장하고, 선배 사제들은 나중에 입장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그냥 오는 대로 어우러져서 입장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교구답게 신자들의 기도를 20개 언어로 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고 신자들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국은 한복을 곱게 입은 자매님이 하였습니다. 약간의 다른 점은 있었지만 이임하는 교구장에게는 그동안 수고하셨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었고, 새로운 교구장에게는 기대와 희망을 담은 축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두 교구의 착좌식을 보면서 이제 곧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착좌식’을 생각해 봅니다. 화려한 성전의 우뚝 솟은 자리는 아니셨습니다. 많은 사제들과 교우들이 함께하는 성대한 착좌식도 아니셨습니다. 신문과 방송으로 착좌식을 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착좌식은 베들레헴 들판의 작은 동굴에 있는 ‘구유’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구유를 만들어 제단에 놓은 이래로 지금 모든 교회의 제단 앞에는 ‘구유’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엄숙함과 친숙함은 없었지만 거룩함이 충만한 착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었습니다.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는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성전을 허무십시오. 내가 3일이면 다시 세우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땀으로 세우는 성전이었습니다. 구리 뱀이 높이 들려서 사람들을 살렸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 성전이었습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렸던 그 돌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2021년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을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 주었던 베들레헴의 구유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더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 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
(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예언자가 되어
-반영억신부-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와 모두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기 몫을 알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이 닦은 길을 바탕으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오신 분은 지배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의 예언자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67-79: 즈가리야의 노래
-조욱현신부-
성령께서는 즈카르야를 사로잡으시어 아홉 달의 침묵을 깨고 요한이 할례 받던 날, 예언하게 하셨다. 즈카르야는 노래 첫머리에서 장차 요한이 준비할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68-69절)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 의롭게 만들기로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뿌리 깊은 병인 교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듯 우리를 찾아오셨고, 당신의 겸손을 그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대가로 치르고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로마 1,3)이며,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뿔이셨다.
그것은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71절) 그리스도는 자비요 정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자비를 입었고 의롭게 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사악함의 때를 씻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는 어떤 일에 대한 보장이다. 반드시 당신 말씀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맹세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 각자에게 당신의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그분 자신의 말씀이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74절) 이 원수들은 육체의 원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원수들이다. “싸움에 용맹하신”(시편 24,8) 주 예수께서는 우리 원수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올가미에서, 즉 모든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71절) 우리를 해방하고자 오셨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72절)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그분의 날을 미리 보고 즐거워하였다(요한 8,56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72-75절)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76절)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예언자의 하느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잠시 그에게 모여들어 세례도 받고 그의 생활방식에 감탄도 했지만, 영원히 타오르는 등불을 끌려고 별짓을 다 하다 결국 그를 죽음의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78-79절)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이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복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명성도 떨치지 않으신 분, 하느님의 모습과 종의 모습을 함께 지니신 분, 그러나 어둠 속에 갇혀있던 우리 세상을 위해 빛처럼 해처럼 솟아오르시는 분, 우리는 그분께 무릎 꿇고 절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구원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한 주님께 매 순간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청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아름다운 예물로 바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들이 모두 감사와 찬미의 순간들이 되어,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말씀 나누기 - 12월 24일-닫힌 말문이 열리기까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3월 2일 재의 수요일 (0) | 2022.03.02 |
---|---|
2022년 3월 1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0) | 2022.03.01 |
2021년 12월 23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0) | 2021.12.23 |
2021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수요일 (0) | 2021.12.22 |
2021년 12월 21일 화요일 (0) | 2021.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