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2월

Margaret K 2021. 2. 1. 07:27

2월 28일 일요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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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은 기꺼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따랐지만,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사악을 뛰어넘는 순종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 속에서 수난의 길,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는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실 수 있으셨던 힘은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당신을 신뢰하시는 아버지를 신뢰하시는 깊은 관계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변모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온전히 순명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신뢰하시며 사랑받으시는 아드님으로 좁고 험한 길을 가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 결심의 시기가 바로 사순 시기입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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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욕구를 죽이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 꼭 가야만 하는 가치 있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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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파도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산이 깊어야 계곡의 물도 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시련과 갈등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 시키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을 하시리라 생각합니다누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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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토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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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또 오늘, 대체 누가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까닭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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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ㅍ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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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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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는 생각을 끊는 것입니다.

축복을 빌어주면 자신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면 화가 날 일이 생겨도 미량만의 물이 흐르기 때문에 지금의 의지력으로 충분히 통제됩니다. 그러면 주위에 나무도 자라고 물고기도 살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그러면 사람들도 그 곳에 쉬러 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납니다. 좋은 기분은 생각을 통제하는 데서 생기는데, 기분이 좋으면 화가 날 일도 웃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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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4일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루카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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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이것을 잘 압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압니다. 어린이처럼 원할 줄만 안다면 우리가 믿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아는데 어른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로 사는 것이 고통이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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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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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자녀뿐입니다. 자녀가 아닌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당신은 내 자녀가 아닌데 왜 아버지라고 부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가까운 관계, 친밀한 관계가 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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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의 제사는 곧 기도입니다. 기도는 축복을 청하는 것입니다. 축복을 청할 때 카인보다 아벨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벨은 은총 지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농부였습니다. 처음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것은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아담에게는 농사일을 시키셨습니다. 농사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가 하는 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아담이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고 카인은 그 이후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란 마치 세례를 주는 것처럼 선교하고 사랑하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일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선악과에 손을 댄 아담은 남을 사랑하는 일보다는 소유하는 일에 집착합니다. 자기 손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사람은 저주받은 땅에서 고생은 하지만 충분한 소출은 얻어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그에게 축복을 거두시기 때문입니다.

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카인인 상태로 청하는지, 아벨인 상태로 청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카인에서 아벨로 옮겨가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분 뜻을 먼저 헤아릴 때 농사를 짓던 아담에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아담으로 바뀝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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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월요일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1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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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소개하셔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볼 줄 압니다.

베드로의 이 시각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2005)에서 자신이 짐승인 줄로만 알았던 한 소녀가 한 스승을 만나 인간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풀과 나무, 꽃과 물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에만 집착했던 때와는 다르게 각 물체가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이 나의 시각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한을 이양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이양받고 그것을 행사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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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1일 일요일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코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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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 속에서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십 년간의 유랑을 마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여정은 어떠하였습니까? 배고프고 목마르다고 투정을 부렸으며, 하느님을 시험하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다가도 하느님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노예 집단’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들은 광야라는 그 척박한 공간에서 조금씩 성숙합니다.
광야는 그런 의미에서 성장과 성숙의 장소입니다

 빵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익숙하고 안정된 이집트에서 벗어났을 때,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불편함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절망 가득한 신음 때문에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그 체험은 신앙의 성숙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광야에서의 시간이 피곤하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 아닌, 머물러야 하는 은총의 시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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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유혹, 시련을 이길때만이 하느님의 영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광야는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사막의 모래를 견뎌야 하고 어두운 밤에는 굶주린 들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 수 있는 척박한 땅입니다. 그러나 광야는 단지 시련만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합니다.

-키엣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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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라는 장소는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향하게 되는 자기와의 싸움의 장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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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벽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유혹에서 지면 보통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태6,11-13).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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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는 무한한 고독의 상징처럼 다가오지만, 이 광야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곳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모든 자신감을 털어버리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무능력, 나약성, 무력감을 가장 절실히 느끼게 되는 곳이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광야에 머무시는 동안에 하느님과 더욱더 깊은 만남을 체험하신다. 즉 광야에서 예수께서는 사탄의 정면 공격을 물리칠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더욱더 강한 현존도 체험하신다. 이 광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보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심을 마르코 복음에서도 강조하고 있다(12절).

우리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무엇임을 깊이 깨달을 때야 하느님께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하느님 앞에 자신들이 가졌던 그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침묵의 공간을 즉 광야를 만드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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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토요일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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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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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8일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가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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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수요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오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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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화요일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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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5일 월요일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창세기.4,1-15.25)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마르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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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사망 원인은 자연재해와 질병 그리고 다른 동물의 공격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에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창세기에 나오는 형제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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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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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일요일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코 1, 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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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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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토요일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창세기3,9-24)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마르코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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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빵으로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신 일은 오늘 복음에 앞서 이미 한 번 일어났던 일입니다(마르 6,30-44 참조). 그때는 사천 명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습니다. 또한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오늘 복음보다 더 큰 기적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기적을 이미 체험하였으면서도, 그때와 거의 유사한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행동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사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이러한 의문은 제자들의 물음으로 풀립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자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마르 6,37)라고 반문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반응은 첫 번째 기적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첫 번째 질문에서 비용을 중요시하였다면, 두 번째 질문은 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거저 주어지는 잔치며, 오늘 복음의 기적은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으신 일임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두 기적 이야기를 함께 읽는다면, 빵의 기적은 바로 예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잔치임을 알게 됩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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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사람들 눈에서 없어짐으로 자신을 감출 수 있지만

하느님의 눈에서는 내가 없어질 수 없고 자신을 감출 수 없지요.

시편 138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너 때문에 죄를 짓고,

너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너 때문에 불행하다는,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내 주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나의 행불행이 나의 손에 있지 않고 그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인생을 잘사는 지혜로운 사람은 <네 덕, 내 탓!>이라고 합니다.

혹시 '네 탓이요, 네 탓이요, 네 큰 탓이로다!'하며

살지 않는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신부-

 

2월 12일 금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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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목요일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마르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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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0일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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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저자는 우리가 의혹을 제기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옆에는 생명나무도 함께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나무를 바라보거나 그 나무에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므로, 생명에 머물고자 한다면 생명나무를 선택하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걸었기에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모든 나무 열매가 다 우리의 것이지만, 단 하나의 나무만은 하느님의 것으로 남겨 드려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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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들이 남의 잘못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들이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선이시고 진리이시고 빛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인간 안에 선이고, 진리고, 빛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하느님께 향하게 만드는 작은 등불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빛은 자신이 어둠임을 깨달은 이에게만 의미를 가집니다. 빛은 어둠만을 구원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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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2월 9일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코 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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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하느님의 율법을 따른다고는 하나 마음은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따르면서도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을 하지만 사실 자기 욕망을 따르는 이들은 남을 겉모습만으로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합리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거스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사람 안에 두 본성이 결국 공존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둠이 빛과 통합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려면 인성을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버리고 신성을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요즘 인간의 통합에 대해 말하며 마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자아를 통합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사람의 마음 안에 이 악한 것들이 나오는 원천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둠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이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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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노자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노자는 자연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서 자연을 이야기하셨습니다하늘의 새와 들의 꽃을 보라고 하셨습니다그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을 닮은 사람도 그렇게 해 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그러니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노자는 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물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평평한 곳에서는 호수가 되고기울어진 곳에서는 흘러 넓은 바다로 간다고 하였습니다개울은 소리가 나지만 넓은 강물은 소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먼저 이야기를 듣고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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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8일 월요일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코 6,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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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말씀이 창조한 ‘세상’과 세상을 창조한 ‘말씀’을 마주합니다. 말씀이 창조한 세상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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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7일 일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코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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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기 7장 1~4절, 6~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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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의 '메시아의 비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고통, 자아 포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함구령이 필요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오직 십자가 위에서만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열쇠가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분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시며 그것으로 힘을 얻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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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토요일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마르 6,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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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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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4일 목요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마르코 6,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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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선포하신 것은 ‘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우리의 지상 순례의 여정에서, 영원한 생명은 아직은 너무 먼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선포하고 교회가 계승한 ‘회개’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내가 아닌 하느님께 향하게 해 보면 어떨까요?

-박형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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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둘씩 짝지어 보냈느냐는 점입니다.

당신이 함께 가지 않으니 당신 대신 서로 의지하라고?

 

그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 짝이 바로 주님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한 짝이 되었다면 베드로에게 요한이 주님이 되고,

요한에게 베드로가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둘이나 셋이 있는 곳에 당신이 함께 계시겠다는 뜻과도 일치합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주신 부부도 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이 아니겠습니까?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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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수요일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마르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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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방식은 ‘안다’라는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유년기와 가족 등을 다 알고 있기에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안다라는 말은 “더는 믿고 희망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는 것을 믿고 희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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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자렛 사람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잘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이 말은, “진짜 메시아라면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몰라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라는 교만은 언제나 신앙의 걸림돌이 됩니다.

욥기의 끝부분을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욥 42,3-).”

(신앙은 학문 연구가 아니라, ‘삶’입니다.

절대자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라는 것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그들은 시기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자기들에게 내리는 은총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처럼 은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시기 질투는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느님을 거스르고 자기 자신의 구원도 방해하는 큰 죄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 대한 시기 질투 때문에 국가도 망치고

자기도 망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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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화요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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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르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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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항상 악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마귀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악습과 죄를 즐김으로써

마귀들과 함께 주님을 못 박았으며, 지금도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CCC 598)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죄를 통해 우리가 악마와 결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돼지는 돼지지 악령과 상관없는 것처럼 무덤에 살던 사람만 악령에 들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본인이 악령에 들렸다고 알았던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자신들이 하는 일이 악령과 상관없다고 믿었던 이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의 모습은 뱀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에덴동산의 뱀을 사탄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래야 사탄에게 유혹받으신 예수님도 쉽게 이해됩니다.

 

내 안에서 악령과 결탁하여 나를 죄짓게 만드는 자아라는 돼지 속에 숨어있는 것이 뱀의 모습임을 명확히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은 인간이 치료할 수 있지만, 악령은 주님만이 물리쳐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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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없는 부활은 환상입니다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세상의 모든 부활은 깨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깨어지지 않는 달걀은 결코 병아리가 될 수 없습니다교회의 위기는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조직이 잘못되어서가 아닙니다십자가 없이 부활하려는 욕심 때문입니다십자가를 외면하는 교회는 언제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질투분노미움교만게으름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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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처음에는“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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