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31일 일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 1,21ㄴ-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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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 가르칩니다. 그러니 많은 경험과 사례들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학생들은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교사’는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핍니다. 그 불은 이전에 추구하던 모든 욕망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립니다. 그 불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악령을 몰아냅니다. 학생들의 마음 안에는 세속-육신-마귀의 악령이 있습니다. 그 어떤 교사든 그 악령을 몰아낼 수 없다면 그 교사는 권위 있는 교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가슴에 지펴진 불로 제자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는 교사가 권위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교사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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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토요일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코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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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이 생기면 그것은 바람과 같습니다. 그대가 흔들린다면 그것은 풍랑입니다. 그리스도를 깨우십시오. 유혹 한 가운데 있는 우리는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아우스티누스 교부)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코 복음 4장 35절)는 말씀은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현재의 것에서 미래의 것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입니다.”(크리솔로구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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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도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한편으로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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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함께 계실지라도 주님은
위험을 원천적으로 막아주시는 분이 아니라
다만 위험 중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 중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얘기지요.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십자가 길을 가셨고,
그리고 우리에게 꽃길을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험한 길과
좁은 문을 통과하라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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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9일 금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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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어제 ‘등불’이 있는 공동체의 필요성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공동체마다 진리를 품은 정도가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에 어느 만큼의 진리가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장에도 차이가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진리와 은총이 충만한 공동체에 머물면 저절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말씀도 오직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따로 풀이해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머물면 그 충만한 진리로 사람이 성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장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과정입니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탈출하여 자신에게 햇빛과 물을 주는 하늘로 향하는 과정이 성장입니다. 하지만 세속-육신-마귀의 본성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이들은 여전히 그것들을 주는 스마트폰에 머리를 들이박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각자의 독방에서 힘든 고독에 지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등불이 있습니다. 이 등불은 진리이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자신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 공동체에 머무는 사람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자기 손해이고 세상의 피해입니다.
사람이 왜 꼭 성장하고 성숙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다면 할 말은 없지만, 행복해지고 싶다면 나를 성장시켜 줄 진리의 빛, 좋은 뜻이 지배하는 공동체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뜻은 ‘사랑’입니다. 인간 육체적 본성과 반대이기 때문에 올바른 성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등불인 공동체에 머물면 자신도 저절로 성장하게 되고 행복도 함께 증가하고 주위 사람들도 함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가장 완전한 공동체가 가톨릭교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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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입니다. 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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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과정 중에 있으며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습니다...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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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8일 목요일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마르 4,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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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수요일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을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삼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백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마르코.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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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화요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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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월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마르코 16,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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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일요일
예수께서 갈릴레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마르코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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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3일 토요일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르코 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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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죽도록 무언가에 한 팀이 되어 매진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받은 리더는 자신과 또한 그를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노력하는 데서 참 기쁨이 옴을 가르칩니다. 게으르게 만드는 리더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령은 밥 먹을 시간도 없게 만드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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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경험상 잘못된 판단과 오해의 더 큰 요인은 성격보다도
인격적인 것 곧 교만이고 그러므로 함부로 판단하거나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자기 비움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영어에서 우리말의 이해에 해당하는 Understand라는 말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영어의 이해는 Under/밑에 Stand/서다 곧 밑에 서는 것이잖아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강하고 늘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데 비해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비우고 늘 다른 사람 밑에 있기에
자기 식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람입장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친척들은 어떤 것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은 교만하기에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할 수
있지만 친척들도 교만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일까요?
교만하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판단하고 오해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들 생각에 주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미쳤다는 표현은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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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금요일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코 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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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목요일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마르코 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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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일 수요일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르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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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체 언제부터 손을 꼭 쥐게 된 것일까?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왜 쥐었을까?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 했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 서라. 손을 뻗어라.”(마르 3,5)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해주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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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움켜쥔 손은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움켜쥔 손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는 펴질 수 없는 손입니다. 나의 손은 어떤 손인가? 살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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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느끼셨던 두 가지 감정을 소개합니다.
분노와 슬픔입니다.
우리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만 주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악함을 보고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신 것인데 어떻게 보면 반대되는 두 감정입니다.
분노는 정의에서 비롯된 감정이고,
슬픔은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며,
분노가 미움적인 감정이라면
슬픔은 자비적인 감정이지요.
분노는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감정입니다.
사람이라면 이러해야 하거늘 인두겁을 하고
어찌 그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감정입니다.
천인공노란 나 한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적인 감정과는 달리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분노이고,
하늘의 뜻과도 어긋나기에 하늘도 노하는 그런 분노이지요.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는 감정도 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이 가련하고 그래서
그들을 보고 슬프신 것인데 이 또한 하늘의 슬픔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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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화요일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2,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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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월요일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마르2,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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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에서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새로 태어남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벌 받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만 하는 율법주의자 수준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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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말씀의 진짜 뜻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은,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니라,
“옳지 않은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지켜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1-22).”
우리는 ‘새것’이든지 ‘헌것’이든지 간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해서 선한 것은 보존하고 악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새것인가?, 헌것인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가? 아닌가?”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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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 하셨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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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일요일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요한 1,3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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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6일 토요일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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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1월 15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르코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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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 목요일
나병환자 하나가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 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하시자 그는 곳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마르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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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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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마르코 1,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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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일 화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마르코 1,21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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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과 동침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마음의 평화만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내 자신이 곧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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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4-20)
1월 10일 일요일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르코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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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일꾼으로 가장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삼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터무니없는 사람이지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세상 것들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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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라”는 말은 ‘지금까지 행복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을 버리라’는 뜻이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손에 든 찻잔이 뜨거우면 그냥 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뜨겁다고 괴로워하면서도 잔을 놓지 않습니다” 돈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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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9일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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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신부가 신랑에게로 향하는 ‘길’과 같은 존재란 뜻입니다. 길은 두 갈라진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고 싶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길은 그래서 돋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길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되고 목적지로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신랑의 친구,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려면 바로 세례자 요한처럼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가기 위해 밟고 지나가는 그 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록 지금은 작아질지언정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히 사랑받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이들을 어딘가로 향하게 하는 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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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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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완전한 자기 비움이며 동시에 완전한 충만함의 모범이고,
자기를 완전히 비울 때 완전히 충만해진다는 증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주님을 완전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와 함께 길을 가던 동료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당신을? 왜 당신을? 왜 당신을?"
당신은 그리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은데
왜 수많은 사람이 당신을 따르냐는 뜻이었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환희에 차서 대답을 하는데
환희에 찬 이유가 자신이 잘생기지도, 유식하지도,
가문이 좋지도 않다고 동료가 얘기한 것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자기의 무성無性과 작음을 진정 기뻐하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기뻐하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기에게 하느님께서
엄청난 은총을 주셨다고 그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큰 은총을 강도에게 주셨다면 강도는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을 주님께 드렸을 거라고 얘기함으로써
자기는 쭈그러들고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고 공현합니다.
하느님은 거저 주시는 분이고 인간은 누구나
그 은총을 주시는 대로 받는 존재라는 건데
이는 오늘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과 맥을 같이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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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8일 금요일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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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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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잔잔할 때는 주변의 모습을 담아 낼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람이 마음에 불면 이웃의 모습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의 바람이 불면 하느님의 뜻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원망과 미움의 바람이 불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을 거울처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음은 차갑지 않습니다. 거울에 비친 불은 뜨겁지 않습니다. 거울은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비추어줍니다. 거울은 오는 사람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습니다.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거울 같은 사람은 비춰오는 것이 밉다고 해서 배척하지도 않고, 곱다고 해서 환영하지도 않으며, 비춰진 것이 떠나가도 굳이 그 자취를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성모님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모습도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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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목적은 나의 원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면 모든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느덧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으로, 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사람으로 바뀌어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늘 행복하게 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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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목요일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4-22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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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가 지금 성경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때 하늘 나라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장소도 또 특별한 시간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주님의 말씀을 지금 이 순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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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수요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코 6,4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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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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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에 ‘프란치스칸 영성’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12월 13일에 연재된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의 저서 ‘The Triple Way(삼중도)’에서 죄의 목록을 열거하는데 뜻밖의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큰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가시밭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는 시간을 믿음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과 사랑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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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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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영근신부-
1월 5일 화요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 6,3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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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 월요일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마태오4,12-17.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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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토요일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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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은 자기 자신에 대한 명료한 신원의식과 명확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저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보내진 자, 자신은 길이 아니라 이정표,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 주인·왕이 아니라 종, 심부름꾼이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때가 이르자, 즉 구세사의 주인공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자 스스로를 소멸시켜나가기 시작합니다.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추며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합니다.
오랜 세월 공들여 양성시켰던 제자들도 미련 없이 예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완벽히 소멸되기 위해 헤로데 왕가의 타락을 공개적으로 거듭 질타합니다. 그 결과 순교라는 완벽한 소멸을 맞이합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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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일 금요일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루카 2,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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