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3월

Margaret K 2021. 3. 1. 05:40

3월 31일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14-25)

 

 

3월 30일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요한 13,21-3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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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주어진 두 뜻이 있습니다. ‘주님 뜻을 죽이고 내 뜻을 사는 것’과 ‘내 뜻을 죽이고 주님 뜻으로 사는 것’입니다. 두 뜻은 반대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분께서 굳이 당신 뜻을 알려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뜻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고 주님 뜻은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선택은 이 두 개만 구분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인지 살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뜻은 분명 결과가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은 생명력입니다. 행복하면 살고 싶고, 행복하지 않으면 죽고 싶습니다. 가리옷 유다의 선택은 내가 살고 이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살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죽고 이웃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뜻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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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 속에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는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입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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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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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하면서 남은 너무나 잘 보는 것 같습니다. 내 눈이 나를 향해 있지 않고 남을 향해 있어서 그럴까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비판을 가지고 남을 설득하려고도 합니다.

시간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용기있게 앞으로 전진하며, 식별을 통해 하나가 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꿈을 찾아내 실행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둔 길을 찾아내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프란치시코 교황).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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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함 없이는 참다운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사 없이 사랑하려는 시도는 기름 없는 자동차를 운전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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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일요일

 “너희는 모두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마르코 14,1─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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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한 편의 드라마를 보게 됩니다. 그 드라마는 이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그 이야기를 재현합니다. 그때의 사건을, 그때의 시간을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재현하며 우리도 거기에 참여합니다. 함께 분노하고 울고 감동하려면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야 합니다. 아니, 자신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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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환호하지만, 그 환호가 며칠 뒤에는 사라지고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외침으로 바뀔 것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그렇게 손을 내밀었던 손은 예수님의 뺨을 때리려고 휘두르고 있으며, 예수님을 찬양하는 말은 예수님께 치욕을 주기 위해 침을 뱉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충분히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않으십니다. 이 순간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 사랑의 완성을 주시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당신 몸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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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마치 당신이 받는 영광에 합당하지 않은 듯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이 실현되기 위해 그리하신 것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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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해서 당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악령들이 예수님의 신비의 일면을 알아챘을 때마저도(1,34;3,12), 당신의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에게마저도(9,9)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곧 ‘메시아의 비밀’이라는 신비에 가려졌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수난기에서는 메시아 비밀이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고 감독한 백인대장의 고백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

수난의 극적인 사건은 어떤 발견(깨달음)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젖어듭니다.

결국, <마르코복음>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이 발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곧 침묵으로 가려져 있던 메시아의 비밀이 십자가에서 발견되게 됩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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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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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읽으며 분노하였고 세상을 보며 분노하였으니, 이제 스스로를 보며 분노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더 나은 나로, 더 나은 사회로, 더 나은 신앙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해 봅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쁜 부활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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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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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리 본성이 하느님이라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고 돈에 집착도 할 수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위선적으로만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신은 인간이라 굳게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려면 자신도 하느님이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믿으면 될까 두려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소주를 찾다가 술병을 보고 “여기 소주다!”라고 말하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두 본성이 합쳐져 있을 때 보통 그 겉을 싸고 있는 것보다 그 안의 물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문지에 쌓인 굴비를 보며 어머니가 “저게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 신문지라고 대답할 아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체는 밀떡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하느님이라 고백하면서,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데도 우리는 그냥 사람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그 믿음 때문에 내가 진짜 그리스도처럼 변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은 모두 신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인간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보며 “나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존재를 퇴색시키지 않습니다.

.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인간이라고 믿어야 인간의 행위를 시작하는 것처럼, 내가 하느님이라 믿어야 사랑이 됩니다. 사랑은 행위가 아니라 본성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숨을 쉬어도 그것이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믿고 하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사랑일 수 있어도 본질에서는 그저 인간의 덧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할 용기가 없는 이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사랑은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하느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 없이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선행처럼 보일지라도 다 위선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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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버지의 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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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겐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 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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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목요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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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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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화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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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함은 욕심의 산물입니다.

욕심이 크면 클수록 조급함은 심하고

그런 마음을 비우면 비울수록 느긋하지요.

조급하지 않으려면 욕심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

곧 마음의 가난이 관건인데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가 않지요.

욕심을 이룰 수 있는데도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 민수기는 스스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죽여주시고 살려주시는 얘기를 들려줍니다.

 

말하자면 뱀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하여 욕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은 죽이시고,

다른 모든 욕심 버리고 오직 살기만을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살리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고,

이런 인생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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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1일 일요일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소서.”(요한 1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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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토요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7,4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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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던 사람들은 배우지 못했어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예수님에게는 새로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예수님과 대화를 하였던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진리를 찾으려는 갈망이 있는 사람입니다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갈망과 희망이 만나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던 마리아와 같은 사람입니다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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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금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오 1,16.18-21.2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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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나 고독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이고

고독은 절대적인 분과 함께 있으려는 마음입니다.

외로움은 도시에서 느끼고

고독은 광야에서 느낍니다.

외로움은 타인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불만족이고

고독은 절대자를 만나기 위해 내가 적극적으로 머무르려는 골방입니다.

      요셉 성인이나 예수님은 이 고독의 힘으로 십자가를 지고 의로움의 길을 가셨습니다

 고독을 즐기십시오. 이것이 ‘적극적 고독’입니다.

이 노력이 ‘광야’로 나오는 삶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혼자 산을 올라도 좋고, 여행해도 좋고, 책을 읽어도 좋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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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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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 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듣고, 내 가정 구성원의 목소리를 서로 잘 들어 주어야 화목해질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동료의 목소리를 들어야 서로 도우면서 일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 된다’라는 것은 우선 듣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먼저 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게 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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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영광을 추구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과 반대되는 것일까요? ‘자기 영광’은 ‘자존심’과 같은 말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억은 ‘내가 그것을 했다.’라고 말하나 내 자존심은 ‘내가 그것을 했을 리가 없다.’라고 맞서는데, 결국엔 기억이 자존심에 굴복한다.”     

자존심은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은 그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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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 수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5,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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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1-3ㄱ.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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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 이현세 씨의 말입니다. 그의 말 중에 ‘신의 장벽’이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천재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신의 장벽’입니다. 오늘 벳자타 연못의 병자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신만이 그의 자비로 그 문을 열어주셔서 당신 양 떼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 자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찾아와서 그 장벽을 넘겨줍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것이 ‘38’이고, 그러면 신이 ‘2’를 줍니다. 자기를 스스로 돕는 것이 ‘38’이고, 그 사람에게 신이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시는 것이 ‘2’입니다.

 

      오늘 복음은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닌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 죄를 이기려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면 언젠가 주님께서 그 장벽을 넘겨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이전에 누워있던 자리를 이젠 들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내가 의지하여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것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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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발생한 환자의 치유는 유다인들에게 큰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38년 동안이나 고생했던 환자의 치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었습니다. 그저 안식일법을 어긴 예수님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만이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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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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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월요일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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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일요일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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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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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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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목요일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 되겠느냐?”(루가 1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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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단체나 사회도 그 사회에 머무르려면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는 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그 사회가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더 완전한 행복의 나라를 원하십니다.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하늘 나라에서는 더 큰 의무가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무관심으로 누군가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더 적극적으로 타인의 고통을 책임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지옥이라는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배에 타서 그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 배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이 얻어질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세상에 선교하러 오셨습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배에 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선교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회 전체에 사기를 떨어뜨리는 탈영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영화 ‘명량’(2014)에서 열네 척밖에 배가 없는데 수백 척의 일본 배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몇 명이 탈영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려워서 떠나겠다는데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그들의 목을 칩니다.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이라는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습니다. 선교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누군가에게 당하고 있는데 팔짱만 끼고 있는 자녀는 잘못이 없을까요? 그것 자체가 부모를 괴롭히는 사람을 긍정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혼을 구하기 위해 악의 세력과 전쟁 중이시고 우리는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팔짱만 끼고 구경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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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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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위선자라고 꾸짖으십니다(마태 23,1-36 참조). 율법에 적힌 규정들을 정확히 지킬 뿐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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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9일 화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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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약자이며 가장 작은 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덜 가졌고, 더 고생하고 있으며, 더 아프고 더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만을 향하게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은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들과 셈을 하는 임금은 자신보다 강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금은 종들을 모두 약자라고 생각하기에 잘못을 하거나 주인의 명령을 어기더라도 가엾은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약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더 큰 빚을 지고 있고, 임금에게 고초를 겪었기에 자신을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괘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배은망덕한 채무자로만 생각합니다. 그에게 용서와 자비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 힘겨운 인내와 고통만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면 누가 가장 작은 이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용서할 마음이 없다면 받은 것들을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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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흔일곱이라는 숫자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아담에서 예수님께 이르는 세대를 일흔일곱으로 루카 사도가 나누었음을 이야기합니다. 즉, 한 세대도 빠지지 않는 용서라는 것으로, 용서 안 될 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조건적인 사랑으로는 마음의 병을 없앨 수 없습니다. 오직 용서라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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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 ‘악한 종’이 동료를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빚이 먼저 다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용서와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기에 앞서, 오히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받았음을 먼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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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 4,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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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일요일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요한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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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의 신앙에서 사랑은 사라지고 제사만 남았습니다. 마음, 영혼, 진심이 담긴 제물 봉헌이나 진지한 예배는 사라지고, 형식과 율법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신 예수님께서 분노와 슬픔 가득한 얼굴로 성전 정화 작업을 실행하십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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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1-3.11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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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움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고 내가 이해할 수도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는 지혜를 가질 때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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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이 3단계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바리사이-율법학자적인 사람들로서 그들은 의무를 다해야만 하느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처럼 하지 않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십일조도 철저히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멀어져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처럼 열심히 의무를 하지 않는 타 종교들을 비판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자비를 너무 과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만 보면 된다고 믿고 의무는 게을리하는 단계입니다. 아버지 유산을 받아 흥청망청 사는 단계입니다. 술에 취하고 게으르게 생활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었다는 만족감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더 중시하는 신앙인이면서 죄인인 상태가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회개한 탕자의 단계입니다. 무엇이든 다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자신도 뭐라도 하려고 하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자비를 굳건히 믿는 두 번째 단계에 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속함으로써 첫 번째 단계는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탕자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적어도 그분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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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비유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오늘 우리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무시하고 막나가던 둘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리 개의치 않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걸로 만사 OK였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비록 죄인이어도 하느님 눈에는 그저 안쓰럽고 딱해보입니다. 측은해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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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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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회개는 사랑을 느꼈을 때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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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11절) 이 두 아들은 두 백성을 의미한다.

율법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이 큰아들,

어리석은 우상숭배를 하는 다른 민족은 작은 아들이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큰아들과 작은아들로 구분을 하게 된 것이다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식량의 기근이 아니라, 선행과 덕행의 기근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난 자가 진짜 굶주리는 자이다.

그가 곤궁에 허덕이고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것은, 방탕한 쾌락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양식으로 배를 채울 줄 모르는 자는 늘 굶주릴 것이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17절) 그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남아있었다. 창녀들과 어울리며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를 떠나 남의 땅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아들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성령께서는 죄를 지은 이에게서도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21절) 작은아들은 아버지께 돌아오며 울부짖는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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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33-43.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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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은 피조물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종이 주인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고 또 잃으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느님을 주님, 혹은 아버지로 인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마치 에덴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내는 교무금과 봉헌금은 바로 주님이 나의 주인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전례와도 같은 행위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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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죽이지 않고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팔았고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요셉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어 주십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직장에서가정에서이웃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의 소작인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내가 만나는 모든 이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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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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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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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서 언제나 먹을 것을 구걸하며 너무나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런 라자로에게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마름과 고통,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에게만 관심을 둡니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이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의 집 앞을 지나가셨다면 무엇을 보셨을까요? 당연히 라자로를 보시며 가엾은 마음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니면 먹을 것을 주셨거나, 그것도 아니면 함께 이야기라도 나누셨을 것입니다. 당장 무엇을 하실 수는 없으셨더라도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려면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것만을 채우고자 하는 시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최종훈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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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는 루카 복음만의 독특한 전통인데, 결국 내어놓음과 믿음은 비례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거지 라자로에게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아서입니다.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믿을 마음이 없으면 라자로가 부활하는 것을 보더라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요? 믿으면 그 믿는 분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할까 봐 믿지 않는 핑계를 표징이 없다는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세 욕구 중,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소유욕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바로 하느님께 바쳐야 했던 선악과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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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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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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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죽으려고 할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게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왜 고통을 감수할 이유를 찾았을 때 가장 행복할까요? 바로 당신과의 관계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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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오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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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월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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