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1년 5월

Margaret K 2021. 5. 1. 06:44

5월 31일 월요일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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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믿음을 찬송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그러자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두 여인은 참으로 서로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누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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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은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더라도 우리가 체험하는 많은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은 신앙인의 기쁨입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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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니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조각의 천재입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매일 20시간씩 14년간 계속 일했는데도 제가 천재로 보이십니까?”
어떤 선천적인 천재도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노력을 통해 다른 이의 눈에는 천재 이상의 인물로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능력과 재능을 주지 않으신 하느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노력하지 않고 있는 자신의 탓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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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다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잘 사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닐까요?

1953년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등정에 성공한 에드먼드 힐러리도 기자가 묻는 소감을 “제가 정복한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라는 멋진 명언을 남겼지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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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일요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오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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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금요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마르코 1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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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집과 강도들의 소굴의 차이점은 ‘믿음의 열매가 맺히느냐, 맺히지 않느냐’로 분별이 됩니다.

 강도들의 소굴은 오늘 복음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됩니다. 그런 전례나 성전은 파괴됩니다. 예수님은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며 우리는 믿음을 맺는 기도를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내가 청하면 하느님은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자녀는 부모에게 청하면 부모가 무엇이든 들어줄 것을 믿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기도한 대로 이미 이뤄졌다는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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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은 무소유의 가르침이었고, 존재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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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성전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분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새롭게 해 주신 하느님의 계명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면 거기가 바로 성전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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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는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척 하고,

실제로는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위선자들을 상징합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당시의 실제 계절을 나타내는

말이긴 한데, 만일에 이 이야기를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로 생각하면,

무화과 철이 아닌데도 열매가 없는 것을 탓하면서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주 많이 잘못하신 일이 되어버리고,

나무 입장에서는 아주 크게 억울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상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다는 말은, “지금은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는 때이다.” 라고

위선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주장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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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께서는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나무에서 무언가를 찾으셨을 때, 그분은 무엇인가에 굶주리시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를 저주하셨고 즉시 말라버렸다. 율법이라는 잎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20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겪지 않도록 포도 줄기와 굳건히 연결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시편 52,10)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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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목요일

"선생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마르코. 10,46ㄴ-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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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특징적인 모습은 “스승님!”이라는 칭호에서 잘 나타납니다. 루카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마르코 복음에서만 예수님을 “스승님!”, 즉 “라뿌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부르는 방식과 같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게 된 것은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배움을 우리는 ‘기도’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떠한 기도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만드는지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여기며 배우려 하는 자세입니다.
 

 

    기도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신의 ‘생각’과의 싸움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고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잊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증가함으로써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듭니다. 생각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숲에서 다람쥐가 야생 비둘기에게 말했습니다.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아?”

    야생 비둘기가 말했습니다.
    “무게가 거의 없어.”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내가 전나무 둥치 바로 옆 가지에앉아 있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한 눈보라도 아니었어.
    전혀 격렬하지도 않고 마치 꿈속처럼 내렸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앉은 가지 위에 내려 앉는 눈송이들의 숫자를 세었어. 정확하게 3,741,952개였어.
    네 말대로라면 무게가 거의 없는 그다음 번째 눈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다른 가지로 뛸 수 있었지. 만약 내가 하나의 숫자에 집중하여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던 거야.”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 생각이 아무리 가벼운 생각이라도 결국엔 나를 죄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을 보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람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숫자’에 집중한 것입니다.

 

   수많은 명상의 전문가들조차 명상은 기도를 끊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라이프 코치이며 영적 카운슬러인 크리스틴 해슬러는 처음 명상 수련할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중지시킬 수 없어서 계속 나 자신을 ‘형편없는 수행자’라고 비난했다.”
   
    언플러그 명상 설립자 수지 얄로프 슈와르츠는 말합니다.

    “명상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다.”
   

    독자적인 요가법을 창시한 브렛 라킨도 고백합니다.
    “종아리와 발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등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잠에 곯아떨어졌다.”
 

    [참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기도할 때 분심을 없애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되 그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바라보고 듣고 배우는 자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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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나에게는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그렇습니다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그분께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사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그래서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눈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될 것입니다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그것은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이요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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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당시에 겉옷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신분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고, 밤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이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 가는데 장애 되는 전 재산, 신분마저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모두를 내려놓고 예수님만을 갈망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이제 그는 거지가 아닙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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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싫증을 느끼겠는가?"( 집회서 42,15-25)

 

지혜서의 완전함이 개인으로서의 완전함이라면

집회서의 완전함은 공동체로서의 완전함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는 완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로서는 불완전하지만 둘로서는 완전하고

셋으로서는 더 완전하고 모두 함께라면 더더욱 완전하여

모든 선이신 하느님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은 모든 선"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 하나도 그것으로서 선이고 나름대로 완전하지만

그 일부 선들이 모두 모여 하나가 되면 전체 선 또는

모든 선을 이루는 것이요, 모든 선이신 하느님만큼 완전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오늘 집회서가 얘기하는 완전함은 하나됨의 완전함이요

사랑의 완전함인데 인간이 혼자 살지 않고

가정 공동체든 수도 공동체든 같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라는

오늘 집회서의 말씀처럼 서로의 선을 붇돋우고 돋보이게 하며

완전하게 하는 공동체가 되고 공동선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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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교부 고백록에서 -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내 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나 밖에서 님을 찾았습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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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수요일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마르코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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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0,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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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너를 두렵게 하지 말라.

모든 것은 다 지나갈 뿐,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소유한 이는 부족함이 없으니(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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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되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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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일요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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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강림은 결국 자기 자신이 원수이고 용이고 뱀임을 알고 그 뱀을 밟으려는 힘을 청하는 이들에게만 이뤄집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기도를 할 때마다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할 때, 그 악이 자기 자신임을 항상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악이 사탄의 악에 동의하지 않을 때 어떤 악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말하며, 그 자아를 죽이기 위해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가르칩니다.

  성령은 우리 자아를 죽이러 오십니다. 예수님도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당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에 나를 박는 그 세 개의 못이 곧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이 무엇하러 내 안에 오시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면 언젠가는 나도 성령을 거부하게 되고 그러면 멸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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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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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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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우리가 운명을 알고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길 원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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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사실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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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다른 사람은 그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해 주면 속을 끓일 이유가 없건만 안타까움이 큽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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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금요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나를사랑하느냐?” 베드로가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줄을 주님께서아십니다.” 하고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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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대상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 ‘주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연결이 없다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양을 돌보되 “삯꾼”(요한 10,12)에 지나지 않으며 “착한 목자”(요한 10,11)는 될 수 없습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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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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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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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이는 큰 신비를 내포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미운 마음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없어질 때까지 1시간이고 10시간이고 그리스도께 붙어있으며 사랑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후 미운 마음이 사라졌을 때 누군가를 만나십시오. 그전에는 누구를 만나 아무리 좋은 것을 주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과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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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잘하기 위해서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실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분께 마음을 열며 거룩하신 하느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에 한없이 기뻐하는 것,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여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바라보는 것”(오리게네스). 이고,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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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수요일

“거룩하신 아버지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1ㄷ-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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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의 ‘세상’은 마치 지옥과 같은 뜻입니다. 이 지옥으로 예수님께서 먼저 뛰어드셔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동시에 기쁠 수 있을까요? 언젠가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세상은 감옥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뿐입니다.

목숨을 잃을 두려움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행복하지 못하고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이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처럼 세상의 모든 시련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기뻐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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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요한 17,1-11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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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짜 앎이 아닐까요?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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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행하신 고별사에 이어지는 고별기도를 듣게 됩니다흔히 이를 대사제의 기도라 부르는데비록 이 기 기도에서 예수님이 천상성소의 대사제이자 희생제물자체가 되셨다는 언급은 없으나본디 사제의 임무가 하늘과 땅하느님과 인간을 잇는 중재라 할 때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고 있기에 대사제의 기도라 부를 수 있으며특히 17장 19절의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앞의 고별사의 중심 주제였던 사랑과 영광이 기도 형식으로 반복되는데세 가지 청원을 담고 있습니다곧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7,1-5)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17,6-19)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17,20-26)입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이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사실예수님께서는 고별사의 시작인 13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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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월요일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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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일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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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토요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3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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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금요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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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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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수요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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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보고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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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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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0일 월요일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너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요한15,26─16,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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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일요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
요한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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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상대방의 감정 탱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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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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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하시고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저분하게 되거나 지치게 되더라도 우리는 현실 안에서 다시 선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갚아 주길 다짐하며……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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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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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굳이 사이가 안 좋아진 사람과 친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같은 본성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모기는 모기끼리, 원숭이는 원숭이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하느님 자녀는 하느님 자녀끼리 모이게 되고 친구가 됩니다.
    사람이 모기와 친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집착일 뿐입니다. 어느 날 모기가 사람처럼 된다면 나와 친구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 하기만 한다면 어느새 주위에 그리스도의 친구들이 모여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과 함께 세상의 악과 싸워나가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결국 그것을 반대하는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5,19)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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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은 조개를 칭하는 라틴어 퍼퓨라(Purpura)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보라색 옷을 만들려면 많은 조개가 필요했다고 합니다이런 이유로 보라색 옷은 귀족들이 입는 옷이 되었다고 합니다. “레이즈드 투 더 퍼플(Raised to the Purple)은 추기경이 되다.”라는 관용구가 되었다고 합니다또한 보라색은 신앙심을 표현하는 색이라고 합니다사랑을 의미하는 빨강과 신뢰를 나타내는 파랑이 합쳐진 색이 보라색이기 때문입니다보라색이 사순절과 연결되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셰익스피어는 왕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보라색 눈물(purple tears)'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는 흰색을 비어 있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빛을 품고 있는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교회는 이런 인식에서 성모님의 의상을 흰색으로 표현하였습니다예수님 탄생과 부활에 제의 색이 흰색인 것은 하늘엔 영광이 가득하고 땅에는 환희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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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목요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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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당신 삶의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열고, 하느님께 속하는 데 있다.”(제27차 청소년 주일 담화문)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은 사랑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기쁨과 사랑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성령의 두 열매이기 때문입니다(갈라 5,22-23 참조). 하느님 안에서 기쁠 때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을 누리며 그 사랑 안에 만족하지 말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애덕을 실천할 때, 우리는 ‘주님 계명을 지켜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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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에너지이고 양식이고 생명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 품에서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가 원하는, 또 부모가 되라는 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에일리언처럼 바이러스처럼, 혹은 아담과 하와처럼 그분 품에서 쫓겨나 생명의 양식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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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해서는 거칠고 황량한 시나이 반도를 지나야 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광야는 세상의 것들을 떨궈내는 정화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악의 유혹을 견디어내는 인내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광야는 부활을 향해 나가는 십자가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풍요로웠던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려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구리 뱀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구리 뱀을 보는 사람은 다시금 하느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보고서 치유되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십자가에서 높이 들려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식별의 과정입니다.

 

교부이신 그레고리오 교황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서 잉태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태어납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교훈으로 젖을 먹습니다

성체성사로 자라납니다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됩니다

지혜와 결합하여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입니다

우리의 집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산은 낙원의 기쁜 삶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두운 죽음이 아니라

지복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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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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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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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월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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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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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이는 “저는 사랑을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닮는 이유는 사랑하면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그 닮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분의 자녀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당당히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상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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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그러니 이는 보고 깨닫고 믿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곧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곧 믿음으로 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그러니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믿음으로 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결국믿음이 관건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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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일요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요한.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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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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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토요일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한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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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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