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토요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루가 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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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다 보면, 어느 길이든 행복하지 않은 길은 없습니다(조지.E.베일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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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0일 금요일
너희는 자기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다면 안식일이라고 당장 구해 내지 않고 내버려 두겠느냐?"(루가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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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이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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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목요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루가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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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수요일
예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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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월요일
“여인아, 네 병이 이미 너에게서 떨어졌다.”하시고 그 여자에게 손을 얹어주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허리를 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가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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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5일 일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마태 22, 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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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분명 경쟁이 아니라 공생입니다. 나를 죽게 하여 타인을 살리는 삶입니다. 이 방향이 틀어지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중요성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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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토요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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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의 첫 행위가 봉헌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삶은 봉헌으로 시작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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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금요일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무엇이 옳은 일인지
왜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루가12,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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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들을 낳지 못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것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나무라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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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2일 목요일
내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다. 사실은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가 12,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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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평화는 ‘불’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성경에서 불은 정화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시어 그 안에 있는 온갖 죄악을 태우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평화는 ‘예수님의 세례’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세례란 본디 옛 삶이 죽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셋째, 평화는 분열을 통하여 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분열은 혈연, 학연, 지연 등의 모든 관계 가운데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심으로써 평화를 주십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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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도 평안치 못하리라 했습니다.” 평화는 주님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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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49절)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종말의 불을 댕기는 불쏘시개요 장차 당신을 심판주로 오시게 할 종말론적 세례로 묘사하신다. 이 불은 세례를 받으면서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오는 복음의 불이다. 엠마오 제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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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예수님이 지르러 오셨다는 "불"은 하느님 현존이라는 영적 의미의 "불"일 겁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실 때, "연기가 타오르는 화덕과 횃불"이 제물 사이를 지나가게 하셨고(창세 15,17 참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신 것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었지요(탈출 13,22 참조). 엘리야가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에도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엘리야 제단의 번제물을 삼켜 버립니다(1열왕 18,38 참조). 오순절에 성령께서도 불꽃 모양의 혀들로 나타나 각 사람 위에 내려앉으셨지요(사도 2,3 참조).
이처럼 불은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확연히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불"을 지르러 세상에 오신 것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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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1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3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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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행세를 하려던 이는 도리어 쫓겨나고, 주인이 아님을 확실히 깨닫고 종으로서의 위치에 충실한 이는 주인의 모든 재산을 맡게 됩니다.
양이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듯이 그저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무나.’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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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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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이 살 곳은 추운 남극입니다. 사막에서는 굶어 죽습니다. 자신을 창조해주신 분이 어디 살라고 창조해주셨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주님의 뜻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새끼가 부화할 때 남극은 먹이가 풍부하게 맞춰져 있습니다. 아기를 낳았을 때 어머니 젖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 자신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그 사람을 통해 당신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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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화요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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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이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종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자신이 따르는 뜻의 주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먹어야 힘이 나는데, 그 힘은 깨어 주인의 뜻을 따를 때 그 주인에게서만 온다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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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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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일요일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오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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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7일 토요일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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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 금요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루가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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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이려 한다는 말은 스스로 낮게 느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 즉 위선입니다.
위선은 그러니까 열등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에 대한 낮은 평가를 높여보려고 자신을 증명하려 노력하는 것이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알고 초대한다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위선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이런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솔직하려고 노력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사람은 본성상 인정받으려 사는 존재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정을 받아야만 합니다.
오직 우리의 임금이신 하느님께 인정받아야 진실해집니다. 진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참 자유인이 되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나를 인정해주심을 믿는 길뿐입니다. 그 방법은 그분께서 항상 내 곁에 계시며 나를 인정해주시기에, 나는 그 기쁨에 쉬지 않고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돌리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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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화요일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을 만드신 것을 모르느냐?(루가 11,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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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 월요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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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려 그 멀리서 솔로몬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표징이 없어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배울 마음이 없어서 안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설사 표징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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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토요일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가 1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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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9일 금요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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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개인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실상 구원은 공동체를 통해 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성장하려는 것보다 공동체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실 어떠한 개인이든 공동체 속에서만 성장합니다. 코로나로 공동체 신앙이 흔들리는 이때,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려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개인적 역량을 발휘하는 나라는 이스라엘입니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칼 막스, 스티븐 스필버그, 빌 게이츠 등 그들의 역량은 시간과 분야를 초월합니다. 미국 유명 대학의 30%, 노벨상 수상자의 30%, 미국 최고 부자의 30%가 유대인입니다.
우리나라 인구의 1/4밖에 안 되고 평균 아이큐도 95밖에 안 되는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를 휘어잡고 있을까요? 이들이 이런 역량을 발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자존감과 직결됩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가 하는 믿음이 자존감입니다. 그들은 ‘선택된 백성’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큼 성장합니다. 코이 물고기가 자신이 담긴 그릇만큼 몸을 성장시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이냐의 믿음에 따라 딱 그만큼만 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 믿음을 후손들에게 전해주는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EBS의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실험한 적이 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개인들이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함께 공부한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게 나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메타인지 때문입니다. 메타인지란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혼자 공부하면 자신이 다 아는 줄 알지만, 타인과 대화하다 보면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고 그것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만 성장합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전수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은 자기의 영예를 세우려 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한 분들이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돌아가실 때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공동체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을 전수받을 수 있고 그 믿음이 그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으라고 하시는 것보다 당신 공동체에 참여하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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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8일 목요일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루가 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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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7일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가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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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6일 화요일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가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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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일 일요일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마태오 21,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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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왔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야 할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구를 소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지구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라는 포도원, 가정이라는 포도원을 맡겨 주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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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토요일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가 1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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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아기 예수의 데레사 이렇게 세 성녀에게 ‘교회 학자’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글을 배웠습니다. 그의 저작들은 대부분 그가 구술한 것을 다른 사람이 옮겨 쓴 것이라고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도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중도에 공부를 포기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17살까지만 공부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24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에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그리 오래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이 교회 학자라고 불릴까요? 지식의 차원으로만 하느님을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똑똑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 다가가는 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한 것입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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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일 목요일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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