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0년 12월

Margaret K 2020. 12. 1. 07:59

12월 31일 목요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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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소위 ‘로고스 찬가’라고 하는 요한복음의 1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이란 뜻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말을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하느님을 알게 된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아는 것처럼, 하느님처럼 되었을 때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빛의 본성을 압니다. 빛의 본성은 사랑입니다.

빛의 자녀는 빛의 증언자가 된다: 동물의 자녀는 동물을 낳고, 사람의 자녀는 사람을 낳으며, 빛의 자녀는 빛을 낳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례자 요한처럼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왔음을 증명됩니다.

이것이 로고스 찬가의 요약입니다. 그런데 빛의 자녀가 되기 위해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그분이 빛이시고 나는 어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믿는 이는 빛을 받아들일 이유를 잃게 됩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히 어둠에 속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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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셨던 분말씀이셨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자칫 예수님에 대한 기록으로 머물 뻔했던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영적인 세계를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심오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 8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운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과 15장에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자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인도해주는 안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사도가 있어서 마음이 든든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도 눈을 감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요한사도가 있어서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들 또한 요한사도처럼 주님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편히 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때문에 주님께서 행복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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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수요일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가 2,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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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화요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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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토요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마태오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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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스테파노의 순교 직전의 마지막 발언과 연결합니다.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대조법을 즐겨 사용하는 루카의 문학적 성향도 드러나지만 그보다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그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스테파노의 자연스러운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주님 성탄의 환희 속에서 스테파노처럼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천상 환시를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박기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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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5일 금요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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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평탄한 길을 주시지 않고 그 길을 갈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나다' 하시며 용기를 주고 두려움을 없애러 이 성탄에 오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시듯 우리에게도 용기 내어 당신께 오라고 하십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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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목요일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6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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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3일 수요일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루가 1,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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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의 마지막 권인 말라키서는 대예언서에서 소예언서에 이르는 예언서 전체를 수렴합니다. 특히 “나의 사자”라는 뜻인 말라키 예언자와 예수님께서 활동하시기 전에 주님의 길을 준비하던 세례자 요한이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말라키서의 메시아 관련 내용에 감명을 받고, 말라키가 기다렸고 또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주님 성탄을 곧 앞두고, 오늘 복음 속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의 이웃들이 메시아의 선구자로 주님의 사자요 주님께서 앞서 보내신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에게 지녔던 두려움을 생각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지금을 사는 우리도 두려운 마음으로 이 질문을 되새겨야겠습니다. 이 아기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고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18 참조). 성인이 된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는 유다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요한 1,19-28 참조).

 -박기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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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가는 가르침을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 얻는 종교가 있습니다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입니다세상의 모든 고통은 삶에 대한 집착에서 왔다고 말합니다그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른 길을 가야하는데 불교에서는 그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첫 번째는 자연을 통해서입니다구름나비시냇물바람햇살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예술인들은 자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했습니다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양심을 통해서입니다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이웃의 고통을 공감합니다자신을 낮추는 겸양을 가집니다잘못된 행동을 부끄러워합니다옳고 그름을 식별합니다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언자(預言者)’를 통해서입니다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릇된 길을 갈 때면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망과 고통 중에 신음할 때는 하느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하느님께서는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셨습니다우리가 구세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 수 있고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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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월요일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가 1,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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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 일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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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토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즈카르야야.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터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서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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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며 완전히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풀이 죽을 때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 곳에서 비로소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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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을 품는 것보다 하느님을 품으면 자녀가 하느님 자녀가 되겠지요.

-김찬선신부-

 

12월 18일 금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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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월 17일 목요일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오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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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씨앗이 전해지는 그 족보 안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자신도 그 씨앗을 전해주는 부모가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구원은 새로 태어남을 통해 얻을 수 있지 개인적인 노력으로 얻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답게 살았다 하더라도 그 족보에 들고 전해오는 믿음의 씨앗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꼭 지녀야 하는 그 족보만의 믿음의 씨앗은 무엇일까요? 바로 아버지의 살과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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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수요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8ㄴ-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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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울 15일 화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마태오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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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맏이는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일하러 나갑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엔 좋다고 했지만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맏이는 결국 ‘그래, 그래도 난 아버지의 아들이지!’라는 믿음을 회복한 것이고, 둘째는 ‘근데 그분이랑 나랑 뭔 상관이야?’라며 믿음을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정체성 자체가 변할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믿음으로써 우리 삶이 완전히 변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변화를 보면서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지 못함이 아니라 오히려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변할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인으로 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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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총동원령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그러니까

우리 전 존재가 사랑하는 이에게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기도 묵상>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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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월요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 21,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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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주님께서는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이 질문에 그들은 당황합니다.

자기들의 권한에 대한 성찰을 한 번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권한은 마땅히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지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은 생각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들이 신앙적으로 생각했을지라도 하느님으로부터

자기들이 위임받았으니 성전의 권한자는

여전히 주님이 아니라 자기들이라고 생각했을 테지요?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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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일요일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6-8.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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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토요일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오 17,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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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1일 금요일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오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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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보면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법을 어기면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가정에서도이웃에서도 늘 말썽을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기계나 로봇으로 만드시지 않고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최초의 인간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이 문제였습니다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동생만 없으면 된다는 시기가 문제였습니다아합은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문제였습니다다윗은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게 하고 바세바를 취하였습니다꺼지지 않는 욕정이 문제였습니다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그릇된 신념이 문제였습니다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풀잎 끝에 맺힌 이슬 같은 삶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이 문제였습니다.

성서를 보면 언제나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하느님의 법을 따르면서 사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가정에서도이웃에서도 모범이 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구원의 방주를 만들었고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욥은 시련과 고난이 찾아왔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야곱의 아들 요셉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혼인 전에 임신한 것이 드러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성령으로 인한 잉태라는 천사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였습니다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에서 시작되었습니다요셉의 거친 손이 아기 예수님을 받아 주었습니다밤을 새운 가난한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는 인간을 추하게도악하게도 합니다그러나 그 자유의지는 시간과 공간에 신화와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드러내기도 합니다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라는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도 않으시고따지지도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네 후손들이 모래처럼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행복하여라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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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목요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오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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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수요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오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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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는 ‘뜻’입니다. 주인의 멍에를 메면 주인의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못하다면 주님의 멍에를 맨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을 바꾸지 않은 상태로 사랑하려 해봐야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뱀은 본성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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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8일 화요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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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잉태되실 때부터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이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죄가 없는 상태란 어떤 상태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아니 그것보다 더 우선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꼬시는 뱀의 말을 듣기 이전의 상태일 것입니다.

      뱀은 어떠한 욕구를 자아내어 선악과를 따먹게 했을까요?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것은 더 가지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세속’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더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욕심은 결국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뱀은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으로 첫 조상들을 유혹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유혹이 없을까요? 우리 안에 뱀 한 마리씩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 뱀을 뱀인 줄 모르고 인정하며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하와가 아무 생각 없이 뱀과 대화하는 것이 죄의 시작인 것처럼,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나를 나로 인정하는 것이 원죄의 시작인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가 없으셨다는 말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하나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뱀의 유혹에 절대로 물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원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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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일요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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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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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시기’는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생활을 청산하고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고향, 하느님 나라로 돌아오는 시기’이다. 더 넓게 생각을 한다면 이 대림시기는 우리의 일생 전체가 대림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짧게 대림시기와 성탄시기의 삶이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될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대림시기와 성탄의 신비를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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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은 우리의 죄이고,

주님의 길을 마련한다는 것은 이 죄에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내는 것은 나의 길을 닦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고,

My Way/나의 길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회개라는 것을

오늘 주님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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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토요일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 35―1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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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쁘게 주는 것 안에만 기쁜 소식이 담긴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기쁘게 주려면 그 주려는 마음까지도 거저 받은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십일조를 생활화합시다. 그러면 나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기쁘게 주는 것 안에서만 기쁜 관계가 형성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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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금요일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마르코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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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넘어서 ‘저들이 누구인가?’로 가야 합니다. 그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상처로 보일 때 그들에게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전념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이 시작되는 터닝포인트입니다.

      사랑은 누가 먼저 발을 씻겨주어야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당연한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항상 모든 이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아무리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지 않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당연한 칭찬이라도 받는 것을 즐기면 사랑을 위한 경쟁에서 먼저 패배하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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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목요일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오7,2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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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월 수요일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 15,2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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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일 화요일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루가 1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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