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0년 8월

Margaret K 2020. 8. 1. 05:36

8월 31일 월요일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6-30)

---

 

 

8월 30일 일요일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하고 꾸짖으셨다. (마태오 16,21~27)

---

얼마 전 은경축일을 맞은 후배 신부와 사목 활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사제가 50세를 넘으면 아무리 확신이 있는 일이라도 우기지 않는 게 가장 큰 덕목”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모든 판단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수 있겠지만 자기가 확실하다고 여기는 그 무엇이라도 고집하기보다는 이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목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느님의 일과 교회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책망하신 이유가 ‘사람의 일’에 우선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결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길’을 택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가야 할 길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의 일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결국 세상과 교회에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자기를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의 생각을 끊고 주님의 뜻을 찾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전삼용신부-

---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면 여전히 "사람의 일"이 우선하는 자아의 노예입니다. 반대로 시선을 하느님께 집중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을 확률이 크지요. 인간적으로는 택하고 싶지 않고, 여건이 된다면 피하고 싶은 것도 하느님 때문에 감내하고 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걸림돌이 아니라 동반자입니다.

-오상선신부-

---

 

8월 29일 토요일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마르코 6,17~29)

---

예언자직은 “나는 당신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당신을 바꾸시기를 원하시고 그래서 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라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 세례자는 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물론 실패한 듯 보이나 미래의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참 예언자직이 무엇인지 그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전삼용신부-

---

 

8월 28일 금요일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

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이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그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혼인 잔치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는 어떤 열정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지요. 이 열정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조명연신부-

---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이 사랑이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조욱현신부-

---

복음 사가는 "등"을 언급하면서 "저마다"라고 반복하지요. 이 "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노력은 함께 공유하거나 차용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무엇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나눔이나 희사의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말씀의 줄기를 놓치는 실수일 겁니다. "등"을 밝히는 기름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유나 차용이 불가능한 저마다의 무엇이니까요.

-오상선신부-

---

 

 

8월 27일 목요일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마태오 24,42~51)

---

 

8월 26일 수요일

너희는 예언자를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다.(마태 23,27-32)  

---

나를 신뢰할수록 주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한 신뢰를 포기한 이들의 것입니다. 

   주님만을 믿으려면 나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

 

8월 25일 화요일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마태오 23,23-26)

---

 

8월 24일 월요일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45-51)

---

 

8월 23일 일요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16,13-20)

---

자신의 생각이 육체를 지배하는 사람에겐 성령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의 생각과 육체가 지시하는 행동들을 버려야 합니다. 모세나 베드로 모두 인간의 나약함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어었습니다. 평생 성실한 삶을 산 모세도 여전히 한 순간 흔들리는 사람이었고 바오로 성인은 언제나 주님께 기도로 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평생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하나뿐인 사랑하는 아드님’이십니다.

자신의 우매함을 알고 겸손과 소통으로 이웃의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나의 나약함을 아는 것이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시작입니다. 나를 비움으로써 성령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키엣대주교-

---

열쇠를 받은 것은 베드로이지만 그 열쇠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해결의 주체이신 것입니다.

-김혜윤수녀-

---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오직 주님 당신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당신으로 인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존재입니다. 주님 손길 안에 머무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복입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양승국신부-

---

 

8월 22일 토요일

너희는 스승 소리를 듣지 마라. 너희의 스승은 오직 한 분뿐이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오 23,1-12)

---

사람 아이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늑대를 자기 아버지라 믿으면 그 아이는 본성이 사람일까요, 늑대일까요? 사람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까요? 늑대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은 자기가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자신이 아버지를 누구라고 믿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사람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이라고 믿고 살라는 말씀일까요? 자신을 늑대라 믿으면 늑대처럼 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며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 있도록 당신 친히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교리서는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라고 하며,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가르칩니다. 본성에의 참여가 자신이 아버지의 본성을 가졌음을 믿을 때 발휘된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삼용신부-

---

 

8월 21일 금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오 22,34-40)

---

 예전에 성 프란치스코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아씨시의 친구들과 먹고 놀고 즐기는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변해서 거지의 모습으로 세상의 모든 쾌락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놀던 친구들도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함께 공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만이 프란치스코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도 악영향을 미칠까 봐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진짜 하룻밤 재워달라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프란치스코와 그를 따르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다음 미소를 짓고 한 번 안아주고는 골방으로 들어가 그 친구를 위해 밤새 기도합니다. 이 모습을 살짝 엿본 친구는 그제야 자신도 제자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를 기쁘게 안아줍니다.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설득할 때, 말로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가 성당에 안 나온다고 수없이 설득합니다. 당연히 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그런 말을 하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게 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먼저 베풀어야 합니다. 고마우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을 더 신뢰합니다. 가슴부터 점령해야 머리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

 

 

8월 20일 목요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

 

8월 19일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

오늘 주님 말씀은 이런 세속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하늘나라에서는 차등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더 부자가 있고 더 가난한 사람이 있지 않고,
더 높은 사람이 있고 더 낮은 사람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찍부터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유대인은 천당 가고
뒤늦게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한 이방인들은 못 가는 그런 일이 없음은 물론
하늘나라에서 유대인들은 윗자리에 앉고 이방인들은 끝자리에 않는
그런 일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김찬선신부-

---

 

8월 18일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오 19,23-30 )

---

 

 

8월 17일 월요일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오 19,16-22)

---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라고 하십니다. 계명은 선한 일입니다. 다시 말해 선한 일을 하되,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냥 선한 일을 하는 사람과 계명에 있기에 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젊은 사람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주님 때문에 선한 일을 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구원에 길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높은 선함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자기 능력이나 재산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선함 자체이신 분의 통로가 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완전해지려면 ‘폭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의 선함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아두었다가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며 주님의 자비에 나 자신까지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태석 신부님이 ‘폭포’와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의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벌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가난한 이들에게로 찾아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분이 돈을 많이 벌어 도왔으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열매는 그런 도움을 주는 것보다 더 많이 열렸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중 의사가 된 이들이 벌써 40여 명이 넘고 기자, 공무원,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이웃을 돕겠다는 제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님을 보며 그분의 능력이나 재산보다는 그분 뒤에서 활동하신 선하신 하느님을 봅니다.

마더 데레사가 참으로 큰 선행을 했지만, 그분이 남겨주신 더 큰 선행은 청빈을 보여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섭리에 맡김으로써 그분의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주님을 찬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내어놓으며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선해지려 할 때, 그분의 선하심이 가려집니다. 따라서 참으로 완전한 선행은 마치 폭포수처럼 나에게 많은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여, 그것을 거침없이 당장 흘려보내 주는 주님 섭리에 맡기는 삶입니다.

-전삼용신부-

---

 

 

8월 15일 토요일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루가 1,39-56)

---

 

 

8월 14일 금요일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오 19,3-12)

---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습니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사육사는 호랑이에게 살아있는 동물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어 죽이는 버릇이 더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주더라도 조금씩 잘라서 준다고 합니다

잡아 찢는 버릇이 사나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재주와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다고 잔치를 벌입니다

돌아온 동생을 보고 형은 잔치를 벌인다고 불평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랑이 없는 말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용기를 주는 말

위로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로 더위를 식히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

 

 

8월 13일 목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18,21―19,1)

---

 

 

8월 12일 수요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18,15-20)

---

 

8월 11일 화요일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18,1-5.10.12-14)

---

 

8월 10일 월요일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26)

---

 

8월 9일 일요일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다..(마태오 14,22-33)

---

 

8월 8일 토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14-20)

---

 

8월 7일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 16,24-28)

---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

 

8월 6일 목요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코 9,2-10)

---

 

8월 5일 수요일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

 

8월 4일 화요일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22-36)

---

 

8월 3일 월요일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셨다.
(마태오 14,22-36)

---

 

8월 1일 토요일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마태오 14,1-12)

---

동물들은 먹이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행복이 오래간다면 더는 먹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죽게 됩니다. 다시 배가 고파야 그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 먹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행복에 중독되면 동물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많이 나오는 영화의 ‘좀비’와 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바로 헤로데입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가 요한 세례자를 죽이는 내용입니다. 요한은 그나마 헤로데에게 충언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도 군중이 무서워 요한을 죽이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가 요한을 죽일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중독된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세상 행복에 대한 집착이 자신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목소리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누구나 우리 안에서 들려오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목을 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

 

'되새기고 싶은 글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0년 10월  (0) 2020.10.01
2020년 9월  (0) 2020.09.01
2020년 7월  (0) 2020.07.06
2020년 6월 1일 ~  (0) 2020.06.01
2월 26일 재의 수요일 ~  (0) 2020.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