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기고 싶은 글들

2020년 6월 1일 ~

Margaret K 2020. 6. 1. 05:06

6월 23일 화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6.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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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2일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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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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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6일 화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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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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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토요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오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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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목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마태오 1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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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화요일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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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월요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오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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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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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이 지닌 또 하나의 영성적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안셀름 그린은 영성의 지향에 따라 영성을 위로 향한 영성 아래로부터 영성으로 구분합니다.

위로 향한 영성은 우리에게 이상적 요소들을 제시하고, 그것은 언젠가는 마침내 채워야 하는 것을 지향하는 영성운동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며 그와 하나 되려는 갈망,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영성을 닮아가려는 일련의 모든 영성적 지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위를 바라보는 영성운동입니다.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고통과 고난으로 말미암은 영성의 새로운 차원을 의미합니다. 곧 고통과 상처, 절망과 아픔 등의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느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말미암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영성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살갗이 드러나는 실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등한시 하고 있는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현실조차도 영성의 자양분임을 인정하고, 모든 부정적인 현실이 지닌 영성적 측면을 회복시킵니다. 곧 육체, 아픔, 상처, 고독과 외로움, 절망, 슬픔, 욕망, 세속 등에서 영성의 의미를 회복시킵니다.

진복팔단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가난, 슬픔, 핍박, 정의를 위한 갈망, 고난 등 우리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들이 지닌 풍부한 영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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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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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겸손해진 사람을 말한다. 이 말씀은 가난이 아니라, 겸손이 복되다는 의미이며, 참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난해진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덕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어울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4) 여기서 슬퍼한다는 것은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들의 죄악을 두고 슬퍼한다는 뜻이다. 열심한 마음과 책임감 때문에 세상의 불의와 죄인들의 죄를 두고 슬퍼하는 이들이 행복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앞으로 올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5) 온유한 사람은 온화하고 겸손하며 잘난 체하지 않고 믿음에 충실하며 모욕을 당할 때 참는 사람이다. 복음의 계명을 마음 깊이 받아들인 사람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신 주님의 온유함을 본받는다. 그들은 약속된 땅, 산 이들의 땅, 하느님의 유산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6) 의로움에 배고프고 목말라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의로움을 행하여야 한다. 의로움에 주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의로움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이는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후한 상을 받는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7) 자비롭지 못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없다. 우리는 구걸하는 거지를 본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도 거지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구걸하는 동안 우리도 구걸을 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지를 대하는 대로 우리의 거지를 대하실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8)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앞의 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비를 베풀고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시샘하지 않으면서도 간음이나 방종 같은 죄에 빠져 사는 사람이 많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안이 깨끗해진 사람이다. 이런 이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모든 사랑의 행위의 목적이요 끝이다. 하느님을 뵙게 되면 어떤 것도 더는 라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9) 믿음이 빛나고 희망이 굳게 자리 잡고 자비의 불이 타오르는 곳에 평화가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든 일에 질서가 잘 잡혀 있어, 이해와 이성이 지배하는 이 평화의 나라에는 다툼이 없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다스림을 몸소 보여주는 이들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10) 주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한 갈망으로 목말라하고 의로움을 위하여 세상의 박해와 육신의 고통, 나아가 죽음까지도 이겨내라고 하신다. 순교자들은 믿음의 의로움과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상의 박해를 견딘 분들이다. 이들에게 위대한 희망, 곧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부당하게 욕을 먹는 이들은 하늘에서 복된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11).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 이런 박해와 비방 속에서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헛된 영예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만 그럴 수 있다. 하늘에 있는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땅에서 듣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에 관해 뭐라고 하는지보다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판단하실지에 대해 마음을 쓴다. 

이 여덟 가지 행복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자.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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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 일요일 삼위일체 축일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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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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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6일 토요일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코 12,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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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짓게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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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난한 과부는 재산도 사람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이 철저한 고독으로 밀려났던 시기를 떠올려 줍니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고, 혹 지금 이 순간 그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러한 가난의 체험을 거치게 마련입니다.
그때 절망의 나락에서 추스르고 일어나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건 놀라운 결단입니다. 게다가 자기에게 남은 것을 있는 것 없는 것까지 박박 끌어 모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건 대단한 용기지요. 자신을 이런 바닥까지 몰아넣은(몰아넣었다고 여기는) 신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자신을 그분께 의탁하는 태도는 엄청난 신앙입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가져야 할 모습이지요.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우리가 바치는 건 그게 무엇이 얼마나 되었든 액수에 관계 없이 렢톤 두 닢도 못 되는 가치니까요. 또 돈, 인맥, 제도 등으로 겹겹이 보호막을 치고 살아도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 외에 인간에게 진정한 보호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바라시는 건, 단순한 의탁과 겸손한 봉헌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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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5일 금요일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마르코 12,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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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득권과 민중이 다투고 있다면 민중 편에 서는 것이 맞습니다. 기득권은 세속적인 것은 원하지만 가난한 민중은 구원을 원합니다. ‘민중의 소리는 하느님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말이 있듯이, 진리는 가난한 군중 속에 머뭅니다. 가정에서도, 본당에서도, 나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음을 잊지 말고 항상 가진 것이 없는 다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진리를 잘 분별하며 살아왔다고 하실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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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메시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열어 찬미와 감사를 드릴 일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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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목요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12,12,28ㄱㄷ-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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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이 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의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이 됩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이웃이 곧 , “가 곧 이웃이 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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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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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라는 말씀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 가운데 첫 번째로 모범이 되는 분은 바로 성모 마리아입니다.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은(루카 1,38) 어쩌다가 그렇게 된 일은 결코 아니고,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모두 하느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과 순종은 어떤 대가를 바라고서 한 일도 아니고,
어떤 조건을 걸고 한 일도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데,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셨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루카 10,37).
사랑이란,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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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수요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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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의 기준이 성령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시간이 ‘기도’이니,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가 되지 않으면 아직 천국에 들어올 행복의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와 같은 현세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행복의 기준을 성령으로 둘 줄 알아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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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독을 통해서 중용에 이르면 하늘의 기운을 얻고, 도를 찾아 화에 이르면 땅의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은 시간의 영역입니다. 땅은 공간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중용에 이르면 하늘과 땅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산다면 자연재해 앞에서도 내 삶의 가치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조화롭다고 해도 내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재능은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 때 하늘과 땅을 능히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늘과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은 중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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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안았어야 할 인간으로 살지 않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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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마르코 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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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황제에게는 돈을 돌려주고 하느님께는 여러분 자신을 돌려드려라.

그러면 우리 안에 진리가 다시 자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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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께 속하므로 우리 모든 인간의 삶은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초상은 우리 인간에게 새겨져 있으니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기에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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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하느님의 것임을 아는 이는 세상 재물과 허영에 목메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 곧 황제의 것들은 추구하고 차지할수록 더 욕망하게 되고 달려들게 만드는 마약과 같지요 마시면마실수록 더 목이 타서 계속 들이키다 결국 죽음에 이르는 바닷물과도 같습니다. 이 상태에서 평화란 없습니다.
온 생애를 걸쳐 하느님께 받은 모든 것을 오롯이 되돌려드리며 살다가 그 순간을 맞는 이는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에 평화로이 들어섭니다. 하느님과 그 사이에 이미 주고 받음의 경계조차 사라졌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것이 모두 그의 것이고 그의 것이 고스란히 그분 것인 차원에서는 소유나 욕망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집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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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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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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