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토요일
예수님께서는“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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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복음>에서도 여전히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죽을 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증거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증언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는 활동의 사목직을 요한에게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관상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한 베드로에게는 교회를, 당신이 사랑하신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맡기셨습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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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금요일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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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첫 번째 질문
"너 어디에 있느냐?"
5월 28일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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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갑니다. 오로지 세상의 악을 처단하고 이웃의 부조리를 심판하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모습으로 정립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은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들먹입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유로운 이, 하느님과 하나 되는 이는 그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랑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세상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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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죽은 사람처럼 되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성령을 통하여 먼저 자신이 행복해지도록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예수님은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거룩’도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거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인데, 사랑을 위해서는 어쨌거나 성령 앞에서 우선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행복한 이기주의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 먼저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성령 앞에서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쨌거나 행복은 나를 통과해서 흘러가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먼저 자신을 도와주십시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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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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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수요일
“거룩하신 아버지,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그리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1ㄷ-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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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요한 17,1-11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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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우리 열매로 나무이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이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기쁘지 못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마음으로 사는지 살펴야 합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가 몰려 취재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 NBC 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후 하느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순간에 주님께 영광을 드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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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은 돈, 건강, 자녀의 축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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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사는 것은, 그 어떤 슬픔도 아픔도
없이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살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선(善) 없이 사는 것’,
즉 악(惡)이 가득한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산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은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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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월요일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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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감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심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둘째, ‘유혹’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내 마음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성덕이 깊어도, 오랜 수양을 했어도 유혹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단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찬미’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만나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 이시로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날마다 모여서 찬미와 찬송을 하였습니다. 행복은 찬미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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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4일 일요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오. 28,16-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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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밖으로 나가실 때 숙제하라고 하셨다면 돌아오실 때 똑같이 숙제했느냐고 물으실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머니를 만날 준비는 바로 마지막 때 하신 말을 실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어머니가 기다려지고 사실 이미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떠나실 때 하신 명령은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도 똑같이 하실 것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예수님을 두려워하며 만나기를 꺼리게 될 수 있습니다. 믿고 싶거든 전합시다. 전하면 만나게 되고 만나면 믿게 됩니다. 믿으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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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토요일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요한 16,23ㄴ-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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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금요일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3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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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품어서 극복되어질 고통이라는 사실이고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건이지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드는 사건은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부활의 기쁨을 향한 디딤돌이지 없애야 할 절대악은 아닙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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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목요일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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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도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이 할머니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라, 지금 힘들어도 사흘 뒤에 또 행복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지금의 십자가를 잘 질 수 있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곧 다시 오셔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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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뜻이 죽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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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수요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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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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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한 말을 기억해 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십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며,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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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말합니다
.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다”(요한 14,6).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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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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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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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면 이전의 자기 자신이 죄 자체였고 의로울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미 지옥에 가도록 심판받은 상태였음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타락한 삶을 살다가 자신을 좇아오는 여인에게 그녀가 알던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가 끔찍한 죄 자체였음을 압니다. 그래서 절대 그 뒤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권한이 없음도 압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셔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제의 내가 죄 자체였음이 보입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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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걸림돌과 디딤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걸림돌로 여겨서 이웃을 탓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더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감옥에 갇혔던 바오로와 실라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지진이 있었고, 분명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간수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하였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간수에게 도망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간수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도망가야 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도망가지 않았던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감동합니다. 그리고 바오로와 실라스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간수에게 지진은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이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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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설하면서,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곧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우스도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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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일요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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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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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토요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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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은 고난을 없애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사랑하신다.” -한스 큉-
그러니, 우리는 고난과 미움은 제거해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속에서 신앙을 증거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을 없애달라고, 악을 제거해달라고 청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하며, 바로 그 순간이 주님께 의탁하고 믿음의 순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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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17)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계명은 이것 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고 하였었지요. 이웃을 사랑하되,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이 예수님에게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으로 변합니다. 이제 이웃사랑의 기준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그분입니다.
5월 14일 목요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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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 머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미워도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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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 우리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하고 물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형제에게 벗이 되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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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생활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그 나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송영진신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호칭은 모든 기도의 바탕이고, 신뢰에 찬 순종의 열쇠이며 근거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주님 손에 공동체를 맡겨드리기 어렵지요. 작건 크건 가정 공동체부터 인류 공동체까지 포함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누군가를 뽑으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를 끌어가고 계십니다.
5월 13일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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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당신을 포도나무로 소개하시는 것은,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드러내시기보다는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이 당신 안에서 또 다른 예수로 거듭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두 존재가 하나로 거듭난다면 서로의 원의와 지향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청하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각자가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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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우리 안에 내주하신 그분의 수액을 받아 마시며, 말씀 안에 머물고, 사귀고, 교제하면서, 당신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해 드려야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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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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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기에 사랑의 존재이지만
하느님처럼 전능하지는 않기에 하느님 사랑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존재이고, 그래야 하느님 사랑 안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씀과 같은 뜻이고,
하느님 사랑에 연결된 우리의 사랑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사랑의 열매란 무엇인지 그것입니다.
제 생각에 사랑의 열매란 선의 창조입니다.
삼위일체 사랑이신 하느님이 모든 선을 창조하시고,
사랑하는 남녀가 자녀를 생산하듯이 주님 사랑에 연결된 사랑은
여러 가지 좋은 결과를 낳는데 말하자면 사랑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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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2일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31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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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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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분명 세상의 평화와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시겠노라 말씀하십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평화라면 무리 없이 받아들일 테지만, 세상과 다른 평화라면 도대체 어떤 평화일까요?
예수님의 평화는 무엇보다 마음의 산란함과 두려움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무엇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하고 두려움에 휩싸일까?’ 되물어 봅니다. 스스로 챙겨야 할 몫과 예수님을 통하여 꿈꾸어 온 영광의 시간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 제자들은 불안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수난의 길이 너무나 힘겨울 것 같아 연민의 정으로 제자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일까요?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 낸 자리에 예수님의 평화는 기쁨의 자리로 다시 정리됩니다. 기쁨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챙겨야 할 몫도, 우리 각자가 지향하는 영광의 시간이나 명예로운 순간도 아닌, 그저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쁨을 위하여 수난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실 것입니다.
잠시 만족할 것들에 사로잡혀 진정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린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저마다 자유로운 삶의 회복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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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기도를 하고, 덕을 쌓으려고 하지만 분명 저의 마음은 작은 일 때문에, 급한 성격 때문에 평화롭지 못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사랑을 주셨고, 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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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입니다. 그것은 남의 것을 가지고자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자신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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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그 모습은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마음과 영혼의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거나 배반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두려움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요한 20,19).”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는 것은 숨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에,
자기들도 박해받고 죽을까봐 두려워서 숨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도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특별히 ‘평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때에는 믿음이 흔들렸고, 마음이 산란해졌고,
평화를 잃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 자체는 제자들 안에
씨앗으로 남아 있었고,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 뒤에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에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화를 잃고 숨어 있었던 제자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고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서
더욱 열성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모습은 예수님께서 주신 평화의 은총의 씨앗이
제자들 안에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운 모습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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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요한 14,21-26)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계명의 길로 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면 당신을 만날 것이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한다. 믿음이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5월 10일 일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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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행복과 감정에 대한 책임을 100%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낄 때야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가 보이게 됩니다.
내가 감정이 격해져 화를 냈다면, 나는 내가 감정이 나빠진 것을 남의 탓을 하는 중입니다. 화가 난다면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구라도 화가 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본래 그런 무감각한 사람이라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그만큼 노력한 것입니다. 감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우리는 매 순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 행복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면 계속 핑계만 대다 한 번도 행복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지금 행복하지 못한 것은 다 나의 탓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 성령께서 나에게 행복한 감정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원하면 행복한 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신 이유는 이 성령을 우리에게 내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을 남의 책임이나 상황의 핑계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장 다시 그런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변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성령을 주시려고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러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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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합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 믿음이 우리 마음을 산란함에서 끌어내어 평화와 평정의 상태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믿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벗님의 믿음을 축하하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아무것도 벗님을 산란케 하지 말며
아무것도 벗님을 놀라게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고
하느님만 불변하시기 때문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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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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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는 ‘육화’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상화된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이 부족하고 못난 인간의 한계가 곧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자리라는 놀라운 발견입니다.
지금 부족하다는 우리의 모습 안에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외면하며 더 나은 내일의 자신을 꿈꾸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이런 모습은 자기 부정이자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부정일 수 있습니다.
필립보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느님을 우상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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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은 절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였다고 믿을 때 누군가로부터 그분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 가면 안에 숨겨진 참 우리 자신이 되시기 위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십니다. 모든 신앙인은 “나를 본 것이 곧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친교의 목적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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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로 양육되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을 닮는 것”이다. 그분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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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절)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이룰 수 있는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을 우리는 성령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분께서 하시는 것이다.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분께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하실 것이며,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도 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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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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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람은 각자의 감정을 각자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분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을 수 없고 외부 상황에 따라 감정이 변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생기는 감정까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도 자신의 책임인 것처럼, 감정도 자신의 책임입니다. 물론 행복한 감정은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감정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니 감정을 책임질 수 있어야 자신 안에 성령을 얼마나 받아들였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옛 순교자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가면서도 기쁨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책임지려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올바른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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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목요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가 보내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인다
(요한 13,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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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안에 맞아들인 주님이 나를 성전으로 만듭니다. 내가 맞아들인 사람들이 나의 열매들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려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내 발밑에는 오로지 나 자신만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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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섬김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실, 섬김은 실행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선을 알되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아니 듯, 실행되지 않은 섬김은 섬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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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뽑은 이들을 아시고 발꿈치를 치켜든 자들을 아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다 아시면서 유다는 왜 뽑으셨을까? 하느님은 아담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창조하셨고, 사울이 죄를 지을 줄 아셨지만 그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셨다. 유다를 뽑으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도 분명히 제자가 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그는 온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아담도 하와도 사울도 유다도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선택한 결과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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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3주간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중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요한 13 -17장)를 묵상합니다. 오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 들려 주시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겸손한 봉사의 삶을 살아라고 당부하시며, 당신이 '섬기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다시한번 보여주십니다. 이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시작해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관계의 끈을 관상합니다.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 13,16-17).
예수님께서 행복의 비결을 일러 주십니다. 곧 자기 분수를 알면 행복하다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한 자각, 내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슨 힘으로 살아가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을 삶으로 표현합니다. 진실한 자기 인식은 겸손의 첫걸음이지요.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우리는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 영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겸손하고 진실한 자기 인식은 자신의 근원을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기까지 나를 성장시키고 파견한 무수한 인연과 손길들을 잊지 않습니다. 그 손길들을 거슬러 올라가, 그 끝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계심을 감지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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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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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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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 대한 답답함은 실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상대가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자신이 당연하다는 것’을 상대가 부당하다 하니까 답답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깨질까 봐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비판하며 다가선 유다인들도 답답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이 듣고 싶던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 예수가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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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형식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믿을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계속 청했던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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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관한 책이 왔습니다.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이 소년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발성법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이 그 책을 통해 복화술 인형 쇼로 유명하게 된 찰리 매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될 때 주님께 봉헌된 성전이 되고 주님의 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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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인간에게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하시는가? 의아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하나 하나 따져보니, 그 혹독한 순간 역시 큰 틀 안에서 은총의 순간이요 보석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견디다보니 아픈 것은 나았고,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눈물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도 훨씬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워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니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였습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요 영예가 될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어둠 속에 방황하는 어린 새 한 마리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곳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2장 46~47절)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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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 “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곧 ‘더 깊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이고,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또한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 곧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관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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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려면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그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와 하나가되기 위해서 성체성사로 오셔서 생명의 빵으로 먹히십니다(요한 6,51.55).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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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릅니다.
목자가 앞장서 가면서 양들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10,10).
살고 싶다면(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목자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예수님의 양’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사는 사람’(‘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이 곧 삶’인 사람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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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하나이신
하느님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일치된 인격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로
끌어 모으십니다.
하나이시기에
모든 것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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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바르나바의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사울을 교회 안에 편입시켜 자리잡게 해 준 것입니다. 사울에 대해 의혹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도 바르나바를 믿기에 옛 사울인 바오로 사도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야구에서 감독이 적시에, 적재적소에 구원투수를 내보내듯이, 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초세기 안티오키아에서 지금 여기 나에게까지 이어진 신앙의 혈류를 느껴 봅시다. 이 모두는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하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지로 가능한 기적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시듯, 우리도 그분들과 하나입니다. 그분들과 우리를 이어준 신앙의 선조들과도 하나이고, 저마다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유기체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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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4일 월요일
나는 문이다.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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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성령님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물이자 생명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생명을 또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흘려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다시 생명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신비에의 참여의 기본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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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일요일
양 떼는 그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그를 뒤따라간다. (요한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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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점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점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희생이 필요했음을 말해줍니다. 양들은 목자가 자신들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단점을 덮어주셨고 우리는 그 희생을 알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는 목자라고 하셨다가 그다음엔 문이라고 하십니다. 목자는 양우리에 이미 있는 양 중에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당신이 이름을 지어준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 아버지께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 안에 있는 양들을 아드님을 통과하여 당신께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파견받은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양들이 아버지께 가는 문이 되십니다. 문은 양들을 보호하고 또 참 목자에게 양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말은 양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이끄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양들을 봉헌하는 문이 되기도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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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 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요한 10,4)
목자는 양들을 밖으로 이끌어 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주와 편리로부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울타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차단된 울타리가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열려진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세상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과 구원을 짊어지고 나가는 일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말씀을 선포하는 일이요 먹이는 일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도 그처럼 ‘성문 밖’으로 나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우리는 분명, “(문을)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문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양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이런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안락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길거리로 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손에 흙을 묻힌 더러워진 교회가 되기를 나는 꿈꾼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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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일 토요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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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말이 듣기에 거북한 이유는 그것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듣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영화였습니다. 그들의 뜻과 반대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열두 사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던 것일까요? 누구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나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지만, 그것도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께 머물렀습니다. 그분께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예수님 말씀이 거북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라고 하십니다. 결코, 육을 추구하는 방향과 영을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빛과 어둠은 반대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하는 저를 ‘극단적 이원론자’로 비평합니다. 천국과 지옥, 빛과 어둠, 영과 육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요한복음의 핵심이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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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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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참된 살과 피를 먹으면,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받아먹는 이는 생명을 먹고 마시는 것이므로 그분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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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체를 영한다고 다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 양식이 하느님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패륜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그분의 살과 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변합니다. 우리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 나를 위해 나에게 찔리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체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성사 안에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합니다.
“나는 다 주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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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는 ‘그분을 통하여’ 사는 것이며, 그것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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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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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바오로를 '나의 형제'라고 부른 하나니아스처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서로가 형제가 되는 회개를 해야지만
진정한 회개이고 완전한 회개가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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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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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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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요한 6,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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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화요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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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더는 외적인 표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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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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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월요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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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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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일요일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가 24,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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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성체가 예수님임을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만났느냐고 물으면 만나지 못했다고 대답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알 뿐, 믿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교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이미 여인들에게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알기는 해도 만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두 제자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줄 수 없었습니다. 비로소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됩니다. 성체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을 알아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요? 바로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부활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열심히 공부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공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뜨거워진 가슴으로 성찬례 때 진정으로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고 당신을 만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빵을 떼어주실 때 그분을 알아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찬례 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지 못하는 성경공부는 빗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빗나간 스승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실 때 그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그분을 만나 뵙게 됩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살아계십니다. 바오로가 교회를 박해할 때 왜 당신을 박해하느냐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예수님의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 죽은 책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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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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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시며”(루카 24,27), 슬픔에 젖은 그들의 어루만지시어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하고 청하자,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토록,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과정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에 비길 수 있습니다. 곧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 주심”은 ‘읽기’(lectio)를, “마음이 타오르게” 하심은 ‘묵상’(meditatio)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청함은 ‘기도’(oratio)를,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 그들의 눈이 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심은 ‘관상’(contemplatio)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말씀의 경청으로 지성을 동반하여 깨달아 알아듣고’(lectio),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meditatio),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응답하고(oratio), 마침내 그분을 뵈오며 일치를 이룹니다(contemplatio).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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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예로니모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다.”(Comment. in Isaiam. Prol., PL 24,17; 계시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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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성경’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때에 두 제자는 이 모든 것을 체험한다. 그들은 그 낯선 동행인이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이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성경을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장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와같이 가장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될 것이다.
또한, 성경과 더불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표지가 바로 성체성사이다. 두 제자에게 낯선 여행자가 초대되어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체성사를 암시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성체성사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31절). 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35절)고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최후의 만찬의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리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성경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되며, 그 안에서 성경에 대한 주석가는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으로 모시게 될 것이다. 그 성경이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있게 된다면 말이다. 또 하나는 성체성사의 표지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성체를 이루는 삶을 살면서, 우리 자신을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삶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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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5일 토요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코 16,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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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금요일
"이 사람들을 다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수 있겠느냐?” (요한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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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 목요일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 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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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주 “무엇을 했느냐, 어떤 것을 했느냐?”, “잘 했느냐, 못 했느냐?” 하며, 따지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갈망하고 어떤 열망을 품느냐?”,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삶의 질이 달려 있습니다. 곧 돈에 열망을 품은 사람은 탐욕스러워 지고 돈의 노예가 될 것이고, 사랑하기를 열망한 사람은 사랑스런 사람이 되어 갈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 생명이 충만해지고, 하느님을 열망하면 하느님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3,36)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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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수요일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요한 3,16-21)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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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2’에서 안나가 동굴에 갇혀서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올라프가 동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를 가리켜도 큰 의욕이 없습니다. 그냥 동굴에 주저앉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 발씩 그 빛을 향해 걸어갑니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동굴을 빠져나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그런 빛이어야 합니다. 내가 한 발짝 걸을 힘만 남아있다면 그 방향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무엇이 밟히는지도 모르는 캄캄한 굴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한 달을 굶은 사람이 음식을 바라는 것처럼, 사막에서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이 오아시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물속에서 숨을 못 쉰 사람이 찾는 공기처럼, 그렇게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면 비로소 그분의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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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화요일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7ㄱ.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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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들어 올리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성령의 힘으로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새로 태어남입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는 항상 이런 기도가 울려나올 것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은 아무래도 좋으니 우리만 구해 달라고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매다셨습니다. 우리도 그 십자가를 보며 나는 아무래도 좋으니 이웃의 행복을 위해 우리 자신을 못 박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자아의 독은 누군가의 자아에서 흘러나온 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리 뱀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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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은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워져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받아들이는 자들의 특색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보게 하소서!
당신 눈으로 새롭게 보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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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디 수사 신부는 말합니다.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천국이 이 땅에 있는 것처럼 살아라.”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안에서 행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합당히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고,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함의 힘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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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버린 뒤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해했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남아
있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되지는 않지만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에 남아 있겠다는 뜻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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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8절)고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신앙인들은 그분이 입으신 영광을 향하는 삶을 갖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 그분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영광을 입으셨으니, 우리가 그분을 닮는 것, 즉 우리도 우리가 지고 가는 나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그 영광을 입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바로 나 자신의 인간완성을 이루어줄 뿐 아니라, 하느님 앞에 또한 영광을 드리는 길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며 열심히 기도하자.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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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 월요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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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일요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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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보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게 되는 종교이다. 다시 말해, 알고 나서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믿지 못한 토마스의 불신앙과 의심을 책망하며, 그를 회의론자나 의심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말한다.
그러나 토마스가 보인 행동은 단순한 회의론자로서 막연히 부정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그를 통해서 토마스는 누구보다 더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토마스의 답변을 통해서 볼 때 ‘신앙은 객관적인 것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체험으로 시작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통해 철저히 자기만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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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향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 평생을 떠돌다 죽기 직전에야 사향 냄새가 나는 곳은 자신의 몸이었음을 깨닫게 된 사향 사슴과 같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아주 가까이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하나 찾으라면 ‘머무름’입니다. 요한도 예수님과 하루를 머물면서 믿게 되었습니다. 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꼭 붙어있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은 토마스 사도가 어떻게 부활의 믿음에 도달하는지를 알려줍니다. 그는 나머지 열 사도가 부활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들과 함께 머물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당신을 보지 않고도 믿으면 더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혼자만 예수님을 못 만난 상태에서 그분을 만난 이들 가운데 일주일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의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지에 보답하여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은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교회 공동체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성체도 소중하지만 그 성체의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공동체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성장시켜 왔습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가 아니라 둘이나 셋이라도 이미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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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호소로 끝난다. 하나는 토마에게 하신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는 말씀과 마지막 부분의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절)는 말씀이다. 즉 신앙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지며, 부활체험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된 인간적 생활로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욱현신부-
4월 18일 토요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꼬 1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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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금요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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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동한 끝에 물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의 이 고기 잡는 기적은 예수님 부활 이후의 사건으로서 교회 공동체에 관계해서 전해집니다. 결론은 사람 낚는 어부를 넘어 처음에 없었던 ‘아침 식사’ 곧 ‘성찬례’인 미사가 거행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손수 마련하신 아침 식사인 성찬례를 통해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만들어지고 유지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부활 신앙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큰 임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박기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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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7명의 예수님 제자들이 밤새 물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하였습니다. 새벽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나 되는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153은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어의 숫자 값이고 7명의 제자는 7성사를 통한 하느님 자녀의 창조를 돕는 교회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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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힌 물고기는 총 153마리였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에 따르면 고대 자연과학자들은 세상 모든 물고기의 종류를 153가지라고 여겼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그물 안으로 총집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징표가 그물 속에 든 153마리의 고기인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주님을 먼저 알아본 이는 요한이었지만, 그분께 먼저 달려간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요한은 관조적이고 베드로는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요한은 사랑을 받은 이가 되고, 베드로는 일을 맡은 이는 이가 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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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목요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가 24,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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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수요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루가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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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 그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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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엠마오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가슴이 뜨거워 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예수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다면 우리는 언제나 엠마오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신앙이 메말라간다면 아무리 성지순례를 해도,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편안한 잠을 잔다고 해도 그곳은 엠마오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나의 가진 것을 기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역시 그곳이 엠마오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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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4일 화요일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요한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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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십니다. 한처음에 빛과 어둠, 하늘과 땅을 만들어 이름을 주셨고, 사람에게 온갖 생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것은 관계를 맺는 시작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스승과 제자, 바로 이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눈물이 주님 부활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눈물 대신 응답해야 합니다. “라뿌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이에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부활의 신비는 사랑의 관계로 거듭 완성됩니다.
-박기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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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우스는 천사가 있었던 “머리맡”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요한 1,1)는 사실을, “발치”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는 사실을 상징한다고 설명해줍니다. 곧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고도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몰랐습니다.”(요한 20,14). 또한 그녀는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음성을 듣고도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랐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도 그랬고(루카 24,13-35),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의 일곱 제자들도 그랬습니다(요한 21,4).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무엇인가를 요청하고 무엇인가를 도와달라고 하는 낯선 이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그러기에, 부활 체험은 ‘낯선 이’ 안에서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낯선 이’의 요청 안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낯선 이’로 다가와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손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만지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든다.’고 말합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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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영적으로 가려져 있는 마리아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일이고, 마리아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이 일은 보통 요한복음 10장 3절에 연결해서 해석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예수님은 ‘나의’ 목자이신 분이고, ‘나의’ 주님이신 분이고,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고,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내가’ 응답하는 일은
전적으로 나의 믿음과 의지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예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내가 응답할 때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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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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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기쁨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기뻤고, 예수님을 만나 더 기뻤으며, 그 기쁨을 교회에 전함으로서
더 기뻐졌습니다. 이 기쁨이 세상의 행복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세상에서 받는 많은 돈의 행복은 느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쁨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미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기쁨을 이기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세상 모든 욕망이 그게 그것으로 보인다면 부활의 기쁨을 품은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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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일 일요일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1-9)---
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텅 빈 무덤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완벽한 증거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비어있으니까 예수께서 당연히 부활하신 것이라는 이 논리는 부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회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빈 무덤 소식을 들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소식을 전한 막달라 마리아마저도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고 보지 못하고 단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며 걱정만 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부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써 그 부활의 증거를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빈 무덤에서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부활 믿음이 시작되고, 그 빈 무덤에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실 때 부활을 깨닫게 되며, 예수님께서 쪼개어 주시는 빵을 나누어 받을 때 그 부활의 진실을 보고 깨닫게 되는 부활 신비의 출발점이 빈 무덤이기 때문이다.
이제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빈 무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사실 증거를 보았다고 해서 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먼저 빈 무덤에 들어가 보았고 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성큼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객관적인 증거나 목격으로 누구나 증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 안에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 부활을 증언할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로 변화된 모습이 가장 강력한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거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부활의 증거가 되고 부활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도 절망이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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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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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금요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요한 18,1 -19,42)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우리는 깜짝 놀라고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그분 부활의 신비가 희망과 함께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에 더 친밀함과 일치를 느낍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우리 믿음의 불씨를 지피며 사랑으로 마음을 열게 됩니다.
-박기석신부----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피 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그러면 우리 살과 피가 이웃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사랑을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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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목요일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스승이며 주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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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견진-성체성사는 바로 재판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만들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마련된 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이 바로 그 성사의 은총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함을 깨닫는 회개의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런 은총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가리옷 유다가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피는 지금의 자신을 죽일 준비가 된 이들에게만 효과를 발휘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은 언제 목욕을 했고, 또 유다는 왜 목욕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들을 목욕시켜 오신 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는데, ‘진리’가 곧 ‘말씀’이고 그 효과는 ‘목욕’입니다. 목욕은 ‘회개의 세례’와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나간 뒤에 다른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고 말씀하셨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제자들을 목욕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진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피인 성령의 은총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목욕을 하지 않은 채 성사를 영할 때, 이것을 ‘모령성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가 그렇게 성체를 영한 것입니다.
지금 오랜 시간 성체를 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체에 갈급하고 어떤 분들은 영하지 않아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목욕하고 발만 씻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왠지 발도 씻고 싶어 져야 정상일 것입니다. 성체에 배고프지 않으면 어쩌면 그동안 목욕도 안 하면서 발만 씻으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성체는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려는 마음 없이 성체를 영하면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리옷 유다처럼 자기를 살리려는 마음으로 성체를 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사는 그리스도를 내 안에 사시게 하려고 나를 죽일 준비가 된 이들에게만 유효한 은총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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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8일 수요일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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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요한 13,21-3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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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월요일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요한 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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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살았다고 상을 받으러 미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과 약을 받으러 갑니다.”
미사가 길고 짧은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강론이 재미있고 재미없고 역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내게 필요한 양식과 약을 받아 모실 수 있느냐만 중요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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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일요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14-27,66)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쉽게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십시오.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나의 마음은 주님의 뜻이 아닌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지는 않은 지 되돌아 보십시오 .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성으로 가는 것은 기쁘고 쉬운 길입니다. 내가 만일 그 길에 있었다면 나도 그들과 같이 종려나무를 손에 쥐고 주님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길은 가시밭길이고 고난의 길입니다. 만일 내가 그 고통의 길에 있었다면 어느 길을 선택했을까요?
-키댓대주교---- 영성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자기부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성의 길은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Nothing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Everything이 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왜 ‘나귀’일까요? 왜 사이비 교주들처럼 백마를 타고 당신 백성들 속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셨을까요? 나귀는 당신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진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왔을 때 당시 재상으로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에게 올가미를 씌워 베냐민을 자신의 종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했던 인물이 유다입니다. 요셉은 유다의 희생적인 마음을 보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자신들에게 했던 형제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유다와 같이 우리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나뭇가지와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는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고, 옷은 자기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겉옷을 벗는 행위가 Nothing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래야 그분이 나의 참 왕으로써 Everything이 되십니다. 이 시기에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그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분만을 자신의 전부로 고백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기도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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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4일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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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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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폭풍우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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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세속성’에 빠진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결국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처럼, ‘영적 세속성’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자기 기득권과 자기중심성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렇게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는 일은 그토록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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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일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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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하느님처럼 되도록 창조하였지만, 인간이 이것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선악과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보려는 사람에 의해 강탈당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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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함에로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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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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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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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하십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사춘기가 오기 이전에 꼭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참 아버지요, 성모 마리아를 참 어머니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분들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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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성서에는 이런 놀라운 표징이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표징은 분명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 항아리에 들어가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재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리제네스는 성서해석의 3가지 차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상식과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혈연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진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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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죄’는 영혼의 감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은 ‘용서’이고,
내가 그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회개’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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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31일 화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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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서 구원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께서 “나”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 이름인 “나는 나”(I AM)입니다. 따라서 “정녕 내가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어떻게 “하느님”이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을 당신 안에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인간으로 보이시지만 아버지께서 그분과 함께 계시니 또한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됨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의 “나” 속에 사로잡혀 죄 속에서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오던 “나”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합니다.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드립시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이 믿음을 위해 성체를 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당신 머리로 받아들여 당신이 곧 아버지가 되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우리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 되시는 것을 믿지 못하면,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죄 속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은 벌써 2년 동안 매일 잠자기 전에 “나는 예수다!”를 100번씩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우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지!’를 100번씩 결심해봐야 큰 소용이 없습니다. 변화는 자신의 “나”에 대한 믿음을 변화시키면서 성취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나는 하느님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리스도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변화는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때 비로소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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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교만, 인색, 시기(질투), 분노, 음욕, 탐욕(탐식), 나태”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칠죄종(七罪宗)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헤롯은 분노로 어린아이를 죽이도록 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탐했습니다. 부자는 창고를 넓혔지만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무엇으로 칠죄종을 끊어 버릴 수 있을까요?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 구리 뱀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죄의 뿌리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다리입니다. 우리를 화해하게 하는 다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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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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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월요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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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배우자를 이기고 싶다면 나의 온 생각은 그 목적을 위해 갖은 방법을 찾아냅니다. 이런 상태에서 말싸움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서로의 주장만 되풀이하다 끝나버립니다. 돌을 들면 던질 곳만 찾게 되어있습니다. 이미 어떤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바꾸려고 해도 욕구에 묶여 그 욕구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그런데 ‘욕구는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내가 의사이면 병을 치료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자기를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욕구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욕구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바꾸려면 정체성을 바꿔줘야 합니다.
물론 새로운 정체성은 누군가의 피 흘림으로써만 얻어집니다.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새로 태어남이고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시며, 한 간음한 여인의 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용서받은 자로서의 정체성을 주시기 위해 유다인들로부터 죽임을 감수하셔야 하셨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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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이유를 모른다면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수산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원로 두 명은 죽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건강하였고, 존경받았고, 가진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야 하는 이유는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산나에게 누명을 씌었습니다. 몸은 건강했지만, 마음은 병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통하여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몰랐던 원로들을 심판하셨습니다.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비록 화려해 보일지 모르지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에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수산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존경받는 원로들이 누명을 씌었고, 율법에 따라서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악의 유혹에 몸을 맡기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마음을 아셨고, 다니엘을 통하여 수난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셨습니다. 수산나는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 해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어둠을 온 몸으로 밝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현실의 삶에서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시간이 흘러도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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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일요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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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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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주일의 복음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우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그리스도는 무한한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시며, 태생 소경의 치유를 통해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이시며, 오늘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서 그분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이렇게 사순절 전례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하게’ 생명을 얻기 위해(요한 10,10 참조) ‘물’과 ‘빛’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해 준다. 이 여러 가지 상징들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고 ‘생명’으로 그 의미가 최고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을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사순절은 사순절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무수한 죽음과 고난의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부활’이라는 밝은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정진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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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7일 금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1-2.10.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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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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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 수요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2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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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 화요일
'낫기를 원하느냐?''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거3월 26일은 마음이 절실한 사람에게만 성사가 유효합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377)
자신으로부터의 참 자유를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 그래서 평생을 의미하는 38년 동안 그것만을 희망할 수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다가오셔서 죄를 이길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큰 소원인 사람이 아니면 믿음이 생기게 해 주는 표징을 볼 수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구, 이웃을 심판하는 마음, 육체를 이기지 못하는 괴로움이 큽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기고 싶습니까? 그러면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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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3일 월요일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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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과 믿음은 새의 양 날개와 같습니다. 새가 날기 위해 한 날개만 움직일 수 없는 것처럼, 희망과 믿음도 함께 움직이며 우리를 하느님 가까이 들어 높입니다. 따라서 청하는 것은 무서워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자녀가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는 부모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십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고 무엇이든 청하십시오. 믿으면 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청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것을 보면 더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더 바라면 더 믿게 되고, 더 믿으면 더 바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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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저는 이 짧은 말씀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내려놓고, 포기하기를 포기한 아버지의 간절함이 그 안에 다 담겨 있으니까요. 우리 하느님 아버지는 부족한 우리를 품으시느라 얼마나 무수히 "그래도"를 되뇌이시며 재차, 삼차, 수차례 호소하고 달래고 침묵하고 또 눈감아 주시는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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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일요일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1-41)---- 오늘 복음을 보면,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자기 탓이나 부모의 탓이 아님에도 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이는 고통을 당했다. 무릇 성경에는 이런 시련과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세 가지로 나온다. 첫째로,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한 대가이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 있던 병자를 고쳐주시며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고 당부하시는 말씀을 들어 알 수 있다. 둘째로, 믿음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고통이다. 욥기를 보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며 신앙과 삶의 위기를 맞아 방황한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하려고 허락하신 시련과 고통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관점의 말씀으로 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 속에 분명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당장 어렵고 힘든 상황이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의 고통을 통해 역사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희망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바쿡 예언자가 바빌로니아 침공으로 유다 왕국이 망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우리에서는 양 떼가 없어지고 외양간에는 소 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라고 노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하느님께서 그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 속에 일하시고 늘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몸의 가시로 받는 고통이 너무도 커서 이를 없애주시길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다가 깨달았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비록 자기를 고쳐달라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더 의지하고 더 겸손하게 일하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도리어 기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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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남자의 고통이 없어진 것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이루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것만을 물고 늘어질 뿐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의 판단은 하느님의 일을 절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습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바리사이의 모습이 바로 영적인 눈멂이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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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이전의 자신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의 자신을 죽이기 싫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고 하는 것부터 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씻었는데 눈이 낫지 않았다면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존심을 버리고 실로암에서 눈을 씻는 행위는 이미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십자가에 죽을 마음이 없다면 구원을 주는 믿음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죽을 거 같아서 안 믿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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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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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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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빛과 어둠 사이의 ‘대립’에 관한 것이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이것은 빛이신 하느님께서만이 인간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눈먼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도 고쳐주실 수 없는 ‘소경’들이 있다. 자신들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잘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모습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요한 9,41).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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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미아노 신부 매일 미사 강론에서-
어렸을 때 일본에서 살았다. 학교갔다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로 곧바로 가서 청란젓을 먹으며 고향의 맛을 찾았다.
작년 동생가족과 여행을 가서 하루 다섯기를 먹었다.
나의 지평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넓혀졌다. 외국에서의 낮선느낌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낮선느낌
영적인 여정도 처음에는 거부하는 느낌을 받는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고 넘나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리사이의 율법주의의 삶은 마치 냉장고의 고향 맛을 찾듯이
장님이 눈을 떳다는 것은 새로운 진리를 맞이했다.
새로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임 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미국에와서 받은 충격은 컸다
충격이 충격인 이유는 내가 살던 방식대로 살면된다. 내칠수 없는 진리를 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애국심, 나라사랑. 미국에 오고나서 이민자들의 삶을 봄
각자의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다가도 공통됨을 알게 된다.
한국을 강조하면 미국에서 소외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사랑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것에 눈을 떴다.
예수님께서 주신 충격을 지금의 나에게 충격을 줌
끝임없이 마음을 열고
웅크리는 마음을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눈을 뜨고 마음을 열것인가. 어둠의 삶을 살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3월 21인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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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오래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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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뭐가 서로 다른 걸까요? 대체,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그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타인을 보는 눈도 서로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이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눈이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가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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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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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까요.
바로 지금 사랑하며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에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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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전삼용신부-
평생을 인간의 욕구에 대해 연구한 애이브럼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밑의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자리합니다. 그다음도 이와 비슷한 생존 욕구인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려 하는 ‘안전욕구’입니다. 제3단계도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기 위한 ‘소속과 애정욕구’입니다. 4단계도 이와 비슷한데 애정을 넘어 인정받으려는 ‘존경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1단계가 해결되어야 2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의 안전욕구와 3단계의 애정욕구에 관한 실험 중에 ‘프라이팬 모성애’ 실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고문으로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바닥에서 결국 엄마는 아기를 밟고 올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일본도 했는데 731부대의 ‘물통 모성애’ 고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결국 엄마가 아기를 밟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은 행위를 통해 얻어 낸 결론이 인간은 생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욕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슬로우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망치는 바로 욕구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성도 그 욕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를 내려놓으면 생각도 바뀝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망치로 어떤 못을 때릴까?’라는 생각만 하면서도 깊은 숙고를 하는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자신을 살리려고 이웃을 이용하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자신도 망치에 맞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를 쥐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생존욕구입니다. 생존욕구는 이웃을 죽이는 욕구입니다. 동물들은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존욕구가 인간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생존욕구가 지배하면 항상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힘으로 이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절대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생각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은 욕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따르는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욕구를 먼저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다가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됩니다. 욕구는 원숭이인데 행동만 사람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욕구는 ‘자기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이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갖고 나서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혹은 1년을 더 살거나, 지금 죽고 5억을 선택하거나 하라고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1년을 더 살기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느니 자녀들을 위해 지금 죽어 5억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요? 자기 정체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늑대로부터 그 정체성을 받아 자신이 늑대인 줄 압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이 그 아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채워질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에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이 믿음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듭니다. 인간은 남을 심판하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신들의 인간인 부모에게서 받는 본성입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여전히 망치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치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멍에로 맨 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의 욕구에 지배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의 욕구입니다. 그분의 욕구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욕구에 지배받으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개로만 나뉩니다. 계명은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멍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도구로 삼으셔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입니다. 소는 주인의 멍에에 가하는 힘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소가 망치를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될 때야만 그 지겹던 이웃을 심판하던 망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왜 이 계명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따르려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 자신도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망치를 쥐여준 장본인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멍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서는 나에게서 실현될 수 없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사람의 자녀라는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 해 봐야 망치로 계속 사람을 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망치를 쥐고 태어나 원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슬로우가 불가능하게만 여겼던 그 다양한 망치들을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어 나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욕구를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한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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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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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이 계명이 단순히 내 편에서 해야 할 절대 의무라면 부담스럽고, 늘 부족해 송구스럽고, 또 무겁게 느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집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계명이 나에게 부과된 의무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고 계신 것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법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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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목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오 1,16.18-21.2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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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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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 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만한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결국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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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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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 작은 금 조각을 무시하면 큰 금 조각의 가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작은 금도 금이고, 큰 금도 금입니다. 작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큰 율법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작은 사랑을 하찮게 여기면 큰 사랑이신 하느님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완전함은 아주 작은 2%의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늘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거든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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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 4,24ㄴ-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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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일요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5-42)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태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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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은 눈이라도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리 가가린은 달에 다녀온 후 ‘나는 달의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달에 첫 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은 달에 도착하자마자 성경을 읽으며 주님께 감사 드렸다고 합니다. 천문학자 뉴턴은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나는 방금 나의 망원경을 스쳐 지나가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옆의 특별하지 않은 많은 보통 사람들 사이에 주님이 같이 계십니다. 그 평범함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서로 다르지 않은 모습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그들을 위해 사랑과 봉사를 한다면 그들 또한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를 가두고 있는 무덤을 무너뜨리고 믿음의 강물이 흘러 내리도록 하여주소서.
저의 모든 장막을 거둬주시어 진정한 행복을 위한 사랑이 피어나게 하여 주소서. 아멘
-키뎃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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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마름과 결핍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장애로 인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으니 이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고백록」에서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저희를 만드셨나이다. 따라서 저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 전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나이다”라는 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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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도착했을 때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합니다
.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화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들어 높인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이때 부하들이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설득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누그러져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 덕분으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나아만은 화를 이기고 자신의 의견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절벽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화가 난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이 교만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를 내어서 분명 자신에게 화가 나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화를 자신의 확신을 바꿀 수 없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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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1-3.11ㄴ-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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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려면 단 5분 기도하더라도 그 힘을 느껴야 합니다. 성령의 힘이 언제쯤 소진되는지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에너지를 측정할 수 있는 계기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계기판이란 바로 자신의 ‘기분’입니다. 행복하면 성령의 에너지가 충만한 것입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하면 하느님의 양식이 소진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말하듯 성령의 에너지는 나의 기분으로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음을 느낀 경험이 있어야 회개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회개도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으로 참으로 행복하고 힘이 넘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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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대하는 큰 아들을 봅니다. 큰 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동생을 받아들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주시는 것, 그와 같은 판단을 하는 분도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큰 아들처럼 하느님을 우리의 기준으로 규정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하느님을 따르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하심에 맡겨드릴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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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의 마음에는 이만큼 했으니 이만큼은 받아야 된다는 보상심리가 잠재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아들을 종처럼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종처럼 생각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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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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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저는 사랑보다 죄 짓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하느님께서 왜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는지,
다른 피조물처럼 죄짓지 않게 만들지 않으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랑이고
자유를 주신 것도 사랑때문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과격하게 표현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랑 없이 억지로 당신 곁에 있는 것보다
한때 죄를 짓더라도 마음을 돌이켜 사랑으로 당신께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자유는 죄를 짓게도 하고 사랑을 하게도 하고,
하느님을 떠나게도 하고 하느님께 다가가게도 하지요.
당신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면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 하느님을 떠나는 죄를 지을 수 있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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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33-43.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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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내에서 ‘감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관계를 더는 관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직결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감사의 마음을 솟구치게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믿는지 살펴보셨습니다. 바로 선악과나무를 당신께 바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봉헌해야 했던 선악과나무까지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따지자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 소작인들이 바쳐야 하는 소출의 일부는 ‘십일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옆에서 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듯이, 내 안의 생명나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믿읍시다. 구원은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를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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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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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으려는 의도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그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표지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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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무서운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적이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 혹은 듣지 못해서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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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1일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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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겐가 힘이 되려면 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으면 다른 이들의 에너지를 빼앗지만, 내가 죽으면 다른 이가 나 덕분으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위해 빵이 되어주라는 아버지의 명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섬김은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행위입니다. 빵이 되는 행위입니다.
“오르막길 인생은 성공과 칭찬에 가려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낮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인생의 말년을 매사추세츠 정신지체인 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용변 식사 목욕 등 구질구질한 일을 하는데 보내고 주님께 갔습니다. 이분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의 저자 헨리 나우웬 신부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 곧 성체의 삶을 사셨습니다. 성체는 우리 손바닥 위에 올라올 만큼 작고,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체만큼 큰 것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는 양식이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모신 성체들입니다. 내가 밀떡처럼 완전히 죽었을 때 참으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성체로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마시면 성체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체성혈과 닮은 만큼 하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웃에게 빵이 되어주는 삶만큼 가치 있는 삶은 없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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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오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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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는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간게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
이것이 내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참으로 나다운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김찬선신부-
3월 9일 월요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가 6,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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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일요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오. 17,1-9)
3월 7일 토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오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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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금요일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오 5,20ㄴ-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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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롭다는 말은 주님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의 의로움은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고 나와 있다면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로움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은 ‘감정’의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행위를 넘어서는 감정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이 감정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행위보다는 감정을 의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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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오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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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를 사랑하십니다,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교황 프란치스코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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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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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울 2일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오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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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일요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1)
2월 29일 토요일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27-32)---
회개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보이게 만드는 일생일대의 대전환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복음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고 말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참으로 기쁜 소식으로 보이면 회개 한 것이고 아니면 아직 회개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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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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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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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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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단식은 감사와 사랑입니다. 그것은 의로움을 행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참된 단식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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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7일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가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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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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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려는 사람에게 "자신"과 "십자가"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이고 지녀야 할 것은 "십자가"임이 명백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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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 수요일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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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 시인『지구별 여행자』에서
“선한 행위를 한 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
한 번 말할 때마다 그 공덕이 절반씩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공덕이 전부 사라지고 만다.
그 대신 당신이 나쁘게 행한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것이 진정으로 참회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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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와 좌절에 못 이겨 자기 비하를 하면 그것은 자존감이 낮은 것이지만 기쁘게 자신을 낮추면 그 사람은 자존감이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자기를 비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에 흙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시작점을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먼지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본래 먼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먼지를 인간으로 만들고 또한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먼지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아 흥분에 넘친 상태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 인정받았음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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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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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라는히브리어(shub)는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저 한 번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듭 되돌아가는’ 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회개’는 뉘우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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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으로 차지하신 영광스러운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그분의 영광에 우리도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의 수난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간의 죄, 그 죄에 대한 보속을 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회개와 보속의 시기이다. 이럼으로써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되어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시기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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